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시다 유타카: 아시아 태평양전쟁 ━ 일본 근현대사 6
- 책 밑줄긋기/책 2012-22
- 2017. 11. 22.
아시아.태평양전쟁 - 요시다 유타카 지음, 최혜주 옮김/어문학사 |
머리말-7
제1장 개전에의 길 17
제2장 초기작전의 성공과 도조 내각 69
제3장 전국의 전환 103
제4장 총력전의 수행과 일본 사회 153
제5장 패전 199
맺음말-251
저자 후기 258
역자 후기 260
연표 263
참고문헌 265
색인 2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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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12 이 책에서는 1941년 12월에 시작되어 1945년 9월에 항복문서 조인으로 끝난 전쟁을 '아시아·태평양 전쟁'이라고 부르기로 한다. 당시 사용된 '대동아전쟁'은 너무나 이데올로기 과잉의 호칭이고, 현재 일반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태평양전쟁'도 미일전쟁 본위의 호칭으로, 중국 전선이나 동남아시아 점령지의 중요성을 놓치게 될 가능성이 있다. 필자도 편집위원의 한 사람으로 참여했던 『이와나미 강좌 아시아·태평양전쟁』(2005년) 전8권에서는 만주사변, 중일전쟁, '태평양전쟁'이라는 일련의 전쟁을 '아시아·태평양전쟁'이라는 광의의 개념으로 파악할 것을 제창하고 있다. 전후도 포함하는 시간적 확대와 '제국'이라는 공간적 확대 가운데 전쟁을 다룬다는 문제 의식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문제 의식을 계승하면서 이 책에서는 '아시아·태평양전쟁'을 '태평양전쟁'에 대신하는 호칭으로 사용하고 싶다. '대동아전쟁' '태평양전쟁'을 대신할 적절한 호칭이 달리 발견되지 않는 이유에서이다.
제1장 개전에의 길
18 1940년 7월 22일, 제2차 고노에 후미마로 내각이 성립한다. 고노에는 고셋게 필두라는 유서 깊은 가문에서 태어난 구게 출신의 정치가이다. 궁중과의 관계도 깊고, 1891년에 태어난 젊은 정치가로 국민적인 인기도 있었다. 이미 1937년 6월부터 39년 1월에 거쳐 제1차 내각을 조직하여 중일전쟁의 자기화에 커다란 정치적 책임을 지고 있었다.
19 결국 이 운동은 여러 정치 세력 간의 대립을 극복하지 못한 채 신당 구상으로서는 좌절하고, 모든 정당이 해산한 뒤에 전 정치 세력을 망라한 대정익찬회가 1940년 10월 12일에 결성되었다. 고노에 수상을 총재로 하는 이 익찬회는 고노에가 당초 기대한 대로 군부를 견제할만한 정치력을 획득하는데는 실패했다. 그러나 각종 관제 국민 운동 단체나 부락회·정내회(町内会) 등의 지역조직을 산하에 모으는 것으로 파시즘 체제 확립기의 국민 운동 조직으로 커다란 힘을 발휘하게 된다.
19 대외정책면에서는, 제2차 고노에 내각 아래에서 1940년 7월 27일 대본영정부연락회의가 「세계 정세 추이에 따른 시국처리 요강」을 결정한다. 독일·이탈리아와의 정치적 결속 강화와 동남아시아로의 무력남진을 결정한 중요 국책이다.
20 삼국동맹·무력남진정책의 배경에 있었던 것은 중일전쟁의 교착상태다.
20 이렇게 해서 일본 전쟁이 장기화하여 전선이 교착하는 가운데 군사력에 의한 해결의 전망을 잃어버린 일본 정부는 정략 공세에 의해 국면을 타개해 보는데 기대를 걸게 되었다.
24 결국 히틀러는 영국 상륙 작전을 최종적으로 단념하고 대소전 준비를 본격화하여, 1941년 6월 22일 발트해에서 흑해에 걸치는 전선에서 대소침공작전을 개시하였다. 바르바롯사 작전이다. 이에 따라 일본의 '사국협상' 구상은 완전히 파탄하였다.
24 일본 측의 의도를 사전에 파악하고 있던 미국 정부는 일본군이 남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 진주한 것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했다. 7월 26일에는 재미일본자산의 동결을 공표하고, 8월 1일에는 일본에 대한 석유 수출을 전면적으로 금지하는 조치를 취했다.
26 1941년 12월 8일 오전 2시 15분, 일본 육군의 다쿠미 지대는 영국령 말레이 반도의 코타바루(Kota Bharu)로의 상륙을 개시하였다. 이어서 오전 3시 19분에는 일본 해군의 기동 부대에서 발진한 제1차 공격대가 진주만으로 공습을 개시, 여기에 아시아·태평양 전쟁의 막을 열고 진주만은 함락되었다.
27 주목할 만한 것은 일본의 무력남진정책이 영일전쟁을 불가피한 것으로 만들었다고는 해도, 미·일 간에는 결정적인 이해대립이 반드시 존재하지는 않았다는 사실이다.
27 나치독일의 팽창 정책에 대결 자세를 강화하고 있던 미국은 아시아에서 '대영제국'이 붕괴되는 것을 방관할 수는 없고, 최종적으로는 영국을 강하게 지원하는 입장을 명확하게 한 것이다.
28 아시아·태평양전쟁에는 식민지를 보유하는 제국주의 대국인 구미열강과, 아시아 최대의 제국주의국인 일본과의 사이에 일어난 식민지 재분할 전쟁이라고 하는 측면이 있다.
31 12월 1일은 어디까지나 형식적인 최종 결정일이고, 실질적인 개전 결정이 언제 이루어졌는가 하는 문제가 중요하다. 그리고 이 실질적인 개전 결정일은 역시 11월 5일일 것이다. 이날의 어전회의에서 결정된 「제국국책 수행요령」은 "제국은 현하의 위국을 타개하여 자존 자위를 지키고 대동아의 신질서를 건설하기 위해, 이번 영미란전쟁을 결의하여 다음 조치를 택한다"고 한 다음에, "무력 발동의 시기를 12월 초두로 정하여 육해군은 작전 준비를 완성한다"고 결정하고 있다.
31 육군의 경우 11월 6일자의 대육명 제555호에 따라 남방작전에 참가하는 각 군의 전투 서열이 발령되었다.
48 미국의 전시 체제로의 이행이 늦어졌던 것도 있어서, 개전 시의 태평양 지역에서는 일본의 전력이 미국을 능가하고 있었다. 여기부터 단기결전에 들어가면 영·미를 굴복시킬 전망이 있다고 하는 환상이 생겨나게 된다.
61 메이지헌법의 규정에 기초하여 천황의 친재에 따라 최종적인 국가 의사가 확정된다고 하는 수속이 취해진 이상, 천황이 스스로의 의사로 대권을 행사하는 '능동적 군주'로 나타나는 것을 저지하는 것은 제도상 불가능했다.
제2장 초기작전의 성공과 도조 내각
73 이렇게 1942년 5월까지 일본군은 동남아시아와 중·남부 태평양의 광대한 지역을 점령해서 연합군을 압도한 것이다.
78 필사적인 반기에 의해 독일군의 총공격을 좌절시킨 소련군은 12월 상순에는 반격으로 바뀌어 독일군을 되밀기 시작했다. 아시아·태평양전쟁이 시작된 것은 바로 그때였다. 일본의 군사 전력의 전제 그것이 조용히 무너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제3장 전국의 전환
108 이 전투에서의 일본 육군 전사자는 2만 1,000명, 미 육군과 해병대의 전사는 1,796명, 지상전에서 일본군의 완패는 분명하다.
109 육군의 전사자 2만 1,000명의 내실이 문제다. 이 가운데 직접 전투에 의한 전사자는 5,000-6,000명에 지나지 않았고, 남은 것은 "영양실조증, 열대성말라리아, 설사 및 각기 등에 의한 것이고, 그 원인은 실로 보급 불충분에 기초한 체력의 자연 소모에 의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즉 전사자 중의 약 70%는 선박에 의한 식량 및 의약품의 보급이 끊어진 상황 아래서 생긴 광의의 아사자였다. 그리고 과달카날 섬의 이 비극은 그 후 각 지역의 전장에서 반복된다.
111 이상 같이 과달카날 섬을 둘러싼 공방전은 아시아·태평양 전쟁의 최대 전환점이 되었다.
144 미국의 경우는 일본과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다. 전시체제로 이행하고 군수 생산은 본격화하는 가운데, 미국 경제는 경이적인 성장을 이루어, 1940년의 국민총생산 997억 달러가 1945년에는 2,119억 달러로 확대되었다. 이에 따라 오랫동안 대공황에 고통받아 온 미국인의 생활 수준은 급속하게 상승한다. "미국은 전시 중에 생활수준을 향상시킨 유일한 나라가 된 것이다. 이것은 미국의 일반 국민에게 있어서도 전쟁이 충분히 '수지맞는' 것이었다는 점을 의미하고 있다. 그러나 이때 형성된 '좋은 전쟁'이라는 낙관적인 전쟁관은 광범한 국민의 생활 실감에 뒷받침된 것이었던 만큼, 그 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계속해서 미국인의 전쟁관을 속박한다.
제4장 총력전의 수행과 일본 사회
166 결국 이 해전에서 일본 해군은 대형 공모=2척, 소형 공모=1척을 잃어버리고, 기지항공부대도 괴멸했다. 미국 측의 손해는 대형 공모=1척, 소형공모=1척의 손상만 있었다. 사실상 일본 해군의 기동부대에 의한 최후의 전투라고 해도 좋다.
190 그 결과 살아남은 학도병들은 군대나 군인에 대한 강한 반감을 지니고 전후사회에 복귀해 가게 된다. 그것은 경제 회복에서 고도경제성장을 맡은 일본 사회의 엘리트들의 정치 문화에 무시할 수 없는 영향을 미치고 있다.
맺음말
253 사실 1951년 9월에 조인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은 '관대한 강화'로서의 성격을 짙게 갖고 있었다. 이 조약에서는 미국을 중심으로한 주요 참전국이 대일 배상의 청구권을 방기했다. 뿐만 아니라 제11조에서 일본 정부가 극동국제 군사재판(도쿄재판)의 판결을 수락할 것이 규정되었던만큼, 전쟁책임 문제에 관한 직접적인 언급은 전혀 없었다.
255 둘째로 국가 지도자의 국민에 대한 책임까지도 애매하게 된 것은 국민 가운데 깊은 응어리를 남긴 결과가 되었다. 전쟁의 말기부터 국민 사이에 국가 지도자에 대한 반감과 불신감이 퍼져 있었는데, 패전은 그것을 결정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일본 국가 지도자의 전쟁 책임은 연합국측이 개정한 도쿄재판에서 판가름하게 되지만, 이 재판이 승자의 재판이라는 정치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재판에 대한 반감이나 반발이 국가 지도자에 대한 비판의 창 끝을 둔하게 한 면이 있었던 것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피해자적인 전쟁관과 결부됨에 따라 전쟁의 책임은 군인을 중심으로 한 국가 지도자에게 있고, 자신들은 국가 지도자들의 잘못된 정책의 희생자라고 하는 국민 의식이 광범하게 형성된 것은 확실하다. 그만큼 전쟁 책임의 문제가 조금씩 애매해진 것으로 인해, 대부분의 국민이 석연치 않은 생각을 갖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생각은 천황을 향하게 된 것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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