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이트리히 본회퍼: 창조와 타락 ━ 창세기 1-3장에 대한 신학적 해석
- 책 밑줄긋기/책 2012-22
- 2017. 12. 6.
창조와 타락 - 디이트리히 본회퍼 지음, 강성영 옮김/대한기독교서회 |
간행사 | 편집자 서문 | 서문 | 여는 마당
첫째 마당
1. 한 처음(창 1:1-2) | 2. 그 말씀(창 1:3) | 3. 하나님의 눈길(창 1:4a) | 4. 하루(창 1:4b-5) | 5. 붙박이(창 1:6-10, 14-19) | 6. 생명체(창 1:11-13, 20-25) | 7. 땅 위의 하나님의 형상(창 1:26-27) | 8. 축복과 성취(창 1:28-31, 2:1-4a)
둘째 마당
1. 다른 면(창 2:4bff.) | 2. 흙과 영으로 빚어진 인간(창 2:7) | 3. 땅의 한가운데(창 2:8-17) | 4. 타자의 힘(창 2:18-25)
셋째 마당
1. 경건한 물음(창 3:1-3) | 2. 하나님처럼(창 3:4-5) | 3. 타락(3:6) | 4. 새것(3:7) | 5. 도망침(창 3:8-13) | 6. 저주와 언약(창 3:14-19) | 7. 생명 있는 모든 것의 어머니(창 3:20) | 8. 하나님의 새로운 행동(창 3:21) | 9. 생명나무(창 3:22ff.)
넷째 마당
1. 가인(창 4:1)
편집자 후기 | 참고문헌 | 약어표 | 색인 | 편집자 소개 | 역자 후기 | 역자 소개
여는 마당
37 창조이야기는 교회에서 그리스도에게서 시작되어 그리스도를 향해 오로지 나아가는 방식으로 읽혀져야 하며,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가 온 세계의 처음이고 새 것이며 종말이라는 사실을 안다면, 비로소 성서를 그리스도를 향하여 서 읽을 수 있게 된다. 신학적 해석은 성서를 교회의 책으로 받아들이고 그 자체로 해석한다. 그 해석의 방법은 곧 이와 같은 전제에서 시작하며, 또한 텍스트로부터 (언어학적이고 역사적 연구 방법의 매개를 통하여) 지속적으로 이 전제를 향해 되돌아오는 일이다.
첫째 마당
51 한 처음, 곧 자유함 속에 곧 무로부터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 이것이 성서가 우리에게, 한가운데 있는 우리에게 또한 잘못된 무와 시작 없는 처음과 종말 없는 나중으로 인해 두려움에 사로잡힌 우리에게 건네는 위로의 말씀이다. 여기서 언급되는 것이 곧 복음이고 그리스도이며, 부활하신 분 자신이다. 하나님이 한 처음에 계시고 마지막 나중까지 계실 분이라는 것과 세계를 초월하여 자유하시며 이것을 우리가 알도록 하심이 곧 그분의 자비요, 은총 이요, 용서이며, 위로이다.
54 하나님이 형태를 가지지 않은 생소한 흑암으로부터 자신을 위해 준비한 찬양은 형태를 통해 완성되어야 했다. 아직도 피조물들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손과 힘에 놓여 있었다. 피조물은 스스로 어떠한 존재도 가지지 못하고, 오로지 피조물이 자신의 존재를 하나님으로부터 받고, 그의 존재 속에서 하나님을 찬미하는 그곳에서 창조주에 대한 찬양이 완성된다. 자신의 피조물에게 형태와 고유한 존재를 부여함으로써, 그리고 형태를 만듦으로써 창조주는 [자기] 스스로를 부정하였지만, 그 피조물로 자신을 섬기게 함으로써 스스로 영광을 받으신다.
57 하나님이 그 말씀으로 창조하셨다는 사실은 창조가 명령이고 하나님의 지시라는 것을 가리키며, 또한 이 명령이 자유로운 것이라는 사실을 의미한다. 하나님이 말씀하셨다는 것은 하나님이 전적으로 자유하시며, 그의 창조와 지으신 것에 대해 전적으로 자유하심을 의미한다.
78 하나님께서 그의 작품을 보신 것이 그 작품을 좋은 것으로 만든다. 이것이 본래적으로 의미하는 것은 작품이 좋은 이유는 다만 창조주만이 선하시기 때문이다. 작품은 그의 좋음의 성격을 결코 그 스스로 안에 가지고 있지 않으며 오로지 창조주 안에서 선한 존재가 된다. 작품의 좋음의 성격은 그것이 매우 단호하게 스스로를 버리고 창조주와 그분의 선한 작품을 가리키는 데 있다. 또한 작품이 좋다는 것은 "하나님 한 분 밖에는 선한 분이 없다"는 데 근거한다. 이러한 예수의 말씀의 의미에서만 첫 번째 창조는 "좋은 것"이다.
79 하나님 한 분 외에 아무도 선하지 않다고 할 때 하나님 한 분만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피조물이 실제적으로 선한 존재라는 것은 그것이 오직 창조주만을 유일한 주님으로 선하신 분으로 믿고 그분의 말씀으로부터 선한 존재성을 받아들이고 그 말씀을 유일무이한 선한 것으로 아는 데 기인한다.
81 창조주가 자신의 고유한 형상을 만들려고 했다면, 그는 그것을 자유 속에서 창조해야만 했을 것이다. 그리고 비로소 자유 속에 있는 이 형상은 창조주를 전심으로 찬양할 것이며, 그 창조주의 영광을 선포할 것이다.
86 유사성, 즉 인간의 하나님에 대한 유비는 존재의 유비(analogia entis)가 아니라, 관계의 유비(analogia relations)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관계(relatio) 역시 인간에게 있어서 하나의 고유한 능력, 가능성, 존재의 구조와는 다른 것이다. 오히려 관계는 선물로 주어지고 설정된 관계, 즉 수동적 의(justitia passiva)이다. 그리고 이 설정된 관계 속에 자유가 부여된 것이다.
87 둘이 더불어 있음(Zweiheit) 속의 인간, 즉 남자와 여자는 그의 하나님의 형상 속에서 붙박이의 세계와 생명체의 세계 속으로 창조되어졌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 대한 인간의 자유는 오직 타자를 위해 자유롭다는 데 있다. 그리고 다른 피조세계에 대한 인간의 자유는 그 세계로부터 자유롭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은 세계의 주인이고, 그 세계를 자신의 것으로 삼고 다스린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 인간의 피조된 하나님의 형상의 다른 측면이 있다. 인간은 다스려야 한다. 이 말은 인간이 당연히 하나님에게서 위탁과 지배의 힘을 받은 자로서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다스려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 마당
96 첫 번째 기사는 철저히 위로부터, 하나님으로부터 사고하며, 인간은 여기서 하나님의 자기 영광을 드러내는 마지막 작품이다. 세계는 하나님에게 오직 그의 영광을 위해 창조된 것이며, 인간은 고귀한 그릇이며, 창조주 자신을 비추는 거울이다. 그 모든 것이 창조주를 찬양하며 그의 영광이 된다. 바로 이를 위해 모든 것이 지어졌고, 인간의 창조에도 불구하고 세계는 여전히 깊음 속에서 낯설고 먼 세계로 남아 있다. 이에 반해 두 번째 창조 기사에는 좀더 인접한 세계와 낙원에서 아담과 함께 살고 있고 지상의 근거리에 계신 주님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100 야웨가 인간을 그의 손으로 만드셨다는 사실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진다. 하나는 피조물에 대한 조물주의 육체적 친근성이다. 즉 자신의 손으로 나━인간━를 만드시고, 그의 염려, 나를 생각하는 마음, 나에 대한 의도, 나를 향한 가까움이 그 모든 것이다. 또 다른 면에서는 나를 짓고 창조하였으며 내가 그의 피조물이 되게 한 그의 전능, 그의 절대적인 우월성을 의미하고, 나를 창조하셨기에 내가 경외하게 되는 그분의 부성을 의미한다. 이것이 성서 전체가 증언하는 하나님 자체이다.
103 인간으로서 사람은 하나님의 영이 없이는 살지 못한다. 인간 존재로 산다는 의미는 영 안에 있는 몸으로서 산다는 것이다. 몸으로부터 도피하는 것은 인간됨으로부터 도피하는 것이며, 영으로부터 도피하는 것과 같다. 영이 몸의 실존적 형태인 것 같이, 몸은 영의 실존적 형태이다. 이 모든 것이 인간에 대해 말해진 바이다. 왜냐하면 오직 인간에게서만 우리는 몸과 영에 관해 알기 때문이다. 인간의 몸은, 인간이 지상 위의 하나님의 영의 실존 형태라는 점에서 인간 이외의 육체로부터 구별된다. 또한 인간이 이 땅의 한 부분이라는 점에서 다른 생명체들과 구별되어지지 않는다. 인간의 몸은 오직 하나님의 영을 통해서만 현실적으로 살아가며, 그것이 곧 그의 존재의 본질이다.
112 인간의 한계는 그의 현존의 한가운데 있지, 그 주변에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삶의] 주변부에서 찾는 한계는 그의 특성의 한계이며, 그의 기술의 한계이고, 그의 가능성의 한계이다. 그러나 한가운데 놓인 한계는 인간의 현실성의 한계이며 전적으로 그의 현존의 한계이다.
112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라는 한계가 있는 곳에 생명 나무, 즉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이 계신다. 하나님은 우리의 현존의 한계이며 동시에 중심이시다. 이것을 아담은 알고 있다. 그런데 그의 지식은 다만 그의 존재가 한가운데로부터 나와 한가운데를 향한다는 사실과 그의 지어짐과 그의 자유에 대한 표현이라는 것을 앎으로써 형성된다. 아담의 지식은 그의 하나님을 위한 자유와 하나님께 대한 어김없는 복종 속에 감추어져 있는 것이다. 그것은, 즉 피조물의 자유로부터 연유되는 지식이며, 삶 속에 있는 지식이고, 무지 속에 있는 지식이다. 따라서 아담은 악을 알지도 못했고, 생각할 수도 없었으며, 그것은 죽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113 한계는 은총이다. 왜냐하면 그 한계가 바로 피조성과 자유와 한가운데 놓인 한계의 근거이기 때문이다. 은총은 비존재와 반생명과 비피조성의 나락 위에서 인간을 붙들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모든 무의 세력은 아담에게 다만 하나님의 은총의 형태로만 생각될 뿐이다. 이전까지는 금지를 어떤 유혹으로 생각하는 것 외에는 달리 이해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지 않았다. 낙원에서의 금지는 피조물에 대한 창조주의 은총이다. 하나님은 아무도 시험하지 않으신다.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라는 것은 이전에는 다만 창조주만이 아시고 아담은 아직 모르는 것이었다. 그리고 복종의 일치 가운데 살고 있는 아담은 그 이중적 의미를 알지 못했다. 아담은 하나님을 그의 생명의 중심이며 한계로 아는 인식의 통일 속에서 살고 있었기 때문에 선악을 아는 지식의 분열을 생각할 수조차 없었다. 아담은 선이 무엇인지뿐만 아니라 악이 무엇인지도 몰랐다. 그는 그 본래적 의미에서 선악의 피안에서 살고 있다.
117 죽는다는 것(Totsein)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지음 받은 존재의 파기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더 살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고, 그럼에도 하나님 앞에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117 이와 같은 의미에서 죽는다는 것이란, 생명을 선물이 아니라 계명으로 가지는 것이다. 이 계명으로부터 어느 누구도 피하여 달아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택한 죽음을 통해서도 회피할 수 없다. 왜냐하면 죽은 자 역시 다시 생명의 계명 아래 처하기 때문이다. 죽는다는 것이란 살아야만 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자연주의적 사고는 이것을 오해하고 있다. 죽는다는 것은 해방이나 구원이나 마지막 도피의 가능성이 아니다. 죽음으로의 도피는 정확히 말하자면 생명의 가장 끔찍한 노예 상태로의 도피이다. 계명으로서 생명의 불가피성이 곧 죽음에 대한 인식이다.
셋째 마당
135 결국 결정적인 것은 인간이 이 질문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 뒤로 물러나서, 이제는 자기의 입장과 하나님의 본질에 대한 자신의 이해를 근거로, 자기 주장을 정당화하려는 경향을 갖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의 이해에 모순되면, 인간은 분명히 잘못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과 명령에 대한 곡해에 대해 적절한 시기에 우리가 종지부를 찍는다면 그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일을 받드는 것이다.
135 악은 다만 경건한 뱀의 모습이다. 오직 그의 질문 속에서 하나님의 능력으로부터 그의 존재를 받고 그가 경건한 한에서 악한 존재가 되는 뱀은 이제 하나님의 말씀의 뒤에 있는 것처럼 자신의 능력을 자칭하고, 자신의 힘으로부터 하나님도 비로소 힘을 가진다고 거짓으로 주장한다. 이것이 뱀이 끊임없이 제기한 경건한 질문이었다.
143 "너희는 절대로 죽지 않는다" ━ "너희는 죽게 될 것이다." 아담의 이해로는 이 두 문장에서 이 세계가 둘로 양분되어진다. 문장은 서로 모순된다. 이것은 아담의 이해력을 넘어서는 것이다. 왜냐하면 어떻게 아담이 거짓이 무엇인지 알 수 있겠는가? 진리가 진리를 역행하고, 즉 하나님의 진리와 뱀의 진리가 대결하고 있다. 하나님의 진리는 금지 명령과 결합되어 있고, 뱀의 진리는 약속과 결부되어 있다. 하나님의 진리는 나의 한계를 가리키고, 뱀의 진리는 나의 무제한성을 가리킨다. 이 두 진리는 말하자면, 둘 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으로, 하나님이 하나님을 거스르는 것이다.
152 하나님이 남자와 여자로 지으신 인간의 이러한 행위는 어떤 인간도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워 질 수 없는 인류의 행위이다. 행위의 범죄성은 아무도 자기 스스로 그 행위를 하지 않았으며, 모두가 다른 사람의 행위에 잘못이 있다는 점에서 엄청난 나락으로 빠져든다. 아담은 하와를 통해서, 그리고 하와는 아담을 통해서 타락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마치 내가 다른 사람의 죄에 대해서 면책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타자가 나에게 그의 죄를 영원히 짊어지게 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타락이 하나님의 창조 세계에서 이해될 수 없을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 용서받을 수 없기 때문에, 불복종이란 단어로 그 사실성을 다 설명할 수 없다.
152 다시 말하면. 이 타락의 범위가 전 피조세계에 확장된다는 것이다. 이제부터 피조성이 박탈당하게 되는데, 이것은 마치 그 핵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별똥별이 덮어놓고 끝없는 공간으로 돌진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155 선과 악을 아는 지식은 분리되지 않는 삶을 사는 아담에게 있어서는 이원성(Zweiheit) 전체의 분열에 관한 불가지이다 그리고 이 이원성의 포괄적인 표현은 tob와 ra, 즉 우리의 언어로는 쾌락적인 선과 고통스러운 악이다.
158 만약 교회교의학이 원죄의 본질을 성적 욕망에서 본다면, 개신교 측에서 도덕적 자연주의의 관점에서 종종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리 터무니없는 것은 아니다. tob와 ra를 아는 지식은 원래 도덕적 원칙들에 대한 추상적인 인식이 아니라 성적 욕망, 즉 인간 사이의 관계의 도착이다. 그리고 성적 욕망이 파괴 속에서 창조적으로 되고자 하는 것에 근간을 두고 있기에, 생식 속에서 대대로 인간의 원죄의 어두운 비밀이 보존되고 있는 것이다.
159 다시 말하면 이 세계는 벙어리가 되고, 그 의도를 알 수 없고, 수수께끼처럼 되어 버렸다. 하나님처럼 된 인간들이 사는 세계는 인간 때문에 수치심을 느끼며, 인간의 목전에서 스스로 은닉한다.
161 양심은 하나님 앞에서 느끼는 수치이며, 그 속에서 자신의 악행을 감추고, 자기를 정당화하며, 동시에 다른 면에서 자기 뜻과는 달리 다른 사람을 가리키는 것을 내포한다. 양심은 죄를 범한 인간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음성이 아니라, 바로 이 음성에 대한 방어인데, 이것은 결국 방어로서 인간이 알고 의욕하는 바를 거슬러서 다시 하나님의 음성으로 향하게 한다.
165 저주 ━ 이것은 창조주에 의해 파괴된 세계가 승인 받는 것이다. 즉 인간이 타락한 세계에서 살아야만 한다는 것이고, 인간이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야 하며, 그가 하나님처럼 되려는 존재로서 하나님처럼 된 세상에서 살아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저주이다. 그리고 인간이 이러한 세계를 살도록 허락 받는다는 것이며, 그 세계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분노하고 추방하고 저주하는 말씀이더라도, 그것이 없으면 살 수 없다는 것, 이것이 언약이다. 그렇게 아담은 저주와 언약 사이에서 산다.
170 타락한 하와는, 모든 쾌락과 고통이 그녀와 함께 시작되는 인류 최초의 어머니이다. 그녀는 최초로 지식을 가진 자였다. 그리고 그녀의 자손들은 쾌락과 고통으로 인해 계속해서 괴롭힘을 당하는 지식을 가지고, 감사와 비난으로 가득 찬 마음으로 그녀를 회상한다. 그녀는 아담에게는 하나님에게서 떨어져 나갔으나 고통스런 열정 속에서 살아가는 새 생명의 상징이었다.
175 그는 자신이 하나님처럼 됨으로써 잃어버린 것을 알고 있다. 그는 그의 잃어버린 삶을 알고 있다. 그는 그가 죽어야만 한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렇지 않다면, 그는 하나님처럼 된 것이 아니다. 그는 그의 죽음을 아는 지식으로부터 죽음의 허락과 자기 생명의 처분권을 감수하는 무서운 쾌락을 맛본다. 그는 그의 죽음이, 단지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생명이 없이도 하나님 앞에서 살아야만 한다는 사실에 기인하는 것으로 받아 들인다. 또한 그의 죽음이 하나님처럼 된 자로서 생명없이 삶을 살도록 심판을 받은 것으로 받아들인다.
넷째 마당
179 이 새로운 생명은 인간과 죽음의 병적 욕망으로 가득 찬 공동체 속에서 창조되었다. 그리고 가인은 저주받은 땅에서 태어난 첫 번째 인간이다. 그리고 가인과 더불어 비로소 죽음의 역사가 시작된다. 죽음을 향하여 보존되며, 생명을 향한 갈증에서 소진한 아담은 가인, 즉 살인자를 낳았다. 아담의 아들, 가인에게 새로운 것은 이런 것이다. 즉 그가 스스로 하나님처럼 되어 인간의 삶을 빼앗았다는 것이다.
180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 죽임을 당하신 하나님의 아들은 가인의 역사를 끝장낸다. 그리고 그럼으로써 결국 역사의 종말이 된다. 이것이 낙원의 문을 향한 최후의 절망적인 돌진이다. 그리고 날카롭게 베는 칼 아래, 십자가 아래에서 인류는 죽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사신다. 십자가의 가지는 생명의 나무가 되고, 세계의 한가운데서 이제는 새로운 것을 가리키며, 생명이 저주받은 땅을 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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