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담화冊談話 | 역사주의의 빈곤(4) ─ 역자해설

 

2024.01.22 📖 역사주의의 빈곤(4) ─ 역자해설

📖 역사주의의 빈곤

칼 포퍼Karl Raimund Popper(1902-1994), ⟪역사주의의 빈곤⟫(The Poverty of Historicism, 1969) 

❧ 역자 해설

    • 역사주의
      • 마르크스주의와 비판적으로 대결하여 혁명의 이론은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위장된 의사과학적擬似科學的 환상일 뿐임을 폭로하고 점진적 사회공학을 참된 경험적 사회과학으로 제시
      • 혁명 이론의 핵심은 ‘역사주의’(historicism)[역사예측주의, 역사법칙주의]. 이는 “역사적 사건의 과정을 예언할 수 있는 역사의 법칙을 발견했다”고 주장하고, 그러한 역사적 법칙을 발견하는 것이 사회과학의 주요한 과제라 주장하는 철학적 입장, 헤라클레이토스, 플라톤, 헤겔, 콩트, 밀, 마르크스 등의 사상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남. 사회과학도 물리학과 마찬가지로 이론적 경험적 과학이므로 보편적 법칙을 발견하여 그것으로써 사회적 사태를 설명하고 예측하여야 한다는 것
      • 자연에 있어서는 제일성齊一性(uniformity)이 성립하지만 사회에 있어서는 그것이 성립한다고 할 수 없으므로 사회과학은 물리적 법칙과는 다른 의미의 보편적 법칙, 즉 역사 전체를 포섭하는 법칙, ‘한 시기에서 다른 시기로의 이행을 규정하는 역사적 발전의 법칙’을 발견하여야 한다고 주장. 이로써 ‘사회학은 이론적 역사학’이라는 입론이 성립
      • ‘역사상대주의’(historism). 일체의 사회적 문화적 현상은 역사적 시대적 조건에 의해 규정된 것이요, 따라서 절대적 진리나 가치는 없다고 하는 사상. 이를 뜻하는 독일어 Historismus가 영어로는 historicism으로 번역되므로 포퍼가 말하는 historicism은 그의 조어인 셈
    • 역사적 법칙의 문제
      • 생물에 있어서나 사회에 있어서나 전개의 과정에는 ‘추세’ 또는 ‘경향’이 있을 뿐 ‘법칙’은 없다. 추세는 법칙이 아닌데도 역사주의자들은 양자를 혼동하고 있다. 어떤 추세가 있다고 주장할 때, 그러한 주장은 ‘존재언명’存在言明이지만, 보편적 언명으로서의 ‘법칙’은 ‘비존재언명’非存在言明이요, 어떤 것의 불가능성을 주장하는 것. 예) ‘에너지 보존 법칙’(law of conservation of energy), 즉 ‘고립계에서 에너지의 총합은 일정하다’(the total energy of an isolated system remains constant)는 것은 ‘영구운동기계를 만들 수는 없다’(A perpetual motion machine is impossible)는 언명으로 표현된다.) 
      • 추세는 초기 조건에 의존하는 것(초기 조건의 가변성)을 간과하고 절대적 추세에 의거하여 역사적 예측이 가능하다고 주장할 수 없다.  
      • 마르크스에 대한 비판. “그 당시의 경제적 제경향의 관찰로부터 예언적 결론을 이끌어내려고 한 마르크스의 정교한 시도는 실패했다.” “예언자로서의 그의 실패의 이유는 전적으로 역사주의 그 자체의 빈곤에, 즉 비록 우리가 오늘 역사적 경향 또는 추세인 것처럼 보이는 것을 관찰한다 할지라도, 그것이 내일도 똑같이 보일 것인가 어떤가는 우리가 알 수 없다고 하는 단순한 사실에 있는 것이다.”
    • 점진적漸進的 사회공학(piece-meal social technology)
      • 사회과학에 있어서도 대규모 예측을 단념하고 그때 그때의 상황에 따라 보편적 법칙을 발견하고 그것을 기초로 하여 예측을 하며, 그것을 사회적 실천에 의해서 테스트해나가는 것. 사회적 예측이 그때 그때의 상황을 무시하고 공학적 예측을 벗어나면 전체론적 유토피아주의에 떨어짐 
      • 점진적 사회공학은 기존 체제의 사회개량을 옹호하는 보수적 이론이라는 비판을 받을 수 있으며, 사회체제의 커다란 전환에 직면했을 때에는 무력한 것이 될 것이다. E. H. Carr는 ⟪역사란 무엇인가?⟫(What is History?)에서 포퍼의 이론을 가리켜, 그것은 “현 정부의 정책을 집행할 권한이 있고, 또 그 정책을 더욱 잘 시행하기 위한 개선안을 제안할 권한도 있으나, 그 정책의 기본적 전제나 궁극적 목적을 문제삼을 수 있는 권한은 없는 영국의 관리의 지위와 같다”고 비난 
    • 문제는 포퍼의 사회공학에 의해서 가능한 진보의 주요원천은 무엇인가 하는 데에 있다. 그것을 포퍼는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인간의 진화에 관한 한, 그 주요원천은... ‘다수인과 의견을 달리하고 자기자신의 길을 갈 수 있는 자유’이다. 전체론적 통제는 인간의 권리의 평등화가 아니라 인간의 정신의 평등화를 초래할 수밖에 없는 만큼, 진보의 종언終焉을 의미할 것이다.” — 이것이 포퍼의 결론 

 

 

오늘은 이석윤 선생님이 쓰신 역자 해설을 마무리를 하겠다. 책 제목이 《역사주의의 빈곤》이다. 그런데 처음에 역사주의에 대해서부터 설명을 해 들어간 게 아니라 과학철학적 문제부터 들어갔다. 얘기를 빙 돌려서 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을 수도 있다. 그런데 역사주의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 얘기를 하려면 일단 시작이 어디서부터 있었는가, 포퍼의 문제의식이 어디에서 시작되었는가, 기원부터 찾아서 설명을 해야 한다. 역사주의가 궁금하면 우리에게 먼저인 것은 역사주의에 대한 궁금증이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처럼 본성상 먼저인 것, 포퍼가 말하는 역사주의는 역사주의 빈곤, 역사주의는 빈약하다는 얘기이다, 역사주의 빈곤이라고 하는 철학의 빈곤인데, 빈곤이라는 말 많이 쓴다. 저는 그렇게 썩 와 닿지 않는 비유라고 생각한다. 역사주의의 형편없음 이러면 훨씬 쉬울 것 같다. 어쨌든 역사주의가 왜 이론적으로 문제가 있는가 하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포퍼는 과학철학적 문제부터 얘기를 한다. 이게 참 좋은 공부를 하는 사람에게는 이게 굉장히 중요한 습관이다. 누가 무언가를 물어보면 즉답을 하지 않고, 지금처럼 포퍼의 역사주의가 무엇인지 누가 저에게 물어보면 역사주의에 대해서 얘기를 하지 않고 포퍼의 탐구의 논리부터 설명을 해 들어간다는 얘기이다. 이게 꼭 이런 철학이론만이 아니라 철학 이론만이 아니라 일상에서도 그렇다. 저는 그 근원부터, 적어도 여기서부터 설명을 해야겠다 하는 게 지나치게 소급되고 많아서 듣는 사람이 힘들까 봐 말을 아예 안 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역사주의라고 하는 것은 여기 이석윤 선생님깨서 써놓으셨다시피 과학 철학자로서는 거의 예외적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사회적 정치적 상황에도 민감했다. 정말 그렇다. 과학철학자 중에 포퍼만큼 이렇게 사회적 정치적 상황에 민감했던 사람은 거의 없다. 그리고 포퍼가 살아갔던 시기가, 요즘 읽고 있는 오스트함멜의 《대변혁》에 나오는 것처럼 '말안장 시대' 또는 '문턱 시대', 그것이 도이치 문학에서는 그 시가를 Goethezeit라고 부른다. 벤담도 죽고 헤겔도 죽고 괴테도 죽고 그런 시대이다. 괴테의 생몰연대가 1749년에서 1832년, 괴테 시대에 대해서는 내일 「라티오의 책들」에서 《파우스트》 들어가기 전에 자세하게 설명을 하겠다. 포퍼도 1차 세계대전 이 시기를 살았던 사람이니까 포퍼의 생애에 대해서 우리가 이제 생각을 해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포퍼는 1902년 사람이니까 괴테 시대는 아닌데 1902년에 태어난 사람이기 때문에 어쨌든 이 사람도 우리가 흔히 말하는 전환기를 살아가는 사람이다. 이때 1902년이라고 하는 게 마침 지금 역사주의라고 하는 것, 마르크스주의와도 아주 깊은 관계가 있다. 포퍼가 이 문제에 직접적으로 대면하게 된 것도 마르크스주의와 비판적으로 대결하면서이다.  이번 주 목요일부터 본격적으로 레셰크 코와코프스키의 《마르크스주의의 주요 흐름》을 통독을 시작을 할 것이다. 공부하다 보면, 이렇게 의도한 건 아닌데 하다 보니까 이렇게 만나게 되는 수가 있다. 마르크스주의와 비판적으로 대결하면서 마르크스주의가 말하는 혁명 이론이 무엇인가를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이들이 과학적 사회주의라고 말을 하더란 말이다.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제시를 하니까, 그 당시에는 너도 나도 과학이라고 하던 시기이긴 했다, 가만히 보니까 포퍼 자신이 생각한 과학 이론에 처음부터 그런 얘기가 나왔다. 과학 이론이 있는데 그것의 과학적 자격, 어떤 때 과학적으로 분류되는가 하는 걸 얘기를 했는데 그게 반증가능성falsifiability이다. 반증가능성falsifiability, 반박가능성refutability 또는 테스트가능성testability.  선생님은 테스트가능성이라고 번역을 하셨는데 검증verification이라는 말은 다른 데서 쓰니까 시험test이라는 말은 또 그렇고 해서 번역이 곤란했다 라는 생각이 든다.   

마르크스주의가 말하는 혁명이론이라고 하는 게 의사과학적Pseudoscience이더라는 것이다.  과학인 척하는 것임을 폭로하고 자신이 생각하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사회이론, 이것을 참된 경험적 사회과학으로 제시하고자 했던 것이다. 포퍼가 처음부터 이를 목표로 해서 과학적 탐구의 논리를 쓴 건 아니다. 하다 보니 이렇게 된 건데 사실은 굉장히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더욱이나 포퍼는 유대인이었고 히틀러의 파시즘, 파시즘과 과학적 사회주의가 조금 다른 건 파시스트들은 그냥 양아치들이다. 자기네들이 진지하게 이론을 이렇게 세워서 그 이론을 현실에 적용해 보겠다 그런 건 아니다. 파시즘은 양아치주의라고 보면 딱 적당하다. 과학적 사회주의는 결과적으로는 정치 체제에 있어서는 전체주의로 귀결된 점이 있지만 시작점은 다르다. 결과만 똑같다고 해서, 그러니까 오늘날에는 파시즘을 열심히 연구해 가지고 뭔가 얻어보려고 하지는 않는다. 그것을 막기 위해서 연구를 하는 것이다. 여튼 점진적 사회공학을 참된 경험적 사회과학으로 제시한다. 마르크스주의가 자기네들이 진정한 의미의 사회과학이다 이렇게 얘기를 하는데 아닌 것으로 보이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걸 비판하기 위해서 생각을 해보고 그러면서 그 핵심이 historicism이라고 생각을 한 것이다. 포퍼가 보기에 혁명이론의 핵심이 역사주의구나 라고 생각을 한 것이다. 

역사주의라고 하는 말은 사실 역사예측주의, 역사법칙주의, 이한구 교수가 《역사법칙주의의 빈곤》이라고 번역을 해서 내놓은 게 있다. 이 사실 이것에 해당하는 용어로 historicism과 historism 이렇게 두 개가 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역사주의historicism과 역사상대주의historism를 구별해서 쓴다.  역사상대주의는 말 그대로 일체의 사회 문화적 현상이 역사적 시대적 조건에 의해 규정된 것이고 따라서 절대적 진리나 가치는 없다는 생각이다. 역사적 상대성이라고 하는 말로 쓸 수 있다. 그런데 사실 도이치어에서는 Historismus가 영어로 번역할 때는 historicism이라고 한다. 도이치어에서는 역사상대주의라고 한다. 다시 말해서 역사상대주의라는 뜻을 가진 도이치어는 없다. 영어의 일반적 용래에 따르면 역사상대주의가 Historismus이다. 어떻게 번역되는가를 따질 거 없이 오늘날에는 historicism이라고 하면 포퍼가 말한 것처럼 번역이 된다. 역사주의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역사적 사건의 과정을 예언할 수 있는 역사의 법칙을 발견했다. 그래서 사실 역사법칙주의라고 하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다. 그러한 역사적 법칙을 발견하는 게 사회과학의 주요한 과제다. 오늘날은 이렇게 얘기하지 않는데 바로 마르크스주의적 사회과학이 그러하다. 그러니까 사회과학도 물리학이나 이런 것과 마찬가지로 경험적 과학이니까 보편적 법칙을 발견해서 그것을 가지고 사회적 사태를 설명하고 예측도 하고 해야 된다. 과학이라고 하는 것은 예측해야 된다 라는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생각하는 과학은 법칙을 발견하는 것이라고 말하는데, 과연 사회에 있어서도 법칙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인가, 자연과학을 본으로 삼아서 법칙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은 난감한 문제이다. 바로 그 지점을 포퍼가 문제 삼고 있는 것이다. 

해설 170 Popper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러한 비판적방법이 철학에 있어서도 가능한가를 문고, 그에 대 한 해답을 비판적태도와 합리적태도와의 동일성 및 비판적방법에 의한 철학과 과학과의 통일가능성에서 찾는다. 그에 의하면 철학적 이론과 과학적 이론을 막론하고 그것이 비판적으로 논의된다는 것이 곧 그 이론의 합리성을 의미한다. “비판적태도, 즉 이론이 개량될 수 있도록 그 약점을 발견할 목적으로 이론을 자유롭게 논의하는 전통이 곧 합리성의 웅도인 것이다." 그리고 모든 합리적 논의란 “문제를 명료하게 진술하고, 그 문제에 대해서 제기된 해답을 비판적으로 합미하는”’ 것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이것은 자연과학의 방법일 분만 아니라 그대로 철학의 방법이기 도 하다. 

해설 171 그러면 Popper가 말하는 역사주의란 무엇인가? 본문에서도 알 수 있듯이 Popper는 historicism과 historism을 술어적으로 구별한다. 후자는 근대의 소위 역사적 상대주의, 즉 일절의 사회적 문화적 현상은 역사적 시대적 조건 의해서 규정된 것이요, 따라서 절대적 정리나 가치는 없다고 하는 사상이다· 그에 반해서 전자는 “역사적 사건의 과정을 예언할 수 있는 역사의 법칙을 발견했다”고 주장하고, 또 그러한 역사적법칙을 발견하는 것이 사회과학의 주요한 과제라고 주장하는 철학적 입장이다. 그리고 이 입장은 그 근원을 캐보면 Herakleitos와 Platon의 철학에까지 거 슬러 올라가며, 특히 Hegel, Comte, Mill, Marx 등의 사상에 있어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전자와 구별하기 위해서는 ‘역사예측주의’ 또는 ’역사법칙주의’라는 역어라도 쓰면 좋을 듯 하나, 역자로서는 새로운 조어에 진중을 기하려는 뜻에서 우선 양자 모두 ‘역사주의’라고 번역해 두었다. 

 

 

자연에 있어서는 제일성齊一性이 성립한다. 자연적 제일성 natural uniformity이라는 말이 한자어인데, 통일성이라고 번역하기는 어렵고 일정한 법칙에 따라 움직여가는 성질을 제일성이라고 말한다. 포퍼가 보기에는 자연에서는 제일성이 성립한다. 그런데 이것 또한 오늘날에는 과학철학자들이 많은 부분 동의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포퍼 당시에는 이게 동의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어쨌든 자연에서는 제일성이 성립하는데 사회에서는 그렇지 않다. 그러므로 사회과학은 물리학에서 본을 받아오기는 하는데 다른 의미의 보편적 법칙, 즉 역사 전체를 포섭하는 법칙, 특히 한 특정한 시기에서 다른 시기로의 이행을 규정하는 역사적 발전의 법칙을 발견해야 된다 라고 주장을 하는 것이다. 이게 마르크스주의에서 왜 강조가 되는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공산주의 사회로 이행하는 법칙을 이 사람들이 얘기를 하고 싶어 하기 때문에 그렇다. 그렇게 해서 불변의 법칙을 만들어 내놓으면 그것에 근거해서 혁명도 일으키고 정치체제도 만들어내면 그 정치 체제가 아주 확고한 사회과학의 법칙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에 정치체제의 견고함과 정통성을 주장할 수 있는, 즉 합법성, 정당성이 아니라 합법성을 주장할 수 있어 버리면, 이건 무적의 독재 정권이 될 수 있다. 그런 목적이 사회과학으로 스며들어서 사회과학을 규정하게 된 것이다. 그렇게 해서 사회학은 이론적 역사학이라는 입론을 세우게 된다. 이게 마르크스주의가 가지고 있는 사회학 개념이다. 레이몽 아롱을 읽으면서도 이런 부분들을 아롱이 지적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아롱이나 칼 포퍼나 이런 사람들의 생각이 굉장히 이론적으로 논박이 된다.  

해설 172 그런데 Popper가 말하는 이러한 역사주의는 한편으로는 자연주의적 이설과 결합하여, 사회과학도 물리학과 마찬가지로 이론적 경험적과 과학이므로, 보편적 법칙을 발견하여 그것에 의해서 사회적 사상을 설명하고. 예측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서 또 한편으로 역사주의의 반자연주의적 이설은 자연에 있어서 자연의 제일성이 성립하듯이 사회에 있어서도 단일한 시대를 넘어선 사회적 제일성이 성립한다고는 할 수 없으므로, 사회과학은 물리학과는 다른 의미의 비판적 법칙, 즉 역사의 전체를 포섭하는 법칙, Popper의 말을 빌린다면 ‘한 시기에서 다른 시기로 이행을 규정하는 역사적 발전의 법칙을 발견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하여 이러한 역사적 발전의 법칙에 의하여 다가오는 미래에 관한 대규모의 예언을 하고 그것을 검사하는 것이 사회학의 임무요, 따라서 ‘사회학은 이론적 역사학이라'고 하는 것이 역사주의자의 근본주장인 것이다. 

 

 

그런데 어떤 점에서 문제가 있는가는 주의해서 봐야 될 필요가 있다. 인간의 비합리적인 편향이 작동하는 부분인데, 생물학에서도 진화가 있다고 말하는데, 항상 우연이라고 하는 것이 있을 수밖에 없다. 자연에는 우연이라는 게 있을 수밖에 없다. uniformity가 어김없는 통일이 아니라, 그러니까 포퍼가 반증가능성을 얘기하는 것도 자연의 세계가 되었건 인간이 살아가고 있는 사회적 세계가 되었건 간에 어김없는 필연성이라는 건 없다. 우연성이라고 하는 것에 항상 노출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생물에 있어서나 사회에 있어서나 그것이 발전해 나가고 전개해 가는 과정에는 일정한 추세 또는 경향이 있을 뿐이지 법칙은 있을 수 없다. 그러니까 그 추세나 경향을 법칙으로는 말해서는 안 된다 하는 것이다. 추세는 법칙과는 다르다. 법칙은 필연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언제 어디서나 예외 없이 우리가 그것을 주장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 설명에 논리학에서 나오는 존재언명과 비존재언명이 있다. 존재언명이라고 하는 것은 간단하게 얘기하자면 무엇이 있다 없다에 관련된 것이다. 예를 들어보면 에너지 보존 법칙은 고립계에서의, 외부로부터 에너지가 더 이상 투입되지 않는 하나의 닫힌 공간이 있다. 고립계isolated system에서 에너지의 총합은 일정하다 그러니까 에너지의 총합은 딱 고정되어 있다는 법칙이다. 그것을 에너지 보존의 법칙이라고 한다. 법칙이라고 하는 것이 생기면 반대말을 만들어낼 수가 있다. 다시 말해서 영구운동기계는 만들 수 없다. 그러니까 그것에 반대되는 말, 즉 중간이 없다. 에너지가 들어가기도 하고 안 들어가기도 한다 그런 게 아니라 모순 관계에 있는 것이다. 그런 것을 법칙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어떤 법칙은 그 법칙의 반대 명제를 세울 수 있는 것을 법칙이라고 한다. 예외가 있을 수 없는 것을 비존재언명이라고 한다. 추세는 가령 철학 선생은 뭔가를 물어보면 근원부터 설명하는 경향이 있다, 대체로 그런 경향이 있다라고 말할 때 '있다'라고 말했는데, 아닌 경우도 있겠지만 대체로 중간이 있다. 어떤 때는 하기도 하고 어떤 때는 안 하기도 하는 것들은 존재언명이라고 얘기를 한다. 모든 철학 선생은 근원부터 설명한다 라는 것은 법칙의 형식을 가지고 설명된 것이다. 그러면 역으로도 성립한다. 근원부터 설명하지 않는 철학 선생은 없다 라고 말할 수 있다. 근원부터 설명하지 않는 철학 선생은 철학 선생이 아니다 라고도 말할 수 있다. 그런 것들은 보편적 언명으로서의 법칙, 즉 법칙은 보편적 언명이다. 보편적 언명이라는 말은 일반적인 것과는 다르다. 그러니까 all과 some이 있을 때 법칙이라고 하는 것은 '모든'이라고 하는 것으로서 표현되는 것을 말한다. 세상의 모든 철학 선생은 근원부터 설명하려고 한다. 그건 추세가 아니라 법칙이다. 그럼 예외가 없고 필연적인 것을 보편적 언명이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추세와 법칙은 다르다. 추세는 존재언명이고 법칙은 보편언명으로서 비존재언명이다 라고 이해를 하면 된다. 그러니 여기서 추세를 법칙으로 환원시켜서 이해하는 것은 섣부른 일반화의 오류라고 말할 수도 있는 것이 생겨나는 것이다. 이것이 이제 역사적 법칙을 말하는 혁명 이론가들 그리고 역사주의자들이 범하는 잘못인 것이다. 

논리적으로 분석해 보면 그것이 하나 있고 두 번째로는 어떤 추세라고 하는 것은 초기 조건에 의존하는 것, 즉 처음에 그것이 어떤 조건으로 시작되었는가에 사실 달려 있다. 이것을 조금 정리해서 말할 때 초기 조건의 가변성이라고 한다. 초기 조건의 가변성을 간과하고 그게 절대적 추세에 의거하여 역사적 예측이 가능하다고 하려면 초기 조건이 언제 어디서나 동일하다는 것을 전제해야 되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 그게 바로 문제이다. 그러니까 존 스튜어트 밀도 역사주의자라고 포퍼는 보는데, 밀은 논리학도 썼다. 그런데 논리적 분석을 철저하게 하지 못한 탓에 모든 추세는 초기 조건에 달려 있다. 즉 무조건적 추세, 절대적 추세 이런 것들을 함부로 말하게 됨으로써 초기 조건이 동일하다고 전제하고서 곧바로 그것으로부터 역사적 예측을 이끌어낸 잘못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니까 포퍼의 역사주의는 꼭 마르크스만을 겨냥한 것은 아니라는 것은 이처럼 논리적인 차원에서나 가능한 것들을 현실세계 차원에서도 가능한 것으로 본 잘못이 있다. 이것이 바로 논리적으로 보면 가장 심각한 문제의 하나가 존재와 당위의 또는 존재와 예측의, 존재언명과 비존재언명의 혼동이라고 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이건 굉장히 초보적인 오류이다. 철학과 1학년 전공 기초 과목이 논리학인데, 논리학을 공부를 하고 나면 누구나 저지르지 않는 것이다. 논리학organon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쉽게 빠져드는 인지적 편향에서 빠져나올 수 있게 해주는 무기이다. 존재언명과 비존재언명. 존재언명으로부터 비존재언명으로 갈 때는 항상 조심해야 되는 게 있다. 그러니까 동일성 그다음에 동일성 명제, 모순 명제 이런 것들을 조심해야 되는데 사실 포퍼가 《역사주의의 빈곤》에서 자기가 반대하는 사람들을 논파하는 게 그렇게 어렵지 않다. 그러니까 이 책이 그렇게 어려운 책이 아니다. 시대를 잘 탄 책이다. 너무나도 당연한 논리학의 아주 기초를 가지고 쳐부순다. 과학적 과학의 법칙이라는 게 무엇인가, 반증가능해야 된다. 반대 증거를 내놓을 수 있으면 과학의 법칙이다. 그러니까 항상 불확실한 것이다.  

두 번째로 일정한 조건을 전제하고 예측 가능한 것을 내놓는 것들이다. 그래서 포퍼는 마르크스 당시의 경제적 제경향으로부터 여러 경향을 관찰해서 예언적 결론을 이끌어내려고 한 정교한 시도는 실패했다고 말한다.  그게 실패한 이유는 역사주의 그 자체의 빈곤, 그러니까 역사적 경향 또는 추세인 것처럼 보이는 것을 관찰해도 그것이 내일도 똑같이 그럴 것이라는 우리가 알 수 없다는 것다 라는 아주 단순한 사실에 있는 것이다.  이렇게 너무나도 당연해 보이는 비판을 한 다음에 포퍼가 내놓는 게 뭐냐 하면 점진적 사회공학piece-meal social technology을 얘기한다. 사회과학이라고 하는 것을 이론적 역사학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서 보편적 법칙을 발견하고, 이때의 보편적이라고 하는 말은 이제 비존재언명의 보편적 법칙이 아니라 일반론이다. 일반적 법칙을 발견하고 그것을 기초로 해서 예측을 하고 그다음에 테스트해 나가는 것이다. 그게 안 된다고 하면 전체론적 유토피아주의에 빠져들게 된다는 것이다. 아주 간단하게 얘기가 진행이 된다. 

해설 173 Popper는 그처럼 역사주의에 대해서 역사적 법칙이나 추세에 의거한 역사적 장기예측의 가능을 거부하는 한편, 사회과학 방법론에 관한 반자연주의적 이설을 비판하고, 자신의 점차적 사회주의 (piece-meal social technology)을 제기한다. 이것은 그가 『탐구의 논리』에서 이미 확립한 과학적방법, 비판적방법과 다른 것이 아니다. 사회과학에 있어서도 우리는 단념하고, 그때 그때의 상황에 따라 보편적 법칙을 발견하고, 그것을 기초로 하여 예측하며, 그것을 사회적 실천에 의해서 테스트해나가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에 대해서《역사란 무엇인가》를 읽어보면 에드워드 카가 딱 한 방 쳐놓은 게 있다. 에드워드 카와 칼 포퍼 둘이 서로 논박을 주고받은 게 있다. 점진적인 사회공학의 입장에 서버리면 비합리적인 결단과 같은 것들은 결코 나올 수가 없다. 역사라고 하는 것이 한 번 탁 넘어가려면 비합리주의로의 탈선 있어야 되는 것이다.  그런데 포퍼의 이론을 가리켜서 "현 정부의 정책을 집행할 권한이 있고, 또 그 정책을 더욱 잘 시행하기 위한 개선안을 제안할 권한도 있으나, 그 정책의 기본적 전제나 궁극적 목적을 문제삼을 수 있는 권한은 없는 영국의 관리의 지위와 같다"고 말했는데 이렇게 말한 것은 굉장히 적절한 비유이다.  에드워드 카가 이렇게 비난을 하는데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런데 포퍼의 얘기도 틀린 게 아니고 에드워드카의 얘기도 틀린 건 아니다. 두 사람 얘기 다 맞다. 포퍼도 이걸 모르고 있는 사람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포퍼는 점진적인 사회공학에 의해서 가능한 또는 점진적 사회 실험에 의해서 가능한 진보의 원천이 어디 있는가의 문제를 말한다. 점진적 사회공학을 한다고 하면, 사회가 진보하는가를 말할 때 포퍼도 제일 원리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는데, 그것은 '다수인과 의견을 달리하고 자기자신의 길을 갈 수 있는 자유'가 주요 원천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포퍼는 리버럴은 맞다. 리버럴은 맞는데, 자기 자신의 길을 갈 수 있는 자유라고 하는 것은 그 어떤 것에 의해서도 증명될 수 없는 제1전제이다. 포퍼는 여기서 출발한다. 전체론적 통제라고 하는 것, 전체주의 국가, 여기서는 정신의 평등화를 추구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끊임없이 나치 체제에서는 교육을 한다. 정신의 평등화는 사람을 마모시킨다. 아주 지겹도록, 귀에서 피가 나도록 거기다 집어넣을 수 있는 그런 장치들을 많이 개발을 한다. 전체론적 통제는 인간 권리의 평등화가 아니라 정신의 평등화를 초래할 수밖에 없는 만큼 진보의 종언을 의미할 것이다 이렇게 얘기를 하고 있다. 

 

해설 174 오히려 문제는 Popper의 점차적 사회에 의해서 가능한 진보의 주요원천이 무엇인가 하는 데에 있다· 그것을 Popper는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인간의 진화에 관한 한, 그 주요원천은... ‘다수과 의견을 달리하고 자기자신의 길을 갈 수 있는 자유’이다. 전체론적 통제는 인간의 권리의 평등화가 아니라 인간의 정신의 평등화를 초래할 수밖에 없는 만큼, 진보의 종언終焉을 의미할 것이다.” — 이것이 곧 Popper의 결론이기도 하다. 

이제 역사 해설을 읽었으니까 이제 한번 본격적으로 본문을 읽어보려고 한다. 꽤나 얇은 책이지만 이런 식으로 차분차분하게 읽다 보면 상반기 안에 다 읽으려고 노력을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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