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조구치 유조, 이케다 도모히사, 고지마 쓰요시 : 중국 제국을 움직인 네 가지 힘


중국 제국을 움직인 네 가지 힘 - 10점
미조구치 유조 외 지음, 조영렬 옮김/글항아리


머리말


제1장 진한제국의 천하통일

제2장 당송의 변혁

제3장 전환기로서의 명말청초

제4장 격동하는 청말민국 초기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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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5 이 책은 사상사라는 제목이 붙어 있지만, 철학적인 담론을 하나 하나 서술하거나 사건 혹은 고유 명사를 늘어놓는 통사의 구성을 취하지 않았다. 기나긴 역사 속에서 도대체 중국은 무엇이 어떻게 변화했고, 그것이 어떻게 현재에 이어지고 있는가. 그 변화의 단면에 입각해서 역사의 숨겨진 동력을 드러내는 방법을 사상사에 적용한 것이 이 책이다. 이 책이 과제로 삼은 지점은 중국의 사상을 아는 데 있지 않고, 그것을 통해서 중국을 아는 데 있다 해도 좋다.


6 진한 제국이 성립한 이래 청말에 이르기까지 중국은 장장 2천 년을 이어온 왕조의 연속태로 간주되어 왔다. 유럽에는 로마 제국이 분열된 이후 중세 봉건제부터 근대 시민혁명에 이르는, 변화가 풍부한 역사 이야기가 있지만 확실히 동아시아의 중국 역사에서 그것에 비할만한 변동은 찾아 볼 수 없다. 그러나 중국을 외부에서 경치를 구경하듯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내부에 시점을 두고 보면, 단조로운 왕조 교체사로 밖에 비치지 않는 시대의 근저에 느릿하기는 하지만 거대한 역사의 변혁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챌 수 있다. 이 책은 중국 역사상의 네 가지 커다란 변동기에 초점을 맞추고, 거기에서 어떠한 새로운 역사가 탄생했는지를 해명하려 한다.


제1장 진한제국의 천하통일

14 첫 번째로 춘추시대 말엽(기원전 6세기) 이후 처음으로 사상 학파로서의 유가·묵가가 탄생하고, 이어지는 전국 시대에는 도가·법가 등 제자백가가 사상계에 등장하여 많은 대립과 논쟁을 펼치지만 진시황제가 천하를 통일하고 고조(유방)가 한나라를 일으켜 천하를 다시 통일하는 중국 사회의 거대한 격류에 호응하는 형태로 여러 사상의 모습이 크게 바뀐 점이다. 이 거대한 흐름에 대응하면서 여러 사상은 단순히 사후에 호응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사상계 내부에는 이것을 미리 예측하는 형태로 대립·논쟁을 극복하고, 통일·종합을 실현하려는 움직임이 생겨났다.


23 이러한 예의 세속화도 공자에서 시작된 작업이다. 본래 종교적 의례였던 예를 가족 간의 단결을 강화하고, 친소와 존비를 차등적으로 질서화하는 가족 도덕을 건설하고, 국가·사회에 있어서 사람들의 귀천과 상하를 구별하는 계급 질서를 확립하기 위해 예로부터 내려오던 내용을 고치면서 재구축했던 것이다.


27 전국시대 말부터 유가도 『역』을 경전화하는 과정에서 도가의 두세계론을 도입했다. 본래 『역』은 민간의 점서, 유가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책이었다. 유가의 중요한 사상가는 공자에서 순자에 이르기까지, 『역』을 긍정적으로 언급한 일이 없었다. 공자가 『역전』(『역』의 주석서) 10편을 지었다는 이야기는 한대 초에 『역』을 유교화 할 필요가 생기면서 만들어진 허구이고, 또한 공자가 『역』을 읽었다고 보는 시각도 의심스럽다. 한 대에 유가가  『역전』을 지었던 목적은 『역』을 유가의 경전에 집어 넣는데 있었다. 그때 그들이 기대한 것은 예전부터 존재론적 사색에 능하지 못했던 유가가 『역』이라는 매개를 통해서 유가 내부에 도가의 도의 존재론을 도입하여, 사상 체계에 기초를 제공하는 작업에 대한 불안을 떨쳐내는 것, 점서로서의 『역』에 갖추어진 종교성을 비판하던 종래의 전통적인 태도를 고쳐, 유가의 도덕적·정치적 덕에 도달하기 위해 필요한 기초 단계로서 그것을 내부로 포섭하여 자기 사상 세계를 풍부하게 하는 것 등이다.


60 순자는 '욕'을 부정하는 주장을 펴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국가·사회를 혼란에 빠뜨릴 위험성을 알기에 '욕'에 대한 추구를 긍정한 것이다. '욕'에 대한 추구와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을, 모든 인간이 스스로 예를 받아들여 새로운 이상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가장 근본적인 에너지로 파악했기 때문이다. 순자는 바싹 다가오고 있던 전국 시대의 결말과 천하통일을 시야에 넣고 지금까지 살펴 본 성악설을 이상사회론의 기초로 삼은 것이었다.


69 성삼품설로서 가장 완성된 것은 당대 한유에게서 보인다. 당대 중기에는 불교가 전성기를 맞이하고 도교도 눈에 띄게 발전했다. 이러한 움직임에 대항하여 한유는 고문부흥을 통해 유교에 새로운 내용을 부여하여 그 권위를 회복하려 시도했다. 이 입장에서 지은 논문이 「원성」(성이란 무엇인가)이다. 그 글에 따르면, 성은 인간이 태어남과 동시에 부여받는 본성, 정은 외물에 접하여 나타나는 감정이다.


71 더욱 주목해야 할 것은, 한유가 공자의 말을 근거로 삼아 인간의 불평등과 성이 변경 불가능함을 주장하면서 불교·노자를 비난하고 있는 점이다. 거꾸로 말하면 당시에 이미 불교의 불성설과 도교의 도성설이 만인의 평등 및 성의 변경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고, 그것이 유교를 포함한 사상계에 상당한 충격을 주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한유의 「원성」은 이러한 불교·도교 등의 사상 혁신에 대해 정통적인 유교에서 반격한 것이라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74 중국에서 봉건론과 군현론은 예부터 둘 다 과거에 실제로 존재했던 역사적 제도에 입각하여 논의되기보다 후대의 저마다의 상황을 배경으로 유교의 이런 저런 입장에서 이상화된 주대의 봉건제를 아름답게 묘사하고, 거꾸로 적에 해당되는 진대의 군현제를 그 음화로서 추악하게 묘사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리고 거칠게 말하자면, 진대·한대에서부터 위·촉·오 삼국시대는 일부의 예외를 제외하고 사회에서 실질적인 군현제가 실행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상면에서는 다음 절에 서술하겠지만 유교의 국교화가 추진되었기 때문에 그 이상으로 삼은 봉건제를 내거는 경우가 많았다. 봉건론과 군현론이 유교의 이러한 고정관념에서 다소 자유로워진 것은 당대 유종원의 봉건론에서부터다.


98 중국의 고대 이래의 학문은 농담의 차가 있긴 했으나 모두 시대의 움직임에 충실한 실천적인 사상이었다. 거꾸로 말하면 중국의 사상은 학문이라는 형태를 취하며 자기를 표현한 것이다. 전국 중기 이래로 학문론의 중심 문제 중의 하나는 어떻게 이러한 여러 사상의 대립과 분열을 극복하여 통일을 실현하느냐에 있었고, 그 배경에는 천하통일을 지속하려는 사람들의 바람이 있었다.


101 춘추·전국 시대의 유가는 주로 인간·사회에 있어서 도덕과 정치를 말했고, 존재론적 사색에는 능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사상 체계의 기초를 다지는 데 불안감이 있었는데, 그들은 전국시대 말부터 도가의 존재론을 포섭하면서 이것을 보강했다. 그것은 「역전」의 저술, 즉 「주역」에 주석을 다는 작업을 통해서 행해졌다. 그리고 시간의 경과와 더불어 유교 경전 속에서 차지하는 「역경」의 지위가 높아져. 전한시대 중반을 지나면 「역경」은 육경의 으뜸 자리를 차지하기에 이른다. 그것은 「역경」이 유교 체계에 기초를 제공하는 이론으로서 기능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124 후한 시대는 후기 이후에 사회가 혼란스러워졌지만, 전한·후한 시대에 국가의 유일한 정통 사상의 지위를 누렸던 유교는 그 혼란에 대해 무력했고, 게다가 인간의 내면적인 마음의 문제를 다루는 일이 적었기 때문에 점차 가치가 떨어지고 사람들의 신뢰를 잃었다. 그 결과 사람들의 마음은 유교를 상대화하고 마음을 지탱해 줄 버팀목을 다른 종교나 사상에서 찾게 되었다. 마침내 도교와 불교가 발전함에 따라 유교를 포함한 삼교 사이에 화이의 구별, 중국의 국가 제도와 출가의 마찰, 군주의 권력과 개인 신앙 사이의 모순, 국가에서 삼교 가운데 어느 것이 우선 하는가 하는 따위 문제를 둘러싸고 숱한 대립과 논쟁이 발생했다.


제2장 당송의 변혁

140 사상사 면에서의 당송 변혁을 지탱한 기술적 기반은 이 인쇄 출판에 있었다. 인쇄의 장점은 정확하게 대량으로 복제품을 만들 수 있다는 점이다. 인쇄를 통해 이전에는 극히 제한된 인사에게만 허용되었던 서적의 소유가 서적을 구입할 수 있는 경제력만 있으면 누구라도 가능하게 되었다. 사제와 교단에서 비교적으로 전수되는 대신 지식은 인쇄 간행물을 통해서 공개 공공의 것이 되었다.


140 인쇄 기술은 이러한 지식의 존재 형태를 바꾸어 버린다. 고금의 지식은 반드시 머릿속에 넣어 둘 필요가 없다. 서가에는 인쇄 간행물이 늘어서 있다. 중요한 것은 필요한 정보를 그때 그 때 골라내는 일이었다. 전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이 현상에 가장 먼저 도달한 것이 중국이었다. 이 방식은 컴퓨터 기술로 인해 제본된 서적의 의미가 상실되고 있는 현재에 와서야 근본적으로 변화를 겪고 있다.


168 황제는 천자로서 천명을 받았다. 그것은 그가 천리의 체현자임을 의미했다. 그러나 동시에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는 천리를 일탈하는 자의적인 통치를 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 역성혁명을 통해 왕위에서 쫓겨나는 불안은 이미 사라졌다 해도, 이런 처지를 몹시 답답하다고 느끼는 황제도 있었다. 명나라 무중에 대해 전해지는, 궁중의 한방에 처박혀 몇 년이나 관료의 알현을 허용하지 않았다는 어리석은 행동은, 꼼짝달싹 할 수 없는 군주가 취할 수 있는 자그마한 저항이었는지도 모른다.


180 화이사상은 이 정통론과 연동되어 송나라가 요에 대해 가졌던 굴절된 우월의식을 형성한다. 세계제국이었던 당나라는 화이를 구별하는 데 엄격하지 않았다. 당나라 사람들에게 호나 이는 이국적인 어떤 것으로서 인기를 누렸다.


181 남송과 금의 관계에 오면 그것이 더욱 증폭되어 한족 내셔널리즘이 발생한다. 다만 그것을 서양의 근대적 의미에서 말하는 내셔널리즘과 동질의 것으로 파악해서는 안된다. 그들이 중화의 인간이라 자부하며 타자에 대해 우월한 느낌을 갖는 것은 자기들이 선왕의 가르침을 충실히 계승하는 유서 깊은 집단이라는 자의식에 바탕을 두고 있다. 요나 금이 이적인 것은 그들이 선왕의 제도와는 다른 풍속·습관을 고수하고 있기 때문이고, 그들도 그럴 마음이 있다면 중화에 동화될 수 있는 것이다.


194 만물에는 본래적인 질서에서 일탈하는 현상이 생겨 버린다. 인간의 경우 그것을 '성'라는 용어로 설명한다. 본연의 성은 '리' 그 자체이고 따라서 선하지만 '기질의 성'에는 치우침이 있기 때문에 사악한 사태의 원인이 된다. 이 '기질의 성'을 '본연의 성' 상태로 되돌려 본래의 바른 질서를 회복하는 것이 사람이 수양하는 목적이다. 이리하여 주자학은 성설의 설명 원리로써 이기론을 구축하고 우주·세계와 인간을 동일 원리에 의해 모두 설명하려고 시도한 것이다.


202 향리공간을 조정의 관료기구와 유기적으로 결부시켜 사회 질서의 체계화를 수행한 것이 「주례」였다. 「주례」 「지관」 부분에는 지방 행정의 모습이 세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당나라 이전의 국제에서는 본래 왕안석 혹은 명나라 태조에 이르기까지, 위로부터 지방을 조직화하려 한 위정자 입장에서 「주례」는 성전이었다. 이에 비해 재지사회에서 생활하는 사대부가 자기 주변을 향리공간으로 조직화하고, 말하자면 질서를 쌓아 올리는 형태로 천하국가를 밑에서 지탱하는 구상을 「대학」의 팔조목에 기초하여 고안한 것이 주자학이고 그것을 계승한 것이 양명학이었다.


제3장 전환기로서의 명말청초

243 '지방자치'라는 개념은 근대가 되어 유럽에서 들어온 것으로, 그것은 중세 봉건영주제 아래에서 어느 영역에 있어서 통행의 자유, 상업의 자유, 관세의 면제 등 법적 계약에 바탕을 둔 이른바 '시민적 권리', 혹은 법적으로 보증된 (체제로부터 자립한) 자치제도라는 뜻을 갖고 있다. 그런데 '봉건영주제가 있었던 중세'가 없었던 중국에서는 고대 이래로 통행의 자유나 상업의 자유가 보증되어 있었고, 새삼스레 권리를 획득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므로 중국에서는 '자치'라 해도 관체제='관치'로부터 제도적으로 자립한 민치의 영역을 건립하는 방향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지방의 공사를 지방관과 신 및 백성이 공동으로 실시하는 그러한 공공의 작업을 의미했다. 이것을 근대에 들어와서 과거를 거슬러 올라가 민간의 '지방자치'라고 일컫는 것이어서, 유럽의 '지방자치'하고는 역사의 문맥이 다르다.


248 송대에서는 이 정치=도덕의 학문 성격을 띤 유교는, 주된 담당자가 과거로 등용된 관료 및 그 주변의 사인층 혹은 지방의 유력층이었고, 민중은 거기에 들어가지 않았다. 원대 이후 과거시험의 경전 해석을 주자학으로 통일함에 이르러 전국의 관료층·사인층·지방유력층에게 질서(=예) 이념이나 이데올로기는 주자학으로 통일되었고, 그 상황은 청나라 말에 과거제가 폐지될 때까지 이어졌다.


289 우리가 상정하는 바로는 명청시기의 향리공간이란 관, 리, 향신, 백성의 유력층, 일반 민중들이 종족, 길드, 선회, 단련 등의 조직이나 네트워크로 교차하면서, 사회적·경제적 공동관계를 구성한 지역활동 공간 또는 지역질서 공간으로, 송대부터 민국시기까지 이어진 것이다. 다만 그것은 같은 공간에 있는 죽통과 같은 연속이 아니라 인구 증대 등에 의한 시대의 진행과 더불어 변화와 발전을 인정할 수 있고, 전체로서는 백성이 차지하는 공간이 팽창되어가는 과정을 지닌다. 명말청초는 그 이전에 비해 관 체제인 이갑제가 약화된 것과 반비례하여 향리공간에서 '민간' 의식이 강화되기 시작했던, 그 양적 변화가 질적 변화로서 드러나게 시작한 시기라고 특화할 수 있을 것이다.


제4장 격동하는 청말민국 초기

294 청말민국 초기의 격동은 1911년의 신해혁명에서 비롯되었다. 신해혁명의 가장 큰 역사적 특질은 (1)2천 년간 이어져온 왕조 체제를 끝나게 한 혁명, '왕조'가 아니라' '왕조체제'를 끝나게 한 혁명이었다는 점, 그 형태 또한 (2)각 성의 독립이라는 형태를 띤 점, (3)그 결과 구체제는 해체되고 혁명 뒤에 국내가 분열·할거 양상을 보였다는 점, (4)혁명을 실현시킨 실제 세력은 예부터 있었던 형태의 반란군이 아니라 민간에 축적된 성의 힘이었다는 점 등이다.


297 1911년의 분해로부터 1949년의 재통일에 이르는 38년이라는 세월은 너무 길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지만 오히려 역으로 그만큼의 세월이 필요했다는 사실 자체가 그 세월의 격동이 역사상의 커다란 전환기였다는 사실의 증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참고로 당나라에서 송나라로 전환된시기에는 오대라는 분열·할거 동란이 53년 간 이어졌다. 즉 신해·건국혁명이란 진한 제국 성립 이래 당송 변혁기와 더불어 천년마다 일어난 대전환기의 하나에 견줄만한 커다란 혁명이었다고 생각된다.


314 신해혁명의 역사적 특질의 하나는 되풀이해서 말한 것처럼 각 성의 독립이라는 형태를 취한 점에 있는데, 여기서 독립이라 함은 바꿔 말해 청 왕조의 통치체제로부터 성 권력이 이탈한 것이며, 또한 성의 이탈에 의해 중앙 집권적 왕조통치 체제가 와해된 것이다. 혁명 뒤에 와해의 공백을 메워야 할 다양한 국가 구상이 중국대륙 위에 어지러이 착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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