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티오의 책들 | [특강] 우리 시대, 사상사로 읽는 원전 1-1

 

2025.01.08 [특강] 우리 시대, 사상사로 읽는 원전 1-1

이번 주에는 《소크라테스, 민주주의를 캐묻다》라는 책과 다음 주에는 《플라톤, 현실 국가를 캐묻다》 책을 가지고 특강을 한다. 이 책은 《소크라테스의 변론》을 어떻게 하면 잘 읽을 수 있는가에 대해서 설명해 놓은 책으로, 사실 「우리 시대 사상사로 읽는 원전: 체제 탐구」라는 시리즈를 하면서 그 첫 번째 시리즈로 내놓은 것으로, 2021년에 출간한 책이다. 이 책 처음을 보면 이 시리즈 출간사가 적혀 있다. 제가 대학원에서 전공을 한 게 정치 철학인데, 정치 철학이라고 하는 것은 정치학과 어떻게 다른가. 철학과에서는 형이상학을 바탕으로 해서 정치에 대해서 연구하고 역사에 대해서 연구하고 사회에 대해서 연구한다. 우리나라는 가만히 보면 《소크라테스의 변론》을 비롯해서 플라톤의 《국가》 등 정치 철학의 고전들이 많은데 그 정치 철학의 고전들을 읽어서 충실하게 설명을 해놓은 책이 없다. 그래서 정치 체제에 대해서 다루고 있는 책들을 골라서 해설하는 시리즈를 써봐야겠다 라고 생각해서 첫 번째 권으로 《소크라테스의 변론》부터 시작을 한 것이다. 2021년부터 쓰기 시작해서 한 10년 정도 하면 하나의 시리즈를 마무리할 수 있겠구나 생각했다. 그래서 이 책이 첫 번째 것이고, 두 번째가 《플라톤, 현실 국가를 캐묻다》인데, 단순한 고전 해설서를 의도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민주공화국이라고 하는 체제, 이 체제에 대해서 근본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내용을 담고 있는 여기다 담으려고 생각을 했다. 

우리는 맨날 헌법 제1조 1항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는 얘기하는데, 그게 무슨 의미인지 사실 잘 모른다. 서양 사람들도 잘 모르는데, 왜냐하면 서양에서도 민주주의라든가 민주공화국이라든가 이런 것들이 그 나라의 주요한 이념이 되어서 사람들이 그것에 목을 매고 살아온 지가 100년이 되지 않는다. 고대 그리스에서 잠깐 있었을 뿐이고 그 이후로는 있지 않다. 그러니까 미국 사람들은 자기네 나라가 민주 국가라고는 하지만 각각 각각의 나라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민주정이라고 하는 것 또는 민주주의 국가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 이해하고 있는 바가 다르다.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것과 다른 나라 사람들이 이해하고 있는 것은 다르다. 그래서 그것이 정확하게 한국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민주주의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생각해 보기 위해서 이 책을 썼다.  

제가 이 분야를 공부하다 보니까 서양에서 나온 책들도 많이 보는데, 서양에서도 민주주의라고 하는 것은 관심 있는 주제가 아니다. 자기네들에게 너무나 익숙하고 새삼스럽게 탐구할 필요가 없는 주제이기 때문에 그렇다. 서양에서도 민주주의나 민주정은 학문적인 관심사로 탐구를 할 뿐이지 일반 사람들이 민주주의에 대해서 공부를 하거나 그러지는 않는다. 《소크라테스, 민주주의를 캐묻다》부터 시작해서 지금 계속 플라톤의 《국가》 해설 그다음에 플라톤의 《정치가》라고 하는 대화편도 해설을 준비를 하고 있는데, 이것을 하는 이유는 10년 정도 지나면 2030년대쯤 되면, 한국 사람이 쓴 책은 아무 것도 읽을 게 없고 소크라테스나 플라톤이나 번역본은 있는데 해설서는 없고 그러한 상황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들어서였다. 그렇다면 적어도 한국에서 이 분야를 공부한, 철학을 공부한 사람으로서 이런 해설서를 남겨놓는 것이, 그들에게 교과서로써 남겨놓는 게, 물론 그때까지 이 책이 살아남아 있는다는 것을 전제로, 읽어볼 수 있는 교과서로 남겨놓아야 되지 않겠나 라고 생각해서, 10년 동안 작업을 해야겠다고 생각해서 한 것이다.  그래서 여하튼 이 이 책은 여러분들이 도서관에서 빌려서라도 지금 상황에서 꼭 한번쯤은, 플라톤보다도 이 소크라테스를 꼭 한번 읽어보기를 바란다.  

책을 읽는다고 하는 것은 상당히 많은 정도로 추상화된 것이고, 어느 정도 있는 현실에서 한 발짝 물러나서 사태를 객관적으로 봐야겠다 라는 마음이 있어야 책을 읽는 것이다. 책은 굉장히 메타 미디어이고, 2차적인 매체이다. 특히나 철학은 어떤 구체적인 학문의 배후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현실에서 세 단계 떨어져 있다. 공부하는 사람들은 적어도 2단계 3단계 정도는 더 많이 생각해 보고 해봐야 한다.  표4를 보면 "개인의 삶은 다양할지 언정 지금 우리 모두의 삶을 규율하고 있는 정치 체제는 '민주공화국'이다. 그러나 이러한 형식적인 헌법 규정보다는 2000년대의 대한민국에서 이 규정이 현실적으로 실천적으로 어떻게 작용하는지, 그리고 그것이 어떤 방향으로 발전되어야 하는지가 더 절박한 우리의 관심사라 할 것이다"라고 되어 있다.  제가 굉장히 말을 순화하고 이렇게 했지만 사실은 이 표현에서 하고자 하는 말은 이것이었다. 누구나 다 민주공화국에 살고 있다고는 하는데 정말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민주공화국이 과연 지속 가능한 것인지, 우리 모두 다 민주공화국에 대해서 뼈저리게 알고 있는지, 그런데 제가 그동안 지내오면서 만나본 사람들 중에, 아무도 민주공화국에 대해서 자기가 살고 있는 체제가 어떻게 작동하고 넘어서는 안 되는 선이 무엇이고 이런 것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대로 흘러가면 결국은 우리는 아무런 의식 없이 살게 된다.  그런 걱정을 해서 이 책을 사실은 쓰게 되었다. 그래서 이 책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너 자신을 알라라든가 이런 의미의 소크라테스와는 다른, 소크라테스 시대에 정치 상황들을 가지고 얘기를 해보겠다. 

욘 엘스터의 《책장 덮기》라는 책이 있다. 책장이라는 게 여기서는 명단이다. 그러니까 부역자 명단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최용주라는 사람이 번역을 했는데 5.18 기념재단 연구위원을 거쳐서 2020년부터 현재까지 5.18 민주화 운동 진상 규명 조사위원회 조사1과 과장을 맡고 있는 사람이다. 이 책이 번역된 연도는 2022년으로 원서가 거의 나오자마자 읽었다. 어떤 체제가 바뀌었을 때 서양에서도 그 이전 체제의 사람들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가 상당히 심각한 문제로 이론적으로 정리가 잘 되어 있지 않은데 이 책은 그 분야에 거의 정평 있는 책이라 할 수 있다. 이 책을 보면 그런 얘기가 있다. 나폴레옹이 프랑스 혁명의 성과를 갖다가 자기가 온전히 챙겨서 황제가 된 다음에 일단 한 번 쫓겨났다가 다시 돌아왔다. 엘바 섬에서 돌아왔는데 나중에 결국엔 잡혀가지고 세인트 헬레나 섬으로 귀향을 갔고, 프랑스에서 제2차 왕정복고가 이루어졌다. 제1차 때와는 달리 2차 때는 대대적인 숙청이 단행되었는데, 국방부가 프랑스 육군 장교를 14개 부류로 분류해서 심사를 진행했다. 1번이 나폴레옹이 파리에 도착한 후 20일 이내에 육군을 이탈한 관리 및 장교는 206명이다. 2번이 군대를 떠나지는 않았으나 나폴레옹에 대한 충성 맹세를 거부한 103명, 이게 1800년대 중반에 있었던 일로, 얼마 안 되었다.  그리고 나폴레옹에 대한 충성 선서를 했으나 스스로 속죄한 장교 5명, 나폴레옹에 합류했지만 국왕이 돌아오기 전에 군대를 떠난 장교 107명, 복무 중이었지만 당국에서 왕당파로 분류하여 따로 관리하고 있던 장교 709명, 그다음에 9번을 보면 순수하게 수동적으로 복무한 장교 2천명, 제일 많다. 그냥 가만히 있는 사람들이다. 그다음에 의외로 이 비율을 보면 국왕이 파리로 복귀하기 전까지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을 따르던 관리 및 장교 2139명, 꽤 많다. 나폴레옹한테 운명을 건 사람들도 꽤 있었다. 화투를 치면 지금까지 내가 잃었기 때문에 이번엔 딸 것이라고 생각하는 도박사의 오류이다. 항상 확률은 따느냐 잃느냐 둘 중에 하나인데 사람들은 지금까지 나폴레옹이 이렇게 했던 말을 보고 믿어서 나폴레옹한테 걸었던 것이다. 특별히 비난받아야 할 7개의 범주로 분류된 장교가 612명이다. 20일 동안 보나파르트에게 충성한 자, 그러니까 나폴레옹이 두 번째 왔을 때 20일 천하였다. 보나파르트에게 충성한 자, 앞장서서 보나파르트의 깃발을 든 자, 왕의 충신을 탄압하거나 처벌한 자, 왕의 명령을 거역하고 항복하기를 거역한 요새 지휘관들, 지금 여기서 왕을 국회라고 생각해보자. 다 연구가 되어 있다.  학문이라고 하는 세계는 정말로 이렇게 반역자들을 위한 분류 기준을 마련해 놓았다. 그 중에서 제일 악질이 파리로 향하는 보나파르트의 행군 대열에 자발적으로 참여한 자이다.  

이런 일이 프랑스에서만 일어나는 게 아니라 역사적으로 사건이 기록이 되어서 사람들이 이것에 대해서 관심을 갖기 시작한 때가 소크라테스 때이다. 사실 소크라테스 시대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서양에서 유일하게 민주정 체제가 있던 때라는 것이다. 그 당시 아테나이에서 민주정이 있었고 그 이후로는 2차 대전 끝날 때까지 서양에서 민주정 국가가 있던 적이 없고 인민 주권이 실현된 적이 없다. 그래서 굉장히 중요한 사건이다. 소크라테스의 재판을 그 맥락에서 봐야 된다. 서양 사람들은 소크라테스의 재판을 그러한 맥락에서 보지 않는데, 서양 사람들은 귀족이 다 학자가 되고, 철학 공부한다고 하면 노동자의 자식이 없기 때문이다. 서양에서는 운동 경기도 계급에 따라 한다. 그러니까 소크라테스라고 하는 사람이 있던 이 시대를 민주정의 맥락에서 읽지 않는다. 소크라테스의 시대는 30인 참주정이라고 해서 독재자가 와서 자기네 패거리를 끌고 와서 반대하는 사람들을 죽이던, 각자가 각자의 세력을 계속 유지하고 있던 시대이다. 소크라테스도 소크라테스에게 재판을 걸었던 사람도 모두 다 민주정 파이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민주주의가 나라를 말아먹는다 라고 생각한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가 좋기는 한데 탐욕에 가득 찬 사람들이 민주주의를 하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에 대해서 생각을 했던 것이다. 그래서 소크라테스의 변론, 소크라테스가 재판정에서 한 얘기들을 역사적인 상황 속에다가 집어넣고 읽어보면 오늘날 한국에서 살고 있는 우리가 참고할 수 있는 것이 굉장히 많을 것이다 라고 생각을 해서 그 부분들을 이것에서 얘기를 했다. 

층지어진 존재론, stratified ontology라고 하는 말을 쓰는데, 원래는 중층 존재론이라는 말을 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에 대해서 한번 생각을 해보자. 우리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때 인간 존재는 가장 기본적으로 신체를 가지고 있다. 가장 밑바닥에 놓여 있는 것을 생각해야 된다. 이를테면 비행기를 예로 들어보면 비행기가 날아가는 것을 보고 어떤 사람이 중력이 없구나 라고 생각하는 사람 바보이다. 중력이라고 하는 건 지구상에 살고 있는 모든 생명체, 모든 물체가 다 중력의 지배를 받는다. 맨 밑에 놓여 있는 것, 우리가 그것을 그것을 눈으로 확인했던, 중력을 본 적 없다, 확인하지 않았건 간에 어쨌거나 있는 것이 있다. 어쨌거나 있는 것을 whatever exists라고 한다. 모든 생각은 여기서 출발을 해야 한다. 우리가 세상을 살 때 어쨌든 있는 것에 대해서 항상 생각을 해야 된다. 가령 이것이 어떤 경우에 속하는가 하면 서양에서 산업혁명이 일어나고 그다음에 산업혁명에 의해서 계몽주의가 있었다. 그렇게 해서 제국주의가 발전했다.  그런데 그 사이에 중국은 뭐 했어 라고 하는 Why Europe이라는 테제가 생겨났다. 왜 유럽이 선진국이 되었는가 하는 것은 다 쓸데없는 얘기이다. 유럽과 중국은 환경 자체가 다르기 때문이다. whatever exists가 다르다. 리얼한 영역에 있는 것, 제일 밑바닥에 놓여 있는 것이 다르다.  상황이 다르고 강이 다르고 종류가 다르기 때문에 그런 종류의 더 리얼한 차원인 기후와 환경, 기후와 환경이 다른 영역에 있는 것들을 비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것을 평소에 잊어버리고 있다. 어쨌든 있는 것으로부터 뭔가가 튀어나와서 행위자agent가 여기에 개입을 한다. 그러니까 whatever exists에다 행위자agent가 개입을 해서 현실화되는 것들이 이런 것들이다. 예를 들어서 중력이라고 하는 것이 있는데, 중력의 존재를 인정하되 그 중력을 벗어나서 날아가고자 할 때 우리는 비행기 같은 것을 설계하는데, 그런 것들이 현실적인 것이다. 내가 공부를 현실적으로 공부를 해야겠다 라고 생각하면 무엇을 해야겠는가. 계획을 세우는 것이 먼저가 아니다. 내가 어떤 신체 조건을 갖고 있는가, 내 환경이 어떠한가를 일단 모니터링을 해야 한다. 항상 whatever exists에 대해서 생각을 해야 한다. 이것을 놓치면 안 된다. 그러니까 공부를 하고 싶다고 하면 현재 나의 환경이 어떠한가, 내 몸은 어떻게 작동하는가에 대한 것부터 체크를 해야 된다. 이게 가장 밑바탕에 놓여 있는 것이다.  맨 위에 있는 경험하고 있는 영역은 발견가능한 것들인데, 발견 가능한 것들이라고 해서 진리의 전부는 아니다. 우리 눈앞에 보이는 것들이 많은데 눈앞에 보이는 것들은 적어도 밑에 두 개의 층을 갖고 있다고 생각을 해야 된다. 이 밑에까지 가는 것은 어렵다 하더라도 내가 발견하지는 못하더라도 있다는 것을 생각을 하는 것이 공부하는 사람의 자세이다.  

작년에 《공공역사란 무엇인가》, 《사회 지리학》을 했었다. 《공공역사란 무엇인가》를 할 때 제2차 세대전 당시 나치 독일이 저지른 학살이 꽤 나중에야 전시되었다고 말했었다. 독일 사람들이라고 해서 그것에 직면하지 않는다.  《사회 지리학》에서 편견과 차별과 같은 것들을 얘기했었다.  그게 사실은 우리가 민주주의 국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꼭 알아야 되는 것이다. 우리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에 대해서 whatever exists가 합의된 바가 없다. 그냥 생물학적으로 이렇게 우리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가 있다. 그런 내가 어떤 성향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들은 타고나지 않는다. 교육되는 것이다.   

민주정은 그냥 다수결일 뿐이다. 올바름이라고 하는 것에 의해서 다수가 끌려가야 제대로 작동하는 것이다. 소크라테스 시대에는 직접 민주주의, 간접 민주주의의 문제가 아니었다. 모든 사람이 다수의 의견에 따라서 뭔가 되는 곳이었다. 소크라테스가 보니까 얘네들이 다수의 의견에 따라서 가긴 가는데 나쁜 짓을 다수의 의결로 하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나쁜 짓 하면 안 돼 하고 말하고 다니니까 떼 지어서 나쁜 짓을 하던 사람들에게 집단 린치가 벌어졌던 것이다. 그것도 압도적 다수가 소크라테스를 추방해야 된다든가 사형해야 된다든가 그렇게까지는 가지 않았다. 소크라테스는 아슬아슬하게 유죄를 받았다. 민주주의는 좋은 것도 아니고 나쁜 것도 아니다. democracy라는 말은 민주정, 민주적 의사결정 과정을 가리킨다. 민주주의는 인민people이 주권을 가지고 있는 체제를 말한다. 여기서 정말로 중요한 것은 무엇을 우리가 공통적으로 좋은 것이라고 생각해서 해나갈 것인가인데, 이것이 핵심이다. 여기에 합의를 해야 한다. 여기에 합의를 하지 않으면 모두 다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훌륭한 삶이다 라고 했을 때 그것은 적어도 아무리 연원을 멀리 잡아도 17세기 이전에는 없었던 이념이다. 17세기 이후에 시장 경제가 본격적으로 전 지구적으로 지배적인 삶의 방식이 되었을 때부터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무엇이 자기 이익인지를 정확하게 알 수가 없다. 절대 다수는 나에게 이익이 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을 해보면 내가 살고 있는 공동체를 건강하게 만드는 것이다.  무엇이 나에게 진정으로 좋은 자기인가를 생각해야 된다. 그래야 이 체제가 유지될 수 있다. 결국 소크라테스도 이 문제에 직면했던 것이다. 아테네는 소크라테스가 살던 당시에 지중해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해군을 가지고 있는 나라였다. 가장 강력한 해군을 가지고 있어서 전쟁을 벌여서 침탈을 한다. 결국 경제 발전을 하려면 기술력이 있어야 되는데, 그 당시는 기술력이 뛰어나지 않기 때문에 아테네에서 경제 발전하는 방법은 약탈이었다. 전쟁이 경제 활동인 것이다. 그래서 지중해에 있는 섬들에 가서 약탈을 한다. 우리가 아테네 사람들은 굉장히 철학도 많이 공부하고 유식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데 아니다.  굉장히 잔인하다. 케르퀴라라든가 이런 섬나라를 약탈해서 사람들을 다 죽였다. 투퀴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 있는 얘기다. 그렇게 해서 아테네 시민들은 어떻게 하면 자기네들에게 더 많은 이익을 가져다주는가 하는 것을 공약하는 사람을 지도자로 내세우게 된다. 한 번 전쟁 경제 속으로 들어가고 내 마음에 드는 사람들, 나의 재산상의 이익을 극단화해 주는 사람을 지도자로서 받아들이기 시작하면 민주정은 깨지고 자기 이익의 노예가 되어서 그 사람을 추종하게 된다. 그리고 올바름이라든가 이런 것들은 다 사라진 상태에서 이익이 올바름과, 그러니까 좋은 것은 이익이라고 하는 상태로 간다. 그 상태에 놓여 있던 것이 소크라테스가 살던 시대의 아테네라는 것을 꼭 생각을 해야 한다. 소크라테스는 자기가 살고 있던 시대에 사람들이 무엇을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는가에 대해서 굉장히 심각하게 문제 제기를 했다고 보면 된다. 그러니까 물리적인 세계에서 어쨌든 있는 것은 지구, 우리의 신체 이런 것이다. 그런데 정신의 세계에서 맨 밑바닥에 놓여 있는 것은 좋은 것이다. 당신은 무엇을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라고 물었을 때 그것에 합의가 안 되면 교우 관계가 형성이 안 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에서는 정신적 세계이다. 제일 밑바닥에 놓여 있는 것인 좋은 것에 합의를 해야 한다. 인간관계에서는 그렇고 우리가 살고 있는 국가에서 맨 밑에 놓여 있는 것은 헌법이다. 이것은 타협할 수 있는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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