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오민: 불교학과 불교
- 책 밑줄긋기/책 2012-22
- 2019. 11. 26.
불교학과 불교 - 권오민 지음/민족사 |
제10장 5종성론에 대하여
제1장 무엇을 깨달을 것인가
18 불교는 결코 단일하지 않다. 불타의 깨달음으로부터 비롯된 불교는 결국 인간 이성의 역사와 함께하였다고도 할 수 있다. 서로 대립하기도 하였고, 지양하기도 하였으며, 종합하기도 하였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불타의 말씀이 그의 깨달음을 근거로 한 가설적 성격을 띠기 때문이다. 말씀이 바로 깨달음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는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깨달았던 것인가? 2500년에 걸친 불교사상은 바로 바로 '무엇을 어떻게 깨달을 것인가'에 대한 치열한 탐구와 해석의 도정이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제2장 교학과 종학
40 동아시아의 불교사상가들이 생각한 최고의 진리는 항상 현실 그 자체를 절대적 이상으로 인식하는 것이었다. 떠남과 초월로부터 복귀와 내재, 아니 떠남과 복귀, 초월과 내재라는 구분조차 허용하지 않는 상즉 무애의 세계를 추구하였다. 차별적 분별을 거부하는 이러한 일련의 불교사상을 성종(性宗)이라 하며, 그 단초는 《대승기신론》이었다. 이는 필경 비록 의식상에 투영된 것이라 할지라도 현상으로 드러난 사사물물의 온갖 차별상에 대해 논의하는 유식이나 이를 모두 공이라고 주장하는 중관과는 다른 것이었다. 엄교판에 의할 것 같으면, 성종은 대승의 완성점이며, 유식과 중관은 대승의 시작에 불과하다.
44 이런 면에서 한국불교는 좀더 지적으로 성숙할 필요가 있으며, 그것은 근본적으로 강원의 교과과정과 결부된 문제이다. 오늘날 강원의 교과과정은 《금강경》을 제외한다면 중국선종서 내지 성종 일색이며, 《금강경》 또한 불교사상사라는 관점을 완전히 배제한 채 혜능과 결부시켜 이른바 공소현의 진리인 진공묘유로 이해하는 실정이다. 한마디로 《기신론》 이전의 불교, 유식도 중관도 아비달마도 사라져버렸다.
54 초기불교는 단일 보편의 영원한 존재인 아트만에 근거한 인도 전통의 세계관을 거부하고, 세계란 다수의 원인과 조건에 의한 것으로 무상과 무아가 진실임을 주장하였다. 아비달마 불교에서는 이른바 일체법이라 일컬어진 그 같은 원인과 조건을 더욱 엄격히 분별하고 그것의 실유를 주장하였으며, 반야공관에서는 이를 비판하였고, 유식에서는 다시 이러한 공관에 근거하여 일체법은 마음에서 비롯된 것임을 천명하였다. 그리고 여래장에서는 이를 종합하여 공과 불공을 마음의 두 측면으로 간주하였다.
54 화엄종에 의하는 한 아비달마는 사법계를, 중관과 유식은 이법계를, 《기신론》은 이사무애법계를 주장하지만, 《화엄경》에서는 사사무애법계를 주장한다. 불교학이나 사상사적 입장에서 본다면, 여기에 대소나 승렬 혹은 권실의 신념이 개입될 여지는 없다. 이는 모두 '진실'의 추구이기 때문이며, 각각의 교학체계는 그 전제(출발점)가 다르기 때문으로, 후자는 당연히 전자를 토대로 하여 비판적으로 발전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만약 어떤 한 교학 체계에 대소 등의 신념을 개입시킬 경우, 도그마에 떨어져 다른 교학 체계는 물론이고, 그것이 원래 추구하려고 하였던 진실 또한 보기 어렵다.
55 불교의 목적은 문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체적 반성과 그에 따른 세계에 대한 참다운 인식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주장(해답)에 앞서 그것의 문제를 찾지 않으면 안된다. 혹은 어떤 특정의 종의(宗義)에서, 선입견에서, 근거 없는 신념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안 된다. 자유롭고 독립된 탐구가 결여될 때 진정한 교학의 연구는 이루어질 수 없다.
60 종학은 전통과 신념에 따른 것으로, 교학과는 구분되지 않으면 안된다. 그것은 자신이 선택한 깨달음의 길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할지라도 종학은 교학에 기초하지 않으면 안되며, 종학의 신념이보다 강화되기 위해서는 그것이 교학의 궁극적인 귀결점임을 밝혀내지 않으면 안 된다. 불교 전통에서 신념(믿음)은 확신(결정적 판단)의 귀결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이른바 교판이었다. 만약 그렇지 않고 다만 맹목적인 이해와 추종만을 요구할 경우, 전통과 신념은 어느 순간 균열상을 드러내게 될 것이고, 다른 교학 체계가 비집고 들어와 어느 순간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될 것이다.
제3장 불교학과 불교
80 초기불교에서 직접적으로 진리에 대응하는 술어는 4성제의 '제'이다. 그것은 말그대로 '네 가지 거룩한 진리'로서, 숲속에서 코끼리 발자국이 제일이듯이 일체법 중의 제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4성제는 대승의 반야공관에 의해 방편설로 전락하고 말며, 공관 역시 유식의 도리를 드러내기 위한 과정에 불과하다. 유가행파에 의하면, 《반야경》에서는 모든 존재가 공이라는 사실을 밝혔을 뿐 궁극적 취지는 밝히지 못했으며, 그것은 다름 아닌 유식성이었다.
85 필자 사견에 의하는 한, 이 모든 체계의 중심문제는 제 · 법성 · 실상 · 진실 · 진여 · 실제 · 진면목 등의 말로 일컬어지는 '진실(참)'이다.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가 거짓이라면, 그리하여 괴로운 것이라면, 진실은 무엇이며 거짓된 현실세계와의 관계는 무엇인가? 그러한 진실을 어떻게 하면 바로 구현할 수 있을 것인가? 지난 2500년의 불교사상사는 이에 대한 탐구와 해석의 도정이었다. 어떤 하나의 해석 체계는 필연적으로 그에 반하는 또다른 해석 체계를 낳게 되었고, 종합이 이루어졌으며, 그에 근거한 새로운 해석이 모색되었다.
101 일련의 사상사 속에 등장하는 각각의 개념을 절대시하는 경우 그것은 종파로 등장하게 되지만, 종파적 차별마저 무시한 연기(혹은 마음)에 대한 무차별적인 이해는, 불교는 만병을 통치할 수 있다는 절대적 이념으로 전락하고 만다. 그리고 그것은 '구호'가 되어 마침내 다양한 경설에 대한 해석도, 논증도 거부한다. 그것은 불교학 나아가 불교의 쇠퇴를 예고하는 것이나 다름없으며, 문 · 사 · 수라는 가장 기본적인 수증론마저 파기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이다.
116 우리가 접하는 불교는 그것이 어떤 것이든 불교학의 산물이며, 우리의 믿음 또한 그것에 대한 것이거나 혹은 그것과 관련된 상징 체계에 대한 것이다. 굳이 라다크리슈난의 연설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다들 잘 알고 있다. 불교에서의 믿음이 기독교에서의 믿음과 같지 않다는 것을. '있어라' 해서 있는 것도, '믿어라' 해서 믿는 것도 아님을. 불교(인도사유)에 있어 믿음이란 존재 본성에 대한 통찰의 결과로서 드러난 내적 직관적 경험에 기초한 것으로, 그것은 분명 절대적 권위에 의탁하여 어떠한 주체적 노력없이 종교적 위안을 얻으려는 맹목적이고 기계적인 믿음과는 다르다.
제4장 뇌허 김동화의 불교학관
130 불교의 갈래 역시 한결같지 않다. 그는 불교를 크게 전적(삼장) · 교주 · 교리 · 실천방법 · 교화방법 등 다섯 가지에 근거하여 분류하였다.
첫째, 전적에 따른 분류: 화엄종 · 천태종 · 진언종 · 정토종 · 열반종 등은 경(經)에 의한 종파이며, 율종은 율(律)에 의한 종파, 지론종 · 섭론종 · 구사종 · 성실종 · 법상종 · 삼론종 등은 논(論)에 의한 종파이다.
둘째 교주에 따른 분류: 정토종은 아미타불에 의지하는 불교이고, 진언종은 대일여래에, 그밖의 종파는 석가모니불에 의지하는 불교이다.
셋째, 교리에 따른 분류: 구사종과 성실종은 소승이며, 삼론종· 법상종 · 섭론종은 방편으로서의 대승이며, 화엄종 · 천태종 · 진언종 · 정토종 · 열반종 · 지론종은 진실로서의 대승이다.
넷째, 실천 방법에 따른 분류: 정토종 · 진종 · 시종 융통염불종은 이행도이며, 그 밖의 종파는 난행도이다.
다섯째, 교화 방법에 따른 분류: 여기에는 현교와 밀교, 교종과 선종의 구별이 있다.
이상과 같은 사실을 고려할 때 불교를 안다고 하는 것은 실로 무망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필경 불교는 앎의 종교이며, 깨달음의 철학이다. 불교란 무엇인가? 불교를 어떻게 연구해야 하는가? 대저 불교를 안다고 함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뇌허는 불교교리를 이해하는 경지를 일곱 가지로 나눈다.
첫째는 한역의 경문을 해석(해독)할 수 있는정도.
둘째는 특수한 불교술어의 의의를 어느 정도 해석할 수 있는 정도.
셋째는 하나의 경, 하나의 논의 취지를 이해하는 정도.
넷째는 한 종파의 교학을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이해하는 정도.
다섯째는 전체 불교 교리사상을 조류적으로 비교 구분하여 이해하는 정도.
여섯째는 교리사상의 발달과정을 역사적으로 더듬어 볼 줄 아는 정도.
일곱째는 전체 불교교리를 종합적으로 조직하고 또한 체계적으로 이해하는 정도.
151 또한 그럼에도 오늘의 우리는 '마음', '연기', '중도' 혹은 '참선'이라는 등의 말 한마디로 수미산보다 더한 볼륨의 지식의 곳간인 팔만대장경(고려대장경)을 우리 스스로 방기해 버린다. 다만 유형의 문화재로서만 귀하다 여길 따름이다. '마음'이라 하지만 그것에 대한 이해는 초기불교와 부파불교, 대승의 학파와 종파에 따라 한결같지 않았다. '연기'와 '중도', '선' 역시 그러하다. 소승선(위빠사나)과 조사선(간화선)은, '선'이라는 말은 동일할지라도 관하는 대상도 방법도 목적도 다르다.
151 불교라는 말은 하나이지만 그것은 시대나 지역에 따라 전개된 온갖 상이한 학적 체계가 모여 이루어진 매우 복합적이고 유기적인 체계이다. 따라서 후대 발달한 어떤 교학 체계상에서의 개념만을 이해한다면, 그것은 앞뒤가 없는 '구호(독단)'로 전락하기 십상이며, 여기에는 호교적인 찬사와 추종만이 요구된다. 이는 사실상 교시이며, 전통이라는 권위에 의지하지 않는다면 외부와의 소통 또한 쉽지 않을 것이다.
152 다시 뇌허가 말한 불교를 이해하는 방법에 귀 기울여 보자. 그에 의하면 다른 뭇 종교와 차별되는 불교의 특징은 이해에 있다.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오로지 믿음으로 이해하는 것은 무지몽매하다.
첫째 불교교리 연구의 첫 번째 대상은 무엇보다도 경(經)과 논(論)이므로 이러한 원전의 이해, 즉 해독에 노력해야 한다.
둘째, 원전의 해독은 자력만으로는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 선현의 주석서에 의지해야 한다. 이것을 일러 훈고학이라 하는 바, 이러한 방식에는 일장일단이 없지 않으나 일단은 불교연구의 불가피한 과정이다.
셋째 모든 교리에 대한 어느 정도의 지식을 얻은 다음에는 그러한 제반교리의 논리적 이해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경론상의 모든 교설은 마치 해변에 흩어져 있는 진주나 효천의 창고에 반짝이는 명성과 같아서 서로 연관적 관계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어찌 그럴 이치가 있겠는가?
넷째 다음은 역사적 이해가 필요하다. 종래 불교학자들의 생각으로서는 불교의 모든 경전은 일불소설이라 하여 모든 교리에 선후가 없는 것처럼 보아 왔지만 기실은 그러한 것이 아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원시 · 부파 · 소승 · 대승 등여러 시대에 걸쳐 엄연한 차이가 있으니, 이것을 무시한 불교연구란 도노(헛된노력)에 불과할 것이다.
다섯째 제반교리를 체계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원시불교의 온갖 교리는 그것대로 체계가 있고, 부파 내지 종파들도 다 각각의 체계가 있을 뿐 아니라 이 전체를 통합하여 보아도 역시 전체로서의 체계가 있다. 그러므로 이것을 체계화하여 보지 않는다면 사상으로서의 불교, 철학설로서의 불교가 존립되지 못할 것이다.
여섯째 인간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고래의 불교학자와 불교인이 이해한 개념을 보면 그것이 불교를 이해하려고 하는 것인지, 또는 불교를 신앙하려고 하는 것인지 태도상의 구분이 나지 않는다. 신(信)과 해(解)는 구별되어야 한다. 이것이 불교의 특징이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무지몽매한 범부로서 현명하신 불타의 교설을 무조건 믿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그 다음 단계에 이르러서는 "우리는 어째서 그 교설을 믿지 않으면 안 되는가? 불타는 어떻게 해서 각자(覺者)가 되셨는가? 우리는 그의 교설대로 과연 각자가 될 가능성을 소유하고 있는 것이 확실한가?" 하는 등의 의문이 자꾸 생기고, 또다시 일어나니, 그 이유를 알아야 한다 ....... (중략) ...... 그러므로 우리가 불교의 모든 교리문제를 연구함에 있어서는 언제나 항상 인간적으로 이해해야 함을 잊어서는 안 된다. 만약 이점을 망각한다면, 그것은 죽은 불교가 되고 만다. (필자 윤문)
제5장 우리나라 인도불교학의 반성적 회고
186 주지하듯이 인도 전통에 있어 철학에 상응하는 술어는 다르샤나 혹은 안비크시키이다. 그것은 '보다' 혹은 '지각이나 증언에 의해 알려진 것을 다시 보는 것', 이미 보여졌다고 하는 절대적 전제하에 보는 것이 아니라 의혹을 갖고 다시 보는 것을 의미한다. 곧 인도의 철학은 '봄(통찰)'의 철학으로 정견(正見)을 제1 덕목으로 삼은 불교의 경우 더욱 철저하다고 할 수 있는데, 여기에는 반드시 동시성과 현장성 그리고 주체성이 수반되어야 한다. 즉 지금 여기서 내가 보아야 하는 것이다.
191 불교의 언어는 죽은 고어가 아니라 살아있는 오늘의 말로 끊임없이 재생되어야 한다. 그리고 중국의 불교가들에게서 보듯이 끊임없는 개역과 주소적 연찬을 통해 그 의미의 타당성을 확보해 나가갸애 하는 것이다. 불교사를 통해 볼 때 불타 언어를 재생시킴으로써 그의 자내증을 보다 명료하게 드러내려는 시도는 필연적이었고, 그것은 다름 아닌 아비달마였다. 즉 궁극적으로 불타 진지에 대한 이해 간택력인 무루정혜를 본질로 하는 아비달마란, 불타 교법을 끊임없이 연찬 해석하여 그 시대의 언어로 재생시키는 것 혹은 반대로 그 시대의 언어로 재생된 불타 교법올 통해 불타 진지를 이해 간택하려 함을 목적으로 하였기 때문이다.
제6장 인도불교사 연구 단상
213 '불타'라는 개념이 언제 어떻게 초월적으로 변모하여 갔는가 하는 문제 역시 다수의 복합적인 원인이 있겠지만, 일단 라모트에 의하면 민중들이 원하였다. 재가신지들은 신을 요구하였으며, 출가자들은 스승을 원하였다. 불타는 바야흐로 신과 인간의 스승으로 출현하였으며, 신 중의 신으로 다시 태어났다. 이 같은 점에서 본다면 '천상천하유아독존'이라는 탄생게 역시 일체 중생은 다 자성불로서 존귀하다는 뜻이 아니다. 연등불의 수기로부터 비롯되는 일련의 불전문학은 모두 이 같은 찬불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213 유부에서는 비록 대중부의 불타관에 반대하였지만, 그렇다고 결코 찬불에 인색하였던 것은 아니며, 대중부의 불타관은 오로지 이 파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경량부(혹은 세친)에서도 일 찰나 마음으로 알며(알고자 하면 바로 알며) 색신 또한 불타(무루)라고 주장한다. 이에 따를 경우 불탑 역시 승가와는 구별되겠지만 여래 색신이 유루임을 주장하는 유부에서도 불탑공양을 부정하지 않았을 뿐더러 조탑은 일겁 동안 하늘에 태어나는 복을 받으며, 불탑을 파괴하는 것 역시 무간죄로 간주하였다.
218 나오는 것이라곤 불교학개론이고, 불교란 무엇인가이며, 불교입문이며, 불교의 이해가 아닌가? 혹 그 밖의 달리 이름하는 것일지라도 결국 그러한 내용의 아류가 아닌가? 이제 그러한것들은 불교대학 졸업생들이 저술가로서 호구의 업을 삼아 쓰도록 넘겨주기야(혹은 남겨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지난 2500년간 '불교'가 생산해 낸 수미산도 비할 수 없을 지식이나 이야깃거리를 상식으로, 교양으로, 흥밋거리로, 혹은 관심의 고조나 포교의 일환으로 일반독자(혹은 불교신자)들에게 제공하는 불교저술가가 반드시 학자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아니 학자라면 경계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신선한 아이디어와, 자료를 정리하고 글쓰기에 소질이 있는 불교대학 졸업생이라면 능히 감당할 수 있지 않겠는가? 또한 오늘날 '돈(?)이 될 만한 인문학'이란 바로 그러한 것밖에 없지 아니한가? 그리고 바로 그러한 인력을 배출하는 것이야 말로 불교대학의 중요한 역할이 아니던가? 이제 교단이나 교계가 '비빌 언덕'이라는 생각은 거둬들여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한 요망은 지난 몇십 년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221 우리에게 무엇이 결여된 것인가? 혹 우리는 불교학을 현실의 불교와 동일시하여 오로지 신념의 체계로만 받아들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혹은 사실 체계로 받이들일 여유가 없거나, 신념 체계를 사실의 체계로 포장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혹은 같은 말이지만, 텍스트의 엄숙함에 갇혀 행간을 읽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혹은 소승이니 대승이니 하는 개별적인 텍스트에 갇혀 텍스트들 사이의 행간을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제7장 불교의 물질관에 관한 단상
240 이를테면 우리는 외계에 객관적으로 실재하는 '산'을 보는 것이 아니라 산의 관념을 보는 것이다. 즉 마음에 의해 낳아진 산의 관념이 외계로 투영되어 마치 외계 실재하는 것처럼 보일 뿐으로, 그것은 신기루와 같고 환상과 같으며, 꿈과도 같다. 그것은 실재하지 않는 주객이원의 허망(거짓된) 분별일 따름이다. 해서 유식학파에서는 일찍이 경험하였던 '관념들의 창고'라고 할만한 심층의 의식인 아뢰야식을 설정하고, 자아의식을 비롯한 일체의 의식, 즉 인식하는 의식과 인식되는 의식(산 등의 관념)은 그것으로부터 변화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241 그렇다고 할지라도 그들은 물질을 포함하여 현상으로 드러난 사사물물 온갖 존재의 차별상에 대해 논의한다. 온갖 존재의 차별상에 대한 언급 없이 허망분별을 논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후 중국에서는 이상과 같은 물질과 마음 등의 현상의 온갖 차별상에 대해 논의하는 불교를 상종(相宗)이라 하였다. 나아가 마음은 현실 즉 미혹한 세계의 씨앗(종자)이 될 뿐만 아니라 깨달음의 근거가 된다고 하는 불교학설이 출현한다. 이른바 여래장 사상이 그것이다. 여래장이란 '여래의 태아' 혹은 '여래의 탯집'이라는 정도의 의미로서, "모든 중생은 여래의 태아로서 여래 안에 포용되어 있다"거나 "모든 중생은 자신 안에 여래의 가능성, 여래의 씨알을 품고 있다"는 뜻이다. 후자가 보다 일반적인 의미이다. 즉 밖으로 드러난 모습은 미망의 범부이지만 그러한 미망 속에 여래라는 태아가 감추어져 있다는 말이다. 이제 바야흐로 마음은 생멸(미망)과 진여(여래), 공과 불공의 토대로서 이해되었다. 일체 모든 존재의 본원으로 간주되었다.
242 이러한 '일심'이라 일컬어진 절대 마음의 불교는 바야흐로 동아시아에서 전개한 거의 모든불교의 요체가 되었으며, 이후 중국에서는 이러한 단일한 진여자성에 대해 논의하는 불교를 성종(性宗)이라 하였다.
243 동아시아 불교 전통상에서 현실의 차별상에 치중한 것이 상종(相宗)이라면 절대의 이상에 치중한 것이 성종(性宗)이다. 세속화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가난 등의 사회악에 대한 통찰이 필요하다. 물질과 그것이 인간의 현실 삶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강렬한 통찰이 필요하다.
제8장 연기법이 불타 자내증이라는 경증 검토
250 불타 깨달음의 내용에 대해 일찍이 우이 하쿠주는 15종의 이설을 언급하였으며, 김동화 박사도그의 《원시불교사상론》에서 11종의 이설을 언급하고 있는데, 대체로 ①4제(諦) · 12연기와 같은 이법의 증득에 의했다고하는 설, ②4념처 · 4정근 · 4여의족 · 7각지 · 8정도와 같은 수행도의 완성에 의했다고하는 설, ③5온 · 12처 · 4계와 같은 제법의 참다운 관찰, 즉 무상 · 고 · 무아관에 의했다고 하는 설, ④4선 · 3 명의 체득에 의했다고 하는 설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우리는 이에 대해 연기법은 성도의 내용이고, 그 밖의 교설은 모두 그에 이르기 위한 과정이나 실천 수행도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어떠한 경전이나 논서에서도 이러한 교설들을 인과 관계로 규정한 곳은 없다.
251 우리의 불교입문서에서 연기설은 모든 교설에 우선하는, 다시 말해 업과 윤회는 물론이거니와 4성제 · 무상 · 무아 등의 이론적 근거로서 불교 제1철학으로 기술되고 있지만 이때 연기는 대개 상의성(相依性) 내지 공성(空性)으로 이해되고 있으며, 그런 점에서 불타의 자내증이 연기법이라고 하는 것은 어느 정도 대승의 스크린을 거친 것이라 할 수 있다.
277 그렇다면 이러한 경증에 근거한 '연기법이 불타의 자내증'이라는 주장은 언제 누구에 의해 제기된 것인가? 앞서 언급하였듯이, 초기경전상에 언급된 불타 깨달음과 관련된 기사 가운데 4성제에 대해 설한 것이 빈도에 있어서나 뉘앙스에 있어서 연기에 대해 설한 것보다 훨씬 많고 강렬하다. 그럼에도 앞서 검토한 몇몇의 경설에 따라 불타 깨달음이 연기법이라는 주장은 근대 이후 일본 불교학계에서 생산된 이론으로, 그들은 대개 초기불교의 연기설을 상의(相依) 상관성으로 해석하여 대승불교의 연원으로 간주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대승의 스크린을 통한 것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다.
278 따라서 무아 · 무상 · 고와 연기설은 다 같이 불타의 근본사상을 나타내는 것으로, 12연기의 근본 취의는 실로 불타의 근본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는, 공은 연기의 이론적 귀결이라는 《중론》의 논리를 차용한 것으로, "연기하기 때문에 무상하다"거나 "'연기하기 때문에 무아이다"라고 하는 말은 초기불전 어디에도 없다. 무상과 무아는 다만 경험적 사실이지 추론을 통해 도출되는 이론적 귀결이 아니다.
278 불타 자내증을, 전승된 일체의 경 · 율과 아비달마의 가치를 '소승 사제교'라는 이름 하에 부정하고, 그 이면에 담겨 있는 불타의 진정한 뜻을 취하여 연기―연기법성―공성―마음―진여로 이해한 동아시아(대승)에서의 해석 역시 일종의 아비달마로서, '전통'이라는규범을 벗어날 수 없는 한 여전히 유효한 해석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할지라도 당시 불교학 전통으로 볼 때 '연기법'이라기 보다는 '4성제'라고 하는 편이 보다 더 설득력을 갖는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제9장 4성제와 12연기
284 불타는 무엇을 깨달은 것인가? 필자의 관견에 의하는 한, 광의로 말하자면 4성제이며, 협의로 말하자면 번뇌 단진의 열반, 즉 누진명이다. 그러나 누진명 역시 4제의 여실지견을 통해 성취된 것이니, 광협의 두 뜻은 본질적으로 동일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297 4제를 여실지견함으로써 일체의 번뇌를 다하여 이제 더 이상 생을 받지 않음을 아는 지혜를 누진지라고 하는데, 그것이 불타의 10력 중의 하나일 때는 누진지력으로 불리지만, 6통이나 3명 중의 하나로 열거될 때는 누진지증통으로 불린다.
298 아함에서는 어떠한 경우에도 연기법을 관하여 번뇌를 끊거나 성자의 과위를 획득한다고 설하는 일이 없다. (우리는 이러한 이유에서도 초기불교 교학상에서 '연기법'의 위상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런 까닭으로 인해 아비달마 논사들은 4성제에 대한 즉각적인 통찰인 현관의 과정을 수행도의 핵심으로 이해하여 통찰에 이르는 예비적 단계 · 준비단계 · 견도위 · 수도위 · 더 이상 닦을 것이 없는 무학위라는 5위(位)의 체계를 세우게 되었으며(이러한 체계는 이후 불교수행론의 골격이 된다), 중기 아비달마인 법승의 《아비담심론》부터는 아예 논의의 골격 자체를 4성제의 형식으로 구성하였다.
323 다른 한편 불타 자내증은 연기법이며, 12연기는 삼세에 걸친 윤회의 과정(원인과 결과)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다만 논리적 조건과 귀결(상의 상관 관계)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한다면, 다시 말해 무아(공)의 이론적 근거로서만 의미를 갖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 역시 폭력이며 파괴를 수반한다. 눈 빠른 독자께서는 이미 간파하였겠지만, 필자는 앞에서 12연기를 윤회의 과정으로 해석하였고, 이는 상좌부나 유부 아비달마의 전통적 입장이었지만, 오늘날 이러한 삼세 양중의 인과설은 지혜가 저열한 이에게 어려운 연기설을 쉽게 이해시키기 위해 비유로써 설한 것이라고 이해한다.
324 필자 사견에 의하는 한, 불교는 물론 불타의 등정각으로부터 비롯되었겠지만, 우리가 접하는 불교는 그것이 어떠한 형태이든 그의 손을 떠난 것이다. 그것은 그것을 전한 이들의 의도가 개입되었고, 해석이 부가되었으며, 그러면서 발전 변모하였다.
제10장 5종성론에 대하여
330 5종성(gotra) 이란, 일체의 유정이 무시이래 법이로서 갖추고 있는 성문정성 · 독각정성 · 보살정성 · 부정성 · 무성유정성을 말한다.
331 이 같은 종성론은 바로 무루종자에 근거한 차별설로서, 그것을 결정적으로 가졌는가, 갖지 않았는가에 따라 정성과 무성으로 나누었으며, 정성은 다시 일부의 무루종자만을 가졌는가, 일체의 무타자를 가졌는가, 혹은 그것이 결정되어 있지 않은가에 따라 성문 · 독각 · 보살정성과 부정성으로 나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럴 때 이 같은 무루종자의 성격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 본래부터 존재하는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후천적으로 훈습되어 생겨난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332 성문 · 독각과 무성은 끝내 불과(佛果)를 획득할 수 없다는 것이 바로 5종성의 각별설 즉오성각별설이다.
335 즉 삼승은 궁극적으로 다 같이 3무자성의 도에 의해 구경청정의 불과(佛果)를 얻을 수 있겠지만, 다시 말해 성문도 대승의 보리를 추구한다면 보살이라 할 수 있겠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원리에 입각한 이론일 뿐 현실상으로 볼 때 성문 · 독각의 정성 이승은 한결같이 공적한 회신멸지의 열반을 궁극의 목적으로 삼기 때문에 그들은 하열의 종성으로 결코 불과를 얻을 수 없다. 따라서 불타가 설한 일승은 다만 그럴 수 있다는 가능성에 근거한 방편일 뿐이며, 삼승의 차별이야말로 진실이라는 것이 오성각별설의 기본입장이었다.
335 이에 반해 천태나 화엄 등의 대승종에서는 우리가 익히 아는 바대로 '일체 중생 실유불성'의 교증에 따라 일성개성설을 수립하였으며, 앞서 언급한대로 원측 또한 이에 따르고 있다.
352 보살의 길은 험난하고도 기나긴 이타행과 자기완성의 도정이다. 그것은 자신의 실존(괴로움)의 문제가 아닌 인류애에서 비롯된 것이기에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것이었다. 따라서 불타의 가르침에 따라 아라한으로의 길을 걷는 성문의 제자들로서는 자신들과 불타로의 길을 걸었던 보살을 엄격히 구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보살과 건널 수 없는 거리를 둠으로써 불타의 지위를 엿보는 불손함을 결코 범하지 않았다. 그들이 생각한 불타는 일체지를 갖추어 그 위신력에 한계가 없으므로 시방의 일체 삼천대천세계에 오로지 한 분만이 출현할 뿐이었기 때문이다.
357 유가행파의 5종성론은 근본적으로 대승과 소승, 엄밀히 말해 보살승과 성문승의 대립의 산물이다. 5종성 중 무상정등각을 증득할 수 없는 종성은 성문정성 · 독각정성과 무성이지만, 독각은 실제적 존재가 아니며, 무성 또한 반열반법의 종지를 갖지 않은 유정을 말하지만 부주열반을 서원한 대비의 보살도 보살종성의 한 형태라고 본다면 그것은 사실상 대승 보살장을 비방하는 단선근자를 의미한다. 과연 누가 보살장을 비방하였을 것인가? 대승보살도를 비방하는 자, 성불하지 못한다고 하는 것은 당연하다.
359 아울러 이러한 유가행파의 5종성론은, 실제적으로 성문승이 부재하였던 중국에 이르러 일천제 등의 무종성 차별론으로 경도되어 이해되었고. 여론의 지지가 부재하였던 까닭에 종파(법상종) 자체가 쇠퇴하게 된 한 원인이 되기도 하였으며, 바야흐로 일성개성설이 불교의 보편적 이념으로 자리잡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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