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돌프 불트만: 공관복음서 전승사
- 책 밑줄긋기/책 2023-25
- 2025. 1. 6.
[POD] 공관복음서 전승사 - 루돌프 불트만/대한기독교서회 |
한국어판을 위하여
머리말
과제와 방법
I. 예수 말의 전승
II. 설화 자료의 전승
III. 전승 자료의 편집
결어
복음 귀절 색인
내용색인
역자후기
455 공관서를 성립시킨 동기는 분명하다. 전승자료의 수집은 팔레스틴 초대교회에서 시작되었다. 변호와 논박은 아포프테그마적 부분의 수집과 작성을 유도했다. 교화의 필요성과 교회 안에서의 예언자적 영의 활력에 의해 예언자적, 묵시문학적 주의 말들을 전하는 일과 작성하고 수집하는 일이 생겼다. 주의 말들의 좀 더 계속된 수집은 생활 계율과 교회 규율의 필요성에서 생겼다. 또 예수에 관한 사화들─전기적 아포프테그마 및 이적 사화와 그밖의 것들─을 교회에서 전하고 이야기한 것은 극히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가령 이적 사화같은 것이 변호와 선전을 위해 메시야 증명으로 사용된 것이 확실한 만큼 어떤 특수한 관심을 주도적인 동인으로 간주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목적과 필요성 만을 묻는다는 것 자체가 이미 옳지 않은 일이다. 도대체 정신적 소유는 특수한 목적 없이도 객관화되기 때문이다.
하여간 교회는 새로운 문학 형태를 든 것이 아니라, 유대교에서 장구한 세월 동안 형성된, ─주의 말들을 문제하는 한 ─ 예수 자신도 사용한 전승형식을 받아들였다. 그런 형식들이 이미 있었다는 것은 확실히 어느 정도 고정된 전승의 비교적 빠른 고착을 가능케 했을 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서의 전형은 아직 만들어지지 않고 단지 준비되어 있었을 뿐이다. 이러한 방법으로는 여지 개체 부분들의 전승만이 이루어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단편들이 결국 수집되고 문서적으로 확정되어 이 때 물론 편집이 기초가 되었다 해도 ─ Q의 어록 자료의 경우가 그리했고, 마가가 이용한 아포프테그마와 이적 사화의 비교적 짧은 수집물의 경우에서 그렇게 추론되는 바와 같이 ─ 그것은 여시 배열과 종합하는 일뿐이었을 것이다. 이런 수집물들은 랍비 전승의 수집물들에서 그 유사형을 볼 수 있는데 랍비전승에도 유기적 통일성은 없이 단편적으로 전승 자료들이 나열되어 있다. 물론 랍비의 수집물둘과 예수의 전승의 수집물은 후자에 서로 다론 권위의 말들이 수록되어 있지 않다는 이유에서가 아니라 오히려 후자가 예수의 전승을 독립시켰다는 점에서 처음부터 구별되어야 한다. 이렇게 복음서가 준비된 것은 의심한바 없지만 그러나 아직 그것이 만들어진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복음서를 처음으로 구성한 생각 즉 어떤 주도적 사상에 의해 예수의 생애를 통일적으로 연결시켜 서술하리라는 생각은 분명히 팔레스틴 교회와는 거리가 먼 것이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이 종말적 공동체의 성격에 의해 만들어진 像 뿐 아니라 우리의 가장 옛 복음서인 마가의 분석 결과에도 일치한다.
복음서의 전형은 마가에서 처음으로 나타나는 데 그가 이것을 만들었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나 그의 자료 중의 어떤 것도 복음서라고 할 만한 것은 없다. 마가와 같은 시대에 혹은 그 전에 복음서라고 분리워질 만한 작품을 썼지만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 작품의 저가가 전혀 없으리라고는 물론 단정할 수 없다. 그러나 없었으리라는 가능성이 더 크다. 왜냐하면 마태와 누가에도 그러 작품이 이용된 일이 없고 이 둘은 마가의 구조를 토대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하간 복음서는 헬레니즘 교회의 작품이다. 그러므로 그 성립은 두 원동력에 근거하고 있다: ① 헬레니즘 교회에 의한 팔레스틴 전승의 전수 ② 전승 자료를 복음서로 형성하게 한 헬레니즘 교회 내의 새로운 동기.
460 끝으로 복음서의 문학형식은 묵시 문학에서 유래했다는 소멘의 견해도 내게는 옳은 것 같지 않다. 그에 의하면 유대 묵시문학에서 그의 종말 예언의 정당성의 증거로 미태형의 역사 설화를 종말 예언에 앞세운 것처럼, 장차 올 메시야로서의 기독교적 예수에 대한 예언을 위해 증거로서 그의 생애를 예언의 이미 성취된 일부로 전했으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 전승에는 예수 생애가 미래형으로 전해진 흔적도 없고 오히려 점차로 ─ 특히 수난에서 ─ 그것을 예언의 성취로 보게 되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묵시문학에서 종말에 선행하는 역사도 "이 세대" 및 이 세대에서 고난을 당하는 백성의 역사이지 메시야의 역사는 아니다. 뿐만 아니라 메시야를 예언의 대상으로 생각했다면 마가와 마태, 누가의 경우처럼 메시야는 예언의 주체로 등장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나는 공관복음서 기자들이 종말의 전망으로 그들의 책을 끝맺지 않은 것을 지나치게 강조하려는 것은 아니다, 혹시 상실된 마가의 결어 부분이 그러한 전망으로 끝났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걱언 자료인 Q는 에티오피아 에녹서의 생활 계율과 같은 묵시문헌이나 디다헤의 유사형으로 볼 수 있다. Q는 이들과 같이 생활 계율과 종말론적 전망으로 끝난 것이 확실하다. 그러나 나는 이런 유사형 이 복음서의 전형에 유사하다고는 보지 않는다.
461 우리가 공관복음서의 개체 자료를 이해하기 위해 유사형을 크게 필요로 하지만 전체로서의 복음서를 이해하는 데는 필요로 하지 않는다. 가명 앞에 소개된 유사형들은 복음서의 고유성만을 아주 분명하게 부각시켜줄 뿐이다. 복음서는 여러 상이한 동기에 의해 자란 전승에 있는 내재적 발전력과 헬레니즘적 기독교의 그리스도 예배 및 그리스도 신화에서 자랐다. 다시 말해서 복음서는 기독교의 독창적인 작품이다. 복음서를 본래적인 문학의 한종류로 평가할 수 있을까? 나는 문학의 한 종류라는 개념은 그것 자체가 독자척으로 나타나는 그 역사에서만 얻어진다고 생각한다. 오직 역사만이 어떤 문학 작품의 형태가 우연한 산물이 아니라 발전 가능한 형태인지, 즉 독자적 삶을 가진 것인지를 증명해 주기 때문이다. 공관복음서들에서는 문학 형식은 그 자체로서의 독자적 삶을 가지지 못한다. 이 글들은 전적으로 기독교의 신앙과 예배에 사용되는 것으로만 존립한다. 우리가 의경 복음서에서 알 수 있는 것도 이것과 다른 것은 아니다. 이들은 단지 전설에 의해 다시 개작, 부연되었을 따름이다. 불은 영지주의적 복음서는 다를 수 있지만 지금 남아있는 것들은 판단을 불허한다. 복음서의 문학사가 어떻게 이루어져 갈 수 있었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은 요한복음서뿐이다. 요한복음서 저자들은 공관복음서 저자들이 만든 전형을 발전 가능한 문학 형식으로 파악했는데 그 형식은 그들의 논쟁과 계시 전달을 위한 도구로 사용되었다. 아니, 그들은 이 형식에 제약을 받으면서 그것을 이용해야만 했다. 이렇게 보면 복음서의 형식이 정신적인 내용에 형태를 줄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을 발전시킬 수 있는 복음서의 문학사를 이룰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되지 못한 이유는 이 이상의 복음서 서술을 막는 네 복음서의 정경화에 있었다. 그러므로 복음서를 한 문학 형태로 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복음서는 결국 교리사와 예배사의 산문인 것이다. 잘해야 근세의 예수전에서 한 문학 형대로서의 복음서의 역사를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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