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갑, 김병준, 박한제, 이근명, 김형종: 아틀라스 중국사(개정증보판)

 

아틀라스 중국사 - 10점
박한제 외 지음/사계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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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판 서문

고대
중세
근세 전기
근세 후기
근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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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초기 국가 단계로의 발전
17 치수에 성공한 우禹가 산서성 남부, 하남성 중서부 지역을 중심으로 한 중원 지역에 하夏 왕조를 세웠다.
17 대규모 성벽이나 문자가 확인되지 않아 그것이 과연 하의 것인지는 논의의 여지가 남아 있지만, 기원전 2000년 이후가 되면 이 지역에 초기 국가가 존재했음을 보여주는 각종 지표가 분명히 나타난다. 


상과 주변의 청동기 문명들

18 상 왕은 중요한 일이건 작은 일이건 모두 점을 쳐서 신의 뜻을 물었고, 거의 일 년 내내내 신에게 융숭한 제사를 바쳤다.
18 농사를 지어 수확한 곡식은 물론이고 목축과 수렵을 통해 얻은 다양한 짐승이 제사에 바치는 희생물로 쓰였다. 잡아온 포로를 재물로 삼기도 했다. 
19 점을 쳐야 할 상황이 되면, 정인貞人이라고 불리는 점쟁이가 갑골을 가져와 미리 파놓은 홈에 불을 지펴서 열을 가한다. 그러면 파인 홈을 따라 반대편으로 ‘복卜’자 형태의 균열이 생겨난다. 
19 최고 신 제帝에게 바치는 제사에서부터, 산과 강 같은 자연신에 대한 제사, 그리고 조상신에게 바치는 제사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종류의 제사가 거의 일 년 내내 거행되었으며, 매번 엄청난 희생물이 봉헌되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서주의 봉건제

20 상과 관련해서는 지극히 적은 문헌 기록과 갑골문만이 남아 있지만, 서주 시기는 청동기에 새겨진 명문〔金文〕이 다량으로 확인될 뿐 아니 라 『상서』, 『주례』 등과 같은 유가 문헌 속에서도 관련 기록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20 우선 낙읍洛邑을 건설하여 동방 통치를 위한 근거지를 마련하고, 그런 뒤 본격적인 봉건제를 실시하였다. 봉건제란 왕이 제후에게 땅과 백성에 대한 통치를 일임하는 대신, 제후는 왕에게 경제적 공납과 군사적 보호의 의무를 지는 통치제도를 말한다. 주는 자신의 종친들을 수도 가까이에 분봉하여 왕실을 보호하는 울타리 역할을 하도록 한 반면, 공신들과 이전 왕조의 후예들은 멀리 옛 상의 영역 곳곳에 분봉하였다. 
20 봉건제는 이념적으로 주 왕이 모든 토지와 백성을 소유하고 있다는 이른바 왕토 사상에서 출발하지만, 실질적으로는 분봉된 제후가 해당 지역으로 가서 그곳을 점령한 뒤 점차 세력을 확대해가는 군사적 식민화 과정이었다.  
21 서주의 봉건제는 왕과 제후가 혈연에 기초한 종 법宗法 관계로 맺어져 있었기 때문에, 적어도 초기에는 제후에 대한 왕의 권한이 상대적으로 강한 편이었다. 
21 각 계층은 자신의 신분에 맞는 예악 제도를 사용해야 하는 엄격한 등급 제도가 강조되었다. 그 밖에 『주례(周禮)』에 따르면 왕실 내부의 행정 업무를 담당하는 관료들의 체계도 정비되었다. 

춘추 시대 패자의 회맹 질서
22 서주의 봉건 제도는 혈연적 종법 관계와 결합되어 있었던 덕분에 초기에는 비교적 결속력이 강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혈연적으로 소원해지자 통치 체제 전반에 커다란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22 서주는 유왕 때 왕위를 둘러싼 다툼 끝에 멸망하고, 수도를 동쪽 낙읍으로 옮겼는데 그 이후를 동주라고 부른다. 동주 시기의 전반에 해당되는 시기가 춘추 시기인데, 그 명칭은 공자의 저작으로 전해지는 『춘추』라는 책 제목에서 유래한다.
22 이 시기에 들어보면 주 왕의 권위가 땅에 떨어져 더 이상 주 왕을 중심으로 한 봉건적 질서는 실질적 의미를 갖지 못하 게 된다. 이를 대신했던 것이 힘에 기반한 패자覇者의 회맹會盟 질서였다. 회맹이란 제후들  중에서 가장 강한 힘을 갖고 있는 패자가 다른 여러 제후들을 한곳에 모이게 하고, 그곳에서 맹약을 맺는 것을 말한다. 
22 제 환공이나 진 문공과 같은 춘추 시대 초기의 패자들은 주 왕의 명목상의 권위를 빌리기 위해 이민 족의 침입으로부터 주 왕실을 보호한다는 명분[尊王攘夷]과, 주 왕이 봉건해준 이상 약소 제후국이라도 함 부로 병합해서는 안 되며 이를 존속시켜야 한다는 명분[繼絕存亡]을 내걸었다. 
22 오랑캐라고 치부하였던 남쪽의 초∙오∙ 월이 패자의 자리에 오르게 되자 존왕양이의 명분도 점차 사라지게 되었고, 또 각 제후국은 계절존망이라는 명분을 버리고 군사력을 총동원해 인근의 약소국을 멸망시킨 뒤 그곳에 직접 현을 설치하여 자국의 영역을 확대하기에 이른다. 

전국 시대 각국의 개혁
24 춘추 시대가 끝나고 전국 시대가 시작되는 기점은 주로 진晉이 한韓‧위魏‧조趙의 세 나라로 분열되는 시기로 잡는다. 서주의 왕으로부터 직접 제후로 봉건된 제후국 진이 내부의 하극상으 로 말미암아 무너졌다는 것은 명목상으로나마 서주적 봉건 질서가 남아 있던 시대가 마침내 종언을 고하 고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기 때문이다.
24 전국 시대 군주들은 자신들의 권력을 극대화하고 춘추 시대와 같은 하극상이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군주를 중심으로 지배 체제를 재편하여야 했다. 
24 모든 국가에서 개혁이 이루어졌지만, 가장 성공적이었던 것으로 평가받는 것은 진秦 효공 때 상앙이 진행한 개혁이었다(상앙 변법). 이 개혁의 방향은 먼저 옛 질서와 공동체를 약화시키는 데에 집중되었다. 

전국 시대 전쟁과 외교
26 서주의 봉건 질서가 무너지고 그 대신 힘에 의지하는 패자에 의해 정치 질서가 주도되면서 전쟁의 중요성 은 더욱 커졌다. 
26 전국 시대 각 나라에서 진행되었던 개혁도 전쟁에 이기기 위해 필요한 재정과 병사를 확보하려는 정책이었다고 볼 수 있다. 
26 북쪽에 위치한 유목 민족과의 전투가 많아지면서 그들의 기병술을 받아들였다.
26 이렇게 전쟁 형태가 달라지면서 전쟁을 담당하는 병사들의 출신도 크게 바뀌었다. 상주 시기에서 춘 추 시기까지 전쟁은 지배 계층에 속하는 국인들 위주로 치러졌다. 
27 일반 농민들을 징집하여 전쟁에 동원하였다. 전국 시대 개혁 과정에서 구공동체적 질서를 파괴하고 그 속의 소농민을 국가가 직접 파악하려고 했던 것도 이러한 병사들의 징집을 위해서였다. 

춘추전국 시대 제자백가 사상
28 춘추전국 시대에는 정치적으로 봉건 질서가 무너지고 사회적으로는 옛 씨족 공동체의 질서가 파괴되어가고 있었다. 엄격한 질서 구분이 사라진 만큼 신분 간의 이동도 자유로웠다. 
28 자신의 부국강병을 도와줄 수 있는 능력 있는 인재들이 많이 필요하였다. 이러한 국가적 수요가 사회적 신분 질서의 동요와 맞물리면서, 사회 구성원의 대대적인 신분 상승 욕구에 부응할 새로운 새로운 지식의 형태가 요구되었다. 

중세

수의 남북조 통일
74 수는 짧은 통일 왕조였지만 후세에 남긴 흔적은 뚜렷하다. 군을 없애 주∙현 2급제로 함으로써 관료 수를 줄이고, 지방관이 가졌던 속료 임명권을 중앙 정부에 귀속시킴으로써 중앙 집권을 강화했다. 수가 정비∙실시한 균전제와 조용조제, 그리고 부병제 등 율령 제도는 당 왕조에 그대로 계승되었다. 남북조 시대의 관리 등용 제도인 구품관인법 대신 호족국가 북위에서 일기 시작한 현재주의賢才主義 이념에 입각하여 창안된 과거 제도를 실시한 것은 커다란 업적이다. 
75 대운하 개착의 실제 목적은 위진남북조 시대 진행된 남방의 경제 개발 성과를 북방 수도 지역으로 흡 하기 위한 것이었다. 

수당 세계 제국과 동아시아
76 문화적 보편성과 정치적 자기 완결성을 가지는 하나의 지역 단위를 ‘세계’라고 한다. 동아시아 세계는 한자∙유교∙중국화한 불교∙율령 등을 공통 요소로 하는 문화권인 동시에 조공 책봉 체제에 의해 서로 연결되는 정치권이었다. 이런 의미의 동아시아 세계는 전한 초에 시작되었다. 민족의 자립과 각 국가 간의 독자적 이해를 전제하면서 서로를 제약하는 관계의 틀 속에서 상호 접촉과 교류의 밀접성을 ‘세계’ 성립의 기본 요건으로 본다면, 그것은 당연히 수당대에 시작되었다. 
77 이민족의 중요 집결지는 수도 장안이었지만, 양주∙광주 등 무역항과 실크로드 연변의 오아시스 도시가 그 매개 역할을 했다. 
77 수당 제국의 대외 민족 정책은 세계 제국의 본 모습이었다.

율령 체제의 전개
78 수 왕조 창설 이후부터 당 중기 안사의 난까지 175년 (581~755)간은 법제와 관제가 치밀하게 완비되던 시대였다. 수당 왕조의 정치∙경제∙사회는 율(형률)∙령(행 정법)∙격(율령의 보충 규정)∙식(시행 세칙)의 형식으로 공포된 법 체계에 의해 규정되고 운영되었다. 

정관의 치세
80 고조의 둘째 아들이 었던 그는 장안성 궁성의 북문인 현무문에 심복을 매복시켜 황태자인 형 건성建成과 동생 제왕(제(齊)나라 왕으로 봉(封)함) 원길元吉을 살해한 후 아버지로부터 양위를 받아 29세의 나이로 황제가 되었다. 
80 치세 23년간 신하들과 나눈 문답을 기록한 『정관정요♛觀政要』는 후세 제왕학帝王學의 전범이 되었다. 
80 태종은 후세 역사 전개에 커다란 영향을 준 세 가지 조처를 단행했다. 첫째, 『오경정의五經正義』의 편찬이다. 『오경정의』는 남북조 시대에 남과 북에서 각각 진행된 경서 해석에 대한 차이를 통일하여 혼란을 극복하고 바른 학문 체계를 정립한다는 명분으로 편찬한 것이지만, 사실은 경서 해석을 그의 정치 노선에 맞게 통일한 것이었다. 
81 서북방 여러 민족으로부터 ‘천가한天可汗’의 칭호를 얻었다. 
81 ‘호와 월이 일가[胡越一家]’ 라는 그의 개명된 종족관이 전제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장안의 사계
84 장안성은 당시 세계 최대 규모를 자랑했을뿐 아니라 가장 전형적인 계획 도시였다
84 외국인 출신 공무원을 뽑기 위한 과거인 빈공과를 두었고, 무인이 되는 길을 활짝 열어두고 있었다.
84 법률도 내∙ 외국인에게 평등했다. 근대 서구법 체계에서 비로소 등장하는 속지법주의∙속인법주의가 채택된 시대가 바 로 당대였다. 

수당의 문화
92 당대를 대표하는 예술은 시이다. 당시는 그 성격에 따 라 초당∙성당∙중당∙만당 4기로 구분된다. 초당의 시는 남조 귀족 사회의 영향을 받아 대구와 음조 등 형식미를 중시했다. 자신의 사상 과 감정을 표현하는 시는 성당이 되어서야 나온다. 시성詩聖으로 칭송되는 두보와 시선詩仙으로 알려진 이백이 이 시기의 시인이다. 중당의 대표적인 시인은 백거이이다.  
92 유∙불∙도가 병립했던 수당은 위진남북조를 이어 다종교 시대라 할 수 있다. 

황제∙가한국과 동아시아 세계
94 고종과 측천무후의 합장묘인 건릉 앞에 나열된 ‘번신’들의 석상은 당 왕조와 서북 유목 지역 군장과의 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94 흉노 선우의 통할하에 있는 ‘활을 당기는 사람[引弓之民]’과 그 땅은, 장성 안 중원 황제[朕]의 통치하 에서 ‘관을 쓰고 혁대를 두르는 사람[冠帶之室]’과 그 땅과는 달리 인식되었다. 
94 유목 민족에게 약탈 대상 지역이었던 중원은 이제 점유∙경영할 땅으로 바뀌었다. 순수한 유목 왕조로 일관했던 흉노와는 달리 장성 밖에 있던 유연도 그러하였다. 

근현대

중화민족론과 20세기 중국
206 청은 중국 본토뿐만 아니라 만주⋅몽골⋅신강⋅티베트까지 정복하여 그곳에 거주하는 다양한 이민족들을 포함한 거대한 다민족 제국을 건설하였다. 
206 반명 청조 타도가 가져올 혼란과 위기를 염려한 개혁파는 한족과 만주족 이외의 모든 민족까지 포함하는 '대민족주의'에 기초한 입헌 군주제를 제창하였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한족과 기타 이민족을 모두 포괄하는 ‘중화민족’ 개념이 탄생하였다. 
207 종래 ‘실패한 혁명’으로 평가받아온 신해혁명은 이러한 영토의 확보⋅유지라는 점에서는 큰 성공을 거두었다. 20세기 초에 무너지는 세계 각지의 제국 가운데 원래의 영토를 유지하면서 단일한 국민국가로 전환한 사례는 중화민국이 유일하다.
207 1949년에 성립된 중화인민공화국에서도 이 점은 마찬가지였다. 중국공산당은 소련으로부터 받아들인 소수 민족의 자결과 연방제를 포기하고 그 자치만을 허용하는 것으로 방향을 전환하였다. 건국 이후 중국공산당은 국내의 각 민족을 한족과 55개의 ‘소수 민족’으로 이루어진 56개 민족으로 규정하고, 이들을 중화민족, 중화민족의 대가정으로 포섭했다. 중화인민공화국 영 토 내에 거주하는 모든 민족은 상위개념인 하나의 ‘중화민족’을 이루고 있다고 가정하는 정치적 개념으로 중화민족론이 재탄생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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