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티오 출판사에서 제공하는 팟캐스트 '라티오의 책들'을 듣고 정리한다. 라티오 출판사에서 출간된 책들에 관한 강유원 선생님의 해설녹음이다.
팟캐스트 주소: https://ratiopress.podbean.com/
2024.02.24 문학 고전 강의 — 91 제38강(1) 멜빌 《모비 딕》
⟪문학 고전 강의 - 내재하는 체험, 매개하는 서사⟫, 제38강(1)
《문학 고전 강의》를 설명하는 게 이제 《모비 딕》 하나를 남겨두었다. 《모비 딕》에 대해서는 다른 기회에도 여러 차례 말한 바 있고 해서 《모비 딕》이라고 하는 작품 자체가 가지고 있는 의미에 대해서는 따로 설명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모비 딕》이라고 하는 작품은 읽을 때마다 읽는 이가 독자가 얻을 수 있는 것들이 다른 것 같다. 그렇다고 해서 《모비 딕》을 자기 멋대로 읽을 수 있는 건 아니다. 해석의 한계라는 것을 분명히 자각하면서, 독자가 이것을 어떻게 읽느냐에 따라서 작품은 다르다, 문학 작품이라고 하는 것은 그것 자체가 가지고 있는 의미는 없고 독자에게 넘어가면 문학작품의 자율성은 사라진다 라는 생각들이 더러 있는데 그것이 사라지는 것 역시 요즘에 많이 쓰이는 그런 말처럼 선을 넘어서는 안 된다. 해석의 한계라고 하는 것이 반드시 있다. 지난번에 읽었던 《파우스트》 마지막 부분인 377페이지에 보면 "언제나 열망하며 노력하는 자, / 그자를 우리는 구원할 수 있노라."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하는 법이니라"가 서곡에 있었고, 노력이라고 하는 건 열망이 있어야 생겨나는 것이니까, 그렇게 노력하는 자를 우리는 구원할 수 있다. 《모비 딕》에 등장하는 에이해브는 열망하며 있는 그대로는 노력하는 사람이다. 그 노력의 내용이 어떻든 간에 어떤 방향을 향하고 있든 간에 하고 있다. 그러니까 그가 구원받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유한한 인간이 할 수 있는 최후의 지점에 이르기까지 가보고 그래서 그 자리에서 철두철미하게 깨닫고 그것을 한계까지 밀어붙이면 구원의 전망이 열린다. 이런 걸 지난번에 변증법적 계기라고 말했는데 예전에는 그렇게 생각을 잘 안 했는데 요즘에는 뭘 봐도 '이거 변증법 아닌가'하는 약간의 변증법 증후군에 걸린 것 같다. 살면서도 좀 느끼게 된다. 저에게 무슨 일을 하느냐 그러면 철학선생이다. 저의 프로필에 철학선생과 서평가라고 이렇게 적어놨다. 그 두 개가 연결되어 있다. 예전에는 철학과에서 배우는 것들, 그런 커리큘럼에 관련된 것만 했는데 지금은 그것을 제대로 하려니까 많이 이것저것 해야 된다. 그래서 이것저것 하다 보니까 그냥 말을 편리하게 만들어보자면 '종합 철학'이라는 것을 하게 된다.
《파우스트》11936~11937행
천사: 언제나 열망하며 노력하는 자,
그자를 우리는 구원할 수 있노라.
《파우스트》 308~311행
주님: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하는 법이니라.
도파민 중독이라는 말이 요새 많이 쓰인다. 사람들이 도파민이 분비되게 하는 짓을 많이 한다고 그런다. 사실 가장 강력한 도파민을 분비하게 해주는 것은 마약이다. 그래서 철두철미하게 도파민을 원하는 사람들이 마약에 궁극적으로 빠져든다. 맛있는 걸 먹어도 행복해지는데 음식 중독이라는 말도 요새 있다고 한다. 그래서 혼자 생각하기에 이런 것들을 계속해 나가는 것, 철두철미하게 유한함을 깨닫고 한계까지 밀어붙이다 보면 그런 지점에서도 도파민이 분비되지 않을까 라는 그런 생각을 잠깐 하게 되었다. 중국의 칭화대학의 교훈이 자강불식自強不息이라고 한다. 스스로 쉴 새 없이 스스로를 열심히 한다는 얘기이다. "인간의 유한함을 철두철미하게 깨닫고 그것의 한계까지 밀어부치면, 그 지점에서 구원의 전망이 열릴 것입니다. 구원 자체만을 갈급하면 역설적으로 구원의 이를 수 없습니다. 파우스트는 그것을 보여준 것입니다."라고 《파우스트》 마지막에서 이렇게 써놨는데, 다시 읽어봐도 이때 그런 생각을 했구나 하는 것을 저도 확인한다. 그런데 《모비 딕》을 오늘 설명하려고 펼치면서 제38강을 보니 자꾸 《파우스트》의 마지막 부분이 자꾸 눈에 밟혔다. 후배가 이메일에서 보내온 자강불식이라고 하는 그 말도 겹쳐져서 보이고, 에이해브도 유한함을 철두철미하게 깨닫고 한계까지 밀어붙인 사람이구나, 그런 사람들이 인류 역사에서 다른 사람에게 기여하는 위대한 뭔가를 만들어내지는 못해도 그것이 구원의 전망이다. 꼭 신에게 영원한 생명을 약속받는 게 구원이겠는가. 자기 스스로가 이제 더 이상 힘을 뿜어낼 수 있는 기력이 없다는 걸 느꼈을 때 탈진하고 마는 것, 그게 구원이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을 해봤다. 그것을 말하기 좋아하는 철학자들은 변증법적인 질적 전환이라 한다.
《모비 딕》의 원제는 Moby-Dick; or The Whale이다. 요즘에 「20세기 읽기, 세미나」에서 오스터함멜이 7장 프런티어에서 생물권生物圈에 대한 침입을 논의하면서 모비 딕이라는 것을 소제목으로 해서 포경산업에 대해서 다룬 게 있다. 거기 보면 허먼 멜빌 얘기도 나온다. 마치 '너 이제 곧 모비 딕 해설해야 되지, 그러니까 이거 읽어야 돼'하고 누가 제 앞에 가져다준 것처럼, 책을 두서없이라고 이렇게 이것저것 막 열심히 읽다 보면 그렇게 느닷없이 책들끼리 마치 미리 짠 것처럼 이렇게 앞에다 가져다주는 그런 경우가 있다. 그래서 저는 그런 순간들에 도파민이 분비가 된다. 그런 그 순간을 몇 번 겪어보니까 책 읽기를 그치기가 어렵다. 공부라고 하는 게 사실은 굉장히 고통스럽고 힘들어도 그런 도파민 분비의 순간이 있어서 굉장히 짜릿한 점이 있다. 모비 딕은 하나의 고래의 특정한 고래, 그러니까 이 고래this whale를 가리키는 말이다. 영어로 말하면 particular, 특수자, 특수한 것이고, The Whale은 고래 일반을 가리킨다. Moby-Dick은 우리가 볼 수 있지만 The Whale은 볼 수 없다. 고래라는 것을 볼 수는 없다. 그런데 or로 연결을 했으니까, '또는'은 왼쪽에 있는 것과 오른쪽에 있는 것. 이 두 개가 서로 바꿔 쓸 수 있는 호환 가능한 것들이다. 그러니 허먼 멜빌이 이것을 의도했는지 어쩐지 모르지만, 여기는 제목을 해석해 보는 것이니까 해석의 한계를 넘어서 할 수 있는 얘기이다, 모비 딕이라고 하는 이 고래this whale는 고래 일반The Whale을 가리키는 고래이다. 고래 일반을 가리키는 것을 this whale로, 말하자면 표상할 수 있는 것이다. 왼쪽에 있는 건 특수자이고 오른쪽에 있는 건 보편자라고 우리가 일반적으로 부르는 것이다. 영어로 말하면 the particular와 the general이 왼쪽과 오른쪽에 이렇게 쓰여 있다. 그러니까 엄격하게 말하면 or로 연결해서는 안 된다. 그런데 이것을 or로 연결했다고 하는 것은 모비 딕이라고 하는 것을 고래 일반을 대표하는 하나의 표상으로 삼은 것을 의미한다로 보면 적당하겠다. 그러면 그게 무엇을 가리키는가. 모비 딕 하나를 이렇게 열심히 들여다보면 고래에 대해서 다 알 수 있다 라는 뜻이 1번 뜻이겠고, 2번 뜻은 모비딕을 쫓아다니면서, 여기서 고래he Whale가 무엇을 가리키는가, 무엇을 궁극적으로 지칭하는 것인가를 생각해 볼 때 진리 일반이다, 진리이겠다. 에이해브는 하느님을 부정하는 사람으로 아주 명백하게 나온다. 서양에서는 기독교 전통christian tradition에서 뭔가 벗어나는 것이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특히나 허먼 멜빌이 살았던 시대에는 더욱 그렇다. 허먼 멜빌은 1819년에서 1891년이니까 19세기를 꽉 채워서 살았고, 더군다나 미국의 역사에서 아주 중요한 시대를 산 사람이다. 미국 내전 이른바 남북전쟁이라고 불리는 civil war가 1861년에서 1865년이고. 재건기reconstruction age라고 불리는 게 1865년에서 1877년이니까, 이때는 요즘에 「20세기 읽기, 세미나」에서 바짝바짝 다뤄지고 있는 그런 시대를 살았던 사람인데, 그런 시대에 자기가 소설로 써서 에이해브 같은 사람을 굉장히 찬양하는 것은 아주 위험한 일이다. 멜빌은 심하게 말하면 제정신이 아닌 상황에서 썼다고 할 수 있는데, 이교도pagan 영웅으로서의 에이해브를 등장시켰다고 하는 것은 멜빌이 가지고 있는 굉장한 모험이라고 할 수 있다.
《문학 고전 강의》이후로도 《모비 딕》을 계속 읽으면서 서구 사상에 있어서 이교도 서사 문학 전통pagan epic tradition이라고 하는 것이 하나 생겨날 수 있겠구나 그런 생각을 해보게 된다. 야로슬로프 펠리칸이 쓴 책중에 《Faust the Theologian》이라고 하는 책이 있다. 그러니까 신학자 파우스트라는 책이 있는데, 또 터너라는 사람이 쓴 책에 《Dante the Theologian》이라는 책이 있다. 또 펠리칸이 쓴 책 중에 《Eternal Feminines: Three Theological Allegories in Dante's Paradiso》도 있는데, 단테 얘기이다. 단테나 파우스트나 이 사람들이 theologian이다 라는 얘기를 보면 이것은 christian tradition에서 얘기를 하는 것일 텐데, 그 누구도 《모비 딕》에 등장하는 에이해브를 theologian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이 사람은 어쨌거나 pagan epic tradition 안에 들어가 있는 사람이고 그래서 이제 《모비 딕》을 마지막으로 하면서 이 사람은, 지금 우리가 고대 헬라스 비극이 가지고 있는 그런 역동성, 신이 없는 세계, 어쩌면 헬라스 비극에 등장하는 사람들보다도 더 고통스러울 수 있다. 그 사람들은 christian tradition의 압력 따위는 없는 사람들이다. 그런 점에서 그들은 휴머니스트인데, 멜빌이라고 하는 사람이 내놓은 이 《모비 딕》은 그런 압력이 아주 명백하게 느껴지는 상황에서 이런 pagan epic tradition을 내놓은 것이다 라고 볼 때는 대단히 용감한, 그 말의 본래적인 의미에서 용감한, 도전적인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다. pagan tradition을 잇고 있다라는 점에서는 그렇고 또 하나는 이슈메일이 서사적 자아이다. 자기 일을 얘기하면서도 남 얘기처럼 하고 또 자기가 목격한, 예전에는 그렇게 생각을 안 했는데 요즘 생각해 보니까 이슈메일이 에이해브를 약간 빙의한 듯한 그런 느낌도 있다. 그러니까 곁에서 방관하는 구경꾼이지만 사실은 완전한 구경꾼은 아니다. 뭔가 그 사태에 개입되어서 그걸 겪은 사람이다. 단테 같은 경우는 자기가 그 일을 겪어서 자기가 서술하니까 자아의 분열을 의도적으로 드러내 보이면서 이야기하는데 여기에서는 서사를 펼쳐 보이는 사람과 그것을 겪어가는 사람이 따로 분리가 되어 있다. 그러니까 이슈메일은 어떻게 보면 코로스처럼 얘기를 한다. 예전에는 또 그게 잘 안 보였는데 지금은 the particular와 the general, 일반적인 것과 보편적인 것을 or로 연결시킨 것 또한 좀 눈여겨 보아야 할 만한 그런 지점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Dasein, 지금 여기에 있는 무엇, the particular이겠다, 지금 여기에 있는 무엇을 아무리 열심히 지칭해내려고 해도 결국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그 지칭어들은 유니버설한 것밖에 없다. 그러면 우리는 그것을 계속 우리의 표상으로 가져오는 것이다. 살아있는 생동적 대상을 언어라는 표상을 가지고 지칭하게 되니까 결국 계속 그것을 표상으로 가져올 수밖에 없고 그러다 보면 그것 사이에 차이가 생겨날 수밖에 없다. 그 간격을 계속 메울 수가 없는, 영원히 우리는 Dasein을, 시간과 공간에서 규정되는 그런 것들을 영원히 지칭할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가 커뮤니케이션을 하기 위해서는 남에게 그걸 전달하기 위해서는 보편자를 쓸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플라톤의 《고르기아스》 편에 나오는 회의주의의 그 논변들이 결국 힘을 얻을 수밖에 없다. 우리는 무엇을 알 수 없다, 알아도 전달할 수 없다 그런 것들.
Moby-Dick; or The Whale이라고 하는 제목을 보니까 이런 오만 잡생각이 다 떠오른다는 점을 오늘은 먼저 말한다. 우리가 《모비 딕》을 읽고 무슨 논문을 쓸 것도 아니고 그러니까 이런 제목을 가지고 이런 생각까지도 해봐야 한다는 점을 말하는 것이다. 다음 주 화요일부터 이제 좀 찬찬히 읽어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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