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셰익스피어의 기억
- 책 밑줄긋기/책 2023-25
- 2025. 1. 19.
셰익스피어의 기억 -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황병하 옮김/민음사 |
1부 모래의 책
타자
울리카
의회
더 많은 것들이 있다
<30> 교파
은혜의 밤
거울과 가면
운드르
지친 자의 유토피아
매수
아벨리노 아레돈도
원반
모래의 책
후기
2부 셰익스피어의 기억
1983녀 8월 25일
파란 호랑이들
빠라셀소의 장미
셰익스피어의 기억
작품 해설
작가 연보
작품 연보
모래의 책
138 나는 〈모래의 책〉을 위클리프 성경을 빼버려 남은 공간에 보관할까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마침내 그것을 몇 권이 빠져 있는 『천일야화』 전집 뒤에 숨겨놓기로 마음을 먹었다. 나는 침상에 드러누웠지만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새벽 서너 시경 나는 불을 밝히고야 말았다. 나는 그 불가능한 책을 찾아 책장들을 넘겨보았다. 나는 한 페이지에 가면 하나가 새겨져 있는 것을 보았다. 페이지의 위쪽 구석에는 지금은 기억나지 않는 9제곱수로 된 페이지 번호가 찍혀 있었다.
나는 내 보물을 그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았다. 그것을 소유하게 된 행운에는 그것을 도둑맞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그리고 이어 그것이 정말로 무한한 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구심이 뒤를 이었다. 이 두 가지 우려는 나의 오래된 염세주의적 성향을 강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내게는 친구들이 얼마 남아 있지 않았다. 나는 심지어 그들조차 만나지 않게 되었다. 그 책의 수인이 된 나는 거의 밖에조차 나가지 않았다. 나는 돋보기를 가지고 닳아빠진 책등과 표지를 살펴본 후 그 책에 그 어떤 종류의 인위적 장치도 들어 있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다. 나는 그 작은 삽화가 매 2천 페이지의 간격으로 들어 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다. 나는 그것들을 알파벳 순서로 공책에 적어넣기 시작했다. 그 공책이 목록으로 가득 차기에는 그다지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똑같은 삽화가 되풀이되어 나타나는 경우는 절대 없었다. 밤에, 아주 가끔 불면의 끝에 오는 휴식 속에서 나는 그 책의 꿈을 꾸곤 했다.
여름이 왔다가 갔다. 나는 그 책이 기괴한 물건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어쨌거나 그것이 눈으로 그것을 보고, 열 손가락으로 그것을 만져보고 있는 나 또한 그것만큼이나 기괴스럽다는 것을 깨닫도록 해준 것은 다행이었다. 나는 마침내 그것이 악몽의 물체, 현실을 손상시키고 썩게 만드는 물건이라는 느낌에 이르게 되었다.
나는 불 속에 던져버릴까도 생각했다. 그러나 무한한 책의 소각은 똑같이 무한한 시간이 걸려 지구를 연기로 질식시켜 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히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는 나뭇잎을 숨기기 위한 가장 적합한 장소는 숲이라는 구절을 읽었던 기억이 났다. 나는 은퇴하기 전 90 만 권의 책이 소장되어 있는 국립도서관에서 일했다. 따라서 나는 입구 오른쪽에 신문과 지도를 보관해 놓는 지하실로 뚫려 있는 굽은 층계가 있다는 것을 안다. 나는 축축한 서가 속에서 〈모래의 책〉을 잃어버리기 위해 사서들이 한눈을 팔고 있는 틈을 이용했다. 나는 출입구로부터 어느 높이, 어느 정도의 거리에 그 책을 두었는지 기억하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나는 약간의 안도감을 느꼈다. 그러나 나는 결코 국립도서관이 자리잡고 있는 멕시코 가에 결코 가고 싶은 마음이 없다.
셰익스피어의 기억
189 누군가가 백과사전을 구입한다고 해서 그가 모든 행, 모든 단락, 모든 페이지, 모든 삽화를 다 얻게 되는 것은 아니다. 그는 단지 그러한 것들 중 어떤 것을 알게 될 가능성만을 얻게 되는 것이다. 만일 그것이 항목들을 알파벳 순서에 따라 정리해 놓은 구체적이면서 상대적으로 간단한 어떤 실체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면 마치 죽은 자의 마술적 기억과 같은 추상적이고 변하기 쉽고 〈물결치고 다변적인〉 어떤 실체에서 또한 일어나지 말라는 법이 어디 있는가?
아무도 한 순간에 자신의 과거 전체를 회상할 수 없다. 내가 아는 한 셰익스피어도 그의 부분적 상속인인 나에게도 그러한 선물은 주어지지 않았다. 인간의 기억은 종합이 아니다. 그것은 무규정적인 가능성들의 혼돈이다. 내가 잘못 알고 있지 않는 한 성 아구스틴은 기억의 궁전들과 동굴들에 대해 언급한다. 두번째 비유가 보다 적합하다. 그 동굴들 속으로 나는 들어갔다.
마치 우리들의 것처럼 셰익스피어의 기억은 그 스스로에 의해 자발적으로 배척한 어둠의 지역들을 그 안에 가지고 있다. 나는 조금은 흥분한 채, 벤 존슨이 셰익스피어로 하여금 라틴과 그리스의 6 보격 시를 읊게 했고, 증오 ─ 셰익스피어에 대한 그의 증오 ─ 는 늘 동료들의 너털웃음 속에서 상당히 흩어져 버리곤 했다는 것을 기억했다.
나는 인류가 공통적으로 경험해 깨닫고 있는 운명과 어둠의 상태들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학문에 묻혀 살았던 긴 고독은 그것을 의식하지 못했던 나로 하여금 순순히 그 기적을 받아들이도록 만들어 놓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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