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다 미즈마로: 반야·유마경
- 책 밑줄긋기/책 2012-22
- 2019. 9. 30.
반야.유마경 - 이시다 미즈마로 지음, 이원섭 옮김/현암사 |
1. 만인을 위한 것
2. 공(空)과 반야(般若)
3. 부처와 보살
4. 공(空)의 실천
5. 병
6. 구원
7. 침묵
8. 정토(淨土)와 예토(穢土)
1. 만인을 위한 것
12 이 연기를 하나의 틀로서 제시 한 것은
이것이 있을 때, 그것이 있다.
이것이 일어날 때, 그것이 일어난다.
라는 것으로, 여기서 이것이라 하는 것은 연을 말한 것이어서 즉 조건을 가리키며, 그것이란 존재를 말한다. 따라서 이 틀은 여기에 어떤 것이 존재하는 것은 거기에 응한 조건이 있어서 존재한다는 것, 또 그런 조건 자체도 처음부터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일어나는 것이라는 사실을 말하는 셈이 된다. 그러고 보면, 이것은 결국 나라고하는 존재의 주체적인 것과 객체적인 것은 그 어느 것이나 조건이 없이는 존재하지 않고, 그 어느 것도 실체적으로는 본래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나타내고 있는 셈이며, 나아가서는 여기에서 주체적이니 객체적이니 말해 온 것도 사실은 그런 주객의 고정된 모습이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리하여 모든 실체적 존재가 부정되는 셈이 되는데, 이것을 불교에서는 무아 혹은 공이라고 불러왔다. 이것은 바꾸어 말하면 생겨나고 없어지고 하여 항상 변화하는 현실의 모습을 알려 준 것으로서, 무엇 하나라도 이것이라고 고집할 것이 없다는 것, 따라서 사람은 이런 것에 대한 집착을 버림으로써 애증의 고뇌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을 가르친 것이다.
14 이러한 공의 이념에 도달한 불교는, 불교로서는 뒤에 발달한 대승불교이다. 그때까지 공은 다만 결핍을 뜻하는 말에 지나지 않았고 충실한 내용을 지닌 적극적인 실천과 연관되지 않았다. 따라서 영어에서 이 공을 empty 나 voidness라고 번역하는 한, 대승 불교의 근본 이념이라고도 생각되는 공의 참뜻은 이해하기 힘들 것이다. 공은 다만 고정적인 실체성을 부정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일체의 집착을 버리는 것과 함께 천마가 허공을 날 듯이 아무것에도 방해 받지 않는 완전한 자유에 도달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 실천적 이념이기 때문이다.
2. 공(空)과 반야(般若)
19 그런데 새로이 눈뜬 재가신자들은, 출가한 이들이 신자에게 주법의 보시까지를 포함하여, 무릇 주는 것의 가치를 특히 강조했다. 재가신자는 저마다 직업에 따라 생산 노동에 종사하고, 그렇게 하여 획득한 재물을 자기에게만 속하는 것이라 하여 독점하지 않고 사회적 인륜적인 것과 관련시키고 환원시킴으로써 재물에 대한 이기적인 집착을 부정하는 태도를 취했다. 이것은 재물을 가진 재가신자이기에 비로소 할 수 있었던 새로운 자기 희생이며, 구도자로서의 일반 신자가 노동과 생산을 매개로 하여 발견할 수 있었던 구제의 실천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즉 재가의 구도자는 기성 출가 교단의 이기적이고 독선적인 생활 태도를 비판하는 데서 출발했기에 구원의 실천으로서 먼저 물심양면에 걸친 보시를 강조한 것이지만, 그런 보시가 항상 자기 만족과의 싸움에서 진실한 것이 되어야 한다는 점을 스스로 경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거기에서 보시에 의해 사회에 사는 사람끼리의 협동적 상관관계가 깊이 자각되는 동시에, 더욱 높은 보시를 향해 비약할 것이 요구되었다.
62 반야바라밀의 공의 실천을 주제로 하여, 이것을 온갖 각도로부터 밝히고자 시도한 경전이 있으니, 그것이 곧 「유마경」이라고 하는 경전이다. 반야사상은 대승을 표방한 재가신자를 중심으로 성립했다. 「유마경」은 이 사상을 재가신자라는 자각에 서서 생활의 실제적인 면과 조화시키면서 어떻게 살리고 실천하느냐 하는 문제를 밝히기 위해 유마라는 재가신자를 중심으로 생활 속에 공의 실천의 본 뜻이 있다는 것을 나타내려 함으로써, 조작한 흔적 없이 대승 불교 운동이 지향하는 목표가 어디에 있는지를 말한 것이었다.
68 결국 유마라는 사람은 반야의 공의 정신을 체득하여 이것을 몸소 실천할 수 있거니와, 그것이 오랜 과거에 걸친 여러 부처에 대한 공양에 의해 얻어진 것임을 알게 된다. 이 사실은 유마가 어디까지나 부처의 가르침을 믿고 이를 따르는 재가신자의 입장에 머물러 있음을 보여 준다. 왜냐하면 공양이 음식이나 의복을 희사하는 행동을 뜻하는 한, 그것은 생산에 종사하여 재물의 축적이 가능한 재가신자가 아니고는 이룰 수 없는 까닭이다. 그리고 이것은 대승불교의 한 성격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일반 민중을 중심으로 하여 일어난 이 종교 운동은 전통적인 권위주의에 서서 번잡한 생활 규율이나 수행 방법을 묵수한 출가 교단에 대한 비판을 통해 자라난 것으로, 재가신자로서 가능한 부처에 대한 순수한 신앙 이라든지 깨끗한 마음에서 나온 공양이라든지 하는 것을 더욱 가치 있는 일이라고 파악했기 때문이다.
3. 부처와 보살
74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유마경」의 무대는 비사리이며, 이 도시의 암라수 우거진 정원에서 석가가 설법하시고 있는 부분이 제1부이다. 여기에 석가의 제자 8천 명을 비롯하여 보살이 3만 2천인, 그 밖에 천상의 신들이 다른 세계로부터 엄청나게 많은 군중을 거느리고 이 집회에 참가해서 가르침을 받고 있다는 설정이다. 그런데 대승 경전이 이와 같이 석가의 설법이라는 형식을 취하고 있는 것은 거의 공통된 점이다.
75 이 형식은 전통적 인습적인 권위주의에 사로잡혀서 민중의 구원을 망각해 버린 출가 교단이 가지고 있는 것과 같은 경전을 못 가졌던 재가신자들이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석가의 정신이라 믿고, 당연히 그랬을 것이 틀림 없다고 파악한 진리를 내세워 기록하기 위한 필요에서 채택한 것이다. 그들은 훌륭한 사상가의 출현을 기다려 거기에 재가신자들이 마음에 그리고 찾던 것을 점차 강조해 가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그들로서는 석가를 어떻게 이해해야 되느냐 하는 문제가 먼저 해결되어야 했다. 석가는 이미 수백 년 전에 이 세상을 떠나셨다. 석가가 살아 계시던 당시에는 직접 가르침을 받아서 혜택을 받을 수도 있었겠으나, 그 가르침을 받드는 승려들은 교단이라는 상아탑 속에 파묻혀서 세상 사람들을 구하고 인도하려고는 들지 않는다. "내가 죽은 다음에는 내가 말한 가르침을 등불로 삼아라."하고 유언하고 가신 석가의 가르침이 단순한 껍질뿐인 말씀이 되어 버리고, 구원을 위한 가르침이 구원을 망각하는 것이다.
76 그리고 그와 동시에 그런 구원의 담당자가 되고자 원해서 그를 위해 한결 같이 도를 구하여 수행에 힘쓴, 부처로서 깨닫기 이전의 석가, 즉 수도자로서의 보살에 대해서도 우러러 보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석가에 대한 추모와 동경을 통해 거기에 이상화된, 영원의 생명과 능력을 구비한 보살이 부처와 함께 창조되기에 이르렀다. 따라서 대부분의 대승경전은 앞서 이런 부처에 대한 이해를 깊이 간직하는 것에 의해 석가를 바로 파악하고, 진정으로 부처의 음성을 듣는 이로서의 보살을 거기에서 발견해 내려 했던 것이다. 따라서 「유마경」도 그 틀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6. 구원
202 여기에서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될 일은 진흙 속에 뛰어 들어가 악에 물드는 것이 그대로 악에 물들어 버리고 마는 결과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사실이다. 악에 물들어 있으면서도 동시에 그것으로부터 벗어나 있어야 되는 것이며, 말하자면 물들어 있으면서 물들지 않고, 물들지 않았으면서 물들어 있는 그런 점아 없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구하려다가 자기도 함께 빠져 죽는다면 구원도 헛된 노력으로 끝나게 되며, 도리어 자비의 구제라는 것이 얼마나 헛된 것인가를 보여주는 것 밖에는 안 될 터이다. 여기에서도 물들면서 물들지 않는다는 점이 자비의 근본적인 성격으로서 인정된다. 그리고 동시에 그 자비를 관철시키는 힘이 보살에게는 갖추어져 있어야 하는 것이다.
202 보살이 갖추는 그런 능력은 이미 밝혀졌듯이 '공'의 실천이라는 사실 속에 포함된다. 보살은 자기의 온 힘을 다해 공을 체득하여 공을 실천할 수 있는데, 그 사실이 그의 자비를 물들면서 물들지 않는 것으로 승화시키는 것이다. 아무것에도 집착함이 없는 공의 실천이 없고 보면, 그의 자비는 악에 물들기를 거부하든지, 아니면 아주 물들어 버리고 말든지 이 두 가지 중의 어느 것에 그칠 터이다. 그러나 공의 실천은 멈출 줄을 모른다. 그것은 정지 없이 계속하여 나아가지만, 꼭 이와 같이 보살의 자비도 물드는 것에 의해 다시 물들지 않는 것으로 정화를 계속하는 것이다. 물드는 것이 자기 정화가 되며, 그 정화는 다시 더 물들기를 요구함으로써 자기를 끝없이 정화해 가는 것이다. 이것이 보살이 걷는 깨달음의 길이며 그의 진실인 것이다.
7. 침묵
224 불이란 절대 평등의 통일이다. 그것은 대립으로서의 '이'를 초월하고 있으나, '이'가 없어져 있는 것은 아니다. '이'를 초월하는 동시에 '이'를 내포하고 있다. 아니 '이'를 초월하는 동시에 '이'에 돌아와 있다. '이'에 돌아와 '이' 속에서 활동하고 있는 것이며, '이'가 바로 불이가 되는 것이다. 앞에 나온 '비도를 행한다.'는 것도 이런 것의 일단이라고 할 수 있을 터이다. 부처의 깨달음을 상대성을 넘은 절대적 허무에까지 밀어 올리려는 듯이 보이는 것은 소승의 가르침이거니와, 대립을 넘으면서 대립 속에 작용하는 것으로서 포착되는 것이 대승의 가르침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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