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쩌화: 중국정치사상사 2 ━ 진한위진남북조


중국정치사상사 2 - 10점
류쩌화 지음, 장현근 옮김/글항아리


제1장 진시황秦始皇의 제왕전제 사상

제2장 한 초 사상가들의 한 제국 정치에 대한 설계

제3장 한漢제국의 정치 대일통과 독존유술獨尊儒術

제4장 유가 정치 관념의 경전화와 사회의식화

제5장 군권君權 합법성 이론과 군권 조절론

제6장 전한 후기 정치 조정 사조와 왕망王莽의 복고개제 사상

제7장 후한 전기 참위화讖緯化한 경학 정치관과 회의론

제8장 후한 후기의 명교名敎와 정치 반성 사조

제9장 초기 도교와 『태평경太平經』의 정치사상

제10장 한 말 위진 시대 명법名法, 명리名理 사조와 현학이 정치사상

제11장 양진兩晉 남북조 시기 정치사상의 다원적 발전






제1장 진시황秦始皇의 제왕전제 사상

15 진시황 이전에 '삼황' '오제'처럼 '황'과 '제'의 칭호가 있었다. 진의 소양왕과 제의 민왕은 각기 '서제'와 '동제'라 불렸다. 『관자』 병법 편은 "하나에 밝은 자가 황이며, 도를 살피는 자가 제이며, 덕에 통달한 자가 왕이며, 군사적 승리를 도모하는 자가 패다"라고 말한다. 진시황은 중국 역사상 처음으로 황과 제를 연결하여 '황제'라 부른 제왕이다. 이는 단순한 호칭 문제가 아니라 제왕 관념의 실현이며 제왕의 존귀함을 새로운 높이로 밀어 올린 사건이다.


23 진씨 부자의 극단적 욕망과 중벌주의는 악순환을 거듭했다. 이것은 진 제국이 신속하게 붕괴된 중요한 원인 가운데 하나이며 동시에 후인들에게 반복하여 생각해볼 과제를 남겼다.


27 분서갱유는 문화에 대한 일대 겁난이며 문화 전제주의가 전에 없이 강화된 사건이다. 폭력과 행정 수단을 가지고 사람들의 사유에 족쇄를 채우는 것은 역사적 창조력에 대한 가장 야만적인 타격이다. 진 왕조는 이론적 사유를 질식시켜버린 시대다. 이론적 사유에 대한 멸시는 곧 야만의 횡행에 빌미를 제공하게 된다. 진 왕조 전체 관료 체계의 야만화는 왕조 멸망의 원인 가운데 하나다.


제2장 한 초 사상가들의 한 제국 정치에 대한 설계

40 역사는 진화, 발전한다. 이로부터 얻어낸 결론이 바로 '통변'이다. 육가는 역사를 매우 중시했지만 옛 것만 따져 이론과 실제가 맞지 않음에는 단연 반대했다. "옛것을 잘 말하는 사람이면 오늘에도 그것을 합치시켜야 한다. 먼 것을 능히 서술할 수 있으면 가까운 것도 밝혀주어야 한다." 역사를 연구함은 문 앞을 포장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 속에서 교훈을 끌어 내 현재에 사용하려는 것이다.


45 육가가 인의를 근본으로 삼은 것은 통치 정책을 조정하려는 데 그 취지가 있었다. 형벌(즉 폭력 통치)이 과해선 안 되며, 이익 추구(즉 경제적 착취)도 과해선 안 된다. 이렇게 했을 때만이 민심을 얻을 수 있으며 자신의 통치를 공고히 할 수 있다는 것이다.


54 육가는 유학, 특히 순자의 학을 제창했다. 그리고 도가와 법가를 종합하여 두루 취했으며 역사를 통찰하여 현실에 맞대면했다. 깊이가 있으면서도 공허하지 않았다. 자신은 계속 정치의 소용돌이 속에서 활동했지만, 논의는 오히려 대범하고 개방적이었다. 개성이 있으면서 권세에 아부하는 말이 적으니 참으로 대단하다고 하겠다.


63 명호, 등급의 귀결점은 윗사람을 받듦과 주군를 향한 존중으로 군주의 지위를 공고히 하는 것이다. "예란 신하가 그것으로 윗사람을 받들어 모시는 바다." "군주는 군주답고 신하는 신하다움이 예의 올바름이다. 권위 있는 덕이 군주에게 있도록 함이 예의 분별이다."


68 정치의 여러 요소 가운데 인민을 사회적 기초로 삼는 것이야말로 가장 안정된 요소다. 나라의 군주는 바뀔 수 있고, 군주는 정치를 바꿀 수 있고 관리들을 바꿀 수 있다. 그러나 민중은 바꿀 수 없다.


95 무엇이 군주 전제주의인가? 아주 여러 방면에서 논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상의 자유를 금절함으로써 ‘하나'와 다른 사상을 범죄시하는 것이야말로 전제주의 가운데 가장 특출한 표준이라 아니할 수 없다. 사람은 생각을 지닌 동물이다. 인간의 창조성은 대부분 사상이 선도한다. 사람이 생각을 한다고 하면 하나와 같기는 불가능하다. 그런데 하나로 하지 않으면 범죄이고 죽어야 한다니 이것이야말로 전제주의의 가장 야만적 표현에 다름 아니다. 기발한 생각이 없으면 자연히 기발한 재주, 기발한 물건이 있을 수 없으며 사회에도 생기가 있을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전제주의가 중국 고대사회 정체성의 가장 중요한 원인이라고 거듭 천명하는 것이다.


100 유가를 하나의 몸에 비유한다면 예는 그 골격이다. 이 의미에서 볼 때 유가는 '예가禮家'라 부를 수도 있겠다. 봉건 통치자들이 유가 사상으로 나라를 다스리고 국가와 사회 질서를 유지했으며, 인의의 설교가 그에 중요한 작용을 했음이 틀림없지만 주로 예라는 하드웨어에 의지하여 유지하고 지탱한 것이었다. 예는 사람을 귀천으로 나누고 성인 숭배라는 고정된 사유의 틀을 만들어냈다. 이는 근대적 사회관계 및 관념과는 판이한 것이었다. '5.4' 시기 예교의 타도를 높이 외친 것은 정말 시대적 필요에 따른 일이었다.


111 황로 정치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청정 무위이고 주요 내용은 농업과 잠업의 권면, 요역의 경감과 부세의 낮춤 가혹한 형벌의 감면, 황실과 국가 지출의 절약, 토목 공정을 줄이는 것 등이다. 이러한 조치는 사회경제의 회복, 인민 생활의 안정에 극히 중요한 작용을 했음에 틀림없다.


113 『회남자』는 『회남홍렬』이라고도 불린다. 전한 경제, 무제 시기 회남왕 유안이 빈객들을 불러 모아 집단으로 쓴 책이다. 책 전체는 21편이며 마지막 1편은 「요략이라 부르는데 책 전체의 서언이라 할 수 있다. 「요략」은 책 전체의 주지와 편찬의 목적을 개괄하고 간단 명료하게 각 편의 요점, 분업 및 그와 잇닿은 배합 관계를 소개하고 있다.


114 『회남자』의 주된 흐름은 순전히 자연에 임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무위론에 반대한다. 저자가 이해하는 무위는 객관과 주관이 결합, 통일되고 그 결합 속에서 주관적 능동성을 발휘하는 것을 말한다.


116 도, 천, 자연은 객관 세계를 표현하는 여러 가지 차원의 개념이다. 도는 천지 만물의 본원이며 존재의 기초다. 천지, 자연 만물은 도가 외적으로 변한 형식이다. 


제3장 한漢제국의 정치 대일통과 독존유술獨尊儒術

152 한대 유학자들이 제창한 대일통사상은 그렇게 제왕들의 마음에 와 닿았으며, 동중서의 건의와 한 무제의 인가를 거쳐 유학은 마침내 일존으로 정해졌다. 이는 한대 정치사상 발전 과정상 일대 사건인 동시에 중국 고대 정치사상과 문화 발전의 이정표가 되었다. 이로써 유가 사상은 차츰 상승하여 중국 전통 사상 문화의 주체 가 되었으며, 그 영향력과 의의는 지극히 심원한 것이었다


176 『공양전」 '대일통' 정치설계도를 구성하는 마지막 이론 차원은 화이華夷의 분별이다. 화華란 화하華夏, 즉 주周 왕실 및 중원지구 문명 정도가 비교적 높은 제후국들을 가리킨다. 이夷란 이적, 즉 대체로 문명이 비교적 열악한 소수 민족을 가리키며 진, 초, 오 등 변방에 위치한 제후국들을 포함한다. 춘추 전국은 중국 고대민족 대융합의 시기다. 일부 문명이 낙후한 민족과 부족들이 분분히 일어나 중원으로 들어왔다."남이와 북적이 교통하니 중국은 선처럼 끊지 못했다." 고대 민족 간의 상호 접촉과 교류는 각기 다른 문화의 충돌이고 다툼이었지만 형식상으로는 줄곧 전쟁 방식을 채용했다. 전쟁과 이민족 문화의 유입은 군권 일통 정치에 위협이 아닐 수 없었다. 『공양전』 저자는 이 점을 명석하게 간파했다. 그들은 “이적들이 중국을 빠르게 병들게 하고 있다"고 질타한다. 이를 위해 '화이와 안팎의 구별', 즉 "그 국國을 안으로 삼고 여러 하夏를 바깥으로 삼으며, 여러 하를 안으로 삼고 이적을 바깥으로 삼을 것"을 제기하여 화이 관계를 조화시키는 기본 방침으로 삼았다.


177 『공양전』이 '존왕'의 깃발을 올린 것은 바로 천자를 정치 핵심으로 삼는 통치 질서를 수호하려는 것이었다. 안으로부터 바깥으로 등급이 분명한 '일통' 군주 정치를 건립하려는 것이었다. 이른바 '화하와 안팎의 구별'이란 곧 하나의 통일천하를 위한 과정이거나 순서였다.


186 고대 중국의 군주 정치는 일종의 경험적 이성 형태의 정치 양식이었다. 오랜 기간 쌓인 정치 경험과 교훈 위에서 이론으로 승화되었을 때만이 이른바 '치도治道'를 형성할 수 있었다. 이렇게 한 실 천하의 장구한 안녕을 위한 이성적 지침과 이론적 근거들이 마련되었다. 그리고 이 어렵고도 거대한 시대적 과제는 바로 동중서에 의해 완성을 보았다.


189 동중서의 천에 대한 인식과 천인합일 이론의 제기는 한대 유학이 신비주의를 향한 전환을 이루었다는 표시이며, 정치 이데올로기 영역에서 전통 유학이 유사 종교적 구속력을 갖게 되었음을 뜻한다.


212 음양의 도로부터 삼강의 제기로 나아간 것은 한대 통치 계급의 정치적 시야가 넓혀져 가는 기본 방향을 설명해주고 있다. 제국의 규모가 처음 갖추어지던 시기에 그들은 회복과 조정을 모색하는 편의상의 법을 추구했는데, 날개가 다 갖추어지자 통치 질서를 수립하고 공고히 하는 장기 계획을 도모하는 방향으로 전환했다.


제4장 유가 정치 관념의 경전화와 사회의식화

302 한 무제의 유가 학술만을 존중하고 시험을 치러 선비를 선발하는 제도는 사인 대다수가 유가 서적을 읽고 벼슬길에 나아가도록 이끈 동시에 유가 학술을 정치의 한 구성 요소로 바꾸어놓았다. 이는 매우 분명한 두 가지 잘못된 결과를 가져왔다. 하나는 청나라 사람 방포의 말대로 "유가의 앞길은 확 트였지만 그 도는 망했다"는 것이다. 방포의 말은 지나친 절대화이긴 하지만 대체로 수긍이 간다. 대다수 유생이 유학을 '도'로 추구하지 않고 벼슬길에 나아가는 문고리로 여기게 되었고, 유가 학술은 독존적 지위에 놓인 동시에 금고를 당해 학술 문화적 독립성과 초월성을 잃게 되었다.


304 한 무제의 독존유술 이후 두 가지 힘이 『오경』을 한 걸음 한 걸음 신성한 위치로 밀어 올렸다. 첫째 한 왕실 정권이 '경'으로 선비를 선발한다고 제창함으로써 광대한 선비들을 독경의 길로 인도했다. 둘째, 유생들이 부단히 『오경』의 신화를 지어냈다. 이 두 가지 힘의 추동으로 『오경』은 행정 규정으로의 권위로부터 신화적 권위로 나아가게 되었다.


305 『오경』은 곧 『역』 『시』 『서』 『예』 『춘추』다. 그전에 이 다섯 부는 '경'으로 불리기도 했지만 그저 민간의 제자학에 속한 것들이었다. 한 무제의 흠정을 거쳐 비로소 관방학으로 올라섰다. 『오경』은 관방에서 반포한 교과서였을 뿐만 아니라 더욱 중요한 것은 그것이 관방의식의 구현이며, 황제가 흠정한 국가 사회의 지도 사상이자 사회를 통제하는 도구이며 행위 규범의 준칙이었다는 사실이다.


306 한대에  『오경』이 확립된 뒤 공자가 수정, 편찬한 공로는 더더욱 강조되었다. 혹은 거꾸로 말해 공자가 수정한 것만을 '경'이라 부를 수 있었다.


310 『오경』은 공자가 손수 정했다. 따라서 공자와 『오경』의 신격화 사이에 서로 밀어주는 관계가 이루어진다. 공자 신격화는 공자 당시부터 시작되었다. 공자가 죽은 뒤 제자들은 세대를 이어가며 한 걸음 한 걸음 스승을 높은 봉우리로 밀어 올렸다. 한 고조의 공자 제사와 한 무제의 독존유술, 제사, 봉호 첨가, 공자 후손 책봉 등과 같은 후대 제왕들의 부단한 공자 존중은 공자 신격화의 정치적 환경을 만들어주었다.


314 한대 통치자들과 진시황 사이에는 관념적으로 중요한 차이점이 있었다. 진시황은 신을 믿었으나 자신이 신보다 높다고 과장했으며, 자신의 권력이 바로 황제라는 자신의 지위와 합법성의 증명이었다. 한대 통치자들 또한 권력을 대단히 중시한 것은 당연했지만 이론상으로 그들은 천명의 보우를 받아 황제가 되었음을 인정했으며, 황제의 합법성 문제는 천으로부터 증명이 되어야 한다고 여겼다. 봉선은 한편으로 황제가 하늘의 보호를 얻었음을 나타내며, 다른 한편으로 황제가 하늘을 향해 정치적 업적을 묶어서 보고 하는 것이기도 했다.


325 봉선은 제사 방식으로 왕권과 신권을 결합시키는 일이다. 황제는 봉선을 행함으로써 신격화되고 인간 세계에서 가장 존엄한 자가 된다. 황제의 합법성 또한 봉선을 행함으로써 더욱 충분한 증명을 얻게 된다.


325 명당은 중앙전제집권과 군주 존중을 더 완벽하게 하기 위한 또 한가지 조치다. 명당은 고대 제왕들이 정치 교화를 밝히는 곳이다.


347 황제의 의지와 경서 사이에 모순이 발생할 때는 때때로 황제 또한 경의에 복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선비들 또한 경서를 무기 삼아 맞서 싸우곤 했다. 이런 맞섬이 제한적이기는 했지만 경학의 정치적 권위를 설명하기엔 충분하다.


380 권위 앞에서 사람들은 다시는 인식 주체로서 독립된 성격을 가지지 못했고, 사람들의 인식은 다만 권위에 대해 이해하고 해석하는 것뿐이었다. 그렇게 성인을 대신하여 말을 하고 도를 전했다. 사상적인 분화와 다양성이 있기도 했지만 인식론적으로 낮은 차원에 속했다. 권위 숭배야말로 군주 전제의 사상적 기초다.


391 한대 사상계를 전체적으로 관찰해보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기본적인 사실을 간파할 수 있다. 즉 유가 내부의 논쟁이 유가와 다른 학파와의 쟁론보다 절대로 적지 않다는 것이다. 유가 내부의 여러 유파 간의 논쟁은 사상 다원화 운동의 또 다른 표현이다. 한대 사상의 다원적 발전은 정치권력의 간섭 때문에 전국 시대의 백가쟁명과는 매우 다른 모습을 보이므로 이를 비정상적 발전이라 부른다. 


제5장 군권君權 합법성 이론과 군권 조절론

432 한대 제왕은 중요한 한 가지 문제에 직면했는데, 이론적으로 군권의 지상성과 신성성을 강화해야 했을 뿐만 아니라 실행 가능한 정치 조절 능력을 군권에 부여해야 하는 일이었다.


449 한대 사상가들의 재천명, 확인, 발전을 거치면서 군권의 합법성에 대한 인식은 혈연관계라는 단순 항목으로 유지하던 국면을 벗어나 천, 성, 도 삼위일체라는 다수 항목으로 유지하는 국면을 만들게 되었다. 이로부터 군권합법성에 대한 이론적 바탕은 대단히 두터워지고 도저히 깨뜨릴 수 없게 바뀌었다.


459 제왕이 천하를 취하고 천하를 다스리는 것은 형벌과 군대뿐이다. 패권이 초기 왕권의 전형적 특징이다. 삼황오제의 전설은 피비린내 나는 정벌과 살육으로 가득하다. 일정한 역사 조건하에 혈연 집단의 군사 수령은 타인을 지배하거나 노예로 부림으로써 개인적 이익과 권위를 수립하는데, 이들이 바로 왕이다.


460 ‘군’ ‘군주’ ‘군상’ ‘군자’는 선진 시대의 각급 군주에 대한 범칭이었다.


460 군주는 사회정치 등급의 최고 봉우리다. 그래서 ‘상’ ‘지존’ ‘원수’라고도 불린다. "위와 아래라 함은 군주와 신하를 이름이다." 상은 하를 상대한 말이고, 존은 비를 상대한 말이다. ‘상’ ‘군상’ ‘황상’ 등 칭호는 모두 지고무상하다는 의미에서 취한 것이다.


466 천자 칭호의 기본적 함의는, 군주는 천의 아들로 하늘로부터 명을 받아 하늘을 대신하여 통치를 한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세 가지 함의와 정치적 효과를 지닌다. 첫째, 군권신수다. "천은 온갖 신의 임금이다." "왕이란 천이 부여해준 바다." 천은 절대적 권위를 지닌 신이며, 군은 천이 선정한 '민주民主'다. 천명은 구한다고 얻어지는 것이 아니며, 밀쳐낸다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472 성화의 극치는 신화神化다. 성인은 "신처럼 일체의 변화를 알고 있으니" 실질적 초인이다. 성화 사유 방식은 현실주의와 신비주의를 한데 결합시켰다. 신화와 성화 칭호가 함께 중첩되면서 신, 성, 왕 일체의 군주는 각종 필연성을 독점하게 되었다. 실천으로 성화와 신화를 결합시킨 사람은 진시황이며 이론적으로 양자 결합을 완성한 사람은 동중서다.


474 황제 칭호가 군권지상 관념의 극치라 한다면 황제 제도야말로 군권지상 관념의 전면적 구현이다. 황제 칭호는 제도, 법률, 도덕, 문화를 내포하고 있다. 황제의 명분은 그 자체로 중요한 정치적 자원이다. 누가 그것을 점유하느냐에 따라 ‘말로 다할 수 없는 고귀함 자체가 되어 최고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합법성을 갖게 된다. 


489 신하의 군권에 대한 상대적 제약 즉 '도의에 의한 견제균형' 시도의 최종 목표는 군주 개인의 전제나 독재를 방지하기 위함이 아니라 신하의 교정과 조정을 통해 군주 정치가 정상적으로 운용되도록 지켜냄으로써 정치 위기를 방지하는 것이었다.


496 죄기조(황제가 자기 잘못을 스스로 인정하여 자책하는 조서)는 제왕이 하늘과 민중을 향해 정치적 잘못을 검토해 과오를 시정함으로써 새롭게 출발한다는 조서다. 한 문제 전원 2년(기원전 178) 11월의 일식조는 처음으로 한대 죄기조의 선구가 되었다. 그 후 역대 제왕들은 누차에 걸쳐 이러한 조서를 내렸다. 죄기조는 고대부터 있었는데, 한대에 이르러 최고로 유행함으로써 한대 정치의 큰 특색이 되었다. 이는 하늘을 두려워하고 성인을 숭상하는 한대 유생들의 사상과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제왕의 통치술 가운데 하나이기도 했다.


497 한대의 죄기조는 벌써부터 고정된 격식을 만들어갔는데, 대체로 세 가지 단계로 나뉜다. 먼저 군주의 치세 업적을 명시하고, 다음으로 천재, 인사의 부조화를 민중에게 널리 알린 뒤 "짐의 부덕함" 때문이라는 따위의 자책어를 잇고, 마지막으로 다양한 정치적 조처로 폐단을 보완할 자구책을 만든다.


501 다른 한편으로 황제가 잘못을 저지를지라도 천, 성과 상통할 수 있는 사람은 여전히 황제 한 사람뿐이었다. 그는 잘못을 저지를지라도 그 잘못을 스스로 고칠 수 있는 특권을 가지고 있었다. 죄기조가 증명하고 있는 바는 바로 황제의 위대함과 영명함이며, 또한 죄기조는 통천치성의 조건을 갖추어주었다.


제7장 후한 전기 참위화讖緯化한 경학 정치관과 회의론

590 참위학은 전한 이래의 음양오행, 천인감응, 천인합일 사유 방법이 국단적으로 표현된 형식이다. 그 핵심은 왕권 신격화에 있었다. 신, 자연, 인간의 일체화를 통해 논리는 황당하나 주장은 분명한 정치 신화를 엮어냈다.


667 공자는 한대 통치 사상의 최고 권위였다. 공자는 비난하는 것은 경전과 도에 대한 반란이었으며, "성인과 법도를 무시한다"는 혐의를 받았다. 왕충은 신화화된 공자를 역사 인물로 환원시키면서 성인의 말씀이라고 항상 맞기만 할 수는 없다고 공개적으로 질타했다. 감히 공자에 대한 미신을 깨뜨리는 이런 대담한 거동은 역사상 극히 드문 경우다. 당시의 역사적 조건하에서 성인 신성화를 부정하고 공자에 대한 미신을 깨뜨린 것은 중대한 현실적 의의를 지닌다. 통치 시상의 이론 형태와 철학적 기초를 공격하고 나선 왕충의 논의는 통치 사상을 전면 재조정하며 사상 문화의 발전에 새 길을 개척했다.


685 대담하게 성현, 경전 및 군권을 비판하고 사회적 권위에 대한 각종 미신을 전면적으로 깨뜨린 왕충과 같은 사상가는 역사상 극히 드물다. 그의 비판 철학은 결국 봉건 정통파들에게는 두려움을 불러일으켰고, 이단 사상가들을 고무시키는 작용을 했다. 이 기본적인 역사적 사실은 중국 정치사상사에서 왕충의 지위를 확고히 다져주었다.


제8장 후한 후기의 명교名敎와 정치 반성 사조

830 중장통이 천도와 인사를 구별 지은 것은 신비주의의 속박에서 벗어나기 위해서였다. 천도를 알 필요도 없으며, 천도를 믿을 필요도 없으며, 핵심은 "인사를 근본으로 삼는" 것임을 사람들에게 알려주기 위해서였다.


831 "인사가 근본이고 천도는 말절이라"는 중장통의 천인관은 인간의 사회적 지위와 작용을 강조한다. 천이나 신에 의지할 필요 없이 사람의 모든 활동은 사람 자신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 이는 신학 정치관에 대한 공격이었으며, 사람들의 사유를 신학의 궤도로부터 현실 속으로 옮겨오도록 했다. 후한 말년의 특수한 역사적 • 정치적 조건하에서 이루어진 사상적 성취였다.


제9장 초기 도교와 『태평경太平經』의 정치사상

868 도교는 중국 땅에서 생기고 자란 종교다. 도교는 유교, 불교와 더불어 전통문화 체계 내에 삼각 정립의 형세를 이루며 봉건 통치자들의 중요한 통치 도구가 되었고 사회에 대단히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도교는 후한 후기에 만들어져 오랜 세월 동안 민간에서 유행하다가 차츰 교파를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초기 도교엔 양대 교파가 있었다. 하나는 동부 지역에서 장각에 의해 창립된 태평도이고, 다른 하나는 파촉 지역에서 장릉에 의해 창립된 오두미도다.


870 초기 도교 이론의 형성으로 볼 때 중요한 사상적 연원은 귀신 숭배, 신선 학설, 음양오행 관념이다. 도교는 무술에서 기원하고, 무술은 일종의 원시 종교이며 귀신과 인간 사이를 소통하는 방식의 하나다. 무술에 종사하는 사람은 귀신을 대표해서 말을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사람의 소망을 귀신에게 전해줄 수도 있다. 이러한 종교적 형식이 유지되는 것은 사람들이 귀신을 숭배하기 때문이다. 귀신 관념은 민간에 매우 광범하게 유행했다. 사람들은 각종 활동에 종사하면서 항상 귀신의 보우를 기원했으며, 이러한 귀신 숭배가 차츰 하층 인민의 신앙으로 바뀌어갔다.


871 장생불사 시도가 시종 실현되지 못했음에도 통치자들은 득도하여 신선이 되려는 노력을 포기하지 않았다. 바로 이와 같은 추구 때문에 도교는 민간으로부터 차츰 상층사회로 진입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통치 계급의 관방 종교가 되었다. 신선 학설은 신선을 숭상하고 복약을 통해 신선이 되는 도교 이론의 사상적 연원이었다.


874 도교와 여느 종교는 다른 점이 있다. 도교는 초인간성뿐만 아니라 인간성도 지니고 있다. 내세를 추구하지 않고 현세를 중시하여 일정한 현실성을 지닌다. 따라서 도교의 정치적 태도는 현실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으며 현실을 직시하고 직접 부닥뜨린다. 초기 도교는 특히 그러했다. 이러한 정치 참여 의식이 초기 도교의 정치 학설을 수립했다. 이 학설은 종교적 체계 내에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어느 정도 종교사상적 특징을 보인다.


888 '승'은 후인들이 선인들의 선과 악을 계승한다는 것이고, '부'는 선인들이 선과 악을 후인들에게 유전시켜준다는 것이다. 즉 사람들의 행위는 후인들에게 역전시키기 어려운 영향을 끼치게 된다는 말이다. 이 때문에 선악의 행위와 결과가 일치되지 않는 현상이 생겨난다고 보았다.


889 승부설의 본래 의미는 사람들에게 선을 권장하고 악을 그치도록 권장하는 것이다. 그 자신을 위해서도 고민해야 하며 자손과 후대를 위해서도 깊이 생각해야 한다. 자신의 악행 때문에 후대에까지 재앙을 미쳐서는 안 된다. 하지만 인과응보설을 인류의 계승 관계에까지 끌어들인 것은 좀 황당하다고 하겠다.


제10장 한 말 위진 시대 명법名法, 명리名理 사조와 현학이 정치사상

937 명리名理와 명법名法은 모두 한위 교체기에 일어난 정치 사조다. 양자의 상호 연관성으로 인해 어떤 학자들은 둘을 하나의 사조로 보아 혹자는 명법 사조라고 부르고 혹자는 명리 사조(명리학)라고 부르기도 한다.


937 명법은 치국의 치도 사상과 수단, 방법 등을 주로 탐구하고, 명리는 인재의 감별 품평, 임용 등을 주로 탐구한다. 명법 사조는 형과 예의 선후 문제, 군신 간의 상호 보완 명실에 대한 종합 고찰 등을 언급하는데, 모두가 국가의 통치와 안정에 직접적으로 봉사하는 것이다. 명리 사조는 사람을 중심으로 삼아 재성, 인물 유품, 성인 등의 문제를 토론하는데 모두가 인재 학설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명리 사조는 사실상 후한 이래 인재의 선발 임용에 관한 학설과 이론을 총결한 것이다.


938 명리학은 한대 사상이 위진 현학으로 전환되는 중간 고리다. 이 과정에서 사회비판 사조와 명법 사조는 새로운 사상을 향한 전통 사상의 전환에 촉매 작용을 했다.


955 하안, 왕필부터 시작되는 현학은 '3현三玄' 즉 『노자』 『장자』  『주역』을 숭상하고 '3현'을 통하여 현리를 밝히고 현원(즉 추상 원리)을 말했으므로 현학이라는 명칭을 얻었다. 현학 정치론의 중심은 명교와 자연과의 관계 문제다. 명교와 자연과의 관계 문제가 새로운 명제인 것은 아니다. 유가는 명교를 위주로 하고 도가는 자연을 위주로 하므로 유가와 도가의 논쟁은 줄곧 명교와 자연과의 관계를 내용으로 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제11장 양진兩晉 남북조 시기 정치사상의 다원적 발전

1068 중국 고대 사회의 권력합법성에 관한 이론 들은 기본적으로 전통형에 속했다. 즉 왕권의 합법성은 주로 조종의 기업에 근원을 두고 후세의 군주는 "우리 조종의 위대한 업적을 이어가는" 수성일 따름이었다.


1074 양진 및 남조의 통치자들이 했던 '순천응인' 인지 양식의 이론적 특징은 일반 사회 구성원들로 하여금 선위 받은 군주의 권력합법성에 대해 더 많이 인정하도록 만들었다. 동시에 어떤 의미에선 왕권을 노리는 사람들의 정치적 야심을 고무시키기도 했다. 빈번한 왕조 교체는 왕권의 전통적 바탕을 약화시켰다. 사람들은 재빨리 새로 흥기한 왕조에 순응하고 또 복종했다. 이른바 "인심이 한 왕조를 생각하는" 현상은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다.


1133 불교는 전한 말의 기록에 분명히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진정으로 중국에 전파되고 유행한 것은 후한 말이다. 수 왕조의 통일에 이르기까지 불교의 중국 전파 상황은 다음과 같이 소략하게 개괄할 수 있다. 한 말 위 초에 처음 들어온 불교는 주로 당시 사회적으로 성행하던 방술, 도술 등과 서로 결합하면서 전파될 수 있었다. 무술, 도교 및 불교의 유행은 실질적으로 양한 시기 통치 지위를 점했던 유가 사상이 쇠락한 데 따른 결과였다. 


1134 외래 종교였던 불교의 수많은 교의와 제도가 당시 중국의 사회정치적 상황과 배치되는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양자 간의 모순을 어떻게 조화시켜 중국 사회에 확대, 전파시킬 것인가 하는 문제는 불교의 생존과 발전 여부에 있어 관건이었다. 중국의 통치자들에게 불교는 마찬가지로 이중적 작용을 했다. 즉 한편으론 불교가 정치에 도움을 줄 수 있었고, 다른 한편으론 불교에도 현행 정치에 불리한 인소들이 잠재하고 있었다. 따라서 한족 통치자들은 불교를 이용하는 동시에 모종의 변화를 요구했다. 이 과정에서 종교의 사회적 기능으로 말미암아 불교 또한 전통 중국의 정치사상에 모종의 새로운 인소를 제공해주었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불교 정치사상 또한 중국 정치사상사 가운데 한 자리를 차지해 마땅하다.


1160 도교가 발전하고 성행하던 시대는 불교 또한 광범하게 중국에 전파되던 시대다. 사상 체계 간의 충돌로부터 시작하여 정치적 •학술적 지위에

대한쟁탈전등 이 시기 도교, 불교 두 종교간의 충돌과 모순은 매우 첨예하고 격렬했다. 이러한 충돌은 두 종교 각자의 특징을 부각시키는가 하면 공통된 점도 존재함을 인식시키게 되었다. 바로 이 논쟁의 와중에서 두 종교의 자아 의식이 제고되었고, 자신 및 타종교에 대한 견해 속에 중요한 의미를 지닌 사상들이 드러나게 되었다.


1164 도교는 무사無死를 이야기하는데, 불교는 무생無生을 이야기한다. "무생의 교화는 요원하고, 무사의 교화는 절절하다. 절절한 법은 겸약을 나아가게 할 수 있고, 요원한 법은 과강을 물러서게 할 수 있다." 이는 불교와 도교의 교화 효과와 대상을 두고 한 말이다. 절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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