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티오의 책들 | 문학 고전 강의 — 88 제36강(1) 괴테 《파우스트》

 

2024.02.13 문학 고전 강의 — 88 제36강(1) 괴테 《파우스트》

⟪문학 고전 강의 - 내재하는 체험, 매개하는 서사⟫, 제36강(1)

 

 

지난번까지 《문학 고전 강의》 제35강을 여러 번에 걸쳐서 도이치의 신헬레니즘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신고전주의라고 말하면 고전주의라는 말이 지나치게 많은 곳에서 사용되고 있기 때문에 그리고 도이치 고전주의에서 도대체 무엇을 그 고전의 전거로 삼았는가를 분명하게 보여주기 위해서 신헬레니즘이라는 표현을 썼다. 그런데 괴테는 빈켈만에 대한 굉장한 경외감이 있었고 그를 찬양하였지만 동시에 동시에 괴테가 살아간 시대는 모든 사람들이 행동으로써 또는 자유로운 의지로써 세계를 만들어보고자 하는 욕구가 굉장히 강했다. 그런 것들을 묶어서 낭만주의라고 말할 수 있다. 프레더릭 바이저의 《낭만주의의 명령, 세계를 낭만화하라》에서 세계를 낭만화한다라는 것은 여러 차례 말했지만 낭만이라고 하는 것은 사실 적극적인 규정은 아니다. 고전이라고 하는 것은 이렇게 하는 게 고전이야 라고 하는 규칙이 있지만 낭만은 그렇게 안 하는 게 낭만이다. 소극적으로는 뭔가를 안 한다는 것이 낭만이지만 조금 더 파고 들어가 보면 그 안에서도 어떻게 하는 게 낭만이다 라는 것이 생겨날 수 있다. 그런데 어떤 규정을 그 안에다가 부여하면 동시에 그게 고전이 되어버린다. 뭔가를 해야 한다고 하면 해야 한다는 것이 규칙이 되고 그러면 낭만에 거슬리는 일이 된다. 낭만이라고 하는 것은 끊임없는 부정과 행동과 운동의 연속 과정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헤겔이 청년기에 자신의 모든 작업을 마무리하면서 내놓은 저작이 《정신현상학》인데, 《정신현상학》에서 사용되고 있는 변증법이라고 하는 말은 그냥 모험이다.  절망과 회의의 길을 가는 모험. 끝이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다. 물론 마지막에 보면 절대적 앎이라고 하는 것으로 귀결이 된다. 그러나 그것은 어떻게 보면 조금 마지못해 덧붙여 놓은 듯한 것처럼 보이고, 물론 그것이 청년기의 신학적 탐구의 성과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중간 과정을 계속 살펴보면 끝없이 앞으로 어찌 될지 모르고 전진해 나아가는 것이 《정신현상학》의 변증법이다. 그게 바로 낭만주의적인 충동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충동이라고 하면 나쁜 것 같아도 그런 정서가 있다. 요즘 《감정의 항해》를 읽고 나니까 이제 정서, 감정 이런 것들도 뭔가 진지하게 탐구해 보아야 할 것처럼 스스로 생각해서 여러 번 얘기한다. 그것에 비하면 뉘른베르크 김나지움에 있을 때 《논리학》을 쓰는데, 논리학은 말 그대로 존재론이다, 이는 아리스토텔레스적인 형이상학을 의도한 것이고, 그리고 나서 이른바 Enzyklopädie이라고 약칭해서 부르는 《철학적 학문의 백과사전》을 하면서 하이델베르그 대학으로 가고, 베를린 대학으로 가면서부터는 정신현상학적인 것들은 놓아버렸다. 헤겔도 《정신현상학》을 쓰던 단계까지는 낭만주의의 자장권磁場圈에 있었는데 괴테만큼은 아니다. 괴테는 나이 들어서 《파우스트》까지도 이렇게 낭만주의를 보여준다.  헤겔은 잠깐 청년기에 그러고 말았다. 철학자들은 로만틱의 일탈을 저지르기에는 체계 수립에 대한 욕구가 굉장히 강한 사람들이다. 완결되지 않은 상태로 방치되어 있는 것을 못 견디는 사람들이 철학자가 된다. 

 

제36강은 감각적 삶을 통해 감각을 초월하고자 노력하는 파우스트. 여기서는 '감각'이다. 그리고 제37강은 심오하고 포괄적인 가치의 영역으로 올라서는 파우스트, '감각'의 영역에서 갑자기 '가치'의 영역으로, 제35강에서는 삶과 앎과 자연의 합일를 추구하는 낭만주의적 인간 편력으로 되어 있다. 이 제목들을 보면 《파우스트》는 그랜드 프로젝트, 모든 것을 싸안으려는 그런 프로젝트구나 라고 생각을 할 수 있다.  감각적 삶을 통해 감각을 초월하고자 하는 파우스트. 감각적 삶을 통해 감각을 초월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가. 이론을 버리고 행동을 해야 된다. 그 얘기가 《파우스트》 제1부에서 시작된다. 파우스트가 이제 한탄을 한다. "철학도, / 법학도, 의학도, / 유감스럽게 신학까지도, / 온갖 노력을 기울여 속속들이 연구하였도다. / 그러나 지금 여기 서 있는 난 가련한 바보에 지나지 않으며, / 옛날보다 더 나아진 것 하나도 없도다!" 이 정도의 한탄은 공부 좀 한 사람은 할 만하다. 저는 그렇지 않다. 우스갯소리로 온갖 노력을 기울여 속속들이 연구하지는 않았다. 그냥 하는 데까지 해봤다. 그리고 저는 가련한 바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옛날보다 적어도 최소한 10년 전보다는 나아진 게 있는 것 같다. 어제보다 나아진 건 모르겠는데 10년 전보다 나아진 게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파우스트는 굉장히 많이 공부를 한 사람이니까 그렇게 되면 오히려 자신이 가련한 바보라는 게 보인다. 물론 이런 것은 무지를 자각하는 것이다. "모든 작용력과 근원을 관조해보고", 이는 철학적 기획이다. 관조contemplation라고 하는 것의 반대말은 행위action이다.  일단은 관조해 보기 위해서 이런 것들을 하였다.  관조해 보니까 "모든 개체들이 어울려 전체를 이루고 / 하나가 다른 하나에 작용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조화롭게 삼라만상을 통해 울려퍼지는"것을 알게 되었다. 그런 다음에 이제 새롭게 뭔가를 해봐야 되지 않겠는가.  이를테면 지금까지 공부한 게 다 헛 것 같고 뭔가 좀 늘어난 것 같지도 않고 가련한 바보인 것 같다. 그러면 뭔가를 다시 시작을 해봐야 되지 않겠나 이렇게 했을 때이다. 

《파우스트》 354~359행
파우스트: 아아! 나는 이제 철학도,
법학도, 의학도,
유감스럽게 신학까지도,
온갖 노력을 기울여 속속들이 연구하였도다.
그러나 지금 여기 서 있는 난 가련한 바보에 지나지 않으며,
옛날보다 더 나아진 것 하나도 없도다!

 

그래서 파우스트는 성서 번역에 착수한다. 이 부분을 보면 "태초에 말씀이 있었느니라! / 여기서 벌써 막히는구나!", 막히는구나 하는 것이 모르겠다는 뜻이 아니라 뭔가 마음에 안 든다는 얘기이다. 난 이렇게 성서를 이해하고 싶지 않아 라는 마음에서 나오는 얘기다. 그래서 곧바로 "이 말을 다르게 번역해야만 하겠다. / 기록하여 가로되, 태초에 의미가 있었느니라." 여기서 번역이라고 하는 것은translation이 아니라 interpretation이겠다. 해석을 해야겠다. 성서를 rewriting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성서를 자기가 다시 써보겠다고 나선 것이다. 그러더니 "만물을 작용시키고 창조하는 것이 과연 의미란 말인가" , 의미가 아니라는 것. "이렇게 기록되어야 할지니, 태초에 힘이 있었느니라!", 힘이라고 얘기를 했다.  말씀과 의미는 관조라고 하는 것에서 나오는 것일텐데 여기서 태초에 힘이 있었느니라 라고 하다가 "갑자기 좋은 생각이 떠올라, / 기쁜 마음으로 기록하노니, 태초에 행위가 있었느니라!"라고 갔다. 이것은 성서를 해석하는 관점을 행위로 귀결시킨 것이다. "말씀이 태초에 말씀이 있었느니라!"는 double quotation 안에 들어있다. 이는 성서에 기록된 그대로이다. 그다음에 그것을 1228~1237행 사이에서 의미로 해석하기도 하고 힘으로 해석하기도 하고 행위로 해석하기도 하면서 쭉 이어져 간다. 이것은 파우스트 해석이라기보다는 괴테의 해석이다. 괴테가 이렇게 성서를 이해하고자 하는 그런 것으로, 그러면 바로 이제 일반적으로는 성서 〈요한복음〉의 첫 구절인 "태초의 말씀이 있었다"를 의미, 힘, 행위 이렇게 가는 게 바로 괴테가 《파우스트》에서 드러내고자 하는 낭만주의적 충동으로 해석한다. 이런 것을 피히테적 낭만주의라고 한다. 피히테의 Tathandlung, 사행事行이라고 한다. 행위가 있었다 라고 하는 것이 바로 낭만주의적 충동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부터 파우스트가 그저 관조가 아니라 행위를 하겠다고 하면 관조하는 인간에서 행위하는 인간으로 나아가 보겠다고 말하는 것이니까 낭만주의적 전회라고 흔히 일컫는 것이다. "철학자들은 세계를 다양하게 해석해 왔을 뿐이며,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루트비히 포이어바흐와 독일 고전 철학의 종말》에서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를 보면 마르크스가 써놓은 말이다. 이런 것들이 다 세계를 낭만화하라는 행위 중심으로, 행위가 인간의 본질이라고 하는 것은 행위 속에서 나타난다 라고 하는 그런 것들을 보여주는 것이다. 마르크스라고 해서 도이치 로만틱의 자장권에서 벗어났을 거라고 생각할 수는 없다. 19세기 전반에 그들을 사로잡은 하나의 그 열정이다. 바로 그런 열정들이 세계를 움직여가는 것이고 어떻게 보면 이론을 만들어내는 게 바로 그런 열정들이라고 할 수 있다. 

《파우스트》 1224~1226행
파우스트: (파우스트, 한 권의 책을 펼쳐놓고 번역을 시작한다.)
기록하여 가로되, "태초에 말씀이 있었느니라!"
여기서 벌써 막히는구나! 누가 나를 도와 계속토록 해줄까?
나는 말씀이란 것을 그렇게 높이 평가할 수 없다.

《파우스트》 1228~1237행
파우스트: 나는 이 말을 다르게 번역해야만 하겠다. 
기록하여 가로되, 태초에 의미가 있었느니라. 
너의 붓이 지나치게 서둘러 가지 않도록, 
첫 구절을 신중하게 생각도록 하라!
만물을 작용시키고 창조하는 것이 과연 의미란 말인가? 
이렇게 기록되어야 할지니, 태초에 힘이 있었느니라! 
하지만 내가 이렇게 쓰고 있는 동안에, 벌
써 그것도 아니라고 경고하는 것이 있구나. 
정령의 도움이로다! 갑자기 좋은 생각이 떠올라, 
기쁜 마음으로 기록하노니, 태초에 행위가 있었느니라!

프리드리히 엥겔스, 《루트비히 포이어바흐와 독일 고전 철학의 종말》
칼 마르크스,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
11 철학자들은 세계를 다양하게 해석해 왔을 뿐이며,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파우스트가 성서를 해석하면서 힘과 행위를 말해야 했으니까 거기에 메피스토펠레스가 인간이 세계를 살아가는 최초의 출발점이라 할 수 있는 관능의 세계부터 경험하기를 권한다. 여기서 관능이라고 하는 것을 파우스트는 안 좋은 거 아닌가 생각하니까 메피스토펠레스는 거기서 "이 모든 것은 하나의 신만을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외다!"라고 말한다. 인간이 내면의 자아도 중요하지만 메피스토펠레스는 그게 전부가 아니고 관능의 세계 역시 신이 만든 것이고 그것을 향유하는 것 또한 인간이 할 수 있고 해야만 하는 일이다 라고 설득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관능이라고 하는 것은 정말 생동하는 세계를 겪어야 한다 그런 얘기이다. 그러면서 메피스토펠레스는 이제 선 넘는 말을 좀 한다. "인간의 최고의 힘이라고 하는, / 이성이나 학문 따위를 경멸하도록 하라." 이는 파우스트가 지금까지 쌓아왔던 학문이다. 이성이나 학문은 관조하는 학문이고 살아 숨쉬는 인간의 삶과는 무관한 것이고 그것을 경멸해라, 메피스토펠레스의 이 말이 바로 도이치 로만틱의 이상이다. 그러면서 "이론이란 모두 회색빛이고, / 푸르른 것은 오직 인생의 황금나무뿐이라네."라고 말한다.  이게 도이치 로만틱의 구호이다. 메피스토펠레스가 이것부터 시작을 하라고 말하는 것은 도이치 로만틱의 이상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인간이 가지고 있는 어떤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이렇게 시작을 해야 되겠다. 그러다가 정말 관능에 빠져서 헤어나지 못하면 할 수 없지만 우리는 어쨌든 끝까지 한번 가봐야 되겠다. 

《파우스트》 1781행
메피스토펠레스: 이 모든 것은 하나의 신만을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외다!

《파우스트》 1851~1852행
메피스토펠레스:  인간의 최고의 힘이라고 하는, 
이성이나 학문 따위를 경멸하도록 하라.

《파우스트》 2038~2039행
메피스토펠레스: 이론이란 모두 회색빛이고, 
푸르른 것은 오직 인생의 황금나무뿐이라네.

오늘 제36강을 처음 읽었고 《파우스트》를 마치면 엄청난 pagan의 히어로 에이해브가 등장하는 곳으로 가게 된다.
봄이 가기 전에 마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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