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틸리히: 경계선 위에서 ━ 폴 틸리히 자전적 사상 탐구


경계선 위에서 - 10점
폴 틸리히 지음, 김흥규 옮김/동연(와이미디어)



폴 틸리히 연보(年譜)

옮긴이 해제_ 틸리히, 그는 누구인가?

머리글

두 기질 사이에서

도시와 시골 사이에서

사회 계층 사이에서

현실과 상상 사이에서

이론과 실제 사이에서

타율과 자율 사이에서

신학과 철학 사이에서

교회와 사회 사이에서

종교와 문화 사이에서

루터주의와 사회주의 사이에서

관념론과 마르크스주의 사이에서

본국과 타국 사이에서

회고: 경계와 한계

미주


<붙임 글>

경계선 신학자 폴 틸리히┃임성모




두 기질 사이에서

36 아버지라고 해서 동독의 특징만 있는 것이 아니고 어머니라고 해서 서독의 특징만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부모의 대립하는 특질이 제가 안팎으로 살아가는 과정에 영향을 미쳤던 것은 사실입니다. 부모의 인격 유산이 자녀가 살아가는 삶을 결정한다는 사실이 중요하지 않고, 삶의 범위를 정해주고 중요한 결정을 끌어내야 할 삶의 내용을 마련해준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이론과 실제 사이에서

60 정치적으로나 종교적으로 자신이 충성하고 있는 대상에 얽매이지 않고, 철저한 질문을 자유롭게 던질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와 동시에 교수의 교육철학은 현대인의 정신문제나 사회문제를 충분히 숙지하고 있어야만 합니다. 창조적인 위대한 철학은 늘 이런 요구를 반드시 충족시켜야만 합니다. 이 사실은 19세기 철학이 거의 예외 없이 점점 더 학교의 도구이자 '철학과 교수들'의 도구로 전락했다는 약점을 드러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고 있는 금세기가 정치수단을 이용해서 근본 질문의 숨통을 조이거나 특정 정치 세계관을 강요하려고 할 때마다 철학은 적지 않은 타격을 입게 될 것입니다.


타율과 자율 사이에서

62 중세철학과 개신교 지성사를 강의하면서, 또한 제 논문 『종교상황』에서 저는 이 생각을 서양 사상사에 적용했는데, 그결과로 신율의 필요성을 찾아냈습니다. 신율은 종교본질에 정통한 자율입니다. 순수자율을 비판한다고 해서 새로운 타율로 가는 길이 쉬워지지는 않았습니다.


64 자율과 타율 사이의 투쟁은 또 다른 수준으로 개신교회에 재등장합니다. 저는 19세기의 온건 정통주의라고 할지라도, 정확히 개신교 정통주의를 반대하면서 자율로 가는 길을 찾아냈습니다. 이런 까닭에 신(神)개념에 함축된 절대성의 관계를 인간종교의 상대성에 적용할 때 신학적으로 근본문제가 발생했습니다. 개신교 정통주의와 최근에 일어난 변증법적 신학(신정통주의 신학)을 포함한 일체의 종교 교조주의는 한 역사종교가 신적인 것의 절대적 타당성을 오로지 홀로 점유했다고 우길 때 생겨납니다. 


65 예컨대 어떤 경전이나 인물, 공동체, 제도, 혹은 교리가 절대적 타당성을 갖는다고 주장하거나 일체의 다른 현실세계의 순종을 요구할 때 종교 교조주의가 생깁니다. 그것은 신적인 것의 절대주장 이외에 다른 모든 주장이 존재할 수 없는 까닭입니다. 하지만 이 신적 절대주장을 역사적으로 유한한 현실에 근거시킬 수 있다는 주장이야말로 모든 타율과 모든 마성주의의 뿌리입니다.


66 개신교회가 가톨릭교회의 약화된 형태 그 이상의 것이 되기 위해서는 개신교가 성취해낸 모든 것에 맞선 저항정신이 그 내부에 계속 살아남아 있어야만 합니다. 이 프로테스탄트 저항정신이야말로 이성적 비판이 아닌, 예언자적 심판입니다. 프로테스탄트 저항정신은 흔히 합리주의와 인본주의 형태로 등장한다고 할지라도, 자율이 아니라 신율입니다. 자율과 타율 사이의 모순은 신율적이고 예언자적인 말씀으로 극복됩니다


신학과 철학 사이에서

76 기독교 신앙의 근거는 역사적 예수가 아닌, 성서적 그리스도상입니다. 인간이 사고하고 행동하는 것을 판단하는 기준은 교회신앙과 인간경험에 뿌리박고 있는 그대로의 그리스도상이어야지, [역사적 예수에 대한] 역사적 연구조사의 추이나 인위적 조작이 될 수 없습니다. 제가 이런 태도를 보였기에 독일에서 졸지에 과격한 신학자가 되어버렸지만, 정작 미국에서는 바르트주의자로 알려졌습니다. 그러나 바르트적 역설인 칭의의 신비에 동의

한다고 해서 바르트주의적 초자연주의에 동의하는 것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자유주의 신학의 역사비판적 성취에 동의한다고 해서 자유주의 교리론에 동의하는 것도 아닙니다.


82 저는 모든 방법론적 학과목을 사유에 관한 학문, 존재에 관한 학문, 문화에 관한 학문으로 각각 분류함으로써 이 질문에 답하고자 했습니다. 다시 말해 의미철학이 모든 학문체계의 기초라는 사실(사유에 관한 학문)을 주장함으로써, 형이상학을 합리적 상징으로 무조건자를 표현하려는 시도(존재에 관한 학문)로 정의함으로써 그리고 신학을 신율적 형이상학(문화에 관한 학문)으로 정의함으로써 대답을 찾고자 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저는 인간 지식의 총체성 안에서 신학 나름의 고유한 위치를 확보하고자 했습니다. 이 분석 방법이 성공을 거두려면 먼저 지식의 신율적 특성 자체를 인정해야만 합니다. 다시말해 인간의 사유 자체가 의미의 근거이자 심연으로서의 절대자에 뿌리박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해야만 합니다. 신학은 모든 지식의 암묵적 전제가 되는 것을 자신의 명시적 대상으로 삼습니다. 이처럼 신학과 철학이 서로 포용하고, 종교와 지식이 서로 포용합니다. 경계선의 입장에 비추어 볼 때 이처럼 양자가 서로를 밀어내지 않고 껴안는다는 사실이야말로 철학과 신학 종교와 지식 사이의 진정한 관계성을 보여줍니다.


교회와 사회 사이에서

88 고대의 호교론이나 현대의 호교론을 불문하고 호교론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문제는 공동의 판단기준, 즉 양자 간의 분쟁을 해결할 수 있는 공정한 재판정을 확보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종교와 문화 사이에서

99 인간실존이 완전하고 자율적 형식체계(틀)로 자신의 유한성 안에서 무한성을 추구하는 것으로 파악되는 곳에서 문화는 극치에 이릅니다. 역으로 극치에 도달한 종교는 고대 교회가 로고스라고 불렀던 자율형식을 자체 안에 포함하고 있어야만 합니다.


루터주의와 사회주의 사이에서

104 루터주의는 인간실존의 "부패성"을 의식하고, 모든 형태의 사회적 유토피아(진보주의 형이상학을 포함해서)를 부인합니다. 또한 인간실존의 몰이성적이고 악마적인 성격을 인식하고, 종교의 신비주의 요소를 존중하며, 개인과 집단생활의 청교도 율법주의를 거부합니다.


107 교육이나 환경을 개선해서 사람들의 일반적 도덕수준이 높아지고, 투박한 본성을 세련되게 연마할 수는 있지만, 인간인 이상 그런 개선책이 선과 악을 행할 수 있는 자유에까지 근본적 영향을 미치지는 못 합니다. 인류는 더 나가지지 않습니다. 더 높은 수준으로 선악이 고양될 뿐입니다.


관념론과 마르크스주의 사이에서

120 경제적 유물론은 역사의 고비마다 사회적이고 지적인 형식이 만들어지고 변혁이 일어날 때 경제적 구조와 경제적 동기가 근본적으로 중요하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경제적 유물론이 보여주는 것은 경제적 요소와 무관한 사상사나 종교사는 있을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회고: 경계와 한계

132 인간 행위에는 하나의 경계가 남아있는데, 이 경계는 더는 두 가지 가능성 사이의 경계가 아니라, 모든 인간의 가능성을 초월하는 영원성으로 말미암아 일체의 유한한 것에 부과된 한계로 남아있습니다. 영원이 현존할 때 우리 존재의 중심조차도 하나의 한계에 불과하며, 우리가 이룬 최고 수준의 성취조차도 단편적인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경계선 신학자 폴 틸리히┃임성모

138 그에게 개신교 원리란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심판에 직면해 있다. 그들의 구원은 인간의 성취가 아닌 하나님의 은혜를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만 가능하다"를 의미합니다. 이 점에서 틸리히는 다른 루터교 신학자들과 아무런 차이점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는 놀랍게도 '오직 믿음'의 교리를 그것의 대척점에 있다고 여기기 쉬운 '의심'과 상호 연결합니다. 즉 의심하는 이는 믿음에서 멀지 않습니다. 믿음이 깊더라도 기존 교리에 대해 과연 그럴까 하고 의심할 때가 있습니다. 자기 삶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신앙문제이기에 아무 것이나 덥석 받아들여서도 안 됩니다 의심으로 점검하고 그 결과 진정한 믿음으로 나갑니다. 기촌교리를 맹목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참된 믿음이 아닙니다 자기 존재 깊이의 물음과 연결되지 않는 대답은 대답이 아닙니다. 그것은 나의 삶과 관계없는 기계적인 지식에 불과합니다. 틸리히는 말합니다. "진지하게 의심할 때 믿음이 확인된다." 왜냐하면 의심한다는 것은 진지한 관심이 있음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142 세상 학문을 포기하고 고립되게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세상 학문이 반드시 신학의 전 단계이지만도 않습니다. 세상학문이 신학을 위한 봉사로만 사용되지 않습니다. 각각 하나님이 쓰시는 도구이지만 철학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질문들, 특히 존재 구조를 규명("존재한다는 것이 무엇인가?")하는데 탁월하고, 신학은 성서적 메시지를 통해 인간 존재의 의미를 밝혀주는데 깊이를 가지고 있습니다. 틸리히는 이처럼 질문에 대답하는 신학을 변증신학(apologetic theology) 이라고 부릅니다. 변증신학은 질문하지 않은 채 대답하는 신학이나, 세상에서 스스로 대답이 나온다는 신학을 거부합니다. 질문이 있어야 대답이 진정한 대답이 됩니다.


147 소외현상에 시달리는 인간에게 그리스도가 되십니다.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은 존재의 근거이신 하나님에게로 회복됩니다. 그럼으로써 소외를 극복하고 치유(healing)의 경험을 합니다. 새로운 존재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궁극적으로 나타납니다. 유일하게 나타난다는 뜻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새로운 존재에 참여하는 것을 신생(regeneration) 이라 하고, 부족하더라도 받아들여진 경험을 칭의(justification)라고 하고, 새로운 존재에 의해 변화 받는 것을 성화(sanctification)로 부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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