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무라 요시로: 열반경


열반경 - 10점
다무라 요시로 지음, 이원섭 옮김/현암사



지은이의 말

1. 열반의 기초

2. 죽음에 대한 고찰

3. 영원에 대한 고찰

4. 영원한 존재와 인간계

5. 영원 활현의 인간계





지은이의 말

「열반경」은 소승 열반경과 대승 열반경으로 나누어진다. 소승 열반경은 석가의 죽음을 중심으로 하여 그 전후의 경과를 서술한 것이요, 대승 열반경은 석가의 죽음을 발판으로 하면서 그것을 넘어 영원의 문제를 밝힌 것이다. 둘을 합쳐서 '죽음과 영원에 대한 가르침'이라고 말할 수 있으리라. 그리고 이것이 결국은 인간 존재의 해명이 되고, 인간성의 발견이 되는 것이리라. 소승 열반경은 석가의 죽음을 통하여 인생의 무상과 인간이 '죽음에 이르는 존재'임을 밝힌다. 그리고 이런 무상과 죽음에서 눈을 떼지 않고 투철하게 관찰함으로써 인생에 대한 집착을 끊고, 유전하는 인생에서 흔들림이 없는 자기를 확립할 것을 권한다. 말하자면 인생에 대한 부정과 초월 위에 자기를 확립하라는 주장이다. 이에 대해 대승 열반경은 석가의 죽음이 사실은 영원 속에서 일어난 한 현상이며, 석가는 본래 '영원한 존재'임을 주장한다. 그것을 통해 무상한 듯이 여겨지는 인생과 죽음에 이르는 인간이 사실은 영원의 품 안에 있으며, 또 영원은 그 속에 충만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하여 자신 안에 있는 영원한 자기를 깨닫고, 그것을 살려가라고 권한다. 말하자면 인생에 대한 부정적·초월적인 자기 확립에서, 긍정적·내재적인 자기 확립으로 전환한 셈이다.


1. 열반의 기초

18 재미있는 것은 인도에 석가가 나타난 기원전 5세기 전후의시기이다. 이 무렵, 그리스에서는 서양 철학의 시조라는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이 활약하였고, 중국에서는 공자와 노자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우연으로 돌릴 수도 있으리라. 우리가 정녕 놀라게 되는 것은 석가가 태어났을 때, 인도 사상계에는 영원의 세계와 현실계의 문제에 관해 생각 할 수 있는 온갖 생각이 거의 다 갖추어져 있었다는 사실이다. 석가는 이런 사상들을 비교·검토한 끝에 자기의 사상 체계를 정비·수립해 간 것이어서, 불교가 심원한 사상·종교가 될 수 있었던 바탕에는 그런 시대적 상황이 크게 작용했음을 잊어서는 안되겠다.


26 독립·고정된 영원 불멸의 것이 있다는 생각은 바로 미혹이고 집착이며, 상견·유견·아견이라 하여 배척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무상·무아라해서 모든 것이 무로 돌아가고 만다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그런 무는 사실상 상견·유견을 뒤집어 놓은 것에 불과하며, 같은 영역과 같은 차원의 그릇된 생각이어서 역시 아견을 떠나지 못하고 있는 까닭이다. 이를테면 사후의 존재나 세계가 있다든지 없다든지 하고 곧잘 논의되지만, 있다고 하거나 없다고 하는 그 사고방식은 사실상 같은 영역에 속하는 생각임을 알아야 한다. 있느냐 없느냐는 질문에 대해 석가가 대답하지 않은 까닭이 여기에 있다. 있다고 말하면 그릇된 있다는 생각으로 받아들일 것이며, 없다고 한다면 역시 그것과 같은 잘못된 없다는 생각으로 이해할 것이어서, 상대방이 사로 잡혀있는 사고 방식 자체가 시정되지 않는 한 대답할 수 없었던 것이겠다


40 이이의 틀(현실)은 불이의 허공(영원)에 싸이고, 불이의 허공(영원)은 이이의 틀(현실)에 담기는 것이다. 그야말로 이이불이·불이이이이다. 여기서 우선 주의해야 할 일은 흔히 영원한 것, 이를테면 신이니 부처니 영생이니 하는 것이 인간·범부·죽음에 대립하는 것으로 주장되고 있으나, 그것은 이이가 상대하는 현실계에 입각한 생각이며, 참으로 영원한 것은 인간 대 신·범부 대 부처·죽음 대 삶을 초월한 불이·공에서만 발견될 수 있는 것이어서, 영원의 존재는 본래 거기에 있다는 사실이다. 일반적으로 불로장생이니 영생이니 하는 데 대해, 불교에서는 '생사초월'이라든지 '불생 불멸' 같은 것을 강조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것을 적극적으로 나타내면 인간즉신·범부즉불·생즉사라는 말이 된다. 바꾸어 말하면 인간·범부·죽음의 틀 안에 진정한 영원 절대로서의 신·부처·삶이 담겨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대승 열반경은 그것을 '여래장'이라든지 '불성'이라든지 '법신 상주'라든지 하는 말로 부르고 있는 것이다.


50 영원은 아득한 저쪽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허공 같은 것이어서, 우리는 지금 그 속에 들어 있다. 그리나 우리는 공·허공의 영원에 들어가 있기만 해서는 안된다. 마치 바닷물을 컵에 담듯이 그것을 현실의 온갖 틀 속에 받아들여서 살려가야 한다. 이것이 인간에게 주어진 의무이며, 여기에야 말로 인생의 의의와 목적이 있고, 우리의 생활이 있다. 또 영원은 한정된 틀 속에 담김으로써 도리어 인생 속에서 숨 쉬고 빛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석가의 삶과 죽음은 현실의 무상·유한·상대성을 우리에게 알림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그것에 대한 집착에서 떠나게 하는 동시에 이 현실 속에서 영원을 살려가도록 본보기를 보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삶과 죽음의 의미와 의의가 180도로 전환하게 되며, 그런 사실을 밝힌 것이 곧 대승 열반경이다.


3. 영원에 대한 고찰

92 법신·반야·해탈은 영원한 존재의 세 가지 특성(열반의 삼덕)을 나타낸 것이다. 법신이란 영원한 진리를 몸으로 하고 있음을 가리키고, 반야 란 생사를 해명하는 지혜를 이르며, 해탈은 생사의 초월을 말한다. 즉 진리·지혜·초월의 셋이 영원한 세계의 특성인 것이다. 이 셋은 셋이면서 하나, 하나인 동시에 셋이어서, 하나도 아니요 다르지도 않은 관계에 있으며, 또 가로도 세로도 될 수 없는 점에서 '이'의 석 점, 또는 대자재천의 세 눈에 비유된 것이다.


96 즉 세상에서 말하는 아는 아집·아욕에 의해 세워진 그릇된 이미지여서, 진실한 아를 포착한 것이 될 수는 없으며, 아가 없는 곳에 수립된 거짓 아에 지나지 않는다. 이에 대해 불교에서 주장하는 아는 아집·아견·아상을 초월하는 것에 의해, 바꾸어 말하면 무아가 되는 것에 의해 파악된 진정한 아라는 뜻이다. 미혹이 없어진 진정한 자기가 되는 까닭에 '불성'일 수 있는 것이다. 석가는 세상 범부들의 망령된 집착을 깨기 위해 무아를 설했다. 그러나 그것은 진정한 자기라든지 진정한 의지처 따위가 없다고 생각하는 부정적·허무적인 견해에 동조한 것은 결코 아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아견이 미혹인 것과 마찬가지 의미에서 미혹된 무아견이 되고 말 것이다. 불성으로서의 아는 그 양자를 넘어선 곳에 있는 것이며, 진정한 아란 아견·무아견의 허망된 분별을 초월한 무분별의 공에서 포착되어야 하는 것이다.


110 즉 AB 이가 현실계의 특징이며 현실상이라는 말이 된다. 그리고 이 AB 이는 각기 독립·고정된 불변의 실체가 아니라, 다른 것과의 관계 속에서 존재하고 변화하는 까닭에, 불교에서는 '상의성'이니 '연기성'이니 하는 말로 나타낸다. 또 이런 특징을 현실계가 지니고 있다 하여 '생멸문 '이라 부르는 경우도 있다. 생멸 상관의 세계라는 뜻이다.


110 현실계의 온갖 존재·온갖 현상이 상의·상관의 양상을 피고 있다는 것은 결국 그것들의 본성·본질이 불이라는 것을 말함이 된다. 즉 어느 AB이를 놓고 보아도 A 내지 B는 각기 독립·고정된 존재가 아니라, B에 의해 A가 있고 A에 의해 B가 있는 바이며, B가 없으면 A가 없고 A가 없으면 B가 없게 된다. 따라서 이것을 바꾸어 말하면, A 내지 B는 AB 불이로서 각기 본성·본질을 삼고 있다는 말이 된다. 그리고 이 불이인 사물의 본성·본질이 바로 인생의 영원 상이요 영원의 세계인 것이다.


4. 영원한 존재와 인간계

122 영원한 존재와 세계를 이렇게 대립하는 관념의 부정으로 나타내는 것은 불교의 일반적인 특징이거니와, 이것을 한마디로 표현하여 불이·공이라 하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흔히 참으로 절대적인 영원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즉 A에 대해 B의 절대를 주장한 대도, 그 절대인 B는 A에 대립하는 것이니까 진정한 절대라고는 할 수 없다. 그래서 AB불이·공에 진정한 절대가 있다고 말하게 되는 것이다.


160 이상의 자기 생명의 존속 내지는 영원의 생에 대한 세 가지 사고로부터는 결국 만족할만한 해답·해명은 얻을 수 없음이 확실하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그런 사고 방식에서 만족스런 해결이 얻어지지 않는 것은 영원에 관한 사고 방식 자체에 오류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것을 검토해보고자 하는 움직임이 생겨났다. 그리고 그런 태도를 취한 대표적인 것이 불교였다.


160 붓다는 자기와 세계의 상·무상, 유한·무한, 육체와 영혼의 동이·사후 생존의 유무 같은 것에 대해 질문을 받았을 때, 대답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어째서 그랬을까. 그것은 그런 문제의 발상법 즉 사고 방식에 잘못이 있었기 때문이다. 바꾸어 말하면 붓다의 침묵은 영원에 대한 종래의 그릇된 사고 방식을 시정하고, 그것을 통해 진정한 영원의 존재를 밝히려고 의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먼저 첫째 오류는 흔히 말하는 불로장생이니 불사니 불멸의 생이니 하는 말이 나타내고 있듯이 그것은 죽음과의 상대성을 벗어난 것이 못 된다는 점이다. 거기서 생각된 영원의 생이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죽음과 대립한 생이며, 따라서 참으로 죽음을 극복한 것은 되어 있지 못하고, 그렇기에 진정한 영원·무한이 파악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죽음에 대립한 생에 집착한 것이며, 생사의 줄을 끊어버린 것이라고 할 수가 없다. 그래서 '죽음에 대립하는 생'이라는 사고 방식을 지양하는 곳에 진정한 영원이 포착되는 것이라고 설해지게 된다.


168 '영원의 지금'의 관념이 불타관 내지 불신론을 통해서 해명된 것이 대승 열반경에 강조된 '법신상', '불성'. '여래장'의 설이다. 진정으로 영원한 붓다는 시간적 연장 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시간의 초월에서 발견되는 것이므로, 그 시간을 넘어선 진정한 영원으로서의 붓다를 법신상주라는 말로 나타낸 것이다. 그리고 이 진정한 영원으로서의 붓다는 시간·공간을 초월하여 존재하는 것이기에, 적극적으로 말한다면 현실의 이 순간에서 발견되고, 자기 몸 속에서 발견된다. 그것을 '불성'이니 '여래장'이니 한 것이다.


5. 영원 활현의 인간계

205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불교의 업설이다. 업은 본래 행위라는 의미인데, 불교에서는 주체적 정신의 존중에서 쓰이던 것이며, 자기 책임을 강조한다는 뜻에서 자업자득이니 전업·선업이라는 것이 설해진 것이다. 그러던 것이 어느 때부터인지 차차 불교 외의 사상에서 생각된 업 사상, 즉 현재의 삶은 모두가 과거 내지 전세의 업의 결과이므로 어떻게도 할 수 없다는 식으로 불교도 그 일부에서는 업을 과거에만 중점을 두어 생각하는 숙명론(숙업)으로 떨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와 같이 업을 과거에만 중점을 두어 생각하는 태도는 본래의 불교에서는 용인될 수 없는 것이어서, 불교에서는 그런 숙명론적 업 사상을 지닌 사상가들을 '숙작 외도'라 불러 이미 준엄한 비판이 내려지고 있다. 현재로부터 미래를 향해 현실을 타개해가는 원동력으로서 업을 미래적으로 보는 것, 그것이 불교 본래의 업 사상인 것이다.


208 불교에 나타난 이런 업 사상은 앞에 든 외도의 그것과 비길 때 현재에서 미래로 눈을 돌림으로써 미래적이라는 선은 유지되고 있다고 하려니와, 그러나 역시 업을 숙명적인 것으로 떨어뜨릴 위험성은 남아 있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 이런 해석이 생겨난 것은 선인 낙과·악인 고과를 고정적·타율적으로 생각하여, 업을 어디 까지나 개인과 결부시켜서 생각했기 때문인 것으로 여겨진다.


208 선인 낙과·악인 고과는 워낙 불교에서 하나의 요청으로 말미 암아 설해졌다. 결국 선인은 낙과를 가져오고, 악인은 고과를 가져와야 할 터이며, 또 그렇게 되도록 노력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선인이 낙과가 되지 않는 것, 이를테면 착하게 살면서도 불행하다는 것은 사회에 결함이 있는 경우가 많으므로, 착한 사람은 반드시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사회를 만들어 가야 한다는 것이다. 업을 개인에만 한정하지 않고 사회적으로 생각한다는 것은 불교가 본래부터 지니고 있는 점이어서 '공업'이라는 관념이 그것이라 하겠다.


303 인간계는 십계의 중간에 놓여있어서, 극락에서 볼 때는 악·고의 방향에, 지옥에서 볼 때는 선·낙의 방향에 존재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한마디로 말해서 인간은 중간적 존재이다. 이것은 복잡 다양한 대립·차별상을 지닌 채 두 극단 사이를 왔다 갔다 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차별의 여러 모습으로 가득 찬 인간계는 전체적으로 보아 절대·무차별의 영원계에 의해 초극되어야 할 유한·불완전한 가의 세계라 할 수 있다. 이 인간계에 삶을 받은 우리는 영원한 세계를 마음으로 믿으며 체득함으로써 유한한 인간을 넘어선 경지에 몰입(있는 정토)하는 것이오 죽음으로써 몸과 마음이 아울러 인간계로부터 해방되어 영원 자체의 세계에 가는(가는 정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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