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준영 외: 죽음, 삶의 끝인가 새로운 시작인가


죽음, 삶의 끝인가 새로운 시작인가 - 10점
정준영 외 지음, 박찬욱/운주사


기획자 서문

죽음에 관한 사유를 통하여 삶의 지혜를 얻길 기원하며


편집자 서문

삶과 죽음에 대하여


초기 불교의 생사관 | 슬퍼할 것도 두려워할 것도 없다 /정준영

인도-티벳 불교의 생사관 | 죽음 앞에서 참된 자신을 발견하기 / 안성두

선불교의 생사관 | 생사가 일여하니, 죽음이란 낡은 옷 벗는 것일 뿐 / 황금연

현대 서양철학의 생사관 | 극한의 한계상황으로서의 죽음 / 박찬국

현대의학의 생사관 | 현대의학은 죽음을 판결할 수 있는가? / 우희종






편집자 서문

9 신체적 아픔이나 심리적 슬픔으로 치환되지 않는 죽음 그 자체의 고통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것은 무엇일까?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죽음이란 과연 무엇인가? 우리는 죽음 앞에서 과연 무엇을 고통스러워하는 것인가? 죽음이 삶의 끝 종말이기에 고통스러운 것일까? 끝이 아니고 새로운 시작이라면 죽음이 더 이상 고통이 아닐까? 이처럼 우리가 죽음에 대해 관심을 갖고 죽음의 정체를 밝혀보고자 하는 것은 그 고통을 벗어나고 싶은 바람 때문일 것이다. 죽음의 정체를 알아야지만 그 고통으로부터 우리가 조금은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삶 너머 죽음에 대해 생각하며 묻는다. 죽음은 그냥 끝인가, 아니면 새로운 시작인가?


초기 불교의 생사관 | 슬퍼할 것도 두려워할 것도 없다 /정준영

35 다양한 죽음의 빠알리어(Pali)들 중에 '마라나'는 죽다'는 의미를 지닌 산스끄리트 어근 'mr'에서 파생된 중성명사로 '현 존재의 끝', '육체적인 죽음', '(눈에 보이는) 현 존재의 소멸', '죽음' 등 현재 눈에 보이는 존재의 '소멸' 혹은 '사라짐'을 의미한다. 『맛지마니까야』의 『삼마딧띠숫따』는 '마라나'라는 죽음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36 '마라나'는 한 존재를 구성하고 유지하는 다섯 가지 모음의 생리적 기능이 말라버리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 '삶의 기능들이 부서진 죽음'이라고 부른다. 또한 '마라나'에 죽는다는 의미의 '맛쭈(maccu, 죽음)'가 합성된 '맛쭈_마라나, [수명의] 죽음)'는 인간이 수명의 끝에 맞이하는 육체적인 죽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초기경전에서 나타나는 '마라나'는 보이는 존재의 물리적 소멸을 의미한다. 그리고 주석문헌으로 가면서 마라나의 의미는 좀 더 구체화된다. '마라나'는 주로 3가지 형태의 복합어로 그 모습을 나타낸다. 이들은 1) '삼우체다-마라나, 2)카니까-마라나, 3)삼무띠-마라나이다.


51 빠알리어 '마라나'가 눈에 보이는 죽음 혹은 '[육체적인] 몸의 소멸이'란 의미에 가깝다면, 빠알리어 '쭈띠'는 부가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것은 죽음이 단지 종결로써의 의미뿐만 아니라 '이동'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즉 쭈따는 죽음을 통하여 한 존재에서 다른 존재로의 이동을[윤회] 의미한다. 결국 '쭈띠'는 앞서 살펴본 '마라나'에 비해 좀 더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마라나'와 쭈띠는 모두 죽음을 의미하지만 '마라나'는 초기경전을 통해서, 쭈따는 초기경전뿐만 아니라 후대 아비담마와 주석문헌을 통해 사용된다.


68 초기불교의 출생은 윤회에 의한 새로운 삶을 의미한다. 앞서 살펴본 것과 같이 출생은 죽음과 밀집한 관계로 이루어져 있다. 초기불교는 다른 종교나 인도철학과는 다르게 새로운 생명의 탄생과 관련된 창조와 신화들을 부정한다. 뿐만 아니라 초기불교는 출생이라는 현상 뒤에 어떤 형이상학적인 원리나 철학적 배경이 깔려 있다고도 말하지 않는다. 초기불교의 출생과 죽음은 어떤 힘에 의해 조정되는 것이 아니라 생멸하는 자연스러운 현상일 뿐이다. 모든 태어난 존재들은 죽음을 벗어날 수 없다. 이것은 마치 익은 과일이 나무에서 떨어지는 것처럼 위험하다. 모든 존재는 언제 떨어질지 모르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으며, 결국에 죽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윤회의 과정을 통해 다시 태어난다, 빠알리어로 출생은 '자띠jati'이다.


76 불교는 이와 같은 출생과 죽음으로부터, 반복적인 윤회의 고리로부터 벗어나는 해탈을 추구한다. 그것은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이며 출생과 죽음을 벗어나 슬픔을 극복하는 길이다. 또한 이것은 시간을 극복하는 길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더 이상 지나간 과거와 다가오지 않은 미래에 대해 근심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초기경전은 지혜 (vijja) 와 실천(caraua)을 강조한다. 이들을 통해 현상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을 때 수행자는 윤회하는 주체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출생과 죽음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앞서 '마라나'의 죽음에서 살펴본 것과 같이, 출생과 죽음을 순환하게 하는 연속된 죽음을 멈추는 방법은 지혜와 실천을 통해 '감각적 욕망(갈애)'과 집착을 제거하고. 업을 쌓는 번뇌를 멸하여 열반을 성취하는 길뿐이다.


93 출생은 죽음과 함께하는 연기의 고리 안에 있다. 또한 출생과 죽음은 개인적인 삶의 시작도 마지막도 아니었다. 왜냐하면 이들 안에 내재하고 있는 괴로움과 슬픔은 끊임없는 반복의 순환이었기 때문이다. 초기불교는 이와 같은 반복적인 윤회의 고리로부터 벗어나는 해탈을 추구한다.


95 죽음을 두려움의 대상으로 보기에 앞서 죽음의 실제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평등하다. 청소부에게도, 극빈자에게도, 왕에게도 죽음은 찾아온다. 죽음은 마치 사형집행인과도 같이 누구에게나 평등하다. 죽음, 이것은 있는 그대로의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우리는 자연스러운 현상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치고 언제나 실패해왔다. 벗어나고자 하는 욕망이 강하면 강할수록 우리의 괴로움은 커져가고 죽음은 반복되었다. 초기불교는 죽음을 바라보며 이로부터 벗어나는 길을 제시한다. 그것이 바로 지혜와 실천을 통해 계정혜의 삼학을 닦는 길이다. 지혜와 실천, 이 길이 살고자 하는 또 다른 갈망으로부터 반복되는 죽음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줄 것이다.


인도-티벳 불교의 생사관 | 죽음 앞에서 참된 자신을 발견하기 / 안성두

101 우리는 이 점에서 당시의 육사외도라고 불리던 다른 사상가들과의 차이를 인식하면서 붓다가 무아를 논증하기 위해 제안했던 오온의 도식에 대해 주목하게 된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기준점은 심-신의 구분이며, 이 오온의 법주는 어떤 점에서 다른 사문전통에서 주장했던 결정론이나 우연론, 유물론이나 상주론을 극복하기 위한 전략으로 간주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오온의 법주에서 심리적 요소인 명名과 물질요소인 색色은 자아를 구성하는 기본 법주이다. 명은 수, 상, 행, 식의 네 심리적 요소로 세분되어 색과 함께 오온을 구성한다. 이들 오온 외에 존재를 구성하는 또 다른 요소는 없다. 따라서 이들 각각의 요소는 자신만의 고유한 성질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각기 다른 것으로 환원될 수 없는 상이한 두 종류의 세계를 구성한다. 이런 상이한 두 세계 중에서 생명체만이 정신적 요소를 가질 수 있기 때문에 심리적 세계는 불가결한 특징으로 간주되고 있다. 이는 초기불교는 물론이고 이후 불교의 모든 학파에 의해 공유되는 관점이라고 보인다. 이러한 불교의 관점은 모든 것을 물리적인 것으로 환원시키는 현대의 물리주의자의 입장과 결코 양립할 수 없을 것이다.


103 불교는 특히 가장 미세한 심리적 요소로서의 식(識)을 생명의 본질적 요소라고 본다. 식은 체온 및 명근과 함께 생명체의 필수적인 요소이다. 식이 특히 윤회의 주체로서 기능한다는 것은 식의 또 다른 표현인 간다르바가 죽는 순간 몸을 떠나서 새로운 모태 속으로 들어가는 존재로 묘사되고 있는 개소나 또는 해탈한 비구 고디카의 식을 악마가 헛되이 찾아다닌다는 기술에서 분명하게 표현되고 있다. 위의 두 개소가 잘 보여주듯이, 식은 윤회과정의 주체이며 따라서 이런 식의 소멸이 바로 열반으로서 윤회의 끝이다.


108 중우를 인정하지 않은 부파들은 『대비바사론』에 따르면 분별론자이며, 『이부종륜론』에 따르면 대중부, 화지부, 일설부 등의 부파들이다. 그들은 중생은 죽은 다음 찰나에 새로운 재생을 하기 때문에 중유의 단계에 대해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하지만 설일체유부(이하 유부)는 중생들은 죽은 후 최대한 49일 동안 자신에게 적합한 재생처를 찾기 위해 중유의 상태로 머문다고 설하고 있다. 이러한 유부의 교설은 동아시아 불교는 물론 티벳불교에서 정설로 수용됨으로써 우리의 생사의식에 깊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112 식이 심리적-물질적 요소를 취하여 자신의 신체를 형성시켜 가는 과정이나 결과를 아비달마 불교에서는 집수라는 개념으로 설명하고 있다. 집수란 식이 자기 외부의 요소들을 내부의 유기체적 존재로 만드는 과정이나 그 결과를 가리키는 개념이다. 이 개념을 통해 우리는 불교가 요소들을 두 가지로 구분하고 있음을 본다. 하나는 식과 무관한 외계의 바위와 같은 물질이고, 다른 하나는 식에 의해 컨트롤된 것이다. 후자의 물질을 아비달마는 upadana의 과거분사형인 upatta를 사용하여 표현하는데, 바로 이러한 집수된 물질이 무생물과는 다른, 살아 있는 유기체적인 물질을 특징짓는 것이다.


145 초기불교에서부터 죽음의 순간의 마음의 성질은 재생을 결정하는데 결정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인정되고 있다. 왜냐하면 마음의 작용이란 전 찰나의 마음을 대상으로 해서 후 찰나의 마음이 생하는 것이기 때문에, 직전의 마음이 선하다면 다음 찰나의 마음도 선심일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마음은 하나의 흐름이기 때문에 비록 개체가 생사에도 불구하고 심의 흐름은 전찰나에 의해 조건 지어져 흐른다고 간주된다. 이것이 티벳불교에서 마음이 물질과 다른 존재성을 가진 것으로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가장 강력한 이유의 하나이다.


146 밀교의 등장과 더불어 죽음에 대한 관념에도 보다 큰 변화가 일어났다. 즉시성불을 목표로 하는 밀교는 생기차제와 원만차제라는 두 단계에서 풍이라고 불리는 몸 안의 에너지와 그 모이는 장소, 에너지 통로 등을 불교전통에서 다양하게 사용되어 왔던 관상법을 통해 생리학적으로 변화시키고자 한다. 이런 생리학적 변화를 통해 본래적인 마음의 청정한 빛을 보고 삼신을 증득한다는 것이다. 이를 증득할 때 불성은 성취되는 것이다. 하지만 생전에 이를 성취하지 못한 수행자를 위해 죽음의 순간과 중유의 상태 재생 시의 순간들이 사용되게 된다.


선불교의 생사관 | 생사가 일여하니, 죽음이란 낡은 옷 벗는 것일 뿐 / 황금연

159 육조 이전과 이후를 구분하는 것은 육조 이후의 선가야말로 가장 중국적이라 할 수 있는 뿌리를 내리고 정착하는 이른바 조사선이라고 하는 단계에 본격적으로 접어드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대략 9세기에 이르러 인도적인 습선이나 삼매의 영역을 벗어나 중국적이라고 하는 대지성과 일상성에 뿌리내린 시상과 실천으로 탄생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159 선은 인도불교가 입었던 옷이나 중국초기 천태지의(538~597)에 의해 표방된 선정과 지혜의 통일마저도 벗어나, 선정이나 지혜의 종교이기보다는 일상생활 자체에서 선을 실천하고 수행함으로써 명상적인 좌선은 그 모습을 잃게 되고, 물 걷고 나무하는 구체적 일상생활의 행위가 신통이며 선이라고 표방하는 데에 이르게 된다.


165 선사 자신의 삶과 공부의 단면을 보여주는 동시에 후래 선자들에게 삶의 수행방향과 죽음의 지표를 제시한 것이기도 하다. 살아서 자신을 둘러싼 인연을 담담하게 받아들여 인연을 따라 모든 것을 성취하며, 죽음에 이르러서도 삶에 집착하지 않고 여전히 흔들림 없는 마음을 유지하는 것이다. 이처럼 선자들에게 있어 삶과 죽음은 전혀 별개의 것이 아니다. 보통의 사람처럼 삶은 기쁨이고 죽음은 두렵거나 슬픈 일이 아닌 것이다. 그냥 단순히 인연 따라 일어난 현상의 하나에 불과한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붙들어야 할 삶이나 밀어내야 할 죽음이란 개념은 없다.


현대 서양철학의 생사관 | 극한의 한계상황으로서의 죽음 / 박찬국

213 요컨대 죽음은 우리 인간의 유한성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건이기도 하면서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무한성과 영원성에 눈뜨게 만드는 사건이다. 그것은 야스퍼스의 용어를 빌리자면 한계상황에 속하는 것이다. 그것은 여타의 상황들과는 달리 우리가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것이라는 의미에서 한계상황에 속한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한계상황에 부딪힘으로써 우리는 죽음으로 끝나는 유한한 것들에 대해 집착하던 삶에서 벗어나면서 진정한 무한성과 영원성을 찾게 된다. 이 점에서 죽음은 유한성의 한계를 넘어서는 무한성과 영원성의 차원을 가리키는 사건이기도 하다.


218 속물적인 삶이 탄생에서 죽음에 이르는 삶의 전체를 보지 못하는 무정신성에 빠져 있는 반면에, 허무주의적인 염세주의는 적어도 삶의 전체에 반성할 수 있는 정신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정신은 유한성에서 벗어날 수 있는 출구는 없다고 생각하면서 절망하는 정신이다.


222 육체와 영혼, 그리고 피안과 차안의 이원론이 전통적인 종교를 특징짓는다면 집단정신과 개개인의 이기적인 정신, 그리고 미래의 유토피아와 현세의 이원론은 근대의 세속종교를 특징짓는다. 사람들은 독일민족이나 프롤레타리아와 같은 특정한 계급 혹은 그러한 집단의 순수한 정신을 가장 잘 구현했다고 평가되는 히틀러나 스탈린, 김일성과 같은 사람들을 신적인 존재자로 추앙하고 그것들에 자신의 삶을 바침으로써 자신의 유한성에서 벗어나려고 한다. 이러한 특정한 집단이나 지도자들은 보통 보편적이고 영원한 가치를 구현한 자들로 인정받기 때문에 이들을 위해서 지신을 헌신하는 것은 자신의 유한성을 극복하고 무한성과 영원성을 얻는 것으로 간주되는 것이다.


226 키르케고르는 이렇게 무한하고 영원한 정신은, 인간이 사멸에 처해질 자신의 유한성과 무력함을 인정하면서 자신을 진정으로 무한하고 영원한 존재인 신에게 내맡길 때 인간에게 주어진다고 본다. 이 경우 인간은 진정한 의미의 무한한 존재인 신 안에서 살려고 노력해야 한다. 우리가 신을 진정한 의미의 무한한 존재라고 말하는 것은, 인간은 자신이 생각하는 모든 가능성을 실현할 수 없는 반면에 신은 어떠한 가능성도 실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진정으로 무한하고 영원한 존재인 신만이 유한성 안에 무한성과 영원성을 실현한다는 모순적인 과제를 구현할 수 있다. 따라서 인간이 자신의 유한성을 인정하면서 자각적으로 신 안에 근거할 경우에만 인간은 자신에게 과해진 과제 즉 유한성과 무한성을 종합한다는 과제를 실현하면서 마음의 평안을 얻을 수 있다.


232 유한성을 포함할 정도로 강력한 정신을 니체는 운명애라고 부른다. 운명애는 죽음을 비롯해서 우리가 삶에서 부딪히는 모든 것을 긍정하고 껴안는 정신이다. 물론 우리가 앞에서 본 것처럼 키르케고르도 유한성과 무한성의 진정한 종합은 유한성을 포용하고 긍정할 정도의 강한 정신에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키르케고르는 기독교적인 신양에 의해서 구속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강한 정신이 인격적이고 초월적인 존재인 신에 의해서 선물로서 주어지는 것이라고 보았다. 이에 반해서 니체는 그러한 강한 정신의 실현은 오직 인간 자신의 노력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본다.


245 니체는 이렇게 모든 것이 아무런 의미도 목적도 없이 반복하는 상태야 말로 인간이 가장 견디기 힘든 상태라고 본다. 인간은 고통을 겪더라도 그 고통에 의미가 있으면 그것을 견딜 수 있지만 인생고에 시달리면서도 그것에 아무런 의미도 목적도 없다면 그것을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니체에게 있어 영원회귀의 상태는 인간이 가장 극복하기 어려운 최대의 고통이자 저항이다. 그런데 우리는 힘에의 의지는 이러한 고통과 저항을 견디고 극복함으로써 성장하고 고양된다는 것을 보았다. 따라서 힘에의 의지가 이러한 최대의 고통과 최대의 저항을 감내하고 그것을 흔쾌하게 받아들이는 순간이야말로 그것이 최대의 힘에 도달하는 순간이다. 그런데 이렇게 최대의 힘에 도달하는 순간 동일한 세계는 이제 전적으로 다르게 나타난다.


249 니체의 영원회귀사상은 피안세계나 미래의 유토피아에 부여되었던 신성을 생성하는 이 세계에 다시 부여하려는 시도이다. 인간의 삶과 세계는 이제 더 이상 피안과 유토피아와 같이 그것 위에 존재하는 어떤 목적에 관계하는 것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하여 목적 없이 흐를 뿐인 무의미한 생성도 아니다. 힘에의 의지는 이제 피안적인 유토피아든 미래에 실현되어야 할 유토피아든 어떠한 유토피아도 지향하지 않으며, 그것은 오직 주어진 순간에 철저할 뿐이다. 모든 것이 항상 거듭해서 회귀할 경우 생성은 생성이면서도 하나의 절대적인 의미를 획득한다. 생성하는 것 우연적인 것은 그 자체에 있어서 모든 순간에 절대적으로 긍정되는 것이다. 생성하는 것은 전통형이상학에서 존재에게 부여되었던 신성을 갖게 된다.


251 하이데거는 인간이 죽음을 생각하면서 자신의 인생의 의미를 물을 수 있는 존재라는 것, 다시 말해서 '자신의 존재에 있어서 자신의 존재를 문제삼는 존재라는 것'을 인간의 본질적 성격이라고 보고 있다. 그리고 이미 앞에서 본 것처럼 인간에게만 독특한 그러한 존재방식을 실존이라고 부르고 있다. 인간이 실존적 존재라는 것은 인간이 자신의 삶에 대해서 이론적으로 묻고 탐구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어떻게 살 것인지에 대해서 고뇌하는 존재라는 것을 의미한다.


253 불안이란 기분은 우리를 인간 일반의 죽음이 아니라 우리 각자의 죽음 앞에 세우는 기분이다. 하이데거는 이렇게 불안이란 기분 안에서 죽음을 경험하는 방식이야말로 죽음이 인간에게 근원적으로 나타나는 방식이라고 본다. 우리 인간은 태어나자 죽음에로 던져진 존재인 한, 불안은 우리의 실존을 항상 철저하게 기분 지우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보통 불안이 대두되지 못하도록 불안을 억누른다. 우리는 항상 죽음으로부터 일상적인 삶으로 도피하지만 그러한 도피는 결국은 불안이 대두되지 못하게 억누르는 것을 의미한다.


254 하이데거는 죽음에 대한 불안에서 도피하지 않고 그것을 용기 있게 인수하는 것을 죽음에로의 선구, 즉 '죽음에로 자각적으로 앞서 달려감'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렇게 죽음에로 선구할 때 우리는 그 어떤 일상적인 세상의 가치로도 환원될 수 없는 독자적인 자기에로 직면하게 된다. 이와 관련하여 하이데거는 죽음은 우리의 '가장 고유하고 가장 극단적이며 다른 가능성들에 의해서 능가될 수 없고 가장 확실한 가능성'이라고 본다.


256 우리 인간은 탄생에서 죽음에 이르는 각자의 시간을 갖는다. 하이데거가 말하는 죽음에로의 선구는 사람들이 자신의 죽음을 앞당겨서 자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어느 것에 의해서도 대체될 수 없는 각자의 고유성을 자각하는 사건이었다. 그리고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결국은 탄생에서 죽음에 이르는 유한한 시간이라면, 죽음에로의 선구는 우리가 자신에게 주어진 유한한 시간을 자기 지신만의 일회적인 시간으로 경험하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죽음은 우리가 세상 사람의 삶에 빠져 있는 상태에서는 삶을 파괴하는 것으로 나타나지만, 우리가 죽음에로 선구할 경우에는 죽음은 우리의 삶을 반복될 수 없고 어느 것에 의해서 대체될 수 없는 일회적인 것으로서, 즉 가장 소중하고 귀중한 것으로서 드러낸다.


253 이렇게 일회적이고 소중한 것으로서 우리의 삶에 주어진 유한한 시간을 하이데거는 시간성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유한한 시간은 무한하게 이어지는 시간의 한 조각으로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나의 가장 정열적인 실존수행을 통해서 형성되는 시간이다. 즉 그러한 시간은 내가 죽음에로 선구하면서 자신의 가장 고유한 가능성 즉 자신의 장래에로 나아가는 동시에 탄생에서 현재에 이르는 과거로 되돌아가는 방식으로 형성된다.


현대의학의 생사관 | 현대의학은 죽음을 판결할 수 있는가? / 우희종

266 죽음은 마치 광기처럼 이미 그전부터 우리들의 시선으로부터 가려져 왔을 수도 있으나 분명한 것은 이 시대에는 죽음이 더 이상 개인이나 가족 형태의 구체적 현실이 대부분이라기보다는 차가운 병원에서의 의사들의 영역이 되었고 병원의 소유가 되었다는 점이다.


274 가장 전통적인 죽음의 정의로서 '심장 및 호흡기능과 뇌 반사의 영구적 손실을 죽음이라고 정의한다'라는, 즉 호홉 운동과 심장 박동이 정지되고 뇌반사가 소실된 것이 불가역적일 때 죽음으로 판단한다. 일반적으로 죽었다고 할 때는 숨을 쉬지 않고 심장이 뛰지 않는 상태를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전통적 기준에 있어서도 조금 더 들여다보면 그리 간단하지 않다. 호흡정지 또는 심정지 중에 어떠한 상태가 죽음을 선언하는데 우선적인가에 대해서는 시대적으로 변하였다.


275 한편 유럽에 소아마비가 유행하면서 인공호흡기가 개발되어 호흡곤란 증 환자에 대한 호흡 유지가 가능해졌다. 또한 마취 기술의 등장과 함께 인공호흡이 차츰 널리 활용되면서 전통적인 죽음에 대한 기준이 애매해지고 도전을 받게 된다. 그래서 국제적으로 뛰고 있는 심장이 멈추는 것을 죽음의 판단기준으로 하는 것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다.


275 전통적인 심장사와는 달리 뇌사란 뇌기능 전체의 비가역적인 영구 손실을 말한다. 말 그대로 뇌가 사망한 것이다. 뇌의 거의 모든 조직이 파괴되어 뇌가 죽으면 그 기능도 모두 상실되기에 이어서 호흡 및 심박동의 불가역적 기능 정지가 유도되기 때문에 결국 심장사를 하게 된다. 이 상태에서 어떤 치료, 어떤 노력을 하더라도 생명을 되살릴 수 없는 상태가 되었을 때를 뇌사라고 한다.


275 하지만 뇌사상태에서 인공적인 외부 생명연장 장치로 길게는 10일까지 심장 박동을 유지할 수 있기에 심장사와의 시간차를 생기게 할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이 시간 차이 과정에서 물질적 신체는 세포나 장기 수준에서 생명을 유지하고 있는 셈이며, 장기이식에 활용할 수 있는 실용적 가치를 지니게 된다. 뇌사는 현대의료가 만들어 낸 인위적 상태라고 볼 수 있다.


278 '뇌사'의 의학적 의미를 살펴보면 뇌 전체의 기능이 완전히 멈춘 상태로 모든 자극에 대해 반응이 없고, 호흡을 비롯하여 스스로의 움직임이 전혀 없는 비가역적인 뇌의 손상을 의미한다. 1968년 호주에서 열렸던 세계의사회의에서 뇌사를 인정하는 "시드니 선언"을 제창하였으며, 같은 해 미국 하버드 의과대학에서 뇌사판정 기준을 제시하였다. 이후 뇌사는 오늘날 거의 모든 국가에서 의학적 사망으로 인정하고 있다.


290 죽음이란 개체성의 상실이다. 그렇다면 죽음을 맞이하는 생명체에 있어서 개체성이란 무엇인지, 그리고 의학적 죽음이 개체성을 어떻게 보는지 확인해야 할 것이다. 기실 인류 역사에서 인간의 개체성이 확립되고 존중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는다. 개체성에 대한 간략한 검토와 죽음으로 해체되는 개체성의 기원을 더듬어 올라가면 역으로 개체의 해체를 통해 전개되는 그 다음의 세계도 어느 정도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죽음의 논의에 있어서 개체성이라는 용어 사용에 새삼 언급해 두어야 할 것은 그것은 개체고유성이며, 특히 고유성에 방점이 있다는 점이다. 뇌사자의 장기이식에서 보듯이 개체성이 해체되어 그 일부가 다시 다른 생명체의 일부를 이루고 살아간다는 것은 죽음이 말해주고 있는 개체의 해체라는 것은 개체의 구성요소로의 해체보다는 죽음을 맞이한 총체적인 개체가 지니고 있던 고유성이 종말을 맞이하여 사라지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292 유전자라는 정보는 복제를 통해 생명체의 자손으로 전달되나 그 생명체가 겪은 삶은 전달되지 못하고 새로 태어난 개체는 그의 선조가 삶 속에서 겪은 모든 과정을 다시 반복해야 한다는 점이다. 다시 말하면 부모가 고민하며 힘들고 또한 즐겁게 겪었던 것을 자식이 다시 반복해 고민하고 겪으며, 그것을 다음 자손도 똑같이 경험하며 살아간다. 이렇게 반복되는 삶이지만 중요한 것은 결코 동일한 삶은 없다는 점이다. 고유한 자기만의 삶은 언제나 스스로 얻어야 하는 참으로 멋진 과정이며 각자의 체험으로 이루어진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항상 스스로 새롭게 발견해 나아가는 보석같이 빛나는 자기만의 창발과정이기에 유전자 복제 역시 일종의 반복이며 삶이라는 외부와의 생태적 관계 속에서 영향을 받게 된다.


302 생과 사를 한 조각의 구름이 피었다가 지는 것으로 보는 불교적 입장에서는 생에 집착하지도, 죽음을 미화하지도 않는다. 오직 고통 속에 있는 중생에 대한 무한한 자비심이 있을 뿐이며, 언젠가는 죽음을 바라보고 맞이해야 하는 생명체로서 그 죽음을 자기 삶의 일부로 따뜻하게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평소 일상적 삶의 현장에서 사랑과 감사라는 수행자적 마음으로 살아갈 때 가능하다. 이러한 삶이 근대의학이 지닌 기계론적 생명관의 한계를 넘어 근대과학 체계로서의 의학과 종교가 만나 너와 나를 더욱 건강하게 해주는 길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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