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오민: 아비달마불교


아비달마불교 - 10점
권오민 지음/민족사


권오민: 아비달마불교


머리말

1장 아비달마란 무엇인가

2장 존재의 분석

3장 미혹한 세계

4장 깨달음의 세계

후기





머리말

6 불타가 남긴 이른바 8만 4천의 법문은 말 그대로 진리에 들어가는 문에 불과하였기 때문에 제자들은 그것의 해석을 통해 불타의 깨달음을 추구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불타교법에 대해 깊이 연구하여 이른바 아비달마로 일컬어지는 방대한 논서를 작성하였는데, 이로 인해 이 시기의 불교를 아비달마불교라고 하기도 한다.


6 그들 성문의 제자들은 세속의 요란함을 떠나 폐쇄된 승원 깊숙한 곳에서 욕망을 억제하며 스승이 남긴 교법을 해석 연구하고 그것의 참다운 이해를 통하여 일체 괴로움의 원인인 자신의 무지와 번뇌를 소멸함으로써 적정의 열반을 획득하고자 노력하였다. 부파불교는 성문 제지들의 불교로서, 철저하게 배우는 입장의 불교, 수동적인 불교였다.


1장 아비달마란 무엇인가

21 부처님께서 쿠시나가라의 사라나무 숲에서 열반에 드셨다. 이제 남은 것은 그의 말씀뿐이었다.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이제 남겨진 성문의 제자들로서는 스승이 남기신 교법을 결집하고, 그 속에 담긴 의미를 해석하여, 스승이 지나가셨던 발자취를 따르는 일밖에 별 도리가 없었다. 그것은 필연적이고도 불가피한 일이었다. 그들 성문제자들의 관심은 오로지 '불타의 교법을 어떻게 정확하게 이해하고 설명할 것인가'에 있었으며, 그 결과 생겨난 성전이 이른바 아비달마 논장이다.


24 우리는 불타 법문의 근거였던 그의 의도 즉 그의 깨달음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인가? 불타의 이해력과 동일한 이해력을 획득하지 못한 범부로서는 마땅히 그것을 이해하기 위한 또 다른 방편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것은 불타 입멸 후 더욱 더 요구되었을 것이다. 이 같은 요청에 따라 일찍이 불타법문에 입각하여 '골똘히 사유' 함으로써 불타와 같은 참다운 이해를 획득하였던 위대한 성문제자들이 불타가 전하고자 하였던 바를 정리 해석하여 편찬 결집하였는데, 이것이 이른바 아비달마이다.


37 《아비달마 구사론》 (줄여서 《구사론》)의 작자는 서력기원 후 400-480년(혹은 320-400년)무렵에 출세한 세친이다. 이 논의 구역인 《구사석론》을 번역한 진제의 《바수반두법사전》에 따르면, 그는 불멸 900년 무렵 간다라의 푸루샤푸르(오늘날 파키스탄의 페샤와르)에서 카우시카라는 성을 가진 바라문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형은 유부에 출가하였다가 대승으로 전향하여 유가행파를 개창한 아상가였으며, 동생은 역시 유부에 출가하여 아라한과를 얻은 비린치밧차였다.


41 유부의 교학은 《집이문족론》과 《법온족론》 등의 6족론에서 시작하여, 《발지론》에서 학설의 큰 줄기를 드러내어 《대비바사론》에서 깊이 심화되었고, 《아비담심론》에서 조직적인 논술의 체계를 갖추었으며, 마침내 《구사론》에 이르러 종합 완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2장 존재의 분석

47 원래 법(dharma)이란 '유지하다' '지탱하다'는 의미의 어원 ✓dhr에서 파생된 말로서, 일반적으로 세계존재를 유지 지탱하는 질서 규범 법칙 등을 의미하며, 나아가 도덕 정의 진실 습관 성질 등의 뜻을 갖지만, 아비달마불교에서는 보통 현상의 경험 세계를 구성하는 존재의 요소라는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를테면 숲과 자동차는 그것을 구성하는 개별적이고도 객관적 실체 ━ 수많은 나무와 온갖 부품에 의해 유지되는 주관적 관념에 불과하다.


47 곧 유부교학에 있어 법이란 그 같은 경험을 구성하는 조건으로서, 개별적이고도 더 이상 환원 불가능한 독립된 실체이다. 그것은 자기만의 고유한 특징과 작용을 지닌 것으로, 그것으로 인해 인식이 가능하며 행위가 이루어진다. 그것은 바로 궁극적인 존재이다. 그리고 그러한 온갖 존재가 원인과 조건이 되어 화합함으로써 드러난 현상의 세계는 다만 가설적 개념적 존재일 뿐이다.


49 무지와 욕망 등의 번뇌가 수반되는 세계를 유루라고 하고, 그것의 조건이 되는 온갖 존재를 유루법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유위와 유루는 무엇이 다른가? 깨달음에 이르는 도정은 온갖 존재가 인연화합하여 드러난 현실에서의 경험이기에 유위이지만, 더 이상 번뇌를 수반하지 않기 때문에 무루이다. 여기서 '누(asrava)'란 누설의 뜻으로, 여섯 감관을 통해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번뇌를 뜻한다.


49 이처럼 일체의 존재는 유위와 무위로 분류되며, 무위는 무루이지만 유위는 다시 유루와 무루로 분류된다. 이를 불타교법의 기본구도인 4성제에 대입시켜 보면, 미혹한 현실과 그 원인인 고와 집은 유위이고 유루이며, 깨달음의 이상인 멸은 무위이고 무루이며,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도정인 도는 유위이고 무루이다.


53 유부에 의하면, 이러한 5 온이 인연 화합하여 끊임없이 상속 현현함으로써, 다시 말해 그것들이 생성 내지 관계라고 하는 행온에 포섭되는 또 다른 존재에 의해 우리들 의식의 상속상에 찰나적으로, 그리고 간단없이 동시현현함으로써 부단히 변화하는 경험세계가 이루어진다. 즉 그 같은 온갖 경험은 '나'라는 관념을 근거로 생성 통합되어 '나의 세계'로 현상하는 것이다.


57 다섯 갈래로 분류되는 일체의 존재 가운데 색법을 가장 먼저 열거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앞서 '법'을 설명하면서 '인식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라고 하였는데, 인식의 주체인 의식은 반드시 감관과 대상에 수반되어서만 나타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대승에서처럼 대상이 의식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의식이 대상에 의해 규정되기 때문으로, 이 같은 객관 우선주의는 아비달마불교의 현저한 특징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70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지각 · 표상 · 판단 등을 의미하는 수 · 상 · 혜 등의 작용과 마음의 인식 작용은 다 같이 의식작용이라는 점에서 어떠한 차별도 인정되지 않으며, 따라서 그것들은 각기 시간을 달리하여 순차적으로 일어나는 일련의 인식과정일 뿐이다. 그런데 유부에서는 마음과 마음의 작용을 완전히 개별적인 존재로 간주하여 동시생기한다고 주장한다.


70 유부 제법분별론에 따르는 한, 유위 제법은 각기 개별적 실체이기 때문에 그러한 제법의 동시생기는 불가피한 일이다. 왜냐하면 제법은 각기 자기만의 고유한 특성과 작용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하나의 인식이 완전하게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그것들이 동시에 생겨나야만 하는 것이다.


90 아비달마불교에서 세계란 궁극적으로 자재신에 의한 것도 아니며, 우연의 산물도 아니다. 그것은 다만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자신의 의도(욕망)에 따라 경험된 세계로서, 앞서 논의한 제법이 원인과 조건(즉 인연)에 따라 화합함으로써 생겨난 것이다. 그것은 온갖 조건의 일시적 화합에 의해 생겨난 것이기에 영원하지 않으며, 영원하지 않기에 불안하다.


90 세계란 찰나생멸하는 제법의 끊임없는 연속이다. 문득 스쳐 지나가는 즐거움의 세계 또한 항구적이지 않기에, 그래서 불안하며 고통스러운 것이다. 오늘의 젊음은 내일을 보장할 수 없으며, 오늘의 행복 뒤에는 내일의 절망이 도사리고 있다. 우리가 경험하는 일체의 현실세계는 괴로움이다. 따라서 초기불교 이래 불교의 이상은 그 같은 괴로움이 소멸된 세계 즉 열반이며, 그것이 바로 무위이다.


91 무위의 문자적 의미는 더 이상 어떤 조건(인연)에 의해 조작(생성)되지 않은 것, 따라서 더 이상 소멸하지도 않는 것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부파불교 시대에 이르면, 무위의 개념이 보다 확대되어 경험의 세계를 생성시키는 온갖 존재들의 사슬이 끊어진 불사 감로의 세계인 열반을 포함하여 생성과 소멸로부터 벗어난 존재, 인과적 제약으로부터 벗어난 존재, 아직 생겨나지 않은 존재, 경험되지 않은 존재, 말할 수 없는 존재, 나아가 이법의 진리까지도 포함하게 되었다.


105 우리는 일반적으로 유부의 법유론을 '삼세에 걸친 제법의 실유’로 이해하고 있지만, 보다 엄격히 말하면 제법이 이미 작용하였고, 지금 작용하며, 아직 작용하치 않은 변이의 상태가 바로 삼세이기 때문에 삼세라는 시간의 흐름은 제법의 생멸에 의해 가능하다. 따라서 지금 작용하고 있는 현재는 오로지 제법의 생성과 소멸의 순간일 따름이다. 다시 말해 유위제법이 비록 실재한다고 하지만, 그것이 현상하여 세계를 구성하는 것은 오로지 현재의 한 찰나에 불과하며, 그러한 현재의 한 순간 한 순간이 쌓여 경험세계에서의 시간의 흐름을 이루는 것이다.


107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란 무엇인가? 그 근거는 무엇인가? 이슈바라와 같은 자재신의 조작인가, 아니면 원인 없이 우연히 생겨난 것인가? 우리는 흔히 불타의 교법을 인과법 혹은 인연법이라고 한다. 모든 존재는 인연에 의해 생겨나며, 그것은 또 다른 존재에 인연이 되기도 한다. 여기서 '인 (hetu)'이란 직접적 혹은 일차적인 원인을 말한다면, '연(pratyaya)'이란 간접적 혹은 이차적인 원인을 말한다. 말하자면 인이 원인이라면, 연은 원인으로 하여금 결과를 낳게 하는 조건이다.


108 연기란 인연생기의 준말이다. 곧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겨나므로 저것이 생겨난다. 이것이 연기의 공식이다. 이것은 바로 불타 깨달음의 본질이라고 한다. 그는 세계의 존재근거를 그 어떤 초월적 실재에서 구하거나 혹은 부정한 것이 아니라 이것과 저것의 관계성에서 구하고 있는 것이다.


108 그렇다고 한다면 우리의 현실세계를 가능하게 하는 조건인 '이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제법이었고, 그래서 아비달마불교에서는 제법분별을 그들 교학의 일차적 과제로 삼았던 것이다.


109 유부 아비달마에서는 제법분별론에 따른 필연적 귀결로서 6인因 4연緣 5과果라고 하는 그들 특유의 인과론을 제출하기에 이르렀다. 즉 다수의 법이 동시에 관계할 때 비로소 작용하고 현상한다고 주장하는 한, 자재신이나 자성과 같은 단일 보편의 원인은 결코 인정할 수 없기 때문에 그같이 다양한 인과관계의 설정이 필요하였던 것이다.


121 찰나생멸하는 제법의 인연에 의해 드러난 유위의 세계는 무상하며, 괴로우며, 실체성이 없는 세계이다. 그러나 범부의 눈에 비친 자신의 세계는 인과의 사슬로 얽힌 유전 변천하는 무상의 세계가 아니라 단일하고도 굳건한 불변의 세계로 투영된다. 그러기에 거기에 집착하고, 또한 절망한다. 그것은 미혹의 세계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그 같은 유위세계의 실상을 참답게 관찰함으써 인과의 사슬을 끊고 열반의 세계로 나아가는 깨달음의 세계도 있다. 


3장 미혹한 세계

129 천계에서의 삶은 위로 올라가면 갈수록 복락과 수명면에서 뛰어나기는 하지만, 지복의 세계는 아니다. 그곳 또한 유위세계인 이상 무상 변천을 면할 수는 없다. 지옥에서 천계에 걸쳐 삶을 영위하는 모든 이를 유정有情(혹은 衆生)이라고 하는데, 그들이 나아가는 세계는 이전에 행한 업에 따라 결정된다. 죽음은 종말이 아니며, 일찍이 지은 업에 따라 5취 중 어느 한 곳으로 끝없는 생사의 유전을 되풀이한다. 생사 윤회한다는 점에서 천계의 유정도 지옥의 유정도 동일하다 그곳은 다같아 미혹한 세계이다. 


130 불교의 경우, 하늘 역시 유위의 세간인 이상 무상 변천을 면할 수 없다. 하늘과 지옥 등은 다만 인간행위에 따른 생사윤회의 궤도일 뿐이다. 그곳들은 오로지 즐거움과 고통만이 감수되는 곳이기 때문에 자발적인 업을 지을 수 없다. 그곳에서의 삶은 모두 이숙의 과보일 따름이다. 아비달마불교의 목적은 궁극적으로 3계 5취의 윤회에서 벗어나는 것이며, 그것은 오로지 인간만이 가능하다. 따라서 3계 5취의 분류는 인간을 본질적으로 열반을 지향하는 존재로 규정하는 것이라고 이해해야 할 것이다.


133 우리가 경험하는 행 · 불행의 세계는 그렇다 할지라도 산하대지나 일월성신과 같은 자연의 세계를 어떻게 다만 업의 소산이 라고 하겠는가? 불교는 이 물음에 대답하여야만 하였다. 그것은 물론 불타의 일차적인 관심사가 아니었다고 할지라도 세간의 호기심에 대답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유정은 각자가 지온 업에 따라 3계 5취를 윤회하지만, 그들의 삶의 토대가 되는 세계는 어떻게 이루어지게 된 것일까? 유정의 업에는 크게 유정 각각의 개별적인 업과 그들 공동의 업 두 가지가 있는데, 전자가 유정 각자의 삶을 결정짓는 업이라면, 후자는 객관의 세계를 형성하는 업으로, 말하자면 우주적 에네르기라고 할 수 있다.


133 세계 기원설에 대해서는 《장아함경》에 수록된 《세기경》과 이것의 별역인 《대누탄경》 《기세인연경》등에서 설해지고 있지만, 아비달마의 여러 논서를 거쳐 《구사론》에 이르러 마침내 구체적으로 집대성된다. 그러나 이것은 불교의 고유한 학설이 아니라 인도 재래의 우주관이 불교의 업설과 관련지어져 정리된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162 아비달마에서 생명현상은 목숨을 의미하는 이른바 명근이라고 하는 불상응행법이 현상함으로써 시작된다. 그것은 의식과 체온을 유지하게 함으로써 어떤 유정이 일생 동안 유정으로서의 보편성(즉 동분)을 지니게 하는 힘이다. 곧 인간의 보편성은 잉태되는 순간 획득되기 때문에 생명현상도 잉태로부터 시작된다. 그러나 생명 자체는 '나(자아)'도 '나의 생명'도 아니다. 그것은 개별적인 실체로서 존재할 뿐이며,:전생에 지어진 업에 따라 구체적 존재(사람 혹은 개의 동분)의 생명으로 현상한다.


164 우리는 일반적으로 '삼세실유 법체항유'라는 유부의 교학을 글자 뜻대로만 이해하여 과거 · 현재 · 미래라는 시간이 실재하며, 그사이로 제법이 관통하여 유전 상속한다고 생각하듯이, 윤회 또한 인간이 죽으면 육체는 소멸하지만 자아(혹은 영혼)는 계속 존재하여 이전 생에 쌓은 업에 따라 지 옥에서 천계에 이르는 3계 5취를 관통하며 유전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누누이 언급하였듯이 초기불교 이래 무아의 이론은 무상의 이론과 함께 교학의 전제였다. 실체로서의 시간이 존재하지 않듯이 자아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오로지 찰나에 생성 소멸하는 5온만이 존재할 따름이다. 5온의 변화가 시간이라 일컬어지는 것이며, 그 같은 존재를 다만 자아라고 가설한 것일 뿐이다.


165 불교에 있어 윤회란, 마치 풀벌레가 이 풀에서 저 풀로 옮겨가듯이 고정불변의 자아가 존재하여 이 생에서 저 생으로 옮겨가는 것이 아니라 5온이 찰나에 생성 소멸함으로써 전이하는 현상을 말한다.


169 '내'가 존재하기 때문에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기 때문에 내가 존재한다. 내가 존재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에 내가 존재한다. 우리 범부들은 대개 드러난 현실만을 알며, 거기에 묶여 있을 뿐이다. 때문에 지금의 나의 생각과 사랑을 나의 모든 것이라 여긴다.


171 세상의 거의 모든 철학과 종교들이 한편으로는 인간이 구원되어야 할 영원한 자아(혹은 영혼)를 갖고 있다고 가르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자비와 관용이라는 비이기성을 가르치고 있다. 자아를 갖는 한 이기성은 필연적인 것이다. 혹자는 말한다. 전자는 대아이며, 후자는 소아라고. 혹은 전자는 보편적인 자아이고 후자는 개별적인 자아라고. 그렇다면 이같이 모순된 두 자아가 어떻게 서로 양립될 수 있을 것인가? '존재론과 윤리학은 양립될 수 없는 것인가?'— 고래로 철학의 관심은 온통 여기에 집중되어 왔지만, 그러나 적어도 불타에 의하는 한 그것은 희론이다. 


171 유부 아비달마에서는 그것이 어떤 형태이건 영속 단일 보편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우리가 세계를 보편적으로 인식하는 것은 보편성 내지 언어라고 하는 개별적 존재(즉 법)가 관계하기 때문이다. 자아를 비롯한 그 같은 보편의 존재 는 다만 미망의 산물일 뿐이다.


174 아비달마불교에서는 불타의 12 연기설 역시 이 같은 5온 상속의 한 형태로 이해하였다. 즉 그들은 12연기를 앞서 언급한 4유설과 태내 태외의 5위설과 결부시켜 번뇌와 업에 따라 과거 생으로부터 현재 생을 거쳐 미래 생에 이르는 윤회의 과정으로 해석하였던 것이다.


180 유부에서는 이 중에서 분위연기설을 불타의 정설로 취하였고, 이에 따라 12 연기를 삼세 양중의 인과설로 해석하였다. 곧 세존께서는 '과거 · 현재 · 미래세에 나는 존재하는가?(혹은 존재하였던가? 혹은 존재할 것인가?) 존재하지 않는가? 존재한다면 어떠한 존재, 어떠한 방식으로 존재하는가?'에 대한 유정의 의혹을 제거하기 위해 12연기를 설하였다는 것이다. 또한 경에서 설한 온갖 형태의 연기설은 유정의 근기에 따른 것으로, 아비달마에서는 삼세에 걸쳐 인과 상속하는 유정의 존재본성을 밝히기 때문에 오로지 12연기만을 설한 것이라고 하였다.


4장 깨달음의 세계

218 불교의 궁극적 지향점인 적정안온의 열반은 바로 이 같은 번뇌의 단멸에서 증득되는 것으로, 그것은 오로지 더 이상 번뇌를 수반하는 일이 없는 지혜의 힘, 무루 간택력에 의해 가능하기 때문에 '택멸'이라고도 한다. 온갖 번뇌를 비롯한 모든 존재의 참다운 관찰만이 중생을 열반으로 이끌 수 있으며, 이것이 바로 아비달마의 목적이었다,


315 우리는 이상에서 깨달음의 과정과 그것의 자재와 양식이 되는 지혜와 선정에 대해 살펴보았다. 그러나 이러한 깨달음의 과정은 불타의 제자 즉 불타의 법문을 듣고서 그에 따라 깨달음의 길로 나아가는 이른바 성문에 해당하는 것이다. 그들의 궁극적인 목적은 무학의 아라한이었다. 그렇다면 불타는 역시 아라한이다. 불타 역시 무루의 지혜로써 일체의 번뇌를 끊었으며, 그로 인해 마땅히 공양을 받을만한 성자가 되었던 것이다.


316 즉 성문은 괴로움으로 표상되는 일체의 세계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불타의 법문을 청문하고서 그에 따라 수행하는 자이다. 이는 바로 당시뿐만 아니라 오늘날에 있어서도 불교 수행자들의 일반적인 태도일 것이다. 그러나 이 점으로 인해 아비달마불교는 새로이 흥기한 대승으로부터 자리의 불교, 즉 '소승'으로 불려지게 된 것이다.


317 예컨대 어떤 한 개인의 죽음(이 또한 경험의 한 형태이다)은 그 누구도 대신 죽어줄 수도 괴로워해 줄 수도 없는 자기만의 죽음이며, 자기만의 괴로움인 것이다 따라서 죽음을 비롯한 일체 괴로움의 소멸 또한 자신의 몫이며, 그래서 불타는 오로지 자기 자신을 귀의처로 삼으라고 가르치지 않았던가? 불타는 구원자가 아니라 다만 법의 위대한 교사일 뿐이었다.


320 보살은 3승 중 가장 근기가 예리한 자로서, 불타가 되기 전까지의 유정을 말한다. 그는 발심하고서부터 3아승지겁 100겁의 수행을 통해 일생보처의 보살로 태어나고, 마침내 이생에 무상정등각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325 불타는 제법의 실상을 깨달아 일체의 지혜를 구현하신 분이며, 그것으로써 일체의 번뇌를 끊으신 분이다. 이는 자리의 덕이지만, 그것은 지극히 원만한 덕이기에 중생을 구제하려는 이타의 덕으로 나타나게 된다. 완전히 차게 되면 흘러 넘치게 마련이다. 아니 그것은 일찍이 발심할 때의 보살의 서원이었다.


327 유부 아비달마에서 설하는 불타의 전지성과 덕성의 위대함은 대승경전에 조금도 뒤지지 않는다. 이 같은 사실은 석존에 대한 그들의 신념이 얼마나 지극한지를 나타내 보여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하니 성문의 제자로서 누가 감히 불타의 지위를 엿볼 수 있을 것인가?


327 나아가 그들의 불타관이 이와 같다고 할 때 불타는 결코 시방의 일체의 삼천대천세계에 두 분이 출현할 수 없다. 불타의 위신력에는 한계가 없으므로 오직 한 분의 불타만으로도 능히 시방의 일체 세계를 교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두 분의 불타가 출현한다면 공덕이 양분되어 원만하지 않다고 해야 할 것이고, 그럴 경우 시방세계를 두루 교화할 수 없게 될 것이며, 어느 한 곳이라도 교화할 수 없는 곳이 있다고 한다면 다른 곳 역시 그러하다고 해야 한다. 이 같은 이유에서 그들은, 하늘에 두 개의 태양이 있을 수 없듯이 불타 또한 시방의 일체 세계에 한 분만이 출현한다는 시방계일불설을 주장하였던 것이다.


328 일반적으로 아비달마불교라고 하면 현학적이고 사변적인 이론 위주의 불교, 현실 부정적이고 개인적인 자리의 불교로 이야기되지만, 그들 성문의 구도자들은 지혜를 구하는 길이 얼마나 어렵고 험난한지를 그들의 구도상의 체험을 통하여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그 같은 길을 열어 보였고, 그것을 다시 자비심으로써 여러 중생들에게 가르치신 불타의 위대함을 누구보다도 강하게 느꼈던 것이다.


328 그렇다고 할 때 이른바 소승이라 일컬어지는 아비달마불교는 참으로 순수하고 솔직하며, 냉철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다만 불타의 가르침에 따라 열반을 추구하는 성문의 제자였던 것이다. 그들의 당면한 문제는 8만 4천의 법문이라 일컬어지는 불타의 가르침을 어떻게 모순 없이 해석하고 이해하여 열반에 이를 것인가? 하는 점이었던 것이다.


후기

330 우리는 대개 그러한 체계를 시대적 구분에 따라 원시(초기)불교―아비달마(부파, 혹은 소승)불교―초기대승―중기대승―후기대승의 밀교로 나누기도 하고, 혹은 그 중의 두드러진 각각의 이론체계에 근거하여 유부 아비달마 · 경량부 · 중관학파 · 유가행파로, 혹은 중국의 교판기에 따라 소승교 · 대승시교 · 대승종교 · 대승돈교 · 대승원교로, 혹은 화엄 · 아함 · 방등 · 반야 · 법화 열반 따위로 나누기도 한다. 그리고 이들 체계는 다시 세부적 체계로 나누어져 서로 대립하기도 하고, 혹은 종합을 꾀하기도 하지만,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이 모두가 불타 깨달음을 근거로 한 그의 말씀의 학적 이해체계로서 상호 유기적으로 관계한다는 사실이다.


332 주지하듯이 소승이라는 말은 부파(아비달마)불교에 반동으로 생겨난 이른바 대승에 의해 폄하되어 불려진 명칭이다. 역어로서는 '작다'이지만, 그 원어 hina는 '마땅히 버려야 할' '저열한' '천한'의 뜻을 지닌 것으로, 제불보살의 어머니라는 반야바라밀다를 통해 불과를 추구하며 6바라밀을 실천하던 일단의 보살승들이 《소품》 계통의 반야경전을 작성하면서 스스로의 도를 '대승'이라 칭하고, 기성의 불교 특히 유부 비바사를 중심으로 하는 아비달마불교를 멸시하여 그렇게 불렀던 것이다.


344 괴로움은 주체적인 것이다. 남의 실연은 일상이지만 나의 실연은 우주의 무게로 다가온다. 남의 죽음은 필연적인 것이지만 나의 죽음은 종말의 비극이다. 그것은 나만이 느끼는, 나만의 고통이다. 그 실연을, 그 죽음을 누가 대신 감내해 줄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은 오로지 나의 몫이며,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는 것 또한 나의 몫이다. 그러기에 자리라고 하는 것인가? 아니라면 혹 그들이 추구한 열반 자체를 이기주의로 이해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348 초기(혹은 아비달마)불교에 의하면, 세계란 단일하고 지속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찰나찰나 간단없이 일어나는 연속적인 경험들의 인과적 연쇄일 뿐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세계를 그러한 것으로 이해하고 또한 믿는(집착하는) 것은 부분적으로 그것이 그러한 특성의 사유와 언어를 통해 드러나기 때문이다.


348 우리는 이 같은 사실을 간과한 채 영속 단일 보편의 언어를 통해 드러나는 세계 또한 그러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다시 말해 언어와 세계를 동일시하는 것이다. 따라서 언어란 한편으로 세계를 드러내는 방편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무지의 근원이기도 하다. 


350 소승이라 일컬어진, 지금도 그렇게 일컬어지고 있는 아비달마불교는 불교철학의 최초의 전개로서, 불교학 상의 거의 모든 문제를 노정시키고 있다 그것은 대승공관에서 항상 말하듯이 그 자체로서는 열등하지도 않으며, 방편설도 아니다. 그것은 대승과는 또 다른 형태의 진리설이기 때문에 그것만으로도 불타 자내증을 엿보기에 충분한 의미와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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