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티오의 책들 | 문학 고전 강의 — 마지막 시간

 

2024.03.09 문학 고전 강의 — 마지막 시간

⟪문학 고전 강의 - 내재하는 체험, 매개하는 서사⟫, 제40강

 

 

《문학 고전 강의》 해설 마지막 시간이다. 거의 100번 가까이하게 되었다. 중간에 다른 얘기도 많이 한다고 했는데 많이 못했다. 그래도 이번에 《문학 고전 강의》를 하면서 좀 보완해서 읽어봐야 되겠다, 클래식한 텍스트들을 좀 더 봐야겠다 생각한 것들이 몇 개 있었고 그런 것들을 따로 정리해 두었다. 기회가 되면 읽어보고 《문학 고전 강의》에 보완하는 의미로 고전적인 텍스트들을 해보려고 한다. 그리고 《에로스를 찾아서》를 검토하면서 이번에 헤겔 예술 철학 강의록이 새로 또 출간된 것도 있고 그래서 보고 있는데, 헤겔이 다루고 있는 텍스트들 중에 헤겔도 읽었는데 나도 한 번쯤은 더 한 번쯤은 읽어봐야 되지 않나 하는 게 몇 개 있었다. 꼭 문학 고전이 아니라 문학 이론서들도 좀 해봐야겠다 생각한다. 

제40강 위엄있는, 신을 믿지 않는, 신을 닮은 선장 에이해브. 아무리 이슈메일이 탁월한 화자이고 살아남은 자라 해도 문학의 역사에서 에이해브만한 성격을 드러내 보여주는 주인공은 드물다. 영화의 역사에서도 딱 두드러진 주인공이 드물듯이 몇 명 없다. 오이디푸스, 아가멤논은 좀 그렇고, 셰익스피어에서는 맥베스. 이슈메일은 선장을 보고 "강력한 슬픔을 지닌 위엄"을 느낀다. 그 사람은 위엄이 있는데 그냥 위엄만 있으면 별로 호소력이 없겠지만 강력한 슬픔을 지녔다 라고 하는 것에서 뭔가 강한 호소력을 느낄 수 있겠다. 그리고 그런 것들이 그 파토스를 겪었다는 것에서, 지난번에 얘기한 것처럼 우리가 살면서 어느 정도의 파토스를 겪어야 다른 사람과 공감도 하고 그럴 수 있는가, 그런 것은 간단치 않다. "신조차도 두려워하지 않는 백발 노인, 증오심에 가득 차서 욥의 고래를 찾아 세상을 돌아다니는 노인", 욥의 고래는 신의 작품이고, 에이해브는 기독교의 세계에서 낯선 사람인데, 에이해브는 신의 작품을 죽이려 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모비딕은 "사람을 가장 미치게 하고 괴롭히는 모든 것, 가라앉은 앙금을 휘젖는 모든 것, 악의를 내포하고 있는 모든 진실, 체력을 떨어뜨리고 뇌를 굳게 하는 모든 것, 생명과 사상에 작용하는 모든 악마성━이 모든 악이 미쳐버린 에이해브에게는 모비 딕이라는 형태로 가시화되었고, 그리하여 실제로 공격할 수 있는 상대가 되었다." 

제가 《문학 고전 강의》를 해설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다루고 있는 텍스트들을 틈나는 대로 조금씩이라도 읽어보라는 것이다. 저 역시 이것을 읽었기 때문에 강의하는 것이고, 함께 읽자는 것이다. 함께 읽어야 이 텍스트들에 등장하는 어떤 정서와 표현과 은유들을 나눌 수 있는 것이다. 일포스티노라고 하는 영화 있다. 거기에 보면 우편배달부가 은유를 배운다. 그것이 우리가 함께 공유할 수 있는 언어를 가질 수 있게 되는 것이고. 《모비 딕》이라고 하는 작품을 읽어서 함께 그것을 공유하고 거기에 나온 표현을 가지고 함께 대화하고 그게 바로 대화의 공동체이고 문학의 궁극적인 목적은 그럴 것이다. 개인에게 위로를 주면서도 동시에 언어의 공동체를 만들어내는데 문학의 위대한 힘이 있지 않나 한다. 철학은 그런 게 없다. 이념은 스며들지 못하니까 그렇다. 

모비 딕은 불가사의한 힘이고 그것을 향해서 돌진하는 사람이 에이해브인데. 그러한 돌진이 신에게서 벗어나고자 하는 인간 실존의 절박한 시도이다. 저는 신을 믿는 사람이기는 한데 그 신에게 무작정 굴복하는 것은 싫다. 니힐리즘이라고 하는 것은 그런 신을 믿는 사람도 가질 수 있다. 무작정 굴복하지 않겠다고 하는 그런 것이 니힐리즘이다. 그렇게 해서 평생을 살다가 죽을 때 죽더라도 그렇게 해서 살다가 죽으면 삶의 절정에 이를 수 있는 것이고, 이슈메일은 혼자만 가까스로 살아남아 모든 과정을 우리에게 전해주지만 그저 살아남은 사람인 것만은 아니다. 지난 시간에도 얘기했던 것처럼 이슈메일은 꼭 그런 사람인 것만은 아니다.

《문학 고전 강의》를 이번에 하면서 저 개인에게 있어 중요한 발견들 중에 하나는 바로 이슈메일의 성격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볼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슈메일에 주목하면서 다시 읽어야겠다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아무래도 이 문학 작품들은 실존철학과 관계가 있으니까 자기와 타자에 대한 성찰, 자기를 성찰하면서 타자를 성찰하는 것이고, 다음에는 욥기만이 아니라 창세기 세계관에 나오는, 이것은 에리히 아우어바흐의 《미메시스》를 읽으면서 얻었던 모티브인데, 우리는 어디까지 우리의 자유를 누리면서 뭔가를 할 수 있는가는 항상 인간에게 깊은 문제를 불러일으킨다. 그래서 그런 것들을 아브라함의 태도에서 한번 본다. 아브라함과 이삭의 아케다, 그런 것들을 희랍에서는 moira라든가 tykhē라든가 이런 말로 얘기를 했을 것이다. tykhē는 운명의 신이라고는 하지만 가만히 보면 뭐 하는 일이 없다. 그러니까 그것은 어떻게 보면 자유의지를 다르게 말한 것일 수도 있다.  

예전에 철학에 있어서 자기Selbst에 대해서 강의한 적이 있는데 요즘에 《문학 고전 강의》를 읽으면서 한 번 생각이 났다. 그때 강의했던 강의 자료가 있다. 소크라테스, 데카르트, 아구스티누스, 또 신플라톤주의를 이어받은 영지주의. 영지주의자들이 말하는 신비mysterion, 기독교도의 신비 그런 것도 또 생각이 났고, 이번에 또 리차드 2세, 포스트 타입에서 꽤 읽었다, 리차드 2세의 실존 변증법 그리고 뚜렷하게 발견한 《콜로노스의 오이디포스트》를 꼭 읽어야겠다 라는 것 그리고 멜빌의 전체론적 진리론, 그다음에 한스 블루멘베르크가 쓴 《난파선과 구경꾼》이라는 텍스트가 있는데, 그 텍스트만이 아니라 블루멘베르크가 《난파선과 구경꾼》에서 여러 종류의 텍스트들을 다루고 있는데 그런 것들도 한번 좀 살펴봐야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다시 정리를 해보면 창세기 그리고 소크라테스나 데카르트나 아구스티스누스나 영지주의나 리차드 2세나 또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 그리고 난파선과 구경꾼에서 제시하고 있는 텍스트, 한스 블루멘베르크도 그렇게 일관성 있는 통찰을 보여주거나 그러지는 않는데, 그 사람이 읽은 텍스트들을 좀 다시 봐야겠구나 하는 생각을 얼핏했다. 

《문학 고전 강의》를 다시 한 번 읽으면서, 문학 고전 강의를 읽는 목적은 앞서 말한 것처럼 《문학 고전 강의》를 읽으면서 《문학 고전 강의》가 다루고 있는 고전 텍스트들을 다시 읽어본다는 것이다. 그리고 기회가 되면 실존이라고 하는 것에 초점을 맞춰서 문학 텍스트들을 다시 한 번 읽어보고 그것을 또 여러분들과 함께 나누는 시간을 갖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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