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욱, 서민우, 현재환, 장하원: 21세기 교양 과학기술과 사회


21세기 교양 과학기술과 사회 - 10점
홍성욱 외 지음/나무나무


서문/21세기 교양, 과학기술과 사회

1/실험과 실험실

2/과학자, 과학 방법론, 과학 지식

3/현대 과학의 쟁점들 1

4/현대 과학의 쟁점들 2

에필로그

인류세의 정치생태학

 



 

서문/21세기 교양, 과학기술과 사회

7 ‘과학기술과 사회'(Science, Technology and Society, 약칭 STS)를 연구하는 우리는 이렇게 생각한다. 인간은 외부 세상을 새롭게 이해하고, 그 과정에서 외부 세상을 바꾼다. 바뀐 지식과 세계는 인간을 바꾼다. 나라는 한 인간의 본질이나 본성은 내 피부가 만든 3차원의 경계 안에 존재하는 그 무엇이 아니라, 내가 맺는 관계의 총합이다. 그 관계 중에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인간관계나 권력관계도 있지만 사람과 사물 사이의 관계도 존재한다. 내가 컴퓨터 없이는 글을 쓸 수 없다면 컴퓨터는 이미 나의 마음의 일부가 된 것이다. 내가 전기에너지 없이 살아갈 수 없다면, 전기에너지는 나의 주체성을 구성하는 일부이다. 따라서 인간에 대한 이해는 자연과 기술적인(technological) 사회에 대한 이해와 함께 진행되어야 하는 것이고, 자연과 기술적인 사회에 대한 이해는 인간이 맺는 관계망을 확장함으로써 인간에 대한 인문학적 성찰에 접목된다. 이렇게 생각하면 내가 맺는 관계의 총집합이 변하고, 이런 변화는 내가 고민해야 하는 문제와 내가 참여하는 실천의 영역을 새롭게 정의한다. 나는 세계를 만들고, 세계는 나를 구성한다.

 

1/실험과 실험실

1. 베이컨주의

23 베이컨주의 자연철학의 바탕에 깔린 자연관에 따르면, 자연은 무궁무진한 유용함의 보고로서 그 잠재성을 만개 시키기 위해서는 관찰과 실험을 통한 인간의 적극적 개입이 필요하다. 사람의 본심이 평정심을 유지할 때보다 어지러울 때 더 잘 드러나는 것처럼, 자연의 비밀도 인간이 인위적으로 조작하고 '못살게 굴어야' 베일을 벗고 본모습을 드러낸다고 베이컨은 믿었다. 베이컨은 이와 같은 탐구 활동을 신이 보장해준다고 믿었다.

 

2. 실험 공동체의 탄생

36 실험과학 자체가 사회적 시험의 대상인 시대에 실험과학을 정당화하는 일은 실험적 증거 이상의 정치를 필요로 했다. 그러므로 보일과 홉스의 논쟁은 자연과학자와 정치철학자의 논쟁이 아니었다. 둘은 지식과 정치적 조직의 문제를 함께 사고했다는 점에서 자연과학자이자 정치철학자였다. 그런 점에서 실험주의자들의 공동체가 열린 듯하면서도 닫힌 위계적 공간임을 지적한 홉스의 비판은 타당한 면이 있었다.

 

3. 실험과학의 탄생

49 실험이 복잡해질수록 사실은 아무런 해석이 가해지지 않은 중립적 사실이 아니라 특정한 과학 기구나 장치 그리고 그에 대한 해석을 통해서만 간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사실이 된다. 더욱이 새로운 실험 기구나 장치가 만들어지고 이것이 받아들여지는 과정은 종종 매우 논쟁적이고, 이 때문에 실험적 사실이 사실로서 받아들여지는 과정 역시 종종 지난한논쟁에 휩싸인다.

 

50 실험적 사실은 상세한 정황적 서술을 제공하는 보고서의 서술 양식 외에도, 이러한 네트워크에 속한 신뢰할 만한 전문가들의 증언이나 검토를 통해 반드시 해당 실험을 반복해보지 않고서도 그 신뢰도를 검증받을 수 있었다.

 

4. 실험실의 탄생

59 18세기 말엽이 되면 물리학 분야에서도 실험 기구와 실험 기법이 매우 정교하고 섬세해짐에 따라 독립적 실험 공간에 대한 필요성이 점차 증가했다. 화학 실험처럼 실험자에게 위해가 되는 경우는 드물었으나, 실험 자체의 정밀도가 높아짐에 따라 실험 조건을 주의 깊게 통제할 필요성이 커진 것이 주된 이유였다.

 

5. 실험자의 회귀

72 연구자들은 중력파의 특징은 무엇인지, 중력파 실험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등에 대해 어떤 기준들을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콜린스는 실험자의 회귀와 과학 논쟁이 종결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실험이나 이론이 아니라 과학자사회', 그 사회에 존재하는 관습이나 협상이라고 주장한다.

 

6. 과학의 공간, 공간의 과학

90 실험실의 역사는 그 탄생에서부터 실험실이라는 공간을 어떻게 조직할 것인가, 그 공간을 누구에게는 개방하고 누구에게는 개방하지 않을 것인가를 둘러싼 공간 관리와 통제의 역사이기도 했다. 실험실과 강연장을 공간적 · 기능적으로 변별함으로써 실험실의 산물이 지닌 인위성을 지우고 그 자연성 및 보편성을 설득하려 한 패러데이와 같은 이들의 지난한 분투나, 대학 실험실의 공간을 다양하게 분할하고 그에 맞게 학생들을 훈육함으로써 실험실 생활에 맞는 새로운 인간형을 길러내려 한 맥스웰과 같은 이들의 주의 깊은 고심은 이러한 긴 역사의 중요한 장면들이었다.

 

7. 실험실이라는 사회, 사회라는 실험실

113 무엇보다 19세기 실험실 혁명은 더 정밀하고 더 복잡하며 더 기술 집약적으로 변화해가는 실험실 기구나 장치의 발달 과정과 더불어 진행됐음을 주목해야 한다. 이는 실험실의 역사가 기술의 역사와 매우 밀접하게 얽혀 있었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실험실은 점점 더 다양한 노동력과 전문성을 요구하는 또 다른 복잡한 사회로 변모하고 있었다.

 

8. 동물실험

127 동물실험에 대한 학계의 입장은 3R 원칙으로 대변된다. 3R 원칙은 살아있는 동물 개체의 사용을 피하는 실험 방법으로의 대체(Replacement), 같은 양의 데이터를 얻는 데 사용하는 동물 수의 감소(Reduction), 마취 등을 통해 동물이 느끼는 고통의 완화(Refinement) 등을 위해 노력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기본 원칙을 바탕으로 관련 학회별로 동물실험에 관한 지침이 마련되어 있으며, 연구에서 활용된 동물의 사육, 관리 조건과 실험법을 논문에 상세히 기재할 것이 요구되고 있다. , 동물실험을 통해 얻은 연구 결과는 과학적 차원에서는 물론 윤리적 차원에서도 정당하다고 평가되어야 학계의 인정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2/과학자, 과학 방법론, 과학 지식

1. 과학자 데카르트

134 자연의 모든 현상은 물질과 운동에 의해서 설명될 수 있어야 했다. 물질에는 지구나 달처럼 눈에 보이는 물질도 있고 공간을 꽉 채운 미세한 물질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물질도 있었지만, 이 모든 물질은 신이 부여한 법칙에 따라 끊임없이 운동했다. 이것이 그가 주창했던 기계적 철학의 요체인대 『세계, 혹은 빛에 대한 논고』는 물질과 운동만으로 세계를 설명할 수 있음을 보인 책이었다.

 

2. 생리학자 데카르트

152 그리고 그는 외부 세상의 존재를 증명했다. 만약에 내가 감각을 통해 알 수 있는 외부 세상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신이 나를 속이는 것인데, 완벽한 존재인 신이 이런 속임수를 쓸 이유가 없기 때문이었다. 데카르트는 외부 세상을 구성하는 물질을 연장을 가진 실체라고 규정했는데, 이 물질의 특성은 공간을 점유하고(이것이 연장이란 의미였다) 운동을 한다는 데 있었다. 그런데 물질이 운동을 하는 이유는 그것이 활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태초에 신이 물질에 부여한 운동이 관성의 법칙에 의해서 지속되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데카르트의 기계적 철학에서 물질은 철저하게 수동적이고 죽은 것이었다. , 물질세계에는 영혼이 없었다.

 

3. 갈릴레오와 후원

178 메디치 가문이 갈릴레오에게 부여한 공식 직위는 '수학자 겸 철학자'였다. 파두아 대학의 수학자가 궁정에서는 이제 철학자가 되었고, 세상의 운동과 물질의 본질에 대해서도 철학자들과 동등하게 자유롭게 얘기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과학사학자 비아졸리의 용어를 빌리자면 갈릴레오는 메디치 궁정에서 수학자와 철학자라는 두 개의 '잡종적 정체성'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메디치 가문의 궁정 내에서는 수학의 언어로 모델이 아닌 실제 자연 세계에 대해서 논할 자격을 부여 받았다.

 

4. 과학과 법

184 지금은 과학의 거의 모든 영역에서 법칙이라는 개념이 사용되지만, 17세기 이전에는 이런 개념이 거의 없었다는 사실은 놀라운 것이다. 17세기 이전의 여러 학자들은 생명력이 없는 자연의 물질이 법칙을 따른다는 것이 어불성설이라고 보았다. 과학에서 자연의 법칙이라는 개념은 종교의 영역에서 '입법자로서의 신'과 법률의 영역에서 '(law)'의 개념이 결합하면서, 신이 자연에도 법을 부여했고 자연의 사물도 이 법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 받아들여진 결과였다.

 

5. 백과전서

191 계몽사조를 주도했던 계몽철학자들은 과거와는 달리 자신들의 시대가 과학과 철학에 의해 계몽된 시대라고 생각했고, 윤리적 문제에 관심이 많았으며, 사회가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간다는 진보에 대한 신념을 공유하고 있었다. 이들은 올바르고 도덕적인 생각이 사람의 행동을 바꾸고, 이렇게 바뀐 행동이 사회를 바꾼다고 믿었다. 이들의 신념이 집약된 프로젝트가 바로 『백과전서』였던 것이다.

 

6. 과학적 발견

213 과학은 상업적 이윤의 원천이기도 했다. 19세기 말 염료화학과 전기공학을 통해 산업계에 본격적으로 침투하기 시작한 과학자들은 메더워가 강연을 하던 1960년대가 되면 이미 많은 기업의 연구개발 연구소나 실험실에 자리를 잡은 상태였다. 문제가 없지는 않았다. 과학자들이 상업적 연구에 종사하기 시작한 이래 과학의 객관성과사적 이익의 추구는 자주 충돌했기 때문이다. 특히 특허를 둘러싼 우선권 논쟁은 19세기를 거치며 점점 중요한 화두가 되었거니와, 종종 무엇이 발명이고 무엇이 발견인가라는 쉽지 않은 논쟁을 일으키기도 했다.

 

214 과학 연구의 현실은 점점 집합적이고 조직적인 것으로 변해가고 있었으나 과학적 발견은 여전히 과학자 개인의 성취로 그려지고 있었다. 오늘날 과학적 발견은 더욱 공동 산물의 성격을 띠게 되었거니와, 그 생산의 현장을 지배하는 논리는 20세기 중엽 많은 과학자들을 우려케 한 정치적 논리가 아니라 상업적 논리다. 이러한 현실을 과학자 개인의 영감이나 '뜻밖의 행운'에 기댄 과학적 발견관만으로 맞설 수는 없을 것이다.

 

7. 패러다임

217 세계관의 변화와 같은 혁명적인 변혁을 지칭할 때 우리는 페러다임(paradigm)의 변화라는 표현을 쓴다. 여기서 패러다임은 미국의 과학철학자 겸 과학사학자 토머스 쿤이 그의 저서 『과학혁명의 구조』(1962)에서 과학의 발전을 설명하기 위해서 도입한 개념이다. 쿤에 따르면 패러다임은 두 가지 특성을 가진 두드러진 과학적 업적이다. 그 하나는 전문 과학자 집단을 끌어들일 만큼 신선하고 전례가 없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이렇게 구성된 전문가 집단에게 풀 문제를 던져줄 만큼 충분히 열려 있다는 것이다. 일단 어떤 과학자가 이런 업적에 해당하는 패러다임을 제시하고 많은 과학자들이 이를 수용하면 과학은 쿤이 정의한 정상과학(normal science)의 시기에 진입한다.

 

221 오래된 패러다임과 새로운 패러다임의 차이는 총체적이며 같은 잣대로 평가될 수 없다는 것을 쿤은 '공약 불가능성'이라는 개념으로 축약했다 예를 들어 쿤은 아리스토텔레스 패러다임과 뉴턴 패러다임 사이에 혹은 뉴턴 역학과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 간에 합리적인 소통을 어렵게 만드는 '공약 불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쿤의 저서에서 가장 논쟁을 불러일으켰던 것이 바로 이 지점이었다.

 

8. 객관성의 역사

228 19세기 중반 과학자들에게는 그간 얻어진 규칙성과 대칭성이 자연에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개입하여 이상화하는 과정을 통해 얻어진, 즉 다양한 변이들을 통합하려는 마음의 산물이라고 이해되었다. 이러한 충격적 깨달음 속에서 당시 학자들은 비대칭적 개별성과 복잡성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을 추구하게 되었다. 당대 유통되던 과학 도판을 보면 이상적인 형태의 자연이 아니라 개별적 특수성이 그대로 드러나 있는 이미지들이 가득 차 있다. 이제 바람직한 연구자라면 미학이나 매력적인 이론에의 유혹 도식화와 단순화예의 욕망에 빠지지 말아야 했다. 그대신 엄격한 프로토콜에 따라 각 개체에 대한 이미지를 자동적으로 생산하는 기계적 방식이 선호되었다. 이렇게 자연을 표상할 때 과학자의 주관이 개입되어서는 안 된다는 새로운 과학적 자아의 태도로부터 '기계적 객관성'이라는 새로운 덕목이 만들어진 것이다.

 

9. 현상을 구제하기

236 '현상을 구제한다'라는 말은 과학에서 자연현상의 원인을 규명하려고 하지 않고 눈에 보이는 현상만을 설명하는 그럴듯한 이론을 제안하는 것을 지칭한다이 개념은 프랑스 물리학자이자 과학철학자였던 피에르 뒤앙이 1908년에 『현상을 구제하기: 플라톤에서 갈릴레오에 이르는 물리학 이론의 관념에 대한 에세이』에서 제시한 개념이다. 그는 여기에서 특히 고대 천문학자인 프톨레마이오스가 원인을 밝혀서 현상을 설명하는 대신에 현상을 구제했다고 평가했다.

 

242 그가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지구가 태양을 공전하는 행성이라는 주장을 폈을 때 그는 단지 "현상을 구제하는" 일을 한 것이 아니라, 우주의 참된 실재와 참된 원인이 무엇인가를 탐구하는 것이 천문학자의 역할임을 역설한 셈이었다. 그는 자신의 우주론이 현상을 구제하는 또 다른 수학적인 방법이 아니라, 우주의 실제 구조에 대해서 얘기해 준다고 믿었다.

 

10. 암묵지

247 암묵지란 경험과 학습을 통하여 개인에게 체화되어 있지만 명료하게 공식화되거나 언어로 표현될 수 없는 지식을 뜻한다. 정형화되고 문자화된 지식인 형식지와 달리, 암묵지는 언어로 표현될 수 없는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지식이기 때문에 책이나 논문을 통해 습득될 수 없다.

 

250 암묵지는 문서를 통해 학습될 수 없으며 접촉을 통해서만 전수될 수 있는 지식이나 능력이다. 콜린스에 따르면 의도적으로 다른 과학자들에게 말해지지 않거나 과학 학술지의 공간상 싣기 어려운 세부 내용들도 암묵지에 해당하지만 때로는 실험에 성공한 과학자 자신조차 인식하지 못하는 암묵지도 존재한다. 어떤 암묵지는 해당 분야의 과학이 발전하면 인식 가능해지고 언어로 표현되기도 하지만, 또다시 새로운 실험이 실행되면서 그와 관련된 기술의 일부는 항상 암묵적 지식으로 남게 된다. 이러한 암묵지 때문에 특정한 실험에 성공하는 것이 어려울 뿐만 아니라, 그 실험에 숙달하기 위해 필요한 시간과 노력을 예상하기도 힘들다. 새로운 과학 지식과 기술을 배우는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바로 이러한 암묵지의 존재를 인식하고 인내심과 자신감을 갖는 것이다.

 

11. 과학자의 창의성

258 여러 과학사 연구들이 그간 천재의 순간적인 깨달음에 의한 것으로 신화화되어온 과학적 발견 사례들의 실제 과정을 밝혀냈다.

 

258 과학사 분야의 창의성 연구는 과학적 발견에 이르는 과정이 순간적인 깨달음에 의한 계몽이 아니라, 매우 복잡하고 지속적으로 진화하는 장기적인 과정임을 보여준다. 창의적인 과학적 발견은 백일몽이나 공상에서 나올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연구 과정에서 부딪히는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와중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3/현대 과학의 쟁점들 1

1. 루핑 효과

267 저명한 과학철학자 이언 해킹은 자연과학과 달리 인간 과학에서는 대상(인간)과 그에 대한 지식 사이에 심대한 상호작용이 일어난다고 설명하면서, 이를 '인간 종의 루핑 효과'라고 명명하였다. 인간과학에서 이전에 없었던 인간에 대한 새로운 범주, 즉 새로운 인간 종을 만들어내면 그러한 범주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만들어지며, 이렇게 만들어진 사람들은 다시 해당 과학 지식을 정당화하거나 변화시킨다는 것이다.

 

2. 생명과학과 인종

271 사회과학과 심리학, 의학 등에서 쏟아내는 인간 종은 가치를 함축하고 있으며, 사람들은 이러한 개념과 관련 사실들을 기반으로 계속해서 생각과 행동을 바꾸게 된다. 이처럼 정상(normality)과 이상(deviance)을 경계짓는 인간과학의 지식에서는 끊임없이 루핑효과가 일어난다.

 

3. 유전체학 시대의 인간 다양성

278 1950년 유네스코 성명이나 2003년 인간 유전체 프로젝트의 염기 서열의 최종 분석 결과 등은 유형학적으로 인종을 분류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했다. 인간은 모두 같은 호모 사피엔스 종이며, 99.9% 동일한 염기서열을 공유하고 있다. 비록 피부색은 다르지만, 그들이 서로 다른 유형이라고 말할 근거는 모두 부정된 것이다.

 

279 통계적 인종 개념은 인종 사이의 육체적 · 정신적 우수함이나 열등함을 위계적으로 구분하기보다 각 인종이 특정 질환에 대해 어떠한 차이를 보이는지를 묻는 데서 종래 유형론적 인종 개념과 구별된다고 할 수 있다.

 

291 생물지리적 조상은 해당 개인의 인종을 판별하는 것이 아니라 아프리카 출신 조상이나 유럽 지역 출신 조상의 비율이 얼마나 되는지를 판별하는 것으로, 이 개념은 인간 집단의 유전적 무리가 대륙적 분포에 상응한다는 연구와 함께 지리적 차이를 통해 보다 중립적인 형태로 인간 집단의 유전 다양성을 드러내고 예측할 수 있다는 주장이 강화되도록 이끌었다. 게다가 일부 연구자들이 이 같은 생물지리적 조상을 살피는 연구가 전통적인 유형론적 인종 개념이 적절치 않음을 드러낸다고 보고하면서, 생물지리적 조상은 중립적으로 인간 집단 간 차이를 드러낼 수

있는 도구로 인식되기 시작한 것이다.

 

4. 맞춤의학

302 미국 국립게놈연구소는 보다 분명하게 "질병의 예방, 진단, 치료에 관한 의사 결정을 내리는 도구로 개인들의 개별적인 유전적 프로필을 사용하는, 새로이 부상하는 의학적 실천"이 맞춤의학이라고 말한다. 우리 정부 또한 대체로 이러한 정의를 따른다.

 

5. 근거 중심 의학

315 근거 중심 의학은 무작위 대조군 연구를 실시하거나 축적된 의학적 보고들에 대한 메타 분석을 수행하는 작업 등과 같은 체계적인 연구 결과를 통해 얻어진 과학적 근거를 바탕으로 판단자가 자신의 의학적 판단을 검토하는 행위로 정의된다. 현재 근거 중심 의학은 영미권 국가의 보건 의료의 중심 담론으로 자리잡았고, 우리나라에서도 의료계 안팎에서 이를 정착시키려는 노력이 계속되고 있다. 한국 의료계에서는 2000년대 초반부터 근거 중심 의학과 관련된 연구들을 수행하여 이에 기초한 진료 지침들을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의학 교육의 핵심 요소로 근거 중심 의학을 포함했다.

 

6. 뇌과학과 법

331 과학과 법의 상호작용은 뇌영상의 가치를 결정할 뿐만 아니라 뇌과학의 연구 주제와 방향을 좌우하기도 한다. 그간의 뇌과학 연구들은 인간의 책임이 어떻게 감소되는가의 문제를 다루는 데 집중돼왔다. 현재의 뇌영상 기술은 어떤 사람이 특정한 정신 상태를 위한 능력이 부족하거나 없다는 것을 뒷받침하는 증거를 제공할 수 있는 수준은 되지만 그 행위에 대한 책임을 밝히기 위해 그 정신 상태의 내용까지 판독해내기는 어렵다.

 

332 , 뇌과학의 연구 궤적은 관련 학문 분야의 연구 전통과 기술 수준, 법 영역의 행위자들의 필요와 요구, 그 밖의 사회적 · 문화적 맥락이 얽히면서 만들어지고 있다.

 

7. 생명가치

338 조직 검체들뿐만 아니라 줄기세포 연구의 중요한 재료가 되는 여성 난자의 난모세포, 제대혈, 영아 조직과 임상 시험에 동원된 피험지들의 건강 모두가 생명가치를 지닌 대상이 된다 캐서린 왈비에 따르면 생명가치를 지녔다는 것은 두 가지 뜻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그것이 수사적 의미든 실제적으로든 간에 생명과학 연구의 재료로서 인간 건강에 기여할 수 있는 대상이라는 뜻이고, 다른 하나는 이 대상이 상업적 이익을 생산할 가치를 지녔다는 의미이다.

 

3/현대 과학의 쟁점들 2

1. 탈정상과학

349 쿤이 제시한 정상과학과 달리, 탈정상과학은 사실이 불확실하고, 가치가 논쟁의 대상이 되며, 파급력은 크지만 동시에 신속한 결정이 이루어져야 하는 주제를 다루는 과학이다. 기존의 기술적 문제들은 보통 응용과학에 의해서 해결되었고, 이보다 조금 더 불확실성이 큰 문제들은 '전문적 자문'에 의해 해결된다. 그렇지만 GMO, 기후변화나 원자력발전같이 불확실성이 큰 위험의 문제에는 이런 전통적인 방법으로는 접근할 수 없는데, 이런 문제를 다루는 것이 탈정상과학이었다. 라베츠와 펀토위츠는 불확실성이 팽배한 탈정상과학의 상황에서는 과학의 주체가 과학자 공동체가 아니라 해당 이해 집단과 시민을 포함한 확장된 공동체로 바뀌고, 과학적 사실이 관련 시민과 주민의 경험과 역사를 포함하는 확장된 사실로 확대된다고 강조했다.

 

2. 과학 논쟁

358 상식과 달리, 과학적 문제와 관련된 논쟁은 과학 대 비과학, 옳은 과학 대 틀린 과학, 합리성 대 비합리성의 대결이 아니다. 대개 과학 논쟁은 과학 전문가 대 과학 전문가의 대결이자, 과학적 증거에 대한 서로 다른 해석과 가정의 충돌이다. 과학은 온전히 합의된 지식만으로 이뤄져 있어 특정 논쟁에 해답을 주는 대상이 아니라 항상 논쟁 중이고 충돌 중인 것으로, 기실 과학의 건전성은 이 끊임없는 논쟁에 기초한다.

 

3. 언던 사이언스

371 특정 영역에서 우리가 얼마만큼 알고 있는지에 대한 한계를 돌이켜보는 것이 무지의 상태이다. 이 무지의 영역에서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것들은 다시 연구 의제가 되어 미래의 지식을 목표로 하는 비지식이 되지만, 중요하지 않거나 연구의 수행이 지식 생산자의 특권을 위협한다고 생각될 때 이러한 주제는 연구되지 않은 채로 잊혀진다. 그로스는 이것을 네거티브 지식이라고 명명했는데, 언던 사이언스든 이런 네거티브 지식에 해당된다. 예산 담당자나 연구자들이 사소한 문제로 간주하면서 그에 대해 탐구하지 않고 잊혀지는 주제인 것이다.

 

4. 기후과학의 확실성과 불확실성

384 빙하문제는 인간에게 절박한 문제를 가져올 수 있는데, 지금 수억 명의 사람들이 빙하로부터 식수를 해결하기 때문이다. 만약에 100년 후 빙하가 거의 사라진다면 조만간 대규모 식수 설비를 새롭게 지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빙하가 거의 사라지지 않는다면. 이러한 정책은 불필요하며 예산 낭비에 불과할 것이다. 불확실성을 어떻게 평가하고 받아들이는가에 따라 정책과 예산이 요동친다.

 

5. 위험과 위험사회

391 복잡한 기술 시스템과 관료제가 결합해서 낳은 것이 독일의 사회학자 울리히 벡이 체계적으로 정리한 '위험사회'이다. 위험사회는 우리가 지금까지 위험을 극복하기 위해 발전시켰던 도구가 더 큰 위험을 만들었다는 역설에서 기인한다. 인류는 과학혁명과 산업혁명을 통해 홍수나 가뭄 같은 자연적 위해를 극복하는 과학기술을 발전시켰는데, 지금의 위험사회는 바로 이러한 목적으로 발전시킨 과학기술이 새로운 위험을 만드는 사회이다. 따라서 지금의 위험에는 뚜렷하게 대응할 방법이 마땅치 않다. 게다가 전문가들의 의견이 일치하는 경우도 드물다.

 

6. 사전주의 원칙

398 거버넌스는 특정 차원의 문제들을 관리하는 과정 방법 그리고 구조와 행위자 사이의 상호작용 패턴 혹은 메커니즘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일국적 차원에서 거버넌스는 정부와 비정부 행위자들을 포함한 집합적 의사 결정에 대한 구조들과 과정들을 가리킨다. 위험 거버넌스는 위험 관련 의사 결정과 관련된 거버넌스를 의미하는데 현재 과학정책적 차원에서 위험 관리 논의를 주도하고 있는 국제 위험 거버넌스 위원회는 위험 거버넌스를 어떻게 관련있는 위험 정보가 수집되고, 분석되며 의사소통되고, 관리 결정이 이루어 지는 지와 관계된 행위자들과 규칙들, 규약들, 과정들과 메커니즘의 총체를 포함하는 것으로 정의한다. 위험 거버넌스의 대표적인 방법이 사전주의 원칙이다. 사전주의 원칙은 보통 과학적으로 불확실할 경우 예방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원리로 이해된다.

 

7. 위험 분석, 그 역사와 모델

408 위험의 최종 결정에서는 항상 위험 관리 단계에서의 성과가 피드백을 통해 수정되어야 했고, 따라서 이런 피드백을 고려하면 위험 평가와 위험 관리의 두 단계는 일방적인 단계가 아니라 상호작용을 하는 단계가 되어야만 했다 게다가 위험 결정이 효율적이기 위해서는 위험 관리 과정에 관여하는 여러 집단들 즉 전문가 집단, 규제 기관, 주민들, 산업체 관계자들이 적절하게 대표되고 참여하는 것이 필수적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특히 시민이나 주민들이 실질적으로 참여하기 위해서는 이들이 전문가 집단에게 신뢰를 가지는 것이 관건이었다.

 

8. 신뢰와 위험 커뮤니케이션

415 과학자가 신뢰를 얻기 위해 필요한 요소는, 첫 번째 범주에 해당하는 것으로는 과학 연구의 합리성, 실험적 증거에 의한테스트의 공정성 등이 포함되며, 두번째 범주에는 과학자 공동체가 공유한 규범, '조직적인 회의주의'(organized skepticism), '지식의 공유', '공평무사함' 등을 준수하는 태도가 포함된다.

 

415 1970년 대 이후 서구에서는 과학자들의 잘못과는 무관하게 전반적으로 과학에 대한 대중의 신뢰가 떨어졌다. 거기에는 대중의 교육 수준이 높아지고, 특정 집단의 인식론적·사회적 권위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태도가 확산되며, 과학이 위해를 끼칠 수 있다는 생각이 퍼졌기 때문이다.

 

9. 왜 위험 관리에 시민 참여가 필요한가

422 과학자들은 자신들의 전문적 지식은 '안전한' 결과를 도출하기에 '충분히' 확실한 것이라고 여기는 반면 대중들은 복잡한 위험사회라는 맥락에서 과학적 논쟁 및 이에 대한 상이한 입장들을 보다 폭넓게 사고하는 편이다. 따라서 과학자들은 전문 지식의 내용, 그것의 정당성 및 실험 방법에 초점을 맞추는 반면 대중들은 전문적 지식에 바탕을 둔 '규제과학' 전반을 염두에 두는 것이다. 이러한 차이는 대중과 전문가의 소통이 신뢰를 바탕으로 하고 장기적인 합의의 과정이 되어야 함을 함의하고 있다.

 

10. 시민의 전문적 지식

438 최근 과학기술학자들은 위험 논쟁에 참여한 시민들이 전문가들이 갖지 못한 전문성을 획득한 사례들을 보여주고 있으며, 이에 입각해서 전문 지식과 전문성이 소위 전문가라고 불리는 사람들의 전유물이 아님을 주장하고 있다. 이런 주장은 위험 거버넌스에서기술적 국면과 정치적 국면'을 나누어서 전자는 전문가들이 주도하고 후자에는 시민들이 참여하는 전통적인 위험 분석 모델에 도전한다. 시민들이 전문성을 획득할 수 있다면 '기술적 국면'이 꼭 전문가들에게만 맡겨져야 할 필연적인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11. 규제과학

451 규제 과학은 정책과 과학 양자에 맞닿아 있는 독특한 종류의 과학이다. 이 모델 하에서는 규제와 관련한 과학 지식을 요청하는 정부 입안자와 과학자가 서로 독립된 정책과 과학이란 영역에 있는 게 아니라, 규제에 관한 지식을 생산하기 위한 규제과학이라는 혼종적인 영역에 존재한다. 이 규제과학을 통해 도출되는 결과물은 정부, 기업 대중을 포함한 여러 이해 당사자들에게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이를 둘러싸고 끊임없는 과학적 사실 논쟁이 자주 벌어지며, 그러므로 사실 입증 과정과 절차가 일반적인 과학자 공동체 내의 논쟁과는 사뭇 다른 양상으로 전개된다.

 

12. 적정 기술

459 적정기술이란 그 기술이 사용되는 사회 공동체의 정치적 · 문화적 · 환경적 조건을 고려해 해당 지역에서 지속적인 생산과 소비가 가능하도록 만들어진 기술로, 인간의 삶의 질을 궁극적으로 향상시킬 수 있는 기술을 가리킨다.

 

에필로그

500 인간과 환경을 구별하고 인간의 생존을 환경의 제약에 적응하는 일에 달린 것으로 보는 통속적 다윈주의적 관점과 이 구별 자체를 철폐하고 인간의 의식적 행위가 지구 시스템 전체의 운명을 좌지우지하기에 이에 대한 책임을 강조하는 인류세의 관점은 판이하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과학자와 공학자들의 … … 벅찬 임무"를 언급한 크뤼천의 생각이나 '지구시스템의 승무원'이라는 개념은 우주선 지구를 운용할 공학자와 디자이너들을 믿은 풀러의 생각과 얼마나 다른 것일까? 또한 '지구 시스템'이란 아이디어는 냉전의 이론가들이 생각한 '관리 가능한 닫힌 세계'라는 관념과 얼마나 다른 것일까? 오늘날 '지구 시스템'은 과연 컴퓨터 시뮬레이션으로 완벽히 모사가능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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