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흥태: 이란의 역사 ━ 이슬람의 유입에서 이슬람 혁명까지 / 살림지식총서 336


이란의 역사 - 10점
유흥태 지음/살림


이슬람 출현 이후의 이란

이란계 독립왕국들의 출현

데일람 왕조

투르크계 왕조의 등장

두 번째 외래 왕조 - 일한조와 티무르조

시아 이슬람의 시작, 사파비조

아프사르조와 잔드조

근대 왕조의 시작, 카자르조

팔레비조

이슬람 혁명





이슬람 출현 이후의 이란

4 사산조 페르시아와 동로마 제국 간의 오랜 전쟁으로 동ㆍ서 거대 제국의 힘이 거의 소진되었을 무렵 양 제국의 틈에서 급격히 성장한 것이 이슬람 세력이다. 로마와의 전쟁과 내부의 혼란으로 이슬람의 급속한 팽창을 저지할 만한 힘이 없었던 사산조 페르시아는 곧 이슬람의 손에 들어가게 된다.


4 이란에 처음으로 무슬림이 들어온 시기는 사산조 말기 호스로우 2세 때의 일이다. 호스로우 2세가 예루살렘과 다마스커스까지 점령한 뒤 가져온 십자가와 예수의 유품으로 인해 다시 전쟁이 시작된다. 이 전쟁에서 비잔틴 황제 헤라클리우스가 크테시폰 근처까지 공격해 들어오면서 호스로우의 군대는 철수를 한다. 이 과정에서 아랍에 있던 사산조 군대 안에 무슬림들이 함께 돌아온다. 그러나 본격적인 이슬람의 유입은 무함마드 사후 아부바크르의 군대가 637년 사산조의 수도 크테시폰을 점령하고 이란 고원으로 세력을 확장하면서부터이다.


5 4대에 걸친 정통 칼리프 시대가 끝난 후 이슬람 세계는 아랍 왕조라 불리는 우마이야 왕조(661~750)의 지배를 받는다. 이들은 원로회의를 통한 지도자 선출이라는 이슬람의 전통을 무시하고 혈족 세습으로 아랍인 중심의 왕조를 세웠다. 이슬람을 받아들인 이란은 세습 아랍 왕조가 이슬람 전통에 위배됨을 주장하며 독립운동을 진행했다. 가장 명분 있는 저항운동의 근거가 바로 종교 교리를 내세우는 것이었다.


5 끊임없이 진행되던 우마이야 왕조에 대한 저항은 이라크와 이란 북동부 호라산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이라크 중에서는 쿠파 지역이 중심지였는데 이곳에는 저항세력을 키우는 데 한계가 있었다. 시아 이슬람의 태동이 된 카르발라의 후세인 순교 사건도 쿠파의 사람들과 관련이 있었고, 또한 이곳은 우마이야 왕조보다 무함마드의 사위이자 사촌인 4대 정통 칼리프 알리를 추종하는 시아 이슬람의 근거지였기 때문에 늘 우마이야 왕조의 관심과 통제의 대상이 되었다. 자연히 우마이야 왕조의 중심지인 시리아와 먼 이란 동부의 호라산이 가장 큰 저항의 중심지가 되었다.


5 우마이야 왕조가 멸망하고 압바스 왕조가 등장하면서 이란인들의 정치ㆍ사회적 위치는 많이 변화되었다. 압바스 왕조는 이슬람 제국을 표방하며 아랍인들보다 천 년 이상 제국을 운영해 본 경험이 있는 이란인들을 중용하였다. 이들은 압바스 왕조의 구석구석에서 일하며 왕조를 운영하는 데 일조하였고 지방 책임자인 아미르로 임명되기 시작하였다.


데일람 왕조

11 마르더비즈가 죽은 후 어부 출신인 부예의 세 아들 중 큰아들인 알리는 동생 하산, 아흐마드와 함께 부예조(932~1062)를 건국한다. 알리는 사만조의 군인으로 활동하다가 마르더비즈 밑에서 지방사령관을 지낸다. 현재 아락 인근의 영주로 있던 알리는 데일람의 용맹한 군인들과 함께 이란 중남부 지역으로 세력을 확장한다. 그는 지여르조의 수도였던 에스파한을 수도로 부예조를 건국한다. 쉬라즈를 근거지로 안정된 세력을 확보한 아흐마드는 압바스 왕조의 수도 바그다드를 공격하여 점령한다. 부예조는 허수아비 칼리프를 세우고 100여 년간 실질적인 무슬림 세계의 통치자가 된다.


11 이란 역사에서 부예조의 바그다드 점령은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 첫째, 당시 맘룩(투르크 노예용병)들에 의해 조종되던 이슬람 세계를 이란의 독립왕조가 자신들의 세력으로 만든 것이고, 둘째 12이맘 시아파를 표방하던 부예조가 이슬람 세계를 지배하면서 시아파의 세력이 힘을 얻어 시아 성직자들을 양성하고 이란에 시아파가 정착하는 계기를 만든 것이다.


투르크계 왕조의 등장

12 투르크인이란 이란의 동쪽인 중앙아시아에 살던 민족으로 투르크계 언어를 사용하고 유목생활을 하는 종족을 일컫는다. 사산조 시기에 몇 차례 페르시아를 침략하지만 성공하지 못하고 자신의 지역으로 돌아간다. 이슬람 등장 후 이슬람 군대가 투르크인들이 살던 중앙아시아를 공격하면서 이들은 이슬람으로 개종한다. 이슬람화된 투르크인들이 사만조 시기에 대거 '맘룩'이라는 전쟁 노예 혹은 용병으로 이란과 이슬람 세계로 들어온다. 이들은 사만조 말기에 군사령관 등 고위직을 차지하기 시작하였고 사회 중심 세력으로 성장하여 10세기에서 13세기까지 가즈나, 셀죽, 하라즘샤라는 세 왕조를 이란에 건립하였다. 이들이 이란의 독립왕조로 분류되는 이유는 이란 지역에 나라를 세운 것뿐만 아니라 이들은 페르시아 즉, 이란 문화에 심취하여 자신들의 공용어도 페르시아어로 사용하여 이란 문화를 지속ㆍ발전시켰기 때문이다. 이란 역사에서도 이 시기를 투르크계 왕조의 시대라고 분류하고 있다.


두 번째 외래 왕조 - 일한조와 티무르조

17 칭기즈칸은 말년에 그가 정복한 이란을 포함한 중국에서 유럽까지 이르는 거대한 영토를 네 명의 아들에게 나누어 주었으며 가장 큰 아들인 오구타이에게 후계권을 계승해 주었다. 후에 칭기즈칸의 아들들은 몽골의 지배를 인정하지 않고 반란을 일삼는 이란을 다시 공격하기로 결정한다. 앞에서 언급한 이스마일파 역시 자신들의 산속 요새를 본거지로 지속적으로 몽골에 저항했다. 바그다드의 칼리프도 몽골의 지배에 반대하였다. 결국 칭기즈칸의 손자인 훌라구(Hulagu)는 많은 군사들과 함께 이란을 다시 공격한다. 이것이 몽골의 제2차 침입이다. 그는 이스마일파를 진압했으며 바그다드까지 진격하여 정복하였다. 또한 압바스 왕조의 마지막 칼리프를 죽이고 멸망시켰다. 결국 1258년(이슬람력 656년), 압바스 왕조는 파란만장한 역사를 남기고 멸망한다. 몽골의 군대는 순순히 항복하는 곳을 제외하고 무자비하게 사람들을 죽이고 파괴했다.


18 일한조 시대 중 '무함마드 가잔' 시대를 황금기로 꼽는데 그의 이름에서 짐작 할 수 있듯이 그는 무슬림이 되어 선대왕들의 다종교 정책을 포기하고 이슬람 중심의 정책을 시행하였다. 그의 정책은 지배층인 몽골과 피지배층인 이란인을 융합을 가져왔다. 그는 몽골 제국으로부터 완전한 자립을 이루었으며 라쉬드 알 딘(Rashid al-din)이라는 재상과 함께 이란의 개혁정책을 진행했다. 그는 내부의 많은 반란과 정적을 제거하고 몽골 지방관들이 행하던 폭정을 개혁하였다. 군인들에게 월급을 지급하여 이란인을 착취하는 시스템을 개혁하려 하였다. 이 외에도 정치, 경제, 문화, 학문 모든 영역의 발전을 가져왔다. 또한 농업을 장려하고 관개수로를 개선하였다. 많은 모스크를 세워 이란에 사는 몽골인들도 점차로 이슬람에 호감을 갖기 시작하였고 머지않아 대부분이 이슬람으로 개종하였다.


시아 이슬람의 시작, 사파비조

20 16세기와 함께 시작된 사파비조(1501~1722)의 등장은, 많은 역사가들이 이란 역사의 새로운 전환점이라고 부를 만큼 큰 변화를 몰고 왔다. 이슬람의 침입 이후 페르시아의 정체성을 가지고 과거 사산조 시대 대부분의 영역을 차지한 중앙집권적인 정권은 없었다. 그러나 사파비 왕조가 이 일을 이루었다. 이들은 시아 이슬람을 국교로 정하여 국민에게 장려하고, 시아 이슬람 신학과 성직자들을 보호하고 육성했다. 또한 경제적 부흥과 함께 유럽과의 교류를 확대하였다.


21 이스마일이 건국하고 타흐마습이 나라의 모습을 갖추어 놓았다면 가장 부강케 한 이가 바로 압바스 왕이다. 그러나 압바스 왕이 사파비조의 다섯 번째 왕으로 등극하던 무렵은 매우 정세가 불안한 시기였다. 우즈베크와 오스만 그리고 포르투갈이 이란의 국경 지대를 침범하여 많은 지역을 점령하였고 타흐마습 1세가 죽은 후에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후계자들 사이에 다툼이 심해져 있던 상태였다.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진 키질바시들의 세력 다툼도 심각했다. 결국 왕위 계승 다툼에서 몇몇 키질바시 종족 장군들의 도움을 받은 타흐마습 1세의 손자 압바스가 승리를 하고 왕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권력의 안정을 위해서 자신을 도왔던 키질바시 세력이 위험 요소임을 깨닫고 그들을 제거한다. 강한 힘을 가지고 있던 키질바시가 언제든지 자신에게 반기를 들 수 있을 것을 예상하고 이들을 대체할 군대를 창설하여 키질바시와 정적들을 진압하고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였다.


23 이란과 유럽 국가들은 오스만투르크라는 거대한 공동의 적을 가지고 있었다. 시아파 사파비조는 수니파 오스만과 늘 갈등 관계에 있었고 유럽 또한 유럽으로 팽창하려는 오스만을 견제해야 하는 필요가 있었다. 또한 유럽 내에서 각 국가들이 펼치는 제국주의적 경쟁으로 인해 이란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 하였다. 이들은 정치ㆍ경제ㆍ군사적으로 서로 경쟁을 하였고 새로운 시장으로 떠오른 이란과의 관계에 관심을 보였다. 이 시기에 이란은 스페인과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등과 관계를 가졌다. 이 시기 유럽은 지리상의 발견과 제국주의의 등장으로 급격한 변화를 겪던 시기였고 이란에도 영향을 주었다.


아프사르조와 잔드조

26 사파비조의 몰락이 급속히 진행되던 18세기 초반부터 이란 사회는 급격히 혼란 속으로 빠져 들었다. 강력한 중앙집권적 왕조의 부재로 인해 사회ㆍ경제는 황폐해졌다. 농업과 무역 활동은 위축되었으며 계속 이어지는 폭군들로 인해 대부분의 성직자들은 인도 혹은 이라크로 망명했다. 나디르 또한 국내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확장 정책을 기조로 전쟁에 몰두하여 국력을 소모했다. 그는 뛰어난 전투력으로 영토를 확장했지만 국내의 사회 경제적 문제들을 해결하지 못했다. 사파비 시대의 가장 아름다운 도시였던 에스파한도 아프간족의 침입으로 많은 부분 파괴되었지만 나디르의 통치 기간 동안 그의 수도 였던 마샤드만은 새로운 중심지로 각광을 받았었다.


근대 왕조의 시작, 카자르조

28 아가무함마드의 사망 소식이 전해지자 그의 군대 사령관들은 각자 자신의 세력을 키운다. 그중에 그의 조카이자 황태자였던 파트알리(재위 1797~1834)가 잔드조의 재상 아브라힘의 도움으로 쉬라즈에서 테헤란으로 올라와 왕위를 차지한다.


28  그는 그의 삼촌인 아가무함마드 같은 강력한 힘을 갖지 못했고 자신의 왕위를 유지하는 데 급급했다. 그는 자신의 왕위 등극을 도와준 아브라힘도 권력을 위협한다는 생각에 제거한다. 파트알리 통치 시에 이란은 러시아와 전쟁을 치렀지만 카자르조는 러시아와 유럽의 침입을 막을 힘이 없었다. 이 시기는 이란의 많은 영토를 외세에 양도할 수밖에 없었던 이란 역사상 가장 굴욕적인 시기였다.


30 무함마드(재위 1834~1848)가 다스리던 시기의 상황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사건이 헤라트의 굴욕이다. 그 당시 헤라트의 지방관이었던 캄란 미르자가 영국의 사주를 받고 이란 정부에 반기를 들고 독립을 선언한다. 무함마드는 이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헤라트로 진군하여 헤라트를 포위하였다. 그러나 영국의 즉각적인 반응은 헤라트를 공격할 경우 이것을 영국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하고 이란 남부를 공격할 것이라는 협박이었다. 무함마드는 영국의 사주로 헤라트가 독립선언을 한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영국의 위협에 굴복해 회군할 수밖에 없었다. 힘이 없었던 카자르 왕조로 인해 이란 내의 외국의 영향력은 점점 커졌다.


30 또한 이 기간 동안 여러 이슬람 분파가 출현하면서 카자르조는 더욱 혼란해졌다. 가장 강력하게 진행된 종교운동이 바로 '바비 운동'이다. 이 운동은 후에 바하이교로 발전하여 이란을 넘어 다양한 국가로 퍼져갔다. 바하이교는 세이드 알리 무함마드가 창시한 이슬람의 한 분파로(밥 이라는 말에서 유래된 종파로 밥은 이맘과 사람을 중재하는 존재를 말한다. 중재의 문이라는 뜻을 지니기도 한다) 그는 곧 자신을 시아 이슬람의 예정된 메시야인 메흐디로 선언하고 반란을 일으켰고, 아미르 카비르는 이 반란을 진압하고 세이드 알리 무함마드를 처형한다. 그의 사후 후계자인 미르자 후세인 알리 누리가 다시 자신을 새로운 예언자로 칭하며 새롭게 종교를 일으켰다. 1960년대 우리나라에도 소개되어 활동하고 있다.


32 1907년 입헌 혁명이 성공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무자파르 알 딘 샤가 죽었다. 그의 후계자로 무함마드 알리(재위 1907~ 1909)가 왕위를 계승하였다. 권력을 획득한 초기, 그는 입헌 정치에 동의하는 듯 보였으나 정권을 장악하고는 러시아의 지지를 바탕으로 입헌 정치 제도의 방해 공작을 본격화하였다. 배후 조종한 러시아는 입헌주의자들은 영국을 지지하는 자로 여기고 입헌 정치제를 반대하였다.


33 테헤란을 점령한 후에 입헌 정치가들은 바허레스턴 광장에서 모임을 갖고 무함마드 알리를 폐위하고 그의 아들인 아흐마드(재위 1909~1925)를 왕위에 올린다. 무함마드 알리는 매년 10만 토만을 받고 러시아로 쫓겨 간다.


팔레비조

34 영국은 새로운 식민지 정책의 실현을 위해 세이드 지여레딘 타버타버이와 레자 칸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였다. 레자칸은 1921년 이란의 유일한 현대식 군대였던 자신의 코사크 여단을 테헤란으로 진격시켰다. 그는 아흐마드 왕을 압박하여 세이드 지여레딘을 총리로 임명하고 자신은 총사령관 자리에 오른다. 이것이 쿠데타의 시작이었다.


34 레자 칸은 1923년 영국의 지지를 바탕으로 자신이 직접 총리로 등극하고 친영 정책을 취하기 시작한다. 영국의 지지는 레자 칸이 정적을 축출하고 새로운 왕조를 세우는 데 큰 힘이 된다. 결국 레자 칸은 1925년 의회를 통해 카자르 왕조를 끝내고 새로운 왕조인 팔레비 왕조(1925~1979)를 시작하고 스스로 레자 칸에서 레자 샤로 바꾼다. 그는 터키의 무스타파 케말처럼 공화정을 기초로 근대화된 국가를 꿈꾸었지만 보수적 성직자들의 반대로 결국 왕정을 택한다.


35 1935년에 레자 샤는 나라 이름을 페르시아에서 이란으로 바꾸며 근대화된 새로운 나라를 세우려는 의지를 다졌다. 경제적인 측면의 개혁 성과로 대륙 종단 철도를 완성하였으며 공업 분야의 성장도 두드러졌다.


35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후에 이란은 중립을 선언했지만 레자 샤는 독일 군대가 우세하다는 판단 아래 독일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는다. 연합군은 독일과 이란의 관계가 자신들에게 위협이 된다는 사실을 깨닫고 1941년 이란을 공격하여 레자 샤를 폐위하고 그의 아들인 무함마드 레자 팔레비를 왕으로 세운다. 공들여 개혁했던 레자 샤의 군대는 연합군의 공격에 맥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35 이란 내의 정치적 활기는 결국 외세에 많은 이익을 넘겨주던 석유 사업에 관한 이란의 독립적 권리 주장을 하게 하였다. 그리고 이 일은 결국 이란의 석유 국유화 선언에까지 이어지게 된다. 이 일을 주도한 사람은 성직자인 아야톨라 카샤니와 무함마드 모사데크 박사이다.


36 무함마드 레자 팔레비 왕은 1963년 다시 이란의 근대화를 위한 6개의 조항을 국민투표에 부친다. 이 위로부터의 개혁은 서구화와 근대화를 위한 무함마드 레자 팔레비의 특단의 조치로 '백색혁명'이라 불린다. 이 6가지 주요조항은 토지개혁, 산림 목초지 국유화, 국영사업장 매각, 근로자에 회사 이윤 분배, 문맹퇴치운동, 선거법 개정 등을 골자로 하고 있다. 이 혁명에 따라 여성에게 선거권이 부여되었으며 가족법을 개정하여 남녀차별을 최소화하였다. 문맹퇴치운동의 일환으로 전국 곳곳에 초등학교가 세워졌으며 문명퇴치 계몽단이 발족하였고 시골마다 계몽차를 보내 운동에 박차를 가했다.


36 백색혁명에 대한 반발은 호메이니를 중심으로 하는 고위 성직자들을 중심으로 일어났다. 1962년 테헤란에서 이 법안을 만들 무렵부터 반대하는 시위가 시작되었고 꼼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반정부 시위와 국민투표를 반대하는 시위를 시작하였다. 무함마드 레자 팔레비는 이 상황을 직접 해결하기 위해 꼼을 방문했지만 실패했다.


36  이 시기에 이슬람 혁명의 씨앗이 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무함마드 레자 팔레비는 1963년 꼼의 페이지예 신학교에 운집하여 백색혁명에 반대하며 반정부 시위를 하던 학생들을 무자비하게 진압하여 많은 사상자를 낸다. 이 일은 많은 이란인들의 가슴에 남게 되었고 혁명의 불씨가 된다.


이슬람 혁명

39 1978년 라마단 달, 이란 국민들의 반정부 투쟁은 절정에 이른다. 특히 라마단 마지말 날에는 각 모스크의 설교자들이 왕이 물러날 것을 강력히 촉구하며 곳곳에서 강력한 시위를 동시에 진행했다. 특별히, 테헤란의 설교자였던 무함마드 오파테흐 박사와 모함마드 자버드 버호나르 박사는 왕을 강렬히 비난한다. 이날 모인 수는 수백만 명이 넘었고 이들의 시위는 늦은 밤까지 계속되었으며 다음 날도 계속되었다.


40 1979년 호메이니는 혁명회의를 구성할 것을 명령하였고 같은 달 왕이 이란에서 탈출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국민들을 거리로 뛰어나와 환호하였으며 축제를 열었다. 왕의 망명 소식이 알려진 며칠 후 호메이니가 이란으로 돌아온다는 소식을 들은 바흐티여르 총리는 공항을 폐쇄하여 호메이니의 귀환을 막았다.


40  호메이니는 즉각 바흐티여르 정부도 불법적 정부로 선언하였고 결국 1979년 수년 간 타지에서 혁명을 지휘한 호메이니는 수많은 군중의 환영을 받으며 입성하며 이슬람 혁명을 승리로 이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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