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마키 고시로: 화엄경


화엄경 - 10점
다마키 고시로 지음, 이원섭 옮김/현암사


1. 세계관

2. 부처의 세계

3. 보살의 인생 행로

4. 보살에서 부처로

5. 영원한 구도





1. 세계관

9 『화엄경』은 석존의 깨달음을 그대로 나타낸 경전이라고 일컬어진다. 그 깨달음이란 한 마디로 무엇인가? 이를 델포이의 신탁에 견주어 말한다면, 자기 스스로를 안다는 일이 무한하게 확대되어 세계가 세계 자신을 인식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석존은 한 사람의 역사적 인물이었거니와, 그가 눈뜬 세계는 석존이라는 개인을 초월하고 포용하여, 한없는 세계가 한없이 깊은 광명에 의해 비쳐지고 구명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그 한없는 세계의 실상은 『화엄경』의 내용이요 석존의 깨달음이며, 한없이 깊은 광명이란 『화엄경』의 중심인 부처 비로자나불로서 영원의 부처, 곧 석존의 깨달음의 본체인 것이다. 비로자나불이란 바이로차나(Vairocana) 즉 광명의 부처라는 뜻이다.


24 자기 혼자의 선정으로부터 『화엄경』의 대선정으로 전환하는 데는 바로 이 대목이 계기가 된다. 자기 혼자의 선정은 아무리 이를 심화시켜도 동시에 자아 관념을 깊게 하는 것밖에 안 되거니와, 눈을 돌려 이 관념의 실태를 이해한다면 우리는 옴쭉도 않은 채로 큰 광명•큰 선정으로 옮겨 갈 수 있는 것이다. 이 크나 큰 광명이 곧 비로자나불이다. 또 자기의 좁은 영역을 넘어선 세계 그것, 우주 그것, 무한히 활동적인 그것, 그것이 곧 비로자나불이다. 다시 또 자기 혼자의 선정이 아니라 크나 큰 선정 세계 그것 • 우주 그것의 대선정, 그것이 곧 비로자나불이다. 또 자기 혼자의 작은 지혜나 자비가 아니라 우주 그것의 크나큰 자비, 그것이 곧 비로자나불이다.


29 법장에 의하면 해인이란 진여본각을 말한다. 진여본각이라 함은 본래의 깨달음•본래의 진리의 세계이며 곧 비로자나불의 세계이다. 비로자나불온 지금까지 말한 바와 같이 세계 그것 우주 그것이며 또 대선정이다. 여기서는 그 비로자나불의 세계가 망망 대해에 비유된 것이다


29 우리는 여기에서 선정의 의미를 고쳐 생각해 보아야 한다. 선정이란지금껏 말해 온 바와 같이 결가부좌하여 자세를 바로 하고 호홉을 조절하고 심신을 통일하여 삼매에 들어가는 일이다. 그러나 화엄경의 선정은 그런 자신의 선정을 통해 우주 자체의 대삼매에 접하고 그것에 동화되는 일이다. 말하자면 우리가 스스로 선정에 들기에 앞서, 사실은 비로자나불 곧 대우주 자체가 대삼매에 들어가 있는 것이다. 우리가 알든 모르든 간에 우주 자체는 영겁의 옛날로부터 지금까지 삼매에 들어 있다. 그리고 이런 사실은 스스로의 선정을 통해 우주에 접하고 우주에 동화됨으로써 인식할 수 있게 된다.


33 우리는 『화엄경』 중의 대선정을 대표하는 해인 삼매에 대해 이상과 같이 구명을 시험해 왔다. 해인 삼매란 요컨대 우리의 모든 일상 경험이 그대로 비로자나불(우주 자체)이라는 크나큰 바다 위에 비치고 있다는 사실을 뜻한다. 경험한다는 것은 곧 비친다는 이야기이다. 스스로의 경험이면서 그대로 비로자나불의 대삼매 속에 포용된다는 것 그것이 곧 해인 삼매요, 『화엄경』의 대선정이다.


34 『화엄경』에서 기본적인 세계관이 되는 것은 해인 삼매이다. 그것은 우주의 삼라 만상이 우주 자체의 대삼매, 비로자나불의 대삼매 속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노닐고 있다는 뜻이다. 따라서 우주 안의 어떤 사물이라도 그 자신의 고정적인 근거를 지니고 있지는 않다. 모든 존재는 저마다 이 대삼매에 의거하고 그 바다 위를 떠돌아 다니고 있다. 바꾸어 말하면 어떤 존재라도 자기만의 영역에 유폐됨이 없이 끝없는 대삼매 안에 해방되어 있는 것

이다. 또는 무엇이 존재한다는 것은 그것이 대삼매 안에 있다는 것을 뜻하는 동시에 거꾸로 또 그것이 대삼매를 반영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고 말할 수 있다.


37 화엄 즉 꽃으로 꾸민다는 것은 부처의 깨달음을 가져올 힘을 가지고 있는 보살의 행위가 사실상 완성되고 충족되어 진리에 합치함을 뜻한다. 그리고 이것에 마음을 오로지하여 주객 • 상대의 관계를 초월하는 일이 곧 화엄삼매이다.


37 화엄 삼매는 이와 같이 보살의 행위가 완성되어 가는 과정을 나타내고 있다. 보살이란 진리를 추구하는 우리 자신이므로 화엄 삼매는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 어떻게 행위 할 것인가, 그리고 그 생활 방식 • 행동 방식이 드디어 진리에 합치하여 비로자나불의 세계에 융해 • 몰입되어 가는 과정을 표시하는 것이다. 해인 삼매가 비로자나불의 세계관이라 한다면 화엄 삼매는 그 세계관에 의거한 보살의 인생관 또는 그 인생 행로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39 비로자나불에서 일어나 비로자나불로 돌아가는 것은 우리가 최고의 깨달음(진리)을 한없이 추구하고, 또 한없이 그것에 귀의 • 순종해 갈 것을 뜻하며, 사회적 실천으로 발길을 내딛는 것은 형태 없는 비로자나불을 사회 안에 실현해 간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39 최고의 깨달음(곧 비로자나불)에 한없이 귀의 • 순종하는 일과 최고의 깨달음을 한없이 사회적으로 실현해 가는 일은 사실상 분리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혼연일체를 이루는 것이라 보아야 할 터이다. 그러나 특히 여기서는 후자인 비로자나불의 세계를 한없이 사회적으로 실천해 가는 일을 화엄 삼매라고 부르고 있다. 그것은 우리가 부처님의 세계를 꽃으로 꾸며 가는 일이다. 꾸미는 것을 불교 경전에서는 장엄이라고도 한다.


2. 부처의 세계

44 부처님의 지혜의 광명은 모든 중생의 몸 속까지 꿰뚫어 비추고, 그 깨달음의 음성은 세계의 구석구석까지 울려 퍼지는 것이다. 결국 부처님의 깨달음은 부처님 자신만의 문제가 아니라. 전 세계를 청정하게 하고 전 세계를 비춘다는 점에 그 참뜻이 있다고 말할 수 있겠다. 깨달음의 세계란 우리의 세계를 떠난 특별한 경지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다름 아닌 이전 세계의 장엄(장식)인 것이며 전 세계의 실상인 것이다.


58 첫째는 비로자나불의 세계가 한없는 인연에 의해 성립되어 있다는 것, 둘째는 그 한없는 인연의 세계가 비로자나불에 의해 정화되고 장엄(꾸미는 것)되어 있다는 것, 그리고 셋째는 비로자나불의 세계란 특별한 부처님의 세계가 아니라 사실은 우리 자신의 세계를 말한다는 것이다.


72 이 세계의 활동은 다만 일방적으로 부처님 쪽으로부터만 작용해 오는 장엄이며 활동인 것은 아니다. 세계에서의 부처님의 활동은 실로 우리 자신의 끝없는 업력과 무한의 과거에서 무한의 미래에 걸쳐 윤회하고 윤회하는 불가사의한 업해를 소재로 삼고 있다. 부처님의 활동은 우리 자신의 끝없는 업해와 업력을 떠나서 있는 것이 아니다. 아니, 드디어는 그 업해야 말로 부처님이 활동하는 장소이며, 업력이야말로 그 활동 자체라고 하여야 될 것이다. 그런 까닭에 우리 보살의 한없는 진리 추구와 그 사회적 실천이 비로자나불 자체의 세계의 광경을 표현하는 일이 된다. 바꾸어 말하면 이런 보살의 활동이야말로 『화엄경 』의 전체라고 말해도 좋다.


77 여기에는 소년의 끝없는 보리심(궁극의 진리를 구하는 마음)이 나타나 있다. 소년은 나와 내 몸에 엉키는 모든 것을 내던지고 궁극의 진리를 끊임없이 추구한다. 그러나 그는 다만 혼자서 그러는 것이 아니다. 무한한 비로자나불의 크나큰 바다에 배를 내어 친히 부처님을 우러러보면서 그 불력에 인도되어 구도의 배를 달리고 있는 것이다. 이 소년에게 준 부처님의 마지막 말씀은 의미 심장한 바가 있다. "태만한 사람은 깊은 방편의 바다를 이해하지 못한다. 노력 •정진의 힘이 성취됨으로써 부처님의 세계는 정화되어 가는 것이다."


3. 보살의 인생 행로

84 보리심이 없다면 보살로서 실격이며, 근본적으로 불교인이라 할 수 없게 된다. 우리는 먼저 보살로서 끝없는 비로자나불에 귀의하면서 궁극적 보리심(무상 보리심)을 일으켜야 한다. 이것이 보살의 가장 기본적인 소원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것이 자기 혼자서만 보리심을 일으키는 일을 가리키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일체의 중생과 함께 일으켜야 하는 것이다. 자기 혼자 깨닫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일체의 중생과 함께 깨닫고자 원하는 것이다. 대승 불교에서는 자기만의 이익은 아무리 존귀한 것이라도, 또한 그것이 아무리 진리라 해도 무가치하다는 것을 명확히 단언한다. 일체 중생의, 사회전체의 이익이 아니면 궁극의 진리는 아니라고 강하게 주장하는 것이다.


85 기독교나 서양 철학이나, 또는 과학 일반이거나 때로는 무종교까지라도, 거기에 도가 있고 진실이 깃들어 있는 한 그런 것들 모두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니 우리네 보살은 주의 • 주장의 여하를 불문하고 자유로이 진리의 집에 들어가 대해 같은 지혜를 얻자, 그리고 그 지혜의 바다를 모든 사람들에게 미치도록 하자, 이것이 둘째 소원이다.


85 인간은 주의 • 주장 • 계급 • 교양 • 신분등이 가지각색이지만, 어쨌든 우리가 인간인 한 서로 화목하여 반목하지 않고 방해가 되지 않게 살고 싶다는 것이 보살의 셋째 소원이다.


129 우리가 보는 것 • 듣는 것 • 접하는 것 그런 것들 모두가 불도로 나아가는 기연이 되지 않는 것이 없다. 그것이 순연이든 역연이든 모두 그렇다. 그리하여 순연일 경우에는 그것을 연장시킴으로써 미혹을 초월하며, 역연일 경우는 그것으로부터 떠남으로써 미혹을 극복하려 든다. 따라서 재가자든 출가자든 우리가 인간인 한은 일상 생활의 다반사를 통해 불도를 닦아 갈 것이 요망된다. 그것이 곧 보살도의 기본적인 생활 방식이다.


4. 보살에서 부처로

140 보살행의 마지막 태도는 회향(廻向)이라는 관념이다. 회향이란 자기가 얻은 바 공덕을 돌리는 일이다. 무엇에 돌리느냐 하는 점에서 세 가지 회향이 구분된다. 즉 보리 회향 • 중생 회향 • 실제 회향이다. 보리 회향이란 자기가 닦은 공덕을 보리(깨달음)를 위해 회향하는 것이고, 중생 회향이란 그 공덕을 중생에게 회향하는 것이며, 실제 회향이란 그 공덕을 궁극적인 세계 즉 열반에 회향하는 것을 말한다. 어느 것이거나 회향이란 자기 공덕을 다른 데로 돌리는 것이어서, 그러기에 자기 쪽에는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다는 점에 특징이 있다. 자기에게 무엇 하나라도 남기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보살행의 완성이 아닌 까닭이다.


236 이 글을 읽고 우리는 그것이 보살 개인 세계의 일이 아니라, 사실은 부처님의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임을 알게 된다. 여기서는 보살 개인의 인격은 지양되어, 오로지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부처님 세계의 사실에 자기의 전체를 융합시키려 하고 있는 것이다.


237 부처님의 세계의 사실이란 무엇일까? 그것이 곧 앞에서 든 바, 한 개의 털끝에서 행해지는 무수한 부처님의 무수한 중생의 무수한 마음가짐에 대한 무수한 설법이다. 그것은 곧 비로자나불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사실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 세계의 사실은 자기 자신 전체를 공(空)으로 돌림으로써 오직 그것에만 귀를 기울이는 수밖에 없다. 법을 듣는 것이 그대로 대선정이 되며, 대선정이 바로 법의 광명이 되는 것이다. 보살은 한 찰나 사이에 이런 부처님들의 모든 설법을 듣고 법(진리)의 광명을 얻고자 한다. 그리고 그것에 의해 한 찰나 사이에 모든 중생을 기쁘게 할 수 있는 지혜의 광명을 얻고자 한다. 이것이 보살의 크나 큰 염력의 성취이다.


5. 영원한 구도

249 보살(bodhisttva)이란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깨달음을 추구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것이 보살 본래의 성질이며 자격이다. 깨달음을 추구한다는 것은 깨달은 사람이 되고자 힘쓴다는 말이다. 깨달은 사람이란 곧 붓다(buddha)이다. 따라서 붓다(부처)가 되고자 애쓰는 것이 곧 보살의 구도 정신이 된다.


249 『화엄경』에서는 붓다라고 하면 으레 일체 제불을 말하며, 일체 제불이란 결국 비로자나불을 가리킨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비로자나불이란 빛의 부처라는 뜻이거니와, 그렇다고 특별한 세계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바로 현실 세계 • 우주 자체 • 자기 자신이 바로 비로자나불인 것이다.


250 비로자나불이란 그런 우리를 싸고 있는 세계 자체이며 끝없는 광명의 바다이다. 우리는 언제나 비로자나불의 세계에 있으면서도 그것을 자각하려고 하지 않을 뿐이다. 이에 대해 보살이 부처가 되고자 노력하는 것은 알고 보면 부처님 속에서 부처님에 의해 지탱되고 재촉 받으면서 끝없이 도를 구하는 일이다. 보살의 구도는 부처님의 세계를 실현코자 하는 노력이며, 바꾸어 말한다면 자리행(스스로 깨닫고자 함)과 이타행(남을 깨닫게 하고자 함)의 실천이다. 따라서 중생이 존재하는 한 보살의 구도는 끝나는 법이 없다. 그것은 부처님의 세계를 실현해 나가는 영원의 구도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보살의 정신이 『화엄경』의 마지막 장 입법계품에 나타나 있다. 그것은 선재라는 소년, 즉 선재 동자가 구도하는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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