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병두: 기독교의 교파 / 살림지식총서 263



프롤로그

사도행전에 나타난 교회의 시작과 이단의 출현

박해와 신학적 논쟁이 빚은 초기 교회의 분열

로마가톨릭교회와 동방정교회의 분열

중세의 교회 이탈자들(서방교회)

16세기 종교개혁과 교단의 형성

16~17세기의 영국에서 시작된 교단들

18세기의 감리교와 성결운동의 교단들

에필로그




프롤로그

3 기독교가 왜 다양한가에 대한 대답을 하고자 하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은 아니다. 이 글은 역사의 현장에서 이미 다양하게 전개된 기독교의 모습을 한눈에 볼 수 있게 펼친 것이다. 한 교파가 어떤 이유로, 또 어떤 과정을 거쳐서 생기게 되었는지 간단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사도행전에 나타난 교회의 시작과 이단의 출현

5 영지주의: 초대교회가 겪어야 했던 또 하나의 주요 이단은 영지주의(Gnosticism)였다. 이들은 에비온파와는 여러 면에서 대조적인 특징들을 보여주었다. 이들은 유대교 전통보다는 희랍 사상의 관점에서 기독교를 이해하려고 한 자들이었다. 그들은 영과 정신은 선하고 육과 물질은 악하다는 극단적 이원론에 근거하여 구약의 창조주 하나님을 물질을 만든 저급한 신으로 보았다. 그들은 구약과 신약의 단절성을 과도하게 강조하였고 그리스도의 인성에 타격을 줄 만큼 신성을 강조하였다. 선한 그리스도의 영이 악한 인간의 육을 입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를 꺼려하였기 때문에 그들이 설명하는 기독론은 가현설로 이해된다.


6 마르키온파: 구약에 나타난 하나님은 율법의 하나님이며 신약에 나타난 사랑의 하나님과는 아무런 공통점이 없다고 주장하면서 구약성경을 총체적으로 부정하였다. 그는 구약의 신을 불완전한 신으로 규정하고 진정한 하나님은 신약성경에 나타난 사랑과 은혜의 하나님이며 사도 바울에 의하여 가장 잘 설명되었다고 보았다.


6 몬타누스파: 몬타누스주의는 급진적인 성령주의와 그리스도의 임박한 종말을 강조하는 2세기 후반기에 나타난 새로운 운동이었다. 그 운동은 프리지아의 몬타누스와 ‘성령의 입’ 역할을 하였던 두 여인 프리스킬라와 막시밀라를 중심으로 기존교회의 형식주의와 도덕적 나태에 대하여 비판하면서 성령의 직접적인 계시와 엄격한 윤리, 금욕주의를 표방하였다. 이들은 기존 교회에 의하여 이단으로 정죄되었지만, 그들의 근본적 차이는 교리적인 것에 있었다기보다는 신앙생활의 방식에 있었다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박해와 신학적 논쟁이 빚은 초기 교회의 분열

8 도나투스파는 결국 기존교회의 총체적 타락을 주장하고 교회의 순결성을 강조하면서 교회의 분리를 택했고, 그들의 교회로 입교할 자들에게 재침례(세례)를 요구하였다. 기존교회는 이들을 교회분리주의자로 정죄하였고, 콘스탄티누스의 제국은 공권력으로 그들을 누르기 시작하였다. 


9 서방교회가 윤리적 논쟁으로 인하여 분열했다면, 동방교회는 신학적 논쟁 끝에 교회의 분열을 경험하였다. 서방교회는 터툴리안 이후 삼위일체론과 기독론에 대하여 대체로 이견이 없었다. 325년의 니케아 공의회를 필두로 하여 일어났던 삼위일체 논쟁과 기독론 논쟁은 주로 동방교회의 관심사였다.


10 칼케돈 공의회(451)는 '신앙의 정의'를 내려서 네스토리우스적인 두 본성의 지나친 구별을 경계하는 한편, 단성론에 대하여도 다시 쐐기를 박음으로써 논쟁의 종결을 기하려 하였다. 그러나 이 논쟁은 끝나지 않았으며 단성론자들은 그들의 신학적 견지를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10 비잔틴제국 바깥에서는 아르메니아와 에티오피아의 기독교가 단성론의 교회였다. 아랍이 이들 지역을 정복한 이후에도 이들 교회는 지금까지도 존속하고 있고, 20세기 후반에 들어와서는 이들 교회와 로마가톨릭교회 간의 화해의 시도들이 있었다. 1973년에 교황 바오로 6세와 콥트 정교회의 총대주교 쉐누다 3세 간에 기독론에 대한 공동 선언이 있었고, 1984년에는 요한 바오로 2세와 시리아 정교회의 총대주교 이그나티우스 자카 2세 간에 유사한 선언문이 채택되었다. 동방 혹은 희랍 정교회는 이미 오래 전부터 동방의 단일 교회가 아니었다. 서방교회도 로마가톨릭교회에서 이탈한 군소 교회들이 있었지만, 후에 점차적으로 가톨릭교회로 편입된 데 비하면 동방교회의 분열은 보다 더 심각하고 영속적인 것이었다.


로마가톨릭교회와 동방정교회의 분열

12 동서교회의 분열에 있어서 또 하나의 중요한 요소는 서로마제국이 패망한 이후 로마교회가 의지할 수 있는 새로운 정치적 세력이 서유럽에 형성되었다는 데 있다. 더 이상 서로마제국의 황제가 존재하지 않았던 476년 이후 로마의 갈리아 지방(지금의 프랑스 지역)에 진입한 프랑크족이 클로비스 왕을 중심으로 새로운 왕권을 수립한 것과 그 왕권이 로마가톨릭으로 개종한 것은, 그 이후의 유럽과 교회의 역사에 획기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8세기에 이르러 프랑크 왕국 내에서 정치적 변동 끝에 메로빙거 왕조가 쇠퇴하고 카롤링거 왕조가 수립되면서 교황과 프랑크 왕국 간의 새로운 관계가 형성되었다. 특히 800년경 교황 레오 3세가 프랑크 왕 샤를마뉴에게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관을 씌운 일은 서방교회에 있어서 새로운 콘스탄티누스적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한편으로는 제국 내에서 교황의 권한을 확대하는 계기가 되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황제가 성직자의 임명권을 행사하기 시작하면서 교회 위에 군림하게 된 원인이 되었다. 이 사건은 무엇보다도 로마의 교황이 정치적으로 비잔틴제국의 황제로부터 독립하는 계기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획기적인 일이었다. 이것은 동서교회의 분열이 현실화될 수 있는 정치적 여건을 제공한 셈이 되었다.


13 1965년에 교황 바오로 6세와 아테나고라스 총대주교가 1054년의 파문장을 동시에 무효화하였지만 때늦은 일이었다. 정교회의 역사가들은 1054년 동서교회의 공식적 결별 사건은 정교회가 서구의 역사에서 소외되는 계기를 만들게 되었으며, 이로 인해 서방 기독교가 그 역사 속에서 영적·신학적 균형을 상실하게 된 근본적인 이유로 생각하고 있다.


14 로마가톨릭교회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하고 근본적인 전통은 '사도계승주의'일 것이다. 초기의 기독교가 이단적인 가르침으로부터 올바른 가르침을 구별하고 세우는 일을 위하여 부단히 노력해 왔던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사도계승주의는 많은 이단들 가운데서 기독교의 가르침과 교회의 정통성을 지키는 차원에서 확립된 개념이었다. 그것은 교회의 정통적 가르침이 사도들의 가르침을 이어온 감독들에 의하여 역사적으로 끊이지 않고 계승되어왔으며, 이러한 감독들의 가르침 혹은 그들이 있는 교회가 정통에 서 있다는 개념이다. 교회가 사도적 계통에 있지 않으면 정통에서 벗어난 것으로 이해되었다. 이 생각은 교회의 전통과 감독의 중요성과 교회의 제도화를 촉진시키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14 교회의 전통은 성경 이외에 교회가 공식적으로 진리라고 확인한 모든 것을 포함한다. 교회가 성경의 유일한 합법적 소유자인 동시에 해석의 주체가 되기 때문에 교회가 역사 안에서 이해한 성경의 해석이 곧 전통이 된다. 교회의 전통은 교회가 인정하는 교부들의 신학, 공의회의 결정들, 신조, 교황의 교서, 그리고 교회법 등을 포함한다. 이러한 전통은 역사적으로 발전하고 변화하여 왔으며 때로는 시대에 따라 달라지기도 하였다. 중요한 것은 그 시대에 교회가 결정한 것이 곧 반드시 지켜야 할 교회의 전통이 된다는 것이었다. 이 전통은 동시에 성경과 동일한 권위를 가진다. 


15 로마가톨릭교회가 말하는 교회는 '가시적 제도'로서의 교회이다. 제도교회의 특성은 사제들의 상하 직위체계와 성례전에서 나타난다. 성령의 임재와 활동은 오직 가톨릭교회 안에서만 이해될 수 있으며 사제의 활동과 성례전을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믿는다. 즉, 교회가 정한 방법으로 사제가 성례전을 온전하게 집행하기만 하면 하나님의 은혜가 그 가시적 성례전을 통하여 수례자에게 자동으로 전달된다고 하는 성례전주의는 가시적 제도교회의 중요한 특성이다. 하나의 가시적 제도로서 가톨릭교회는 신앙생활과 신학의 보편적 진리를 소유하고 있으며, 그 진리를 신자들에게 베푸는 매개의 역할을 한다. 한 개인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이 가시적 교회의 역할은 절대적이다. 이 보편적 교회는 하나이며 베드로의 사도적 후계자인 교황에게 모든 권위가 집중되어 있다. 가장 초기부터 가톨릭교회는 한 교회의 개념을 강조해 왔고 모든 지역교회는 독립적인 교회가 아니며 이 '한 교회'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15 근대 이후의 로마가톨릭교회는 대체로 그 의미에 있어서 서로 대조적인 1차 바티칸 공의회(1869~1870)와 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로 특징지어진다. 1차 바티칸 공의회는 당시의 계몽주의적 시대풍조와 현대주의에 대하여 가톨릭교회의 교리를 수호하고 교황의 권위를 높이는 일을 위하여 개최되었으며 ‘교황무오’를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2차 바티칸 공의회는 그야말로 개혁 공의회였다. 현재의 가톨릭교회를 말할 때 2차 바티칸 공의회를 기준으로 그 이전과 그 이후의 가톨릭은 결코 같지 않다고 말할 정도이다. 두드러진 변화는 라틴어 예전이 자국어로 가능하도록 문이 열린 것이다. 이것은 가톨릭 예전의 다양화의 계기를 만들었다. 지역교회에 따라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예전에 대하여 상당한 자유가 생기게 되었고 간소화되었다. 또 하나 두드러지는 것은 정교회와 개신교단에 대한 태도가 달라진 점이다. 그들을 더 이상 정통과 이단의 관계에서 보지 않고 단순히 '분리된 형제들'로 부르기 시작하였다. 2차 바티칸 공의회는 여러 가지 면에서 현대 가톨릭교회의 모습을 결정하였다.


16 동방정교회는 역사적으로 7차 대공의회 때까지는 서방교회와 실질적으로 한 교회의 개념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니케아에서 있었던 787년의 '성화상' 공의회 때까지는 양측이 공동으로 공의회의 결정을 승인하였다. 지금도 동방정교회는 그들의 교회전통이 첫 7대 대공의회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초대교회의 전통에 충실하게 서 있다고 자부한다. 그들은 오히려 자신들의 교회가 로마가톨릭교회보다 그 부분에 있어서 더 정통에 서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하고 있다. 그들의 입장에서 로마가톨릭교회는 필리오쿠에 문제에서 이미 정통성을 상실한 것으로 본다.


16 정교회의 역사는 대개 세 시기로 나누어서 이야기하는데 787년까지의 고전적 시기, 1453년에 비잔틴제국이 이슬람 제국에 의해 멸망한 때까지의 시기, 그 이후 이슬람과 공산주의 치하에서 지내온 현재까지의 시기이다. 10세기에서 11세기에 걸쳐서 비잔틴 교회는 새로운 두드러진 확장을 이루는데, 그것은 바로 키에프(우크라이나) 공국에 중심을 둔 러시아 민족의 개종이었다. 그리스 선교사들은 포티우스 총대주교 때부터 슬라브족을 위한 선교의 노력을 기울여 왔었다. 집권자들에 의하여 받아들여진 러시아의 정교회는 독립적인 국가교회로 성장하였으며, 비잔틴제국의 멸망 이후에는 가장 크고 영향력 있는 정교회로 자리 잡게 되었다.


중세의 교회 이탈자들(서방교회)

18 중세에 나타난 교회 이탈자들은 대체로 제도교회의 형식적이고 외형적인 신앙 형태에 대하여 불만을 가진 자들이었으며, 신앙의 보다 내면적이고 개인적인 차원을 중시하였던 자들이었다. 그들은 당시에는 제도교회에 의하여 이단으로 낙인찍혀서 종교적으로 불명예를 안게 되었고 정치사회적으로도 많은 어려움을 겪었지만, 앞으로 도래할 시대를 예견했다는 면에서 중요한 역사적 의의를 남겼다고 할 것이다. 그들 가운데는 성경의 권위를 회복하고 성경을 기준으로 하는 교회의 개혁을 꿈꾼 자들이 있었고, 그들의 정신은 직접적으로 후세대들에게 영향을 주기도 하였다.


20 중세에 나타난 교회 이탈자들은 대체로 제도교회의 형식적이고 외형적인 신앙 형태에 대하여 불만을 가진 자들이었으며, 신앙의 보다 내면적이고 개인적인 차원을 중시하였던 자들이었다. 그들은 당시에는 제도교회에 의하여 이단으로 낙인찍혀서 종교적으로 불명예를 안게 되었고 정치사회적으로도 많은 어려움을 겪었지만, 앞으로 도래할 시대를 예견했다는 면에서 중요한 역사적 의의를 남겼다고 할 것이다. 그들 가운데는 성경의 권위를 회복하고 성경을 기준으로 하는 교회의 개혁을 꿈꾼 자들이 있었고, 그들의 정신은 직접적으로 후세대들에게 영향을 주기도 하였다.


16세기 종교개혁과 교단의 형성

21 16세기의 종교개혁은 그 방향에 따라 대체로 세 가지 타입으로 나누어 이해할 수 있다. 우선은 가톨릭 내에서 교회의 타락을 경고하며 윤리적 개혁을 강조한 종교개혁이다. 이 종교개혁은 종교의 개인적인 측면을 강조하였고, 성경의 권위를 회복하고 모든 사람들이 성경을 읽고 공부해야 할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많은 기독교 인문주의자들이 여기에 속했으며 에라스무스는 그 대표적인 자였다. 그의 희랍어 신약성경은 16세기 종교개혁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서 작업 중 하나로 꼽힌다. 그들은 여전히 가톨릭교회의 신학과 제도에 긍정적인 입장이었고 그 교회 내에 계속 남아 있었지만, 그들의 사상은 많은 개신교 개혁가들에게 광범위한 영향을 끼쳤다. 또 다른 타입의 종교개혁은 가톨릭교회의 교리적·신학적 문제점들을 지적하고 비판을 제기한 종교개혁이었다. 루터를 포함한 대부분의 주류 종교개혁가들이 여기에 속한다. 그들 역시 교회의 윤리적 타락을 지적하였지만, 교회 타락의 더 근본적인 이유는 교리와 신학의 문제에 있다고 생각하였다. 


22 또 하나의 종교개혁은 주류 종교개혁가들의 교리적·신학적 문제제기에 동의하면서도 교회 타락의 근본적인 원인이 교회와 국가의 합일, 즉 교회와 사회의 구별이 없는 국가교회에 있다고 주장한 자들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그들은 신약성경에 나타난 교회는 사회의 모든 자들로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인 신앙고백을 한 믿는 자들로 구성된다고 보았으며, 국가에 의하여 강요된 신앙을 거부하였다. 그들은 기존 교회는 기초부터 잘못 세워졌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각 개개인의 신앙고백을 근거로 교회를 다시 세워야 한다고 했으며 의도적 분리를 시도하였다. 복음적 재침례교가 여기에 속한다. 이들 가운데서 현대 자유교회 전통이 시작되었다.


23 1526년과 1529년에 있었던 슈파이어 제국회의가 열릴 즈음에는 이미 독일 내에서 루터교 지역과 가톨릭 지역의 구분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그 제국회의의 결정은 독일 지역이 종교적으로 양분되는 공식적 과정의 첫 단추였다. 그 제국회의의 잠정적인 결론은 "그 지역의 종교는 그 지역 군주의 종교로 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소위 ‘영역교회’의 개념 도입을 의미하는 것이었으며, 루터교의 운명이 이제는 루터의 손을 떠나 독일 제후들의 손에 넘어갔음을 의미하였다. 이후 독일의 루터교회와 가톨릭교회의 갈등은 제후들 간의 정치적 갈등으로 비화되었고, 루터교의 운명은 자기 지역에서의 권력 신장을 꾀하면서 정치적 독립을 강화시키려고 하였던 제후들의 정치적 성패에 달리게 되었다. 그 지역의 종교가 그 지역의 독립적 정치권력을 획득한 군주의 종교로 정해지는 상황에서 종교개혁가들의 역할은 극소화될 수밖에 없었다.


26 칼빈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신학적 기조 위에 당시의 주요 개혁가들의 신학사상을 계승·발전 및 정리한 자였다. 종교개혁가들이 중세 가톨릭교회의 신학에 대하여 비판을 제기했을 때 가장 중요한 이슈는 구원론과 인간론이었는데, 이는 칼빈에게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는 루터와 마찬가지로 구원에 대하여 인간의 역할은 전무하며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만으로 가능하다고 주장하면서 하나님의 주권 사상을 강화하였다. 이러한 관점에서 칼빈이 발전시킨 것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예정론이었으며 이는 칼빈주의의 주요 쟁점이 되었다. 라이덴의 야코부스 아르미니우스는 칼빈주의의 예정론적 구원론에 대하여 문제점을 지적하고, 구원에 있어서 인간의 선택과 책임을 강조하였다. 1618년부터 1619년까지 네덜란드 도르트레히트에서 있었던 종교회의에서는 아르미니우스의 가르침을 반박하며 5개의 칼빈주의 강령을 채택하였다. 그것은 곧 하나님의 무조건적 예정, 그리스도의 제한적 구속, 인간의 완전한 타락, 거부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 성도의 견인 등을 말한다. 이 다섯 가지 강령이 개혁교 전통의 본질적 관점들을 모두 포괄하지는 않지만, 역사적으로 개혁교 전통의 가장 중요한 특색인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26 칼빈은 루터처럼 교회를 말씀이 선포되고 성례전이 온전하게 이루어지는 곳으로 정의를 하지만 더 나아가 한 가지 요소를 더 추가하였는데, 그것은 바로 교회의 권징제도였다. 교회는 교인들의 올바른 윤리적 삶을 장려하고 관장하는 곳이며 때로는 출교의 조치를 할 수 있다고 보았다. 여기서 칼빈은 율법을 기독교인의 생활의 길잡이로 강조하면서 루터보다는 율법을 더 긍정적으로 이해하였다. 교회치리는 장로주의의 형태를 취했으며 직위는 목사, 교사, 장로, 집사를 두었다. 여기서 장로는 평신도인 시의회의 의원들에 의하여 구성되어 교회법원을 관장하도록 하였다. 칼빈의 이러한 가르침은 개혁교 전통에 서 있는 여러 교단들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다.


27 초기의 재침례교 지도자들은 거의 모두가 루터와 츠빙글리의 개혁을 열렬하게 지지하던 자들이었다. 그들 중에는 가톨릭 사제들도 있었고 수도사들도 있었으며, 에라스무스의 영향을 받은 기독교 인문주의자들도 많이 있었다. 16세기의 첫 재침례교도들은 취리히에서 개혁을 추진하고 있었던 츠빙글리의 개혁 진영으로부터 나왔다. 그들은 주로 젊은 인문주의자들로서 츠빙글리의 지도하에서 '예언모임'이라는 원어 성경공부 그룹에 소속된 자들이었다. 그들이 츠빙글리와 결별하게 된 원인은 종교개혁을 추진하는 데 있어서 세속권력의 역할에 대한 견해 차이에 있었다. 츠빙글리는 시의회와 손을 맞잡고 가야 한다고 보았고, 그의 제자들은 교회개혁에 있어서 세속권력의 개입을 반대하였다. 이러한 차이는 결국 양측의 교회론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었으며, 곧 유아세례의 문제가 가장 근본적인 쟁점이 되었다. 당시에는 태어난 아이가 유아세례를 통하여 교인이 되는 동시에 시민이 되었다. 즉, 유아세례는 교회와 국가를 한데 묶어주는 매개의 역할을 하였기 때문에, 츠빙글리의 젊은 제자들은 교회개혁의 첫걸음으로 유아세례의 철폐를 꼽았다. 그들에게 있어서 교회는 자발적인 신앙고백을 한 각 개인들, 즉 믿는 자들의 자발적 모임이었다. 그들이 추구하는 교회는 그 지역의 모든 사람들이 태어나면서 유아세례를 통하여 자동적으로 교인이 되는 영역교회, 혹은 국가교회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자들로 이루어지는 '신자의 교회'였다. 그들은 교회타락의 근본적인 원인을 윤리적 타락이나 신학적 타락에서 찾기보다는 교회의 정체성 상실에서 찾았다. 교회의 정체성 상실은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집권하였던 4세기 초부터 시작된 국가와 교회의 합일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그들 역시 다른 종교개혁가들과 마찬가지로 중세교회의 윤리적·신학적 문제의 심각성에 대하여 공감을 하였지만, 그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교회론의 문제라고 생각하였다. 그들이 주류 종교개혁 운동에서 이탈하여 자신들의 교회를 세운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었다.


28 재침례교운동의 신학적 특징은 무엇보다도 교회론에 있다. 국가교회를 배격하고 신자의 교회를 추구하면서 신약성서의 원시기독교로 돌아가고자 하는 것이 그들의 염원이었다. 그런 관점에서 그들은 유아세례를 배격하고 신자의 침례(세례)를 주장하였으며, 정교분리와 완전한 종교자유를 주장하였다. 어떠한 경우에도 개인의 양심의 자유가 침해되어서는 안 되며, 개인의 신앙이 강요되어서는 안 된다고 보았다. 국가는 오직 시민들의 질서와 공익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며 교회의 일에 개입해서는 안 되었다. 그들이 특히 강조하였던 것은 제자도의 개념이었는데, 그들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의 제자란 어떤 특정한 사람에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모든 믿는 자들에게 해당된다고 하였고 교인이 된다는 것은 곧 제자가 됨을 의미하였다. 교인이란 단순히 신앙고백을 한 자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세상 안에서 제자로서의 사명을 다해야 한다는 것이다. 16세기에 제자도를 교회의 표시로 삼은 것은 재침례교운동의 중요한 특징이 되었다. 또 하나의 중요한 그들의 사상은 평화주의였다. 


16~17세기의 영국에서 시작된 교단들

30 장로교회는 츠빙글리에서 칼빈으로 이어지는 스위스의 개혁교 전통에서 나온 교단이다. 칼빈의 제네바 교회는 대체로 장로주의에 입각하여 세워진 교회였으며, 장로교는 그 전통에 따라 유럽의 여러 지역에서 거의 동시에 발전하였다. 장로교는 신학적으로는 칼빈주의, 정치적으로는 장로주의에 입각한 교단이다. 장로주의는 가톨릭교회의 일인 감독주의를 배격하고 회중의 위임을 받은 교직자들에 의하여 교회의 일을 처리하는 것을 말한다. 전술되었듯이 장로주의는 프랑스의 위그노파, 네덜란드 개혁교회, 스코틀랜드의 장로교회, 영국의 청교도들에 의해 계승되어 각 지역에서 발전하였다.


31 미국의 장로교회는 영국과 스코틀랜드를 비롯한 유럽의 각 나라에서 이민 온 자들에 의하여 시작되었는데, 주로 중부 식민지에서 발전하였다. 그리고 19세기 초에는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교단 중 하나가 되었지만, 신학적 노선과 노예제도를 둘러싼 갈등으로 남북 장로교로 나뉘고 말았다. 그들은 여러 차례 통합을 위한 노력을 하였으나 120여 년 뒤인 1983년에 이르러 드디어 '미합중국 장로교회'로 통합하게 되었다. 


31 한국의 장로교는 1885년 미국 북장로교의 선교사 언더우드의 도착으로 시작되었는데 그 직후에 호주 장로교, 남장로교, 캐나다 장로교에서도 각각 선교사들을 파송함에 따라 서로간의 선교적 마찰이 생기게 되었다. 이를 해결하는 방안으로 ‘선교사공의회’를 조직(1893)하고 선교구역을 분할하였다. 이 네 선교부는 결국 1907년 평양 장대현교회에 함께 모여서 ‘독노회’를 설립하면서 단일교단을 형성하였고 오늘날 한국 장로교회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32 영국의 일반침례교와 특수침례교는 1891년에 통합하기까지 각각 독립적으로 발전하였으며, 신학적으로 칼빈주의와 아르미니우스주의의 뚜렷한 차이점을 가지고 있었다. 두 교단은 박해가 극심했던 17세기에는 꾸준한 성장세를 보이다가 1689년의 ‘종교관용령’ 이후부터 18세기 전반부까지 내부적 진통을 겪으면서 쇠퇴하는 위기에 처하였다. 반전이 일어난 것은 웨슬리의 부흥운동에 자극을 받으면서였다. 특히 영국 침례교는 1792년에 설립된 ‘침례교 선교회’와 윌리엄 캐리의 활약으로 근대 개신교 선교운동의 기폭제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1891년의 양교단의 통합은 신학적 차이를 극복한 쾌거였다.


33 가장 초기의 침례교 신앙고백서들은 이러한 자유교회 전통의 기본적 특징들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교회정치의 형태는 전신자제사장의 이론을 반영하는 회중주의를 지향하였으며 지역교회의 자치주의를 중요시하였다. 그들은 지역교회 위에 군림하는 어떠한 기구나 조직도 인정하지 않았으며 지방회와 총회는 교회 간의 교제와 공동사역의 장으로 이해하였지 권위기관으로 보지 않았다. 그들은 역사적으로 신조를 만들지 않았으며 신앙고백서만 발표하였다. 성경이 아닌 어떠한 문서도 개인의 신앙에 대하여 구속력이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신앙고백서는 항상 성경에 종속적이며 바뀔 수 있다고 보았다. 침례교의 직위는 목사와 집사 두 직위가 있다. 침례의 방식은 침수례인데 이것은 역사적으로 동교단의 대표적인 특징이 되었다.


18세기의 감리교와 성결운동의 교단들

36 감리교운동의 핵심적인 특징은 그것이 소그룹 운동이었다는 점이다. 소그룹을 통한 교육과 영성 훈련을 강조한 것은 당시의 교회 상황에서는 사역의 주체를 뒤바꾸어 놓는 결과를 가져왔다. 사역의 주체가 고위성직자가 아니라 사역의 현장에서 활동하는 평신도 지도자들이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가히 혁명적인 것이었으며, 웨슬리 운동의 가장 중요한 영성과 사역의 방법을 보여준 것이었다. 


36 무엇보다도 웨슬리의 개인적 영성과 복음의 열정이 이 운동에 심대한 영향을 주었다. 그가 경건한 영성을 중요시하는 동시에 그 영성이 실제로 사회 속에서 행동으로 나타나야 할 것을 강조한 것은 그를 따르던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주었으며, 그의 개인적인 삶의 모범은 많은 사람들에게 귀감이 되었다. 웨슬리의 가르침은 오늘날에도 교회 갱신을 생각하는 자들에게 한 표본을 제시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현재에도 교단을 초월하여 웨슬리의 영향은 지속적이다.


37 성결운동에서 나온 또 하나의 주요 운동은 20세기 초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오순절운동'이었다. 성결운동과 오순절운동은 보수적인 신학, 엄격한 도덕성, 그리고 믿음을 통한 신유를 중요시하였다는 점에서는 유사하였지만 성령강림의 교리와 방언의 교리는 후자에만 있기 때문에 그 차이가 서서히 뚜렷해지면서 분리된 운동으로 각각 발전하게 되었다.


37 오순절운동은 처음부터 교단을 형성하려는 운동이 아니었지만 곧 다양한 교단들이 독립적으로 형성되었다. 또 이 운동의 초기에 참여하였던 많은 이들은 그들이 원래 속했던 교단을 떠나지 않고 자기 교단 내에서 그들의 '오순절적' 신앙방식을 유지하였고, 그들에 의해 많은 교단들이 오순절운동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받게 되었다. 이 운동에 참여했던 자들 가운데는 칭의와 성화 이후에 일어나는 성령체험을 중시하여 그것을 성령침례(세례)라 하고 제2의 축복으로 이해하는 자들이 많이 생겨났으며, 그들은 1914년에 새로운 교단 '하나님의 성회'를 조직하였다. 이 교단은 오순절운동이 낳은 가장 큰 교단으로 성장하였다. 오순절운동은 지역과 지도자의 특성에 의하여 전 세계에서 다양한 교단들로 발전되었고, 한국에서는 ‘순복음교회’가 이와 유사한 오순절운동의 교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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