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드리히 니체: 바그너의 경우·우상의 황혼·안티크리스트·이 사람을 보라·디오니소스 송가·니체 대 바그너 (1888~1889)



바그너의 경우

우상의 황혼

안티크리스트

이 사람을 보라

디오니소스 송가

니체 대 바그너 (1888~1889)





바그너의 경우

19 .음악이 정신을 자유롭게 한다는 것을 사람들이 알까요? 사유에 날개를 달아준다는 것을? 사람들이 음악가가 되면 될수록 더욱더 철학자가 된다는 것을? —추상이라는 회색 하늘에 번개가 번쩍이며 지나간 듯 합니다 ; 사물의 온갖 금사 세공을 비추기에 그 빛은 충분히 강합니다 ; 큰 문제들이 거의 포착됩니다 ; 세계가 마치 산 위에서 내려다보듯 내려다보입니다. — 내가 바로 철학적 파토스에 대한 정의를 내리고 있는 것 같네요. —그리고 돌연 해답들이, 힘들이지 않고도 저절로 내 손에 들어옵니다. 얼음과 지혜의 싸라기 우박이, 해결된 문제들의 싸라기 우박이……내가 있는 곳은 어디입니까? —비제는 나를 비옥하게 합니다. 선한 모든 것은 나를 비옥하게 합니다. 나는 이것에만 감사해하며, 또한 이것만을 선한 것의 15 증거로 삼습니다. —


48 一지금까지는 모든 음악이 문학을 필요로 하지는 않았습니다 : 이에 대한 충분한 이유를 찾아보는 것은 잘하는 일입니다. 바그너의 음악이 이해하기에는 너무 어렵다는 것이 그 이유일까요? 아니면 반대의 것 즉 사람들이 그 음악을 너무 쉽게 이해하는 것을 바그너가 두려워한다는 것이 이유일까요? ― 달리 말하면. 사람들이 그 음악을 꽤 어려워하지 않고서도 이해한다는 것이 이유가 될까요? —실제로 그는 평생 하나의 명제만 되풀이 해왔습니다 : 자기 음악이 단지 음악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고 말이지요! 음악 이상을 의미한다고 말이지요! 무한히도 많이 그 이상을 의미한다고 말이지요! ……"단지 음악만이 아니다" — 어떤 음악가도 이렇게는 말하지 않습니다. 다시 한번 말하자면 바그너는 전체로부터 창작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니 그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으며, 불완전한 것을 만들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모티브, 몸짓, 정식, 이중으로 늘리고 백 배로 늘임. 음악가로서 그는 수사학자였습니다―그래서 그는 원칙적으로 '그것의 의미는'이라는 것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입니다. "음악은 언제나 수단일 뿐이다" : 이것이 그가 내세웠던 이론이었으며, 무엇보다도 그가 통틀어 실천할 수 있었던 유일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떤 음악가도 이런 식으로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바그너는자기 음악이 "무한한 것을 의미하므로" 진지하게 받아들이라고, 깊이 있게 받아들이라고 전 세계를 설득시키기 위해 문학을 필요로 했던 것dl지요 : 그는 평생 '이념'의 해설가였습니다.


53 우리의 배우들이 그 어느 때보다도 존경을 더 많이 받을 만하다는 이런 통찰이 그들의 위험성을 미약한 것으로 파악하게 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내가 무엇을 바라고 있는지에 대해 아직도 의아해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一 예술에 대한 나의 분노와 우려와 사랑이 이번에 나에게 말하도록 했던 그 세가지 요구들을 말입니다.


극장은 예술을 지배하는 주인이 되지 않는다는 것

배우는 진정한 예술가를 현혹하는 자가 되지 않는다는 것

음악은 기만하는 예술이 되지 않는다는 것


우상의 황혼

99 지고의 가치는 모두 최고 서열의 것이다. 최상의 개념들 모두, 존재자, 무조건적인 것 선, 진리, 완전 — 이것들 모두가 다 생겨날 수는 없는 것들이다. 그러므로 자기 원인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이것들 모두가 서로 다를 수는 없으며, 서로 모순될 수는 없다…… 이런 식으로 철학자들은 '신' 이라는 그들의 놀라운 개념을 갖게 된 것이다. 최후의 것, 가장 빈약한 것, 가장 공허한 것이 최초의 것으로, 원인 그 자체로서, 최고로 실제적인 존재자라고 규정된다……인류가 병든 망상가의 이런 미친 짓을 진지하게 받아들여야만 했었다는 것! — 인류는 이 때문에 값비싼 대가를 치렀다!……


123 우리의 유일한 가르침이 될 수 있는 것은 무엇이겠는가? ━ 어느 누구도 인간에게 인간의 특성을 부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신도 아니고 사회도 아니고, 인간의 부모나 선조도 아니며, 인간 자신도 자신의 특성을 부여하지 않는다. 도대체 인간이 존재한다는 것, 그가 이러저러한 성질을 갖고 있다는 것, 그가 바로 그런 상황과 바로 그런 환경에 처해 있다는 것에 대해 누구도 책임이 없다.


123 사람들은 필연이며, 한 조각 숙명이다. 사람들은 전체에 속하며, 전체 안에 있다. ― 우리의 존재를 판결하고 측정하며 비교하고 단죄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왜냐하면 그런 일은 전체를 판결하고 측정하며 비교하고 단죄할 수 있을 만하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체의 외부에 존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一 어느 누구도 더 이상은 책임지지 않는다는 것, 존재의 방식이 제일 원인으로 소급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 세계가 감각중추나 '정신'으로서의 단일체는 아니라는 것, 바로 이것이야말로 위대한 해방이며 一 이로써 생성의 무죄가 비로소 다시 회복된다…… '신' 개념은 지금까지 인간 삶에 대한 최대의 반박이었다……우리는 신을 부정하고, 신을 부정하면서 우리는 책임을 부정한다 : 이렇게 해서야 비로소 우리는 세계를 구원하는 것이다.


177 자유란 무엇이란 말인가! 자기 책임에의 의지를 갖는다는 것, 우리를 분리시키는 거리를 유지하는 것, 노고와 난관과 궁핍과 심지어는 삶에 대해서까지도 냉담해지는 것, 자신의 문제를 위해 인간들을 그리고 자기 자신마저도 희생시킬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 자유는 남성적 본능, 전투적이고 승리의 기쁨에 찬 본능이 다른 본능들, 이를테면 '행복' 본능을 지배하는 것을 의미한다. 자유로워진 인간은, 그리고 자유로워진 정신은 더 말할 것도 없이, 소상인과 그리스도교인과 암소와 여자들과 영국인들과 다른 민주주의자들이 꿈꾸는 경멸스러운 복지를 짓밟아버린다. 자유로운 인간은 전사이다. 개인에게서나 대중에게서 자유는 무엇에 의해 측정되는가? 극복되어야 할 저항에 의해서, 위에 머무르기 위해서 치르는 노력에 의해서. 최고로 자유로운 인간 유형은 최고의 저항이 끊임없이 극복되는 곳에서 발견될 수 있을 것이다.


197 나의 휴식, 나의 선호, 온갖 플라톤주의로부터의 나의 치료가 되었던 것은 언제나 투키디데스였다. 아무것도 속이지 않으며 이성을 '현실성'에서 보려고 하는 무조건적인 의지에 의해서 투키디데스와 그리고 아마도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은 나 자신과 가장 유사할 것이다. ━ 이들은 이성을 '이성' 안에서 보려 하지 않으며, '도덕' 안에서는 더더욱 보려 하지 않는다……그리스인들에 이상이라는 색채를 뒤집어씌운 저 통탄스러운 미화는 "고전적으로 도야된" 젊은이가 고등학교식 훈련을 받은 대가로 삶 속으로 끌어들이는 것이며, 이것을 투키디데스보다 더 근본적으로 치유하는 것은 없다. 그의 글을 우리는 한줄 한줄 보면서 그의 말처럼 그의 배후 생각도 분명하게 읽어내지 않으면 안 된다 : 투키디데스만큼 배후에 숨겨진 생각이 많은 사유가는 드물다. 그에게서는 소피스트의 문화가 등장한다. 말하자면 실재론자들의 문화가 완성된 표현에 이르러 있다 : 소크라테스 학파들이 여기저기서 벌이기 시작한 도덕과 이상의 사기 행각의 한가운데에 이 귀중한 운동이 있었다.


안티크리스트

217 지상의 서로 다른 여러 곳에서, 서로 다른 여러 문화에서 좀 더 높은 유형은 실제로 제시되어왔다 : 인류 전체와 비교해서는 일종의 위버멘쉬인 유형이. 위대한 성공의 이런 행운적인 경우들은 항상 가능했었고 미래에서나 가능할 것이다. 심지어는 전 세대가, 모든 종족과 민족도 경우에 따라서는 이렇게 맞아떨어지는 경우를 제시할 수 있다.


218 그리스도교를 장식하거나 요란하게 치장해서는 안 된다 : 그리스도교는 좀더 강한 유형의 인간에 대항하는 사투를 벌였으며, 그 유형의 근본 본능을 모두 추방했고, 이 본능들로부터 악과 악인을 만들어냈다 ━ 강한 인간을 비난받아 마땅하고 "버림받는" 인간의 전형으로 만들어냈다. 그리스도교는 약자, 천한 자, 실패자 전부를 옹호했으며, 강한 삶의 보존 본능에 대한 반박을 이상으로 만들어냈다 : 그리스도교는 정신의 최고 가치를 죄가 된다고, 오도한다고, 유혹이라고 느끼도록 가르치면서 가장 정신적인 인간의 이성마저도 망쳐버렸다. 가장 통탄스러운 예 ― 파스칼의 타락. 그는 원죄에 의해 자신의 이성이 타락했다고 믿었다. 그의 이성을 망친 것은 오로지 그의 그리스도교였건만 말이다! —


219 이미 알아차렸겠지만, 나는 타락을 데카당스라는 의미로 이해하고 있다. 내가 주장하는 바는 현재 인류가 그들의 최고 소망 사항을 통합해놓은 가치들은 모두 데카당스가치라는 점이다.


219 내가 보기에는 삶 자체가 성장을 위한 본능, 지속을 위한 본능, 힘의 축적을 위한 본능, 힘을 위한 본능인 것 같다 : 힘에의 의지가 결여되는 곳에서는 쇠퇴가 일어난다. 내가 주장하는 바는 인류의 모든 최고 가치에 이런 의지가 결여되어 있다는 것 — 쇠퇴의 가치들이, 허무적 가치들이 그것을 가장 성스러운 이름으로 지배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219 그리스도교는 동정의 종교라고 불린다. 一동정은 생명감의 에너지를 증대시키는 강장적인 tonisch 격정과는 반대의 것이다 : 그것은 의기소침하게 만든다. 동정을 느낄 때 사람들은 힘을 상실한다. 고통 자체가 이미 삶에 끼치는 힘의 손실은 동정으로 인해 더욱 커지고 몇 배로 불어난다.


236 불교는 그리스도교보다 백 배나 더 실제적이고 객관적이고 냉정한 문제 제기의 유산을 갖추고 있다. 그것은 수백 년 동안 철학적 운동이 지속된 다음에 등장한다. 그것이 등장했을 때 '신' 개념은 이미 폐기되어 있었다. 불교는 역사가 우리에게 보여준 단 하나의 진정한 실증적 종교이며, 그것의 인식 이론(엄밀한 현상주의)에서도 마찬가지다. 불교는 더 이상은 '죄에 대한 싸움'을 말하지 않고, 오히려 현실을 인정하면서 '고통에 대한 싸움'을 말한다. 불교는 ― 이 점이 불교를 그리스도교로부터 철저히 갈라놓는다 ― 도덕 개념의 자기 기만을 이미 뒤로하고 있다. 내 언어로 말하자면 불교는 선과 악의 저편에 서 있는 것이다.


242 여기서 나는 그리스도교의 기원 문제만을 건드려보겠다. 문제 해결을 위한 첫 번째 명제는 다음과 같다 : 그리스도교는 그것이 생겨 난 토대로부터만 이해할 수 있다 — 그리스도교는 유대 본능에 맞서는 반대 운동이 아니며, 유대 본능의 수미일관함 자체이며, 공포감을 조성하는 유대 본능의 논리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간 결론이다. 구원자의 공식으로는 : "구원은 유대인에게서 온다"이다.


288 어떤 행위의 자연적 결과가 더 이상 '자연적'이지 않고, 미신의 유령과도 같은 개념들인 '신' 이나 영 이나 영혼에 의해 초래된다고 생각되면, 한갓 '도덕적' 귀결이자 보상과 벌과 징표와 교육수단이라고 생각되면 인식의 전제들이 다 파괴되어버린다 一 이런 식으로 인류에 대한 가장 큰 범죄가 저질러진 것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죄라고 하는 인간의 전형적인 자기 모독 형식은 지식과 문화와 인간의 고양과 고결함을 불가능하게 만들기 위해 고안된 것이다 : 죄를 고안해냈기에 사제가 지배한다. —


293 그리스도교는 제대로 된 정신적인 성숙 전체와는 대립 관계에 있다. ― 그것은 단지 병든 이성만을 그리스도교적 이성으로 이용할 수 있었고, 온갖 백치들 편을 들며, '정신'과 건강한 정신의 드높음에 대해 저주의 말을 내뱉는다. 병이 그리스도교의 본질에 속하기에, 전형적인 그리스도교적 상태인 '신앙' 역시 병든 형태이지 않으면 안 된다. 인식을 향하는 바르고 정직하고 학적인 길은 교회에 의해 금지된 길로서 거부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의심도 이미 죄다……사제에게 전적으로 결여되어 있는 심적 순수함은 一 그의 시선에서 보여지는 — 데카당스의 결과적 현상의 하나다. 一 우리는 히스테리증 여자들이나 곱사등이 어린아이들의 본능적인 허위와, 거짓말을 위한 거짓말을 하는 즐거움이나, 똑바로 볼 수 없고 걸을 수 없는 무능력이 통상적인 데카당스의 표현이라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317 이것으로 나는 끝을 맺고 나의 판결을 내린다. 나는 그리스도교에 유죄판결을 내리며, 그리스도교 교회를 가장 혹독하게 탄핵한다. 그 어떤 고발자가 입에 담았던 탄핵보다도 혹독하게. 내가 보기에 그리스도교 교회는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부패 중 최고의 부패이며, 궁극적이지만 실제로도 가능한 부패에의 의지를 지녔다. 그리스도교 교회가 부패의 손길을 대지 않은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모든 가치를 무가치로, 모든 진리를 한 가지 거짓으로, 모든 정직성을 영혼의 비열성 하나로 만들어버렸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내게 아직도 감히 교회의 ‘인도적’ 축복에 대해서 지껄여대다니! 여느 비상사태를 없애버리는 것은 교회의 뿌리 깊은 유용성에 어긋난다 ― 교회는 비상사태를 통해 연명해왔고, 자기를 영구화시키기 위해 비상사태를 만들어냈다…… 죄라는 벌레가 그 예이다 : 교회야말로 이 비상사태를 가지고서 인류를 풍부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 


이 사람을 보라

326 내 작품 중에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독보적이다. 이 책으로 나는 인류에게 지금까지 주어진 그 어떤 선물보다 가장 큰 선물을 주었다. 수천 년간을 퍼져나갈 목소리를 지닌 이 책은 존재하는 것 중 최고의 책이며, 진정 높은 공기의 책이다 ― 인간의 만사가 그것의 밑에 아득하게 놓여 있다 ― 그뿐아니라 이 책은 가장 심오한 책으로서, 진리의 가장 깊숙한 보고에서 탄생했고, 두레박을 내리면 황금과 선의가 담겨 올라오지 않을 수 없는 고갈되지 않는 샘이다. 거기서는 어떤 '선지자'도, 종교의 창시자라고 불리는 병과 권력의지의 섬뜩한 자웅동체도 말하지 않는다. 차라투스트라의 지혜의 뜻에 불쌍하게도 부당한 일을 하지 않으려면, 무엇보다도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그 평온한 음조를 제대로 들어야만 한다. "폭풍을 일으키는 것, 그것은 더없이 잔잔한 말들이다. 비둘기처럼 조용히 찾아오는 사상, 그것이 세계를 이끌어간다" —


375 나와 내 작품들은 별개다. ━ 내 작품들에 대해 말하기 전에 여기서 나는 그것들이 이해되고 있다는, 혹은 그것들이 이해되지 못한다는 문제를 다루어본다. 나는 이 문제를 여기에 적절한 만큼만 다루겠다 : 왜냐하면 이 문제를 다루기에는 아직은 때가 아니기 때문이다. 나 자신의 때도 아직은 오지 않았다. 몇몇 사람은 사후에야 태어나는 법이다. ― 언젠가는 내가 이해하는 삶과 가르침을 사람들에게 살도록 하고 가르치게 될 기관들이 필요할 것이다 : 심지어는 《차라투스트라》를 해석해내는 일을 하는 교수직들이 만들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내가 내 진리들을 위한 귀와 손들을 벌써 기대한다면 그것은 나와는 완전히 모순되는 것이리라. 오늘날 사람들이 내 말을 듣지 않는다는 것, 오늘날 사람들이 내게서 뭔가를 받아들일 줄 모른다는 것은 이해할 수 있는 일일 뿐 아니라, 내가 보기에는 정당한 것 같다. 나는 혼동되고 싶지 않다.


376 언제가 하인리히 폰슈타인 박사가 내 《차라투스트라》의 말은 한마디도 이해할 수 없다고 정직하게 불평했을 때, 나는 그에게 그게 당연하다고 말했었다 : 《차라투스트라》에 나오는 여섯 문장을 이해했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는 : 그 문장을 체험했다는 것이고, 사멸적인 인간존재의 최고단계에 '현대'인으로서 이를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런 거리감을 느끼면서 내가 어찌 내가 알고 있는 '현대인'에게 읽히기를 기대할 수 있단 말인가! — 나의 승리는 쇼펜하우어의 승리와는 정반대다. — 나는 "나는 읽히지 않는다, 나는 읽히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 내 작품들을 부정하는 순수함이 내게 여러 번 주었던 즐거움을 과소평가하고 싶지는 않다.


377 내게서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했던 자는 내가 도대체 고려할 만한 대상이라는 점을 부정해버렸다. ― '위버멘쉬'라는 말은 최고로 잘 되어 있는 인간 유형에 대한 명칭이며, '현대'인, '선한' 자, 그리스도교인과 다른 허무주의자들과는 반대되는 말이다 ― 도덕의 파괴자인 차라투스트라의 입에서 이 말이 나오면, 아주 숙고할 만한 말이 된다.


404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는 어떤 위기의 기념비이다. 이 책은 자유정신들을 위한 책이라고 자칭한다 : 그 책의 거의 모든 문장이 승리를 표현하고 있다 ━ 나는 이 책을 통해 내 본성에 속하지 않는 것들에서 나를 해방시켰던 것이다. 내게 속하지 않는 것이란 이상주의다 : 그 제목은 "너희가 이상적인 것들을 보는 곳에서, 나는 ━ 인간적인, 아아, 인간적인 것만을 본다"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나는 인간을 더 잘 알고 있다…'자유정신'이라는 말은 여기서 어떤 다른 의미로도 이해되기를 바라지 않는다 : 자유정신은 스스로 자기 자신을 다시 소유하는 자유롭게 된 정신인 것이다.


429 이미 선취되었던 진리가 계시되는 순간 어디서든 그 가장 위대한 것들 중에서 어느 것 하나라도 알아차려졌던 적은 없었다. 차라투스트라 이전에는 지혜도, 영혼의 탐구도, 에술도 논해지지 않았다. 


431 즉 어떻게 이제껏 긍정되어왔던 모든 것에 대해 전대미문의 부정의 말을 하고 부정하는 행동을 하는 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정하는 정신의 반대일 수 있느냐는 것이다 ; 어떻게 가장 무거운 운명을, 숙명적인 과제를 짊어지고 있는 정신인 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가볍고도 가장 피안적일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 차라투스트라는 춤추는 자이다 ━ ; 실재에 대해 가장 가혹하고도 가장 무서운 통찰을 하는 그가, "가장 심연적인 사유"를 생각하는 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그 사유에서 삶에 대한 반박을 목격하지 않고, 삶의 영원한 회귀에 대한 반박조차 목격하지 않으며 ━ 오히려 모든 것에 대한 영원한 긍정 자체일 수 있는 근거를 하나 더 갖게 되는가 하는 것이다. 즉 "웅대하며 한없는 긍정과 아멘을 말할" 근거를……"모든 심연 속으로 나는 내 축복하는 긍정의 말을 가져간다" ……그런데 이것은 또다시 디오니소스란 개념이다.


443 150쪽이 채 안되는 이 에세이는 괘활하고 숙명적인 어조를 띠고 있으며, 미소 짓는 악마이다 — 내가 주저하며 그 수를 거론할 정도로 며칠 걸리지 않은 이 작품은 책들 중에서는 단연 예외적이다 : 이보다 더 내용이 풍부하고 더 독자적이며 더 파괴적인 책은 一 더 악의 어린 책은 없다. 내 이전에 모든 것이 어느 정도로 뒤집혀 있었던 지에 대해 간략하게 파악하고자 한다면 이 에세이로 시작하라. 그 표지에 씌어 있는 우상이 의미하는 바는 아주 간단하다. 그것은 이제껏 진리라고 불리어오던 것이다. 우상의 황혼 ━ 치장하지 않고 말하자면 : 옛 진리가 종말로 다가간다이다……


456 나는 내 운명을 안다. 언젠가는 내 이름에 어떤 엄청난 것에 대한 회상이 접목될 것이다 ━ 지상에서의 전대미문의 위기에 대한 양심의 비할 바 없이 깊은 충돌에 대한 지금까지 믿어져 왔고 요구되어 왔으며 신성시되어왔던 모든 것에 대한 거역을 불러일으키는 결단에 관한 회상이. 나는 인간이 아니다. 나는 다이너마이트다. ― 그렇다고 해도 내 안에는 종교 창시자의 그 무엇도 들어 있지 않다 ― 종교는 천민의 사건이다. 종교적인 인간과 접촉한 후에는 나는 내 손을 닦을 필요를 느낀다…… 나는 '신자'를 원치 않으며, 나 자신을 믿기에는 내가 너무 악의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나는 결코 대중을 상대로 말하지 않는다……내가 언젠가 신성하다는 말을 듣게 될까 봐 나는 매우 불안하다 : 이제 사람들은 내가 어째서 이 책을 먼저 출판하는지를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나에 대한 사람들의 못된 짓을 방지하게 될 것이다.


457 하지만 내 진리는 끔찍한 것이다 : 왜냐하면 지금까지는 거짓이 진리라고 불리었기 때문이다. ━ 모든 가치의 전도 : 이것이 내 안에서 살이 되고 천재가 되어 있는 인류 최고의 자기 성찰에 대한 내 정식이다. 내 운명은 내가 꼭 분별있는 최초의 사람이기를, 내가 나 자신을 수천 년간의 거짓에 맞서는 그 대립자로 인지하기를 원한다. …… 나는 최초로 진리를 발견했다. 내가 거짓을 거짓으로 최초로 경험했기에 — 냄새 맡았기에……내 천재성은 내 콧속에 있다……나는 전대미문의 저항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정의 말을 해대는 정신과는 반대이다. 나는 전대미문의 복음의 전달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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