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릭 홉스봄: 극단의 시대 ━ 20세기 역사: 상
- 책 밑줄긋기/책 2012-22
- 2019. 11. 4.
극단의 시대 : 20세기 역사 -상 - 에릭 홉스봄 지음, 이용우 옮김/까치 |
20세기 - 개관
제1부 파국의 시대
1. 총력전의 시대
2. 세계혁명
3. 경제적 심연 속으로
4. 자유주의의 몰락
5. 공동의 적에 대항하여
6. 1914-45년의 예술
7. 제국들의 종식
제2부 황금시대
1. 냉전
2. 황금시대
20세기 - 개관
22 세기 중반의 15년 동안 소련은 자신이, 전인류의 3분의 1을 이루는 '사회주의 진영'의 수뇌이자, 잠시 자본주의의 경제성장속도를 앞지른 것처럼 보였던 경제의 수뇌가 되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33 마르크스와, 그 말고도 낡은 가치관 및 사회적 관계의 해체를 예언했던 사람들의 말은 옳았다. 자본주의는 영구적으로 계속 해서 혁명적 변화를 일으키는 힘이었다 논리상, 자본주의는 자기 자신의 발전에 도움이 된다고, 아니 어쩌면 반드시 필요하다고 보았던 전 자본주의적 과거라는 부분까지도 해체시키는 것으로 끝날 것이다. 자본주의는 자신이 걸터앉은 가지들 중 적어도 하나를 톱으로 자르는 것으로 끝날 것이다.
34 이것이 세기말에 이미 인류의 일부가 감수해야 했던 상황이고, 새로운 천년기에 더 많은 인류가 감수해야 할 상황이다. 그러나 새로운 천년기에는 인류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가 오늘날보다 더욱 분명해질지도 모른다. 우리는 여기까지 걸어온 길을 되돌아볼 수 있고 그것이 필자가 이 책에서 시도한 것이다. 우리는 무엇이 미래를 형성할 것인지 모른다. 비록 나는 미래의 문제들 중 일부 ― 그것이 이제 막 끝난 시기의 잔해에서 생겨난 ―에 대해서 숙고하고 싶은 유혹을 물리치지 못했지만 말이다. 미래는 더욱 낫고, 더욱 정의로우며, 더욱 활력 있는 세상이 되기를 바라자. 구세기는 좋게 끝나지 않았다.
제1부 파국의 시대
1. 총력전의 시대
38 인류는 살아남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세기 문명이라는 위대한 건축물은 세계대전의 불꽃 속에서 그 기둥들이 무너짐에 따라 허물어졌다. 세계대전 없이는 단기 20세기를 이해할 수 없다. 전쟁은 그 세기에 흔적을 남겼다. 단기 20세기는 총소리가 나지 않고 폭탄이 터지지 않았을 때조차 세계전쟁의 견지에서 살았고 사고했다. 그 세기의 역사, 특히 붕괴와 재난의 초기 역사 이야기는 31년 간의 세계전쟁의 역사 이야기로 시작해야 한다.
40 이 모든 것이 1914년에 바뀌었다. 제1차 세계대전은 모든 주요 열강과 사실상 스페인, 네덜란드, 스칸디나비아 3국, 스위스를 제외한 모든 유럽 국가를 끌어들였다.
40 더욱 중요한 것은 미국이, '유럽 문제에 말려들지' 말라는 조지 워싱턴의 경고를 거부하고 미국인들을 유럽에 파병함으로써 20세기사의 양상을 결정지었다는 것이다. 또한 인도인들이 유럽과 중동에 보내졌고 중국의 노동자 부대가 서구에 왔으며 아프리카인들이 프랑스 군대의 일원으로 싸웠다. 비록 유럽 밖에서의 군사행동은 중동에서의 경우를 제의하고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지만, 해상전이 다시 한번 세계적인 양상을 띠게 되었다. 첫번째 해상전은 1914년에 포클랜드 군도 앞바다에서 벌어졌고, 결정적인 해전은 독일의 잠수함과 연합국의 호위함대에 의해서 북해와 중부 대서양의 해상 및 해저에서 벌어졌던 것이다.
67 제 2차 세계대전은 양쪽 모두에게 종교전쟁 또는 근대적 용어로 이데올로기 전쟁이었다. 그것은 명백히, 관련된 나라들 대부분에게 사활을 건 싸움이기도 했다. 독일의 국가 사회주의 체제에 패배한 대가는, 소련 내의 피점령지역과 폴란드에서 입증되었고 유태인들의 운명 ― 그들에 대한 조직
적인 절멸정책이 쉽게 믿지 않으려고 하는 세상에 점차 알려지게 되었다 ― 이 보여주었듯이 노예화와 죽음이었다. 그러므로 전쟁은 무제한적으로 수행되었던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은 단계적으로 대량전을 총력전으로 확대했다.
69 20세기 총력전이라는 괴물은 아직 완전히 태어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1914년부터 줄곧, 전쟁은 여지없이 대량전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 때조차 영국은 남성의 12.5퍼센트롤 군대에 동원했고 독일은 15.4퍼센트, 프랑스는 거의 17퍼센트롤 동원했다. 제 2차 세계대전 때 총경제활동인구 중 군대에 간 비 율은 대체로 약 20퍼센트였다.
70 산업사회에서조차 그렇게 큰 인력동원은 노동력에 막대한 부담을 주며, 바로 그러한 사정이 현대의 대량전이. 조직된 노동자층의 힘을 강화한 동시에 가정 밖에서의 여성 고용에 일대 혁명을 일으켰던 이유이다.
2. 세계혁명
83 구세계가 운이 다했음은 명백해 보였다. 구사회, 구경제, 구정치체제는 중국 성구의 표현대로 "천명이 다했다." 인류는 대안을 기다리고 있었다. 1914년에 그러한 대안은 친숙한 것이었다. 사회주의 정당들 ━ 그들 나라의 늘어나는 노동계급의 지지를 받으며 그들의 승리의 역사적 불가피성에 대한 믿음에 의해서 고무된 ― 이 유럽의 대부분 나라들에서 이러한 대안을 대표했다 민중들이 떨쳐 일어나 자본주의를 사회주의로 대체하고, 그럼으로써 세계전쟁이라는 무의미한 고통을 무언가 보다 건설적인 것 ― 신세계를 낳는 피나는 고통과 경련 ―으로 변화시키는 데에는 단 한 번의 신호로도 충분할 것 같았다. 러시아 혁명, 보다 정확히 말해서 1917년 10월의 볼셰비키 혁명이 바로 이러한 신호를 세계에 보내기 시작했다. 따라서 그 혁명은, 1789년의 프랑스 혁명이 19세기 역사에 대해 중심적인 사건이었듯이, 금세기사에 중심적인 사건이 되었다. 사실 이 책에서 정의된 단기 20세기의 역사가 10월혁명으로 태어난 국가의 생애와 시간적으로 일치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87 1917년의찬 러시아에 사회주의혁명을 위한 조건이 전혀 없었다는 것은, 다른 모든 러시아 및 비러시아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만큼이나 레닌에게도 명백해 보였다.
90 사회혁명의 기회가 무르익었고, 전쟁에 지쳤으며, 패전에 직면한 러시아는 제1차 세계대전의 압박과 부담으로 무너진 중부 유럽 및 동유럽 체제들 중 첫번째 체제였다.
97 러시아를 사회주의 건설에 주력하도록 한 레닌의 결정을 정당화할 세계혁명은 일어나지 않았고, 사회주의와 함께 소련은 한 세대 동안 가난하고 낙후된 고립상태에 빠졌다.
102 1920년에 볼셰비키는 그러한 희망을 포기하기는 커녕, 돌이켜보면 중요한 실책으로 보이는, 국제노동운동의 영구적 분열에 몰두했다. 볼셰비키가 택한 방법은, 전업적 '직업 혁명가' 엘리트로 구성되는 레닌주의 전위당을 모델로 삼아 새로운 국제공산주의 운동을 조직하는 것이었다.
122 공산주의의 이름으로 이루어진 혁명들은 현재 지칠대로 지친 상태다. 인류의 5분의 1을 차지하는 중국인들이 공산당이 통치하는 나라에서 계속해서 사는 한, 그러한 혁명들에 대한 추도사를 읽기에는 너무 이르지만 말이다. 그러나 그러한 나라들이 구치제의 세계로 돌아간다는 것은, 혁명기와 나폴레옹 시대 이 후 프랑스에서 그러한 복귀가 불가능했듯이 또는 전 식민지들이 식민지 이전의 생활로 돌아가는 것이 불가능한 것으로 드러났듯이, 불가능하다는 점은 명백하다. 공산주의의 경험이 역전된 곳에서 조차 전 공산주의 국가들의 현재는 혁명을 대체한 반혁명의 뚜렷한 흔적을 지니고 있고, 아마도 앞으로도 계속해서 지닐 것이다. 소련 시대를, 마치 러시아사나 세계사에 속하지 않은 것처럼 그러한 역사들과 무관하게 쓸 수는 없으며, 상트 페테르부르크가 1914년으로 돌아갈 수도 없는 것이다.
3. 경제적 심연 속으로
125 경제붕괴가 없었다면 확실히 히틀러도 없었을 것이고, 거의 확실히 루스벨트도 없었을 것이다. 소련 체제가 세계 자본주의에 대한 만만치 않은 경제적 맞수이자 대안으로 간주될 가능성은 지극히 낮았을 것이다. 비유럽 세계나 비서방세계에서의 경제위기의 결과는 분명히 극적인 것이었다. 요컨대 경제붕괴의 충격을 이해하지 않고는 20세기 후반의 세계를 이해할 수 없다. 이것이 이 장의 주제이다. 제1차 세계대전은 구세계의 일부만을, 주로 유럽 지역만을 황폐화시켰다. 19세기 부르주아 문명 몰락의 가장 극적인 측면인 세계혁명은 보다 넓은 곳에 걸쳐서 일어났다.
154 대공황은 장기 19세기의 경제와 사회로 돌아갈 수 있다는 어떠한 희망도 파괴해버린 재난이었다. 1929-33년의 시기는, 이제부터는 1913년으로 돌아가는 것을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으로 만들어버린 대협곡이었다. 구식의 자유주의는 죽었거나 운이 다한 것으로 보였다.
154 이제는 세 가지 길이 지적-정치적 헤게모니의 쟁취를 다투었다. 마르크스주의적 공산주의가 첫번째 길이었다. 1938년에 미국 경제학협회 자신이 인식했듯이 어쨌든 마르크스 자신의 예언이 실현되고 있는 것 같았으며, 그보다 훨씬 더 인상적인 것은 소련이 그 재난을 면한 것으로 보였다는 점이었다. 두번째 길은 자유시장이 최선의 것이라는 믿음을 잃고 비공산당계 노동운동과 온건한 사회민주주의의 일종의 비공식적 결합이나 영구적 연계를 통하여 개혁된 자본주의로서, 세계대전이 끝난 뒤에 가장 효과적인 길로 드러났다.
155 세번째 길은 파시즘이었다. 공황은 파시즘을 세계적 운동, 보다 적절히 말해서 세계적 위험으로 바꾸어 놓았다. 독일판 파시즘은, 1880년 대 이래 국제적 정통교리가 된 경제적 자유주의의 신고적주의적 이론들에 대해서 적대적이었던 독일의 지적 전통으로부터 득을 보았던 동시에, 어떠한 대가를 치르고라도 실업을 없애기로 결심한 단호한 정부로부터 득을 보았다. 독일판 파시즘은 대공황을 다루는 데에 다른 어떤 길보다도 빠르고 성공적이었다는 점을 말하고 넘어가야 한다. 대부분 어찌할 바를 몰랐던 유럽에서 이러한 점이 파시즘의 주된 호소력이 되지는 못했다. 그러나 대공황과 함께 파시즘의 파고가 높아짐에 따라, 파국의 시대에 19세기 자유주의 부르주아 사회의 평화, 사회적 안정, 경제뿐만 아니라 정치제도와 지적 가치관까지 쇠퇴하거나 붕괴하고 있음이 갈수록 분명해졌다.
4. 자유주의의 몰락
156 19세기부터 살아온 생존자라면, 파국의 시대에 이루어진 모든 사태전개 중에서, 아마도 자유주의 문명의 가치관과 제도가 붕괴한 것에 가장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157 자유주의 문명의 가치관이란 독재와 절대주의적 통치에 대한 불신과, 자유롭게 선출된 정부 및 의회를 가지거나 그러한 기구가 이끄는 입헌통치에 대한 헌신과, 연설, 출판, 집회의 자유를 비롯한 시민들의 권리와 자유에 대한 인정이었다. 국가와 사회는 이성, 공개토론, 교육, 과학, 인간이 사는 조건의 개선 가능성의 가치를 알아야 한다. 이러한 것들의 가치는 19세기 내내 명백히 진보해왔던 것으로 보이며 앞으로도 더욱 진보할 운명이었다.
195 왜 자유주의는 양차 세계대전 사이에, 파시즘을 받아들이지 않은 국가들에서조차 후퇴했는가? 당시를 살았던 서구의 급진주의자들, 사회주의자들, 공산주의자들은 전지구적 위기의 시기를 자본주의 체제가 단말마의 고통을 겪는 시기로 보는 경향이 있었다. 자본주의는 의회민주주의를 통해서 그리고 자유주의적 자유 ― 덧붙여 말하자면, 온건하고 개혁주의적인 노동운동에 세력기반을 마련해 준 — 아래에서 통치하는 사치를 부릴 여유를 더 이상 가질 수 없다고 그들은 주장했다. 해결할 수 없는 경제문제들과/또는 갈수록 혁명적이 되어가는 노도계급에 직면한 부르주아지는 이제 폭력과 강제, 즉 파시즘 같은 것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197 근본적으로 자유주의 정치는 공격받기 쉬운 것이었는데, 그 이유는 그것의 특징적인 통치형태인 대의제 민주주의가 국가를 운영하는 설득력 있는 방식이 되는 경우가 드물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파국의 시대의 상황은, 대의제 민주주의를 효율적이게 하는 조건은 말할 것도 없고 존립 가능하게 하는 조건조차 보장해주는 경우가 드물었다.
198 민주주의가 존립할 수 있는 것은, 민주적 투표가 그 나라 주민들 사이에 존재하는 분리선들을 가로지르는 경우이거나 그들 사이의 갈등을 화해시키거나 전정시키는 것이 가능한 경우이다. 그러나 혁명과 근본적인 사회적 긴장의 시대에는 계급평화보다는 계급투쟁이 정치로 표현되는 경우가 더욱 우세했다. 이데올로기적, 계급적 비타협성은 민주주의 정부를 파산시킬 수 있었다.
201 민주주의는 어느 쪽이냐 하면, 서로 화해할 수 없는 집단들 간의 불화를 공식화하는 장치였다. 가장 좋은 상황에서조차, 특히 민주적 대표제 이론이 비례대표제라는 가장 엄격한 형
태로 적용될 때, 민주주의가 민주적 정부의 안정된 토대를 전혀 낳지 못하는 경우가 매우 빈번했다. (영국과는 달리) 독일에서처럼 위기의 시기에 의회 내의 과반수세력이 전혀 없었던 경우에는 의회 밖으로 시선을 돌리려는 욕구가 압도적으로 우세했다. 안정된 민주주의 국가에서조차 그체제가 내포하는 정치적 분열은 많은 시민들에게 그러한 체제의 이득이라기보다는 대가로 보였다. 정치의 수사 자체가 후보와 정당을, 협소한 당의 이해관계의 대표자로보다는 국민적 이해관계의 대표자로 선전한다. 위기의 시대에 그러한 체제의 대가는 감당할 수 없는 것으로, 이득은 불확실한 것으로 보였다.
5. 공동의 적에 대항하여
204 미국과 소련은 둘 다 상대방보다 히틀러 독일을 더욱 커다란 위협으로 보았기 때문에 그 나라에 대항하여 공동전선을 폈던 것이다.
205 결국 제 2차 세계대전에서 싸워 이긴 국가들과 운동들의 이례적인 제휴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결국 독일에 대항하는 연합을 만든 것은 독일이 단순히 자신의 상황에 불만을 느낄 만한 이유를 가진 국민국가가 아니라 정책과 야심이 자신의 이데올로기에 의해서 결정되는 국가라는 사실, 요컨대 파시즘 강국이라는 사실이었다.
247 서방 선진국들의 반파시즘과 그 식민지들의 반제국주의는, 전후에 재발하게 될 이해관계의 충돌에도 불구하고, 양자 모두가 전후 미래의 사회적 변혁으로 상정한 것을 향하여 수렴되었다. 소련과 각국 공산주의는 한 세계에게는 반제국주의를, 또 한 세계에게는 승전에 대한 완전한 헌신을 의미했으므로 선진국들의 반파시즘과 식민지들의 반제국주의 사이의 차이를 좁히는 데에 일조했다.
251 자본주의 정부들은 경제에 대한 개입만이 양차 세계대전 사이의 경제적 파국으로 돌아가는 것을 막을 수 있으며, 인민들이 이전에 히틀러를 택했듯이 공산주의를 택할 정도로 급진화될 정치적 위험을 피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251 어떤 의미에서 그들은 옳았다. 지구의 표면과 인간의 생활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버섯구름 아래 시작된 시대만큼 그렇게 극적으로 변모한 적은 일찍이 없었다. 그러나 언제나처럼 역사는 인간의 의도 ― 국가정책 결정자들의 의도조차 ―에 아주 조금만 주의할 뿐이었다 실질적인 사회변혁은 의도된 것도, 계획된 것도 아니었다. 어쨌든 세 지역 모두가 직면해야 했던 첫번째 우연적인 사건은 반파쇼 대동맹의 거의 즉각적인 붕괴였다. 단결해 맞설 대상으로서의 파시즘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자 마자,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는 다시 한번 서로 불구대천의 적으로 대치할 준비를 했다.
6. 1914-45년의 예술
253 사실, 기성 전위예술계에서 1914년 이후에 이루어진 형식의 혁신은 두 가지 뿐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서부 유럽에서의 다다이즘 一 초현실주의로 점차 변화했거나 초현실주의를 예기한 — 과 동구에서의 소련산 구성주의가 그것이다.
256 이 모두를 종합해서 본다면, 이것들은 세계가 실제로 산산조각 나기 전에 고급예술에서 이미 일어났던 전위예술혁명이 확대된 것이었다. 격변의 시대에 일어난 이 혁명에 관해서는 다음의 세 가지 사실을 언급할 수 있다. 전위예술은 말하자면 기성문화의 일부가 되었다. 또한 전위예술은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일상생활의 구조에 흡수되었다. 그리고 아마도 무엇보다도 전위예술은 아마도 혁명의 시대 이래 어느 시기의 고급예술보다도 더 극적으로 정치화되었다. 그러나 이 시기 내내 전위예술은 서구에서조차 일반 대중의 취미와 관심으로부터 여전히 동떨어져 있었다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비록 지금은 전위예술이, 대중들이 일반적으로 인정하는 것보다 더한 정도로 대중들에게 영향을 미치게 되었지만 말이다. 전위예술은 1914년 이전보다는 약간 더 커진 소수만이 즐긴 것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실제로 그리고 의식적으로 즐긴 것은 아니었다.
279 라디오는 소리가 들리는 범위의 청각적, 기계적 한계를 무너뜨렸으므로, 라디오의 영향을 가장 크게 받은 예술은 음악이었다. 구두 커뮤니케이션을 구속하는 육체라는 감옥을 탈출한 마지막 예술인 음악은 1914년 이전에 축음기가 도입됨으로써 이미 기계적 재생산의 시대에 돌입했다. 아직은 축음기가 대중들의 손이 쉽게 닿는 곳에 있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확실히 축음기와 음반 둘 다 대중들의 손 안에 들어온 것은 양차 세계대전 사이의 시기였다.
7. 제국들의 종식
283 19세기 동안에 몇 안 되는 나라들 이 나머지 비유럽 세계를 우스울 정도로 쉽게 정복했다. 서방국가들이 그러한 세계를 점령하고 지배하는 데에 고생하지 않는 한, 그들은 자신의 경제적, 사회적 체제와 그 체제의 조직 및 과학기술을 통해서, 훨씬 더 도전받지 않는 우위를 확립했다. 자본주의와 부르주아 사회가 세계를 변화시키고 지배했으며, 역사라는 괴물에게 잡아먹히거나 버림받기를 원치 않는 자들에게 모델이 되었다. 1917년 이후에는 소련 공산주의가 대안적 모델이 되었으나 본질적으로 동일한 유형의 모델이었다. 사기업과 자유주의제도들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는 점만 제외하고 말이다. 따라서 비서구세계, 보다 정확히 말해서 비북 서유럽 세계의 20세기 역사는 본질적으로, 19세기에 인류의 주인으로 자리잡은 나라들과의 관계에 의해서 결정되었다.
313 영국령의 카리브 해 식민지들 가운데 큰 섬들은 1960년대에, 작은 섬들은 1960년대와 1981년 사이의 여러 시기에, 인도양 및 태평양의 섬들은 1960년대 말과 1970년대에 조용히 탈식민화되었다. 실제로 1970년경에 이르면, 중남부 아프리카를 제의하고는 어느 정도 규모 있는 영토 중 어느 곳도 이전의 식민주의 열강이나 그들의 식민자체제들의 직접 통치하에 남지 않았다. 제국의 시대는 끝났다. 4분의 3세기 전만 해도 그러한 시대는 불멸의 것으로 보였었다. 불과 30년 전만 해도 그러한 시대는 지구상의 민족들 대부분을 포괄했었다. 그러나 식민지였던 나라들 출신의 신세대 토착작가들이 독립의 시대와 더불어 시작된 문학을 생산하기 시작함에 따라, 제국의 시대는 돌이킬 수 없는 과거의 일부로서 왕년의 제국국가들의 문학 및 영화상의 감상적인 추억에 속하게 되었다.
제2부 황금시대
1. 냉전
317 원지폭탄 투하에서 소련의 몰락까지의 45년은 세계사에서 단일한 동질적 시기를 이루지 않는다. 다음 장들에서 보게 되듯이 그 시기는 반씩 둘로, 즉 1970년대 초의 분수령 양쪽의 몇 십 년 씩으로 나누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시기 전체의 역사는 소련이 몰락하기 전까지 그 역사를 지배한 독특한 국제적 상황에 의해서 단일한 유형으로 결합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을 통해서 부상한 두 초강대국의 끊임없는 대결, 이른바 '냉전'이 바로 그 상황이다.
317 냉전의 독특성은 객관적으로 말해서 세계전쟁이 곧 일어날 위험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는 데에 있다. 게다가 양측의 묵지적인 언사에도 불구하고, 두 초강대국 정부 모두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났을 때의 지구상의 세력분배상태를 받아들였다.
318 소련은 지구상의 일부 지역에서 지배하거나 지배적인 영향력을 행사했고, 군사력을 통해서 자신의 영향권을 그 이상으로 확대하고자 하지 않았다. 미국은 나머지 자본주의 세계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예전 식민열강의 잔존한 기존의 제국적 헤게모니를 인수함으로써 서반구와 대양들에 대해서도 통제력과 지배력을 행사했다. 그 대신 미국은 소련의 헤게모니가 인정된 지역에 간섭하지 않았다.
323 불행하게도, 두 초강대국 중 어느 쪽도 핵 버튼을 누르기를 실제로는 원하지 않을 것이라는 분명한 사실 자체가 양측으로 하여금 ― 상대쪽도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신하고서 — 협상을 위해서 또는 (미국의 경우) 내정을 위해서 핵 제스처를 사용하도록 부추겼다. 이러한 확신은 정당한 것으로 드러났지만 여러 세대의 마음을 졸이게 하는 대가를 치렀다. 이러한 종류의 전적으로 불필요한 사건이었던 1962년의 쿠바 미사일 위기는 며칠 동안 세계를 불필요한 전쟁에 거의 빠뜨릴 뻔했고 실제로 최고 정책결정자들조차 위협하여 잠시나마
이성을 되찾게 했다.
338 미국은 자신의 정치적, 경제적 계획을 유럽인들에게 철저히 부과할 수는 없었지만, 그들의 국제적 행동을 지배할 정도로는 충분히 강력했다. 반소 동맹의 정책도 미국의 정책이었고, 반소 동맹의 군사계획도 미국의 계획이었다. 독일은 재무장되었고, 유럽 중립주의에 대한 열망은 확고히 억제되었으며, 서구열강이 미국의 정책으로부터 독립된 세계정책을 개시한 유일한 시도인, 1956년에 영국-프랑스가 이집트와 벌이고자 한 수에즈 전쟁 시도는 미국의 압력으로 무산되었다. 동맹국이나 피보호국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일이란 (드골 장군처럼) 군사동맹을 실제로 떠나지 않은 채 그 동맹에 완전히 통합되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었다.
339 냉전이 끝났을 때 미국의 경제적 헤게모니 중에서 남은 것은 너무도 적어서 군사적 헤게모니조차 더 이상 그 나라 자체의 자원으로 유지될 수 없을 정도였다. 기본적으로 미국의 군사행동이었던 1991년 이라크와의 걸프 전쟁은, 자진해서든 마지 못해서든, 워싱턴을 지지한 다른 나라들이 비용을 댔다. 이 전쟁은 실제로 한 강대국이 수익을 올린 드문 전쟁에 속했다.
349 냉전은 두 초강대국들 중 하나 또는 모두가 핵무기 경쟁의 불길한 불합리성을 인식했을 때 그리고 양국 중 하나 또는 모두가 그러한 경쟁을 끝내고 싶어하는 상대국의 소망을 진지한 것으로 받아들였 때 끝났다. 이 방면에서 앞장서기는 아마도 소련 지도차 쪽이 미국 지도자의 경우보다 쉬웠을 것이다. 왜냐하면 모스크바는 냉전을 결코 워싱턴에서처럼 십자군적인 견지에서 보지 않았기 때문이며 또한 아마도 흥분한 여론을 고려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한편 바로 이러한 이유로, 소련 지도자가 서방측에게 자신이 진심이라는 것을 확신시키기가 더욱 어려웠을 것이다. 바로 이러한 점이 세계가 고르바초프에게 그리도 막대한 빚을 지고 있는 이유다.
350 냉전의 종식이 소련 체제의 종식을 수반한 것인가? 두 현상은 명백히 서로 관련된 것이지만 역사적으로 서로 분리할 수 있다. 소련형 사회주의는 자본주의 세계체제에 대한 전지구적 대안을 자임해왔다. 자본주의는 무너지지 않았거나 무너지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 않았으므로 세계적 대안으로서의 사회주의의 전망은 세계 자본주의 경제와 경쟁할 수 있는 능력
에 달려 있었다. 대공황과 제 2차 세계대전 이후에 개혁되었고 1970년대에 정보 및 통신 기술의 탈산업혁명을 통해서 변모한 자본주의 경제와 말이다. 사회주의가 갈수록 큰 폭으로 뒤지고 있다는 것은 1960년 이후에 명백해졌다. 사회주의는 더 이상 경쟁력이 없었다. 이 경쟁이 두 정치적, 군사적, 이데올로기적 초강대국들 사이의 대결이라는 형태를 취하는 한, 이러한 열세는 파멸적인 것이 되었다.
351 사회주의의 토대를 침식한 것은 자본주의 및 그 초강대국과의 적대적인 대결이 아니라, 사회주의 자체의 갈수록 명백해지는 심각한 경제적 결함들과, 훨씬 더 역동적이고 선진적이 고 우세한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사회주의 경제에 대한 가속화되는 침탈의 결합이었다.
2. 황금시대
376 자본주의의 개조와 경제적 국제화의 진전이 핵심적이었다. 많은 기술혁명들이 이루어졌지만, 기술혁명이 황금시대를 설명해주는지는 그다지 분명치 않다. 앞서 보았듯이 이 몇 십 년간의 새로운 공업화의 상당 부분은 구식 기술에 기반한 구식 공업화가 새로운 나라들에 확산된 것이었다. 즉, 석탄, 철, 강철의 19세기식 공업화가 사회주의 농업국들에, 석유 및 내연기관의 20세기 미국 공업이 유럽국가들에 확산되었다. 고도의 연구가 낳은 기술이 민간공업에 미친 영향은 아마도 1973년 이후의 '위기의 몇 십 년'이 되어서야 강력해졌던 것으로 보인다. 그 시기에 미지의 세계로의 수많은 도약뿐만 아니라 정보기술과 유전공학의 비약적 발전이 주로 이루어졌던 것이다. 거의 전쟁이 끝나자마자 세계를 뒤바꾸기 시작한 가장 중요한 혁신은 아마도 화학과 약학의 혁신일 것이다.
386 이러한 초국적화는 특히 세 가지 측면을 명백히 보여주었다. (종종 '다국적회사'로 알려진) 초국적회사, 새로운 국제적 분업, 오프쇼어(offshore) 금융의 부상이 그것이다. 이들 중 세번째 것은 초국적주의의 최초 형태 중 하나가 발전한 것일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 경제가 일국적인 통제나 다른 어떤 통제에서도 벗어나는 방식을 가장 생생하게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390 새로운 제3세게 공업은 팽창하고 있는 국내시장 뿐만 아니라 세계시장에도 상품을 공급했다. 제3세계 공업이 이러한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대부분이 1970년까지는 기존의 공업국에서 '개발도상'국으로 이미 이동한 섬유공업처럼) 자국공업에 의해서 완전히 만들어진 제품을 수출하는 동시에 초국적인 제조과정의 일부를 담당했기 때문이었다.
392 이러한 결합은 앞서 보았듯이 정치적 구조물이었다. 그것은 대부분의 서방국들에서 우파와 좌파 사이의 효과적인 정책 합의에 기반했다. 파시스트-초민족주의적 극우파는 제2차 세계대전으로 정치무대에서 제거되었고, 공산주의라는 극좌파는 냉전으로 제거되었다. 케인스주의적 결합은 또한, 노동자의 요구는 이윤을 잠식하지 않는 범위 내로 제한하고 이윤의 장래 전망은 막대한 투지를 정당화할 정도로 높게 유지하기로 한, 고용주들과 노동자조직들 사이의 암묵적, 명시적 합의에도 기반했다. 막대한 투자가 없었다면 황금시대에 노동생산성의 눈부신 성장이 이루어질 수 없었을 것이다.
396 1960년대 동안에 이 모든 것이 마모의 조짐을 보였다. 미국의 헤게모니가 쇠락했고, 그것이 사라짐에 따라 금-달러에 기반한 세계 통화제도도 붕괴했다. 여러 나라에서 노동생산성의 증가가 둔화되는 몇몇 조짐들이 나타났고, 공업의 호황을 유지시켜온 국내 이주집단이라는 커다란 노동 공급원이 거의 고갈되었다는 조짐이 명백히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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