라티오의 책들 | 문학 고전 강의 — 90 제37강 괴테 《파우스트》

 

2024.02.20 문학 고전 강의 — 90 제37강 괴테 《파우스트》

⟪문학 고전 강의 - 내재하는 체험, 매개하는 서사⟫, 제37강

 

 

《문학 고전 강의》 제37강은 괴테 《파우스트》를 다루는 마지막 부분인데 오늘은 한 번에 마저 다 읽으려고 한다. 예전에 이 《문학 고전 강의》를 할 때 도이치 낭만주의 이런 부분들을 제35강에서 설명을 했다. 그런데 그때 이 서울시 성북구에 있는 성북정보도서관에서 강의를 했던 걸로 기억을 하는데, 그때 이 로만틱을 얘기하면서 많이 얘기를 안 했다. 그래서 이번에 제35강 들어가면서 자잘하게 이런 것들을 많이 얘기했다. 로만틱이라고 하는 것은 꼭 문학적인 것에만 국한시켜서는 안 되고 우리 삶의 방식이다. 막 살아도 된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까지는 아닌데, 절제하는 것도 좋지만 반드시 그 절제가 우리 삶에 행복을 주거나 그러지는 않는다. 스토아주의자들처럼 사는 건 너무 힘들다. 로만틱이라는 단어를 이번에 《문학 고전 강의》 해설에서 많이 얘기한 이유는 이 단어를 그냥 문예 사조 정도로만 생각하면 안 되고, 온갖 것에 다 쓰이니까, 어떻게 보면 고전보다도 더 많이 쓰인다는 것을 주지시키려고 했던 것이다.  제37강 심오하고 포괄적인 가치의 영역으로 올라서는 파우스트에 가면 헤겔의 철학적 학문의 백과전서, Enzyklopädie라고 불리는 텍스트의 제3부, 제1부가 논리학이고 제2부가 자연 철학이고 그리고 세 번째가 정신철학이다. 괴테 《파우스트》의 비극 제2부를 볼 때, 이미 여러 번 말했다시피 저는 《파우스트》 이전에 헤겔의 텍스트를 먼저 읽었는데 사실은 괴테의 책을 먼저 읽었어야 했다. 그런데 헤겔을 읽고 이해하고 《파우스트》를 읽으니까 헤겔에서 뭔가 좀 본 듯한 기시감이 드는 그런 지점이 된다. 

우리 인간의 정신으로서 성취할 수 있는 세계, 그리고 정신이 스스로를 펼쳐 보이는 어떤 세계에 대한 모습, 그런 모습들을 비극 제2부에서 5막으로 구성해 두었다. 제1부는 파우스트 개인의 삶이고, 그것도 아주 좁은 의미의 감각적 관능적 삶에 대해서 다루고 있던 것이다. 제1부는 또 막 구별이 없었지만 제2부는 5막으로 구성되며 대지에 대한 찬사로 시작한다. 지금 이렇게 생각해 보니까 대지에 대한 찬사로 시작해서 하늘로 올라가는, 대지와 하늘을 연결시키려는 어떤 그런 시도가 아닌가 한다. 또는 전 우주, 우주라는 말은 구체적으로 천문학에서 말하는 그 우주도 있지만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계, 그리고 우리의 사유 속에 들어오는 세계 전부, 그것을 우주라고 말하기도 하지 하는데, 이것을 다 포괄해 보려는 그런 괴테의 의욕이 드러난 것이 아닌가 생각이 된다.  그리고 1막부터 3막까지는 환상의 세계라고 했는데 여기서 파우스트는 중세의 귀족도 되고 고대 희랍에 가서 헬레나와 결혼도 하고 한다. 여기서 환상의 세계라고 하면 그냥 뻘 생각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되고 판타지아이다.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대로 뭔가를 이야기하는 것, 우리는 환상이라고 하면 뭔가 실현 가능성이 없는 나쁜 것이라고, 아주 심하게 나쁜 건 아닌데 뭔가 안 좋은 쪽으로 생각하기가 쉬운데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거의 망상처럼 보이는 그런 것들을 하다 보면 그것을 어떻게 구체화할 수는 없을까 라고 하다가 새로운 사유와 현실을 만들어내는 게 인간이다. 넓게 보면 그게 관념의 힘이다. 관념의 힘, 저는 조금도 주저함 없이 관념주의자idealist이다. 관념이 가지고 있는 힘의 위력을 여실히, 그것이 가지고 있는 Potenz를, 믿음에서 시작하면 된다. 믿음pistis도 관념이다. 4막과 5막은 현실 세계의 이야기인데 현실 세계라고 해서 관능이나 이런 것이 아니라 정신으로써 성취하는 그런 세계이다. 그러니까 1부보다는 2부가 훨씬 더 심오하고 포괄적인 가치의 영역 정신의 영역을 다루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다.  


책 372페이지에 보면 파우스트가 그런 얘기를 한다. "이 지구상에는 / 아직도 위대한 일을 할 여지가 남아 있다. / 경탄할 만한 일을 성취해야만 하겠다. / 나는 대담한 노력을 하고 싶은 힘을 느끼노라." 위대한 일과 경탄할 만한 일을 하는 사람을 우리는 영웅이라고 부른다. 영웅이라고 하는 것은 무력만을 생각하면 안 되고, 로만틱 즉 낭만주의 시대에는 천재에 대한 찬양이 있고 그 천재에 대한 찬양이 예술에 있어서의 천재만이 아니라 정치적 세계, 역사적 세계에서의 탁월한 업적을 이룬 사람들, 위대한 일을 한 사람들, 경탄할 만한 일을 한 사람들 이런 사람들을 가리키기도 한다. 명성을 추구하는 삶이라고 하는 것, 좋다. 자잘한 것들에 대해서 얽매이지 않고 자기의 욕망을 그런 위대한 일, 경탄할 만한 일 또는 인류를 위해 기여할 수 있는 것이라고 예로부터 알려진 것들에 투여하고, 혼신의 힘을 기울여서 그것에 몰두하는 것이다. 그런데 파우스트는 "지배권을 얻고 소유권을 획득하는 것이다! / 행위가 전부이며, 명성이란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말한다. 그런데 지배권을 놓고 소유권을 얻는 것은 육체적인 쾌락을 얻는 것과는 다르다. 일단 파우스트는 지배권을 얻고 소유권을 획득한다. 어떤 해석에서는 이 부분에서 파우스트가 자본의 욕망을 뿜어낸다고 얘기를 하는데, 괴테가 그런 걸 알고 있는 사람이었던 것 같지는 않다. 이것을 자본가적 욕망의 발로라고 이해하고 파우스트를 바야흐로 이제 막 움터오르는 도이치 자본주의의 욕망의 화신이라고 해석해서 종합적으로 일관되게 《파우스트》를 해석해 낼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렇게 해서 성공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그렇다면 저 갈리아를 정복하러 갔던 율리우스 카이사르도 자본가적 욕망인 것인가. 지배권을 얻고 소유권을 획득하려고 했다. 그야말로 그 사람은 날 것 그대로의 지배권과 소유권을 얻고자 했고 루비콘 강을 건너면서 부하들에게 내가 파멸하느냐 로마가 파멸하느냐 하는 얼토당토 않는 반역자의 연설을 했는데, 그런 사람도 자본가적 욕망의 발로라고 이해할 수 있는 건 아니겠다. 물론 앞에서 파우스트는 무한한 지적 추구와 쾌락의 추구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여기서는 지배권을 얻고 소유권을 획득한다 라고 말하니까 이것을 자본가적 욕망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제가 여기 적어 둔 것처럼 "자신의 행위를 통해 세계에 대한 자기의 지배를 추구하고 그러한 지배에 의해서 생겨나는 유형의 성과들을 가지고 싶다"는 것이다. 행위를 통해서 뭘 하고 싶다는 것이 바로 이제 피히테적 열망이라고 할 수 있다. 

《파우스트》 10181~10184행
파우스트: 당치도 않은 소리! 이 지구상에는 
아직도 위대한 일을 할 여지가 남아 있다. 
경탄할 만한 일을 성취해야만 하겠다. 
나는 대담한 노력을 하고 싶은 힘을 느끼노라.

《파우스트》 10187~10188행
지배권을 얻고 소유권을 획득하는 것이다! 
행위가 전부이며, 명성이란 아무것도 아니다.

5막에 보면"내가 이룩한 모든 사업을 바라보고, / 현명한 뜻을 실천하여 / 백성들에게 넓은 땅을 마련해 준, / 인간 정신의 걸작품을 / 한눈에 둘러보고 싶단 말이다." 는 것이겠다. 정신의 걸작품을 가지고 싶다는 얘기이다.  이것에 한 번 맛 들이면 이제 벗어나기 어렵다. 정신의 걸작품을 가지고 싶다, 대작을 쓰고 싶다 라고 하는 것이 꼭 양이 많아서가 아니라 어마어마하고 무시무시한 것을 쓰고 싶다는 것인데 그런 욕망에 사로잡히면 결국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심지어 다 쓰고 난 다음에 자기 자신도 이해할 수 없는 그런 글을 쓰기가 쉽다. 무협지 용어로 주화입마에 빠졌다고 말하는데 좀 끔찍하다. 그럴 때는 아주 빤해 보이는 그런 것에서 시작하는 게 좋지 않겠나 한다. 인간 정신의 걸작품이라고 하는 것은 위대한 정신의 걸작품이지 나의 정신의 걸작품은 아니다. 나의 정신은 걸작품을 만들어낼 수 없다. 그것에 사로잡혀서 자기를 치장하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고 감당할 수 없는, 또 다른 사람들은 자기를 경멸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렇게 경멸을 받고 있음을 알지 못하는, 아주 무시무시한 처치, 곤란한 오만의 덩어리로 빠져들게 된다. 오이디푸스가 그랬다.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풀고, 정말 거칠 것 없이 살았는데, 결국에는 자기 스스로 눈을 찌르고 여동생이자 딸들과 함께 방랑하는 그런 사람이다.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를 제가 촘촘하게 읽어봤는데, 그건 정말 실존문학인 것 같다. 《오이디푸스》와 《안티고네》는 다 강의를 했는데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는 강의를 하지 않았다. 언젠간 강의를 좀 해봐야겠다 라고 생각해서 열심히 읽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파우스트는 자신의 정신의 산물을 뿜어내겠다 라고 하는 것만 있기 때문에 그런 고뇌와 번민의 나날을 보내지는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을 실존문학에다 넣기는 좀 어렵다. 고전 문학 그리고 낭만주의 문학으로 집어넣는 것이 좋겠다. 

《파우스트》 11246~11250행
내가 이룩한 모든 사업을 바라보고, 
현명한 뜻을 실천하여 
백성들에게 넓은 땅을 마련해 준, 
인간 정신의 걸작품을 
한눈에 둘러보고 싶단 말이다.


마지막에 "이러한 드높은 행복을 예감하면서 / 지금 나는 최고의 순간을 맛보고 있노라."라고 얘기했다. 에이해브도 그렇다. 그렇다면 《모비 딕》도 이런 영역에 들어가는 것일까. 에이해브의 오만함, 그런데 씁쓸함이 있다. 이슈메일의 회고로써 쓰여졌기 때문에, 만약에 《파우스트》의 이 텍스트가 파우스트가 이렇게 했다는 것을 어떤 누군가가 관찰했던 기록으로 남긴다 라고 했으면 씁쓸함이 슬쩍 배어 나오겠지만 이것은 파우스트 1인칭으로 쓰여졌다. 그렇기 때문에 씁쓸함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파우스트는 최선을 다해서 구원의 길로 들어섰고 "언제나 열망하며 노력하는 자, / 그자를 우리는 구원할 수 있노라"라고 천사들이 그랬다. 언제나 열망하며 노력하는 자가 파우스트이다. 그리고 그를 우리는 구원하겠다.  서곡에서 신이 말하기를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한다." 그리고 파우스트는 노력하였고 방황하였고 그것이 구원의 방법이었다. Leidenschaft, 겪음, 열망으로써 구원에 이른다. 이게 과연 정말로 구원에 이를 것인지 알 수 없지만 끝까지 가보는 것, 이게 바로 괴테가 말하는 구원이다. 낭만주의의 구원이다. 인간의 유한함을 철저하게 깨닫고 한계까지 밀어붙였을 때 구원에 얻는다.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어쨌든 열망하고 노력해 가는 것이 낭만주의의 변증법일 것이고, 이것이 바로 낭만주의의 구원이겠다. 《파우스트》는 군데군데 지겹고 따분하지만 굉장히 대단한 작품이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해본다. 

《파우스트》11563~11586행
파우스트: 이로써 난 수백만의 백성에게 땅을 마련해주는 것이니,
안전치는 못할지라도 일하며 자유롭게 살 수는 있으리라.
들판은 푸르고 비옥하니, 인간과 가축들은
새로 개척한 대지에 곧 정이 들게 될 것이며,
대담하고 부지런한 일꾼들이 쌓아올린
튼튼한 언덕으로 곧 이주해오게 되리라.
밖에선 거센 파도가 미친 듯 제방까지 밀려 온다해도,
여기 이 안쪽은 천국과도 같은 땅이 될 것이며,
파도가 세차게 밀고 들어와 제방을 갉아 먹는다 해도
협동하는 정신은 서둘러 갈라진 틈을 막아버리리라.
그렇다! 이런 뜻에 나 모든 걸 바치고 있으니,
인간 지혜의 마지막 결론이란 이러하다.
자유도 생명도 날마다 싸워서 얻는 자만이,
그것을 누릴만한 자격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위험에 에워싸여 있으면서도 여기에서는,
아이고 어른이고 노인이고 값진 세월을 보내게 되리라.
나는 이러한 인간의 무리를 바라보며,
자유로운 땅에서 자유로운 백성과 더불어 살고 싶다.
그러면 순간에다 대고 나 이렇게 말해도 좋으리라.
멈추어라, 너 정말 아름답구나!
내가 이 세상에 이루어 놓은 흔적은
영원토록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드높은 행복을 예감하면서
지금 나는 최고의 순간을 맛보고 있노라.

《파우스트》11936~11937행
천사: 언제나 열망하며 노력하는 자, 
그자를 우리는 구원할 수 있노라

다음부터는 《모비 딕》 제38강 겪음을 통해 앎에 이르는 충일한 인간의 삶을 읽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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