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경: 불교의 무아론
- 책 밑줄긋기/책 2012-22
- 2020. 1. 20.
불교의 무아론 - 한자경 지음/이화여자대학교출판문화원 |
1부 근본 불교의 무아론
1장 무아론의 의미
2장 유업보(有業報) 무작자(無作者)의 논리
3장 작자 없는 연기적 순환
2부 유부의 무아론: 인무아
1장 유부(有部)의 존재론
2장 업과 업력의 존재론적 위상에 대한 물음
3장 유부에서 업과 업력: 표색(表色)과 무표색(無表色)
4장 유부적 설명의 한계와 다른 부파의 설명
3부 경량부의 무아론: 상속전변차별
1장 경량부에서 업과 업력: 사(思)와 종자(種子)
2장 종자의 상속전변차별
3장 업 상속의 제 현상
4장 미세식의 발견
4부 유식의 무아론: 인무아와 법무아
1장 유식성과 그 자각의 의미
2장 식의 전변
3장 식의 삼성
5부 무아론에 담긴 불교 존재론
1장 현상 세계 존재론: 5온 12처 18계
2장 윤회의 길과 해탈의 길
3장 연기와 무아
지은이의 말
7 불교는 일체가 상대적임을 인식할 때 그 인식의 시점이 절대의 시점이라는 것, 그리고 그 절대가 바로 공(空)이라는 것을 안다. 공은 신이나 물질로 또는 관념이나 언어로 실체화되거나 객관화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현상 세계, 만물의 경계 그리고 선과 악, 유와 무, 음과 양 등 모든 이원화의 경계를 흔들고 녹여 사라지게 만드는 절대의 시점, 그것이 바로 공이다.
8 불교의 존재론은 곧 수행론이다. 마음이 공이 되자면, 마음이 포착하는 이 세상 모든 것이 상대적이며 인연 화합의 산물이라는 것, 무자성이며 비실유의 가(假)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 그 깨달음의 내용에 도취해 있지 말고 거기에서 깨어나야 한다. 그것이 "이 뭐꼬"의 화두가 풀리는 순간이고, 깨달음의 내용인 팔만대장경의 법문이 염화미소 속에 녹아 버리는 순간이다. 색이 사라지고, 상이 사라진 허공에서 마음이 마음을 보고 눈이 눈을 보는 순간이다.
1부 근본 불교의 무아론
19 불교에 따르면 그것은 오온 화합물로서의 인간이다. 그렇다면 오온 화합물로서의 자아는 존재하는 것이 아닌가? 업과 윤회의 주체를 오온 화화물로서 인정한다면, 그런 오온 화합물로서의 자아가 존재하는 것인데, 굳이 무아론을 표방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그것은 오온 안에 '그것이 나다'라고 할 만한 자기 동일적 실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내 몸 바깥의 빵을 나라고 하지 않는다면, 그 빵을 먹어서 된 나의 몸도 나라고 할 수 없으며, 내 생각 밖의 특정 이념을 나라고 하지 않는다면, 그 이념을 받아들여 형성된 나의 생각도 나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불교는 오온을 중연이 화합해서 형성된 연기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무아를 주장한다.
28 취착의 업력에 매여 해탈하지 못하면 후세의 몸을 받고, 취착의 업력이 끊어져 해탈하면 후세의 몸을 받지 않는다라고 함은 불교에 있어 업에 따른 윤회와 업이 다한 해탈은 단지 심리적 지유와 심리적 부자유의 차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말해 준다. 윤회는 죽음이 번뇌의 끝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주고, 해탈은 번뇌의 끝이 그냥 끝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다. 인간이 단지 오온 화합물일 뿐이라면, 현생의 고통과 고통스런 윤회는 설명되겠지만, 불교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해탈이 설파되지 않는다. 해탈 또는 열반이 단지 심리적 자유스러움 또는 생과 더불어 모든 번뇌가 끝나 버리는 단순한 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생과 사 너머의 어떤 것을 의미한다면, 인간 안에 생사의 경계를 넘어서는 무엇인가가 있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42 불교는 상일주재의 자아 관념을 떠날 뿐만 아니라, 무상 · 고 · 무아인 오온까지도 떠날 것을 촉구한다. 오온이 상일주재의 자아가 아니라는 그 실상을 제대로 파악함으로써 오온에 대해 싫어하는 마음을 내어 결국 오온을 떠나라고 말하는 것이다.
42 이처럼 오온은 그것이 상일주재적이라고 잘못 안 상태에서든 아니면 무상 · 고 · 공인 것으로 바로 안 상태에서든 우리가 그 안에 머무르며 우리 자신과 동일시될 수 있는 자아로 인정되지 않는다. 이런 의미에서 불교는 상일주재의 자아에 대해서도 무아를 주장하고, 마찬가지로 무상 · 고 · 공인 오온에 대해서도 무아를 주장한다. 상일주재적 지아의 관념도 떠나고, 무상 · 고 · 공인 오온으로부터도 떠날 것을 촉구하는 것이다. 상일주재적 자아는 단지 시설된 개념인 가설(假說)일 뿐이고, 색수상행식의 오온은 단지 중연화합하여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른 가상의 가아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47 석가는 사후에 지아가 존속하는가 함께 사멸하는가의 물음에 대해 존속한다는 상견을 제시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함께 사멸해 버린다거나 아니면 알 수 없다는 단견을 제시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석가는 그 물음에 이미 전제되어 있는 자아의 관념을 비판한다. 즉 그 물음은 생전의 자기 동일적 자아를 이미 전제하고 그 지아가 죽음 이후에도 멸하지 않고 동일하게 남는가 아니면 죽음과 더불어 단멸하는가를 묻고 있다. 그런데 그러한 물음의 대상이 되는 그 지아란 과연 어떤 존재란 말인가? 사후의 존속 여부를 묻게 되는 그 자이를 우리는 어떤 존재로 이해하는가? 석가는 그 물음이 이미 당연하게 전제하고 있는 바로 그 자아의 존재를 문제 삼으면서, 그런 자기 동일적 자아란 애당초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51 석가가 무기를 보인 물음, "세상은 상주하는가, 무상한가?", "자아는 지속하는가, 단멸하는가?" 에서의 무상함은 실제로 단멸함을 의미하며, 불교의 기본 교설에 속하는 "일체는 무상하다"의 무상함은 그야말로 무상함(anicca)을 의미한다. 결국 "자아는 사후에도 존속하는가, 단멸하는가?" 의 물음은 이미 자아의 일생 동안의 불변적 자기 동일성을 전제한 물음이며, 이는 곧 "일체는 무상하다"는 일체 존재의 본래적 무상성(anicca)에 어긋나는 것이다.
52 이처럼 위의 물음에서의 상견과 단견은 둘 다 일정 기간 존속되는 자기 동일적 자아를 전제한다. 이런 식으로 지속하는 자아를 전제할 경우에만, 다시 그것이 언제까지나 계속 남아 있는가 아니면 어느 순간에선가 단멸하는가를 물을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그 두 관점은 다 무상하지 앓은 자아 존재를 인정하는 유아론에 속한다.
56 앞에서의 상견이나 단견이 둘 다 인간 삶에 대해 '삶을 사는 자'를, 인간 행위에 대해 행위하는 자를 자아로 설정하고 있는 것이라면, 석가는 그와 같이 사는 자, 행위하는 자 등을 작자로서 따로 설정하는 것을 비판한다.즉 업에 대해 '업을 짓는 자', 보에 대해 '보를 받는 자'를 자아라는 이름 아래 따로 설정하는 것을 비판하는 것이다. 동사적 활동에 대해 명사적 사물을, 활동성에 대해 '활동하는 어떤 것'을 활동의 주체로 설정하는 실체론적 사유에 대한 비판이다.
59 석가는 이러한 설체론적 논리에 따라 상주불변하는 것으로 생각된 자기 동일적 자아인 아트만을 부정한다. 인간의 업에 대해 그 업과 독립적으로 업을 짓는 작자로서 상정된 자아란 그야말로 우리 자신의 설정이고 개념일 뿐이라는 것이다. 분명히 업은 존재하고 인간 행위는 존재하지만, 그리고 행위의 결과, 업의 보도 존재하지만, 그런 현상적인 것들을 넘어서서 불변하는 업의 주체, 동일한 행위 주체란 실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67 이러한 사물의 구성에 있어서도 더 이상 다른 것으로 분할되거나 환원될 수 없는 궁극적 요소가 있어야만 한다. 그래야만 그 최초의 시작 이후의 오늘의 존재가 설명 가능하고, 최초의 인간 이후의 오늘의 나의 존재가 이해 가능하며, 궁극 요소의 화합으로 이루어진 현상 사물의 존재가 해명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실체론적 사유의 기본 논리이다. 그렇다면 연기론적 사유는 실체론적 사유의 무엇을 부정하는 것인가? 연기론적 사유는 실체론적 사유가 무한소급을 피하기 위해 궁극적인 최초의 것을 설정하는 것을 비판한다.
68 연기론적 사유가 무한소급을 피하는 길은 최초라고 생각된 그 어떤 것을 최후라고 생각된 그 어떤 것을 통해 존재하는 것으로 설명하는 것이다. 원의 시작점이 원을 완성하는 끝점과 맞물려 그 과정에 끝이 없듯이, 씨에서 싹이 트고 꽃이 피고 열매가 열리는데, 그 열매에서 다시 씨가 나와 그 과정에 시작과 끝이 없듯이, 그렇게 최초라는 것도 없고 최후라는 것도 없다는 것이다. 순환 속에는 근원적 시작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어느 것도 시작으로 상정될 수가 없다.
86 연기의 각 항들이 동시적 상호 인과가 아니라 이시적 상호 인과의 관계로서 존재하기에, 따라서 어느 항이든 그것이 인과 계열을 따라 한 바퀴 돌아오고 나면 이전의 그것과는 다른 것으로 비뀌어 되돌아오기에, 인과 관계로 이어지는 12지 연기는 발생의 논리이며 윤회의 논리가 되는 것이다.
98 식과 명색의 관계는 애착의 업력에 따라 후생을 받고자 하는 식(중음신)과 그 식이 수정란을 통해 자신을 실현시켜 현실화된 물리 심리적 존재인 오온으로 해석될 수 있다. 그렇다면 중음신인 식은 어떻게 해서 생긴 것인가? 불교는 행을 연하여 식이 생긴 것으로 말한다. 식은 업력 덩어리이다. 전생의 오온이 쌓은 업 중에서 그 생에서 미처 보를 받아 해소되지 못하고 남아 있는 업이 간직하고 있는 힘이다.
99 불교는 일체의 집착을 집착하는 자아에 대한 집착인 아집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본다. 그리고 이는 집착할 만한 아가 없다는 무아를 알지 못하는 무명에서 온다. 지아 내지 오온의 실상을 제대로 여실지견하지 못하여 그러한 무명으로부터 사량과 분별 망상과 집착의 업을 짓게 되고, 그 업으로부터 업력의 식이 생겨나는 것이다.
102 12 연기는 업의 작자를 상정하지 않고 연기의 시작을 설정하지 않은 채, 즉 누가 느끼고 누가 사랑하고 누가 집착하고 누가 있는가를 묻지 않은 채, 느낌이 사랑으로, 사랑이 집착으로, 집착이 존재로 이어지고 있음을 설명하는 것이다. 이 이어짐 속에서 현상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명색, 즉 색수상행식의 오온일 뿐이다. 오온은 자기 동일적인 것으로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연기 과정의 변화 속에서 단지 연기의 인과법칙에 따라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것일 뿐이다. 현생의 오온이 다하고 내생의 오온이 생하는 것이 윤회이며, 윤회에 있어서도 자기 동일적 자아는 없고, 단지 연기에 따른 이어짐이 있을 뿐이다. 오온으로 이어지는 윤회에 있어 그처럼 미래의 유를 이끌어 오는 것이 식이며, 이 식으로부터 미래의 명색, 즉 오온이 형성된다. 따라서 식이란 바로 오온을 형성해내는 힘, 업력을 뜻한다. 결국 윤회란 업이나 업력 또는 식의 상속으로 이해될 수 있다.
2부 유부의 무아론: 인무아
106 집착할 만한 자아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나라고 집착하는 것은 단지 색수상행식 오온 화합물일 뿐이다. 화합물이라는 것은 인연 화합의 결과물, 연기의 산물기라는 말이다. 요소들이 모이고 쌓여서 나라는 가상물인 오온을 만들어내고, 그 오온에 대해 나라는 망상·아견을 일으켜 아집이 발생하지만, 이는 내가 인연 화합물인 오온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연기의 산물기라는 것을 모르기 때문이다. 불교의 이러한 주장은 인연 화합으로 구성된 것, 요소들이 모여 쌓인 것, 연기의 산물은 실유가 아니며, 그런 연기적 화합물을 구성하는 각각의 요소, 각각의 법은 실유라는 주장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 바로 이런 방식으로 연기의 구성물인 오온으로서의 자아는 실재하지 않지만, 그런 구성물을 형성하는 각각의 요소인 법은 실재한다는 '아공법유'가 성립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설일체유부의 관점이다.
107 오온과 달리 오위법에 무위법이 포함된 것은 유부가 오위법으로써 일체 존재를 설명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색수상행식의 오온이 원래는 인간 존재의 심과 신의 설명에서 출발하되, 오근의 대상으로서의 오경과 의근의 대상으로서의 법경을 함께 논함으로써 결국 인간 이외의 대상 세계까지도 포함하여 설명하였지만 그 범위가 현상 세계의 유위법에 국한되어 있었다면, 유부는 인연 작합을 통해 현상 세계를 구성하는 유위법뿐 아니라 판법까지도 포괄하여 일제를 설명하고자 한 것이다.
111 유부에 따르면 색수상행식 화합물로서의 지아는 실재하는 것이 아니지만, 각각의 구성 요소로서의 법온 실재한다. 극미 화합의 색법이 실재하고, 심법, 심소법, 불상응행법, 무위법이 그 각각으로서 실재한다. 색법은 물리적 실재이고, 심소법은 심리적 실재이며, 불상응행법은 논리적 내지 관념적 실재이고 무위법은 절대적 실재라고 할 수 있다.
134 유부에 따르면 표업의 행위가 마음의 의도에 기반하되 그 자체로서는 마음과 독립적인 것이듯이, 그 표업이 남겨놓는 결과물인 무표색 또한 마음과 독립적으로 신체상에 유지된다. 그러다가 그 무표색이 보를 산출하기 위해서는 법처에 속하는 또 다른 법인 득(得)과 결합되어야 한다. 무표색은 찰나 생멸하는 현재의 우리 행위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업보를 발휘할 수 있게끔 그 업력을 보존해 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135 무표색은 신체적 업을 통해 발생하며 그 신체의 색온에 부착되어 남겨지기에 색법에 속하는 것이지만, 그러나 표업처럼 표가 나는 것이 아니며 오근 오경 이외의 것이기에 법처에 속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결국 무표색은 색온에 포함되면서 또 동시에 심소(心所)처럼 법처에 포함된다는 이중성을 가진다.
3부 경량부의 무아론: 상속전변차별
143 경량부는 구업이나 신업에 있어서도 그 업의 본질을 유부처럼 말소리나 형색으로 간주하지 않고 사(思)로 간주한다. 그렇다고 이것이 업의 본질을 구체적 행위 이전의 단순한 의도라고 설명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유부가 구업이나 신업의 표업을 사와 구분되는 것으로 간주한데 반해, 경량부는 구업이나 신업 역시 광의의 사(思)에 지나지 않는다고 해석하면서, 그 광의의 사(思)를 업의 본질로 간주하는 것이다.
149 단멸되지 않고 연속적으로 계기하면서 그 상속에 있어 전후가 다르게 일어나는 것을 '전변(轉變)'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처럼 전변하다가 최후 순간 특별한 공능을 따라 지금까지의 상속과 성격을 달리하는 전변을 일으키는 것을 '차별(差別)'이라고 한다. 마치 어떤 것이 시간 흐름에 따라 양적으로 물리적으로 변화하다가 어느 순간 질적 변화 또는 화학적 변화를 일으키게 된다면, 전자는 전변에 해당하고, 후자는 차별에 해당하는 것이다. 잠재적 종자로서의 연속이 전변이고 그 종자가 드디어 현행화되는 것을 차별이라고 할 수 있다. 종자는 상속 전변하다가 차별의 과정을 거쳐 현재화되는 것이다.
153 오늘 던져지는 공은 오늘의 오온이 짓는 업이 며, 내일 떨어지는 공은 바로 그 업의 보이다. 우리가 자아로 여기는 오온은 바로 업의 힘, 업력에 의해 형성된 존재이지, 즉 굴러가는 공 자체이지 공 바깥에 따로 서 있는 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가 던져진 공 바깥에 따로 자아를 설정하는 것은 업 바깥에 자아를 설정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자아란 업력에 의해 형성된 것이지, 업력 바깥에 따로 존재해서 업을 받고 피하고 할 수 있는 그런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153 불교의 업보론은 이런 의미에서 작자를 설정하지 않는 무아의 업보론이다. 이 업보가 12지 연기에 따라 현생에서 내생으로 이어지는 것이 윤회 이므로 불교의 윤회는 윤회 주체를 따로 선정하지 않는 무아 윤회인 것이다.
175 마치 앞의 생각과 뒤의 생각이 인과 과의 관계로서 서로 연결되면서도 그 둘간에 전변 차별이 있게 되듯이, 우리가 일상적으로 업과 보라고 부르는 것도 인과 연기법칙에 따라 전변 차별하는 오온의 연속성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업에 의해서 오온이 형성되므로 업이 과를 갖는 것이고 다시 그 오온이 짓는 업이 오온의 변화를 일으키며 오온의 상속에 전변 차별이 있게 되므로 인과가 성립한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업과 보가 이어지고 있으므로, 자기 동일적 자아를 상정함이 없이도 윤리적 책임의 문제 역시 해명될 수 있다.
176 윤회라는 것은 업을 짓는 나, 그리고 보를 받는 나가 존재하여 그 자기동일적 나가 이생에서 내생으로 넘어가는 것이 아니다. 업으로 형성된 하나의 온이 멸하고 나면 거기 남겨진 업력이 다시 그 다음의 온을 형성하고, 그렇게 해서 온에서 온으로의 연속성, 즉 온의 상속만이 있을 뿐, 자기동일직 실체가 오온 너머의 별도의 자아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인으로서의 오온과 과로서의 오온을 하나라고도 말할 수 없고 그렇다고 완전히 서로 다른 것이라고도 말할 수 없는 것은, 한 촛불에 있어서도 아침에 타는 불과 저녁에 타는 불을 서로 같다고도 다르다고도 말할 수 없는 것과 같다. 불길은 인과 과의 관계로 연속성을 가지며 계속되는 것일 뿐이다. 그처럼 유정의 오온도 인과 과의 관계로서 연속성을 가지며 한 생에서 그 다음 생으로 계속되는데, 이를 윤회라고 하는 것이다.
4부 유식의 무아론: 인무아와 법무아
199 유식이 인간 마음의 활동 중 가장 심층의 식으로 발견한 아뢰야식은 자아로 간주될 만한 특별한 실체가 아니다. 아뢰야식은 업(業)에 의해 형성된 업력인 종자의 흐름[잠재식]으로존재하며, 또 동시에 중연을 따라 끊임없이 현상 세계로 구체화되는 심층식이다. 아뢰야식에 심겨지는 종자를 유식은 그것이 습관적인 기운이라는 의미에서 습기(習氣)라고도 한다. 행위 내지 업이 그 행위의 잔재 세력인 업력을 남기는 것이 훈습이다. 마치 향 피운 방에 오래 있으면 향내가 옷에 스며들 듯이, 행위[업]는 그렇게 우리의 마음에 그 여력[종자]을 남기는데, 이 과정을 현행훈종자라고 한다. 그리고 그렇게 마음에 남겨진 종자가 마음 속에서 멸하지 않고 상속 전변하는 과정을 종자생종자라고 한다. 그리고 잠재적 종자가 구체적 식으로 일어나는 현행의 과정을 종자생현행이라고 한다.
5부 무아론에 담긴 불교 존재론
202 전경을 대상으로 인식하는 식이 의식과 말나식의 표층적 식이라면, 배경과 관계하는 식은 심층의 아뢰야식이다. 유식은 표층적 식이 인식하는 세계에 대해 그 배경이 되는 세계 자체를 심층 아뢰야식이 그린 영상, 즉 식일 뿐이라고 간주한다. 의식의 배경이 되는 세계는 식의 변현이고 식의 영상이지, 식 바깥에 식과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객관 세계가 아니라는 것이다.
205 아뢰야식이 주객으로 이원화됨으로써 견분과 상분이 발생한다는 것은 곧 식이 활동하여 현상 세계(상분)를 그려내면서 그 세계 속에서 그 세계를 객관 대상으로 인식하는 주관적 자아 의식(견분)을 형성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주객 통합의 마음이 발하여 주객 이원화, 나와 세계의 대립이 형성된다. 그 객관적 상이 상분이고, 그 주관적 상이 견분이다. 그렇게 견분과 상분으로 전변하는 아뢰야식 자체의 활동성을 아뢰야식의 자증분이라고 한다. 아뢰야식의 견분은 주관의 위치에서 객관을 의식하는 능동적 작용이며, 이를 식의 행상이라고 하고, 아뢰야식의 상분은 견분에 의해 대상으로 취해진 것, 즉 식의 소연을 말한다.
215 그런데 문제는 일반 범부는 이러한 유식성을 모른다는 것이다. 즉 의타기성을 모르고 연기를 모른다. 근본 불교에 있어 일체가 연기에 의해 형성된 것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것이 바로 무명(無明)이다. 이 무명에 근거해서 중생의 번뇌와 업이 발생하고 업에 따라 윤회가 성립한다. 유식에 따르면 연기를 모르는 것은 곧 의타기성을 모르는 것이고 유식성을 모르는 것이다. 유식성을 모르고, 자아와 세계, 아와 법을 실아와 실법으로 간주하여 아집과 법집을 일으키며, 그 분별과 집착으로 인해 번뇌 속에서 괴로워하며 업을 짓고 윤회하는 것이 일반 범부인 것이다. 이처럼 의타기를 모름으로써 성립하는 식의 또 다른 특징을 변계소집성이라고 한다. 현상 세계가 무자성이고 비 실유라는 것을 모르고 치우쳐 분별하는 것이 변계이며, 그 분별에 따라 집착하게 되는 것이 변계소집이다. 그것은 아무런 자성도 실유성도 없는 것을 분별하고 집착하는 것이기에 망분별이고 망집인 것이다.
219 자신이 보는 눈이라는 것을 자각하는 것은 세계가 보여진 세계라는 것을 깨닫는다는 말이다. 유식성을 깨닫는다는 말이다. 이렇게 해서 유식성, 즉 의타기성을 의타기성으로 알게 되면 변계소집성을 떠나게 되며, 이를 원성실성이라고 한다. 원성실성은 아와 법이 실아와 실법이 아니라는 아공과 법공을 깨닫는 것이며, 아와 법, 자아와 세계가 식소변이라는 것을 참되게 아는 것이다.
252 불교의 연기는 유전문만을 가진 것이 아니라, 윤회를 벗어 해탈에 이르는 환멸문도 함께 가진다. 환멸문은 연기적 인과 관계 속에서 한항을 없앰으로써 다시 그 다음 항을 없애 결국은 전체가 다 멸해 다시 태어나지 않고 윤회를 벗어난다는 것이다. 연기의 유전문이 연기의 각 항들이 그 상호 의존성에 따라 연하여 생기함, 즉 연기함으로써 윤회가 성립하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면, 연기의 환멸문은 그러한 상호 의존적인 연기의 관계가 소멸함으로써 결국 연하여 생하는 윤회를 벗어나게 된다는 것을 말해 준다.
254 연기적 순환 관계 속에서 어떻게 그 순환 고리를 끊고 밖으로 탈출할 수 있는가? 연기적 윤회로부터의 탈출, 해탈이 어떻게 가능한가? 그 답은 12지 연기 자체에서 찾아진다. 연기 자체가 비약을 가능하게 하는 역설의 구조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연기는 일차적으로 항들간의 인과 관계의 고리가 순환을 이루어 전체가 상호 의존 관계(유전문)에 있다는 것을 말해 주지만, 바로 그 연기를 깨닫는 순간 그 상호 의존 관계를 벗어나게 된다는 것을 주장하고 있다. 연기를 모르는 한 그 연관 관계 속에 있지만, 그 속에 있다는 것을 아는 순간, 즉 연기를 깨닫는 순간 이미 그 안이 아니라 그 바깥에 있게 되는 것이다.
256 불교의 연기는 형식적으로 보면 일체가 중연이 화합해서 일어난다는 연기의 사실, 일체의 상호 의존성의 시실을 논하고 있는 것 같지만, 실제 연기가 밝히고자 하는 것은 단순한 상호 의존성이 아니라, 그 상호 의존성을 앎으로써 열리게 되는 또 다른 차원이다. 이런 차원으로의 비약을 열어 주는 것이 바로 식이다.
256 일체가 상호 의존적 연기의 산물이라는 것은 일체가 고정적인 자기 자성을 가지는 개별 실체가 아니라, 상호 의존 관계 안에서 형성되는 것임을 뜻한다. 따라서 연기에 의해 존재하는 것들은 그것이 상호 의존적인 연기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즉 자기 자성이 없다는 점에서 모두 무자성의 가"이다.
262 이렇게 눈은 보여진 세계에 상대적이다. 보여진 세계가 나와 너를 포괄하는 하나의 세계인 만큼 보는 눈도 나와 너의 자아 의식을 넘어선 포괄적인 하나의 마음이지만, 보여진 세계가 보는 눈에 의해 그려진 비실유의 가이고 공인 것만큼 보는 눈 역시 비실유의 가이고 공이다. 그래서 불교는 윤회하는 자아, 세계를 그리는 식, 현실 세계를 꿈꾸는 자아에 대해서도 무아를 설한다.
266 꿈에서 깨어나 그 보편적 일심이 회복되면, 더 이상 꿈속에서와 같은 나와 너의 구분, 있음과 없음의 구분이 무의미해질 것이다. 무아는 꿈에서 깨어나기까지, 진정한 진여의 깨달음에 이르기까지, 그 꿈을 깨우기 위해 설하는 방편설인 것이다.
267 결국 꿈에서 깨어나는가 아닌가, 진여를 자각하는가 아닌가는 방편교설을 통해 각성히여, 스스로 그 경지에 이르는가 아닌가의 문제인 것이다. 마음을 욕탐으로 묶어 세간에 매어 두어 윤회를 반복할 것인가, 그 매임을 풀러내고 공성을 자각하겨 해탈에 이를 것인가는 결국 각자가 그 마음을 어떻게 먹는가에 달려 있는 것이다. 그래서 석가는 처음부터 마음을 강조하였으며, 그 자신을 통해서만 스스로 해탈할 수 있음을 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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