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머스 J. 미사: 다빈치에서 인터넷까지 ━ 기술은 어떻게 사회와 역사를 변화시켜 왔는가


다빈치에서 인터넷까지 - 10점
토머스 J. 미사 지음, 소하영 옮김/글램북스


서문

제1장. 궁정시대의 기술, 1450~1600년

제2장. 상업 시대의 기술, 1588~1740년

제3장. 산업의 지형도, 1740~1851년

제4장. 제국의 도구들, 1840~1914년

제5장. 과학과 시스템, 1870~1930년

제6장. 모더니즘의 재료들, 1900~1950년

제7장. 파괴의 도구 1936~1990년

제8장. 글로벌 문화를 향해, 1970~2001년

제9장. 불안정으로 가는 길, 2001~2010년

제10장. 기술을 둘러싼 문제들


감사의 말

주석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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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5 이 책은 르네상스 시대부터 현재까지 약 500년 동안 누적된 기술의 다양한 특성과 변화를 기술했다. 산업화 이전의 시대와 과학과 정치, 산업혁명의 시대부터 제국주의, 모더니즘, 전쟁, 세계문화 그리고 보안과 같은 최신 주제까지 다양한 분야를 다룬다. 르네상스 시대부터 연대별로 살펴보는 기술의 변화는, 앞으로 기술이 나아갈 다양한 범위와 방향을 연구하는 데 있어 견고한 경험적 기반을 제공한다.


7 나는 특정한 사회에 역사적, 공간적으로 존재했던 기술들에 대해 그 순수한 기술뿐만 아니라 이러한 기술들이 진화해 사회의 사회적, 문화적 발달에 어떠한 형태를 줄 수 있는지, 사회가 생각하는 기능한 것과 열망하는 것 등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양방의 영향을 잘 표현하기 위해 나는 기술과 문화의 고유한 '시대' 개념을 채택해 이 책의 소재를 구성했다.


17 특정한 목표와 열망이 있는 사회들은 특정 기술을 선택하고 영유했다. 그리고 이런 기술들은 경제, 사회 그리고 문화적 역량을 가동하는 데에 아주 유용한 도구와도 같다. 우리 사회의 논쟁과 이슈는 모든 사회구성원이 허심탄회하게 논의할 수 있게 항상 열려있어야 한다. 우리 사회가 갖는 내일의 향방은 우리가 선택한 기술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제1장. 궁정시대의 기술, 1450~1600년

47 불행히도, 최근 20년 동안 학자들은 다빈치의 노트에 적혀있던 기술 및 개념들이 그의 독창적인 것이었다는 순진한 생각을 버리기 시작했다. 다양한 분야에서 경력을 쌓으며 다빈치는 많은 곳을 여행했고 그의 주의를 끌었던 것들을 노트에 담았다. 그의 노트는 기술 프로젝트를 최소 4가지의 주제로 분류했고 이는 다음과 같다. 궁정 후원자로부터 받은 특정 의뢰, 자신의 기술적 '꿈' 혹은 실현 불가능한 기구들, 실증 이론적 연구 또는 그가 여행 중에 본 혹은 동료 기술자들에게서 들은 기계장치들 그리고 비트루비우스와 같은 선임 작가들의 말을 인용한 인용구들 ..


49 인쇄를 위한 이동식 활자의 발명은 학문 연구, 종교 활동, 그리고 기술을 급격히 변화시키는 정보의 폭발을 불러일으켰다. 인쇄혁명은 이전 전통에 얽매인 기관들로부터 자유를 쟁취하게 해주었고, 진취적 자본주의 인쇄업자들의 활동을 권장, 활성화하는 마법을 부렸다. 동시에 유럽 전역에서는 인쇄물들을 거래하는 대규모 시장이 형성되어, 기술에 관해 글을 쓰는 창작 업무에 무게를 둔 후원 네트워크가 구성되기도 하였다. 초기 인쇄업자

세대와 초기 기술 작가 세대에 속한 유명 예술가들은 놀라운 속도로 르네상스후기 귀족문화에 의존하거나 참여했다.


61 설계에 박식한 기술자 중 몇몇은 모방한 삽화 내의 왜곡된 원근법을 파악하고 오류를 고쳤을지 모른다. 하지만 모방한 드로잉이 수작업으로 복사되었고 그 과정에서 왜곡된 부분들이 추가되었다고 상상해 보라. 프란체스코의 원 기계를 다시 제작하는 과정은 절망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의 설계는 마치 중국기술자들의 경우처럼 전해지는 과정에서 사라져버리게 될 것이다. 골자는 기하학적 원근법이 대중적으로 이용되기 이전, 한 세대에서 모습을 드러냈던 발명품들이 동료들의 모임 내에서만 공유되어, 노트나 습작 수준에만 머물러 다음 세대로 전달되지 못했다는 점이다. 이러한 환경에서 통치자의 몰락 혹은 통치자의 문화 파괴와 같은 사회체제 분열은 기술 전통의 지속성을 떨어뜨리며 세대 간의 공유를 단절시켰다.


61 기술에 있어 영구적이고 계승 기능한 전통은 인쇄술과 원근법이 만들어지고 난 후에야 비로소 중유럽의 광산업에서 나타났다.


67 르네상스 궁정과 도시국가의 이상은 그 시대의 기술과 문화적 성격을 정립하는 것이었다. 다빈치, 프란체스코, 알베르티, 그리고 르네상스 시대의 과학기술자들은 군사적, 도시건설 귀족오락, 그리고 궁정의 위엄을 알릴 수 있는 일들을 주로 수행해 왔다. 이는 후원자인 귀족들이 그 같은 분야에 가치를 두고 기술자들을 고용했기 때문이다.


제2장. 상업 시대의 기술, 1588~1740년

71 귀족 기문이나 도시국가의 권력자들은 도시를 건설하고 전쟁을 벌이며 유흥을 즐기는 등 국가 통치를 위해 다양한 분야에 르네상스 기술자들을 고용했다. 하지만 이는 기술을 이용해 부를 창조하거나 산업을 발전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자신들의 부(토지, 금융, 용병자산)를 가지고 기술을 창조하고 적당히 이용하기 위함이었다.


103 르네상스기 궁정 후원 시대와 비교했을 때보다 훨씬 다양한 상인들과 무역업자, 조선업자, 선박 주인, 설탕 정제 산업 관계자들 섬유제작자 외 많은 사람이 부를 창출해야 한다는 강박에 휩싸였고, 이는 상업시대 기술의 성격을 완전히 바꿔 놓았다. 부의 창출을 목적으로 기술을 개발하고 사용하는 것이 이전에는 눈에 잘 띄지 않는 암류였었다면 이 시기 동안은 국제적인 자본(비산업적인)과 번영이 기술의 주된 목적으로 받아들여졌다. 네덜란드 상업시대를 다른 시대와 구분하는 것은 바로 부를 창출하는 기술과 기법들이었다.


103 다른 그 어떤 시대나 장소에서도 대형화물을 싣는 상선들이나 공장 같은 청어 어선, 내륙 도시들과 연계된 분주한 대형 항구들, 교역의 부가가치, 주식과 상품을 거래하는 거래소, 공공소유선박, 청어, 양모, 한때는 튤립 거래를 위한 선물시장을 포함하는 세계적 금융기관의 정교화는 찾아볼 수 없었다.


제3장. 산업의 지형도, 1740~1851년

110 영국에서도 10명 중 1명의 노동자만이 공장 내부를 볼 수 있었으며, 대개의 노동자는 작은 가게에서 일하거나, 건축, 양모, 가죽 등의 전통적인 산업에 종사했다. 증기기관을 이용한 면직물공장 외에도 이러한 활동들이 영국 제조업의 가치를 전반적으로 향상시켰고 엄청난 성장을 이뤄냈다. 이 새로운 역사적 관점은 영국이 산업혁명에 이르기까지 다양성과 복잡성의 특징을 띠었음을 시사한다.


155 산업화도시는 확실히 감각과 감성에 거세게 저항하고 있었지만 큰그림을 보면 또그렇지만은 않았다. 확실히 산업혁명은 영국사회 내부에 차이를 발생시켜 불안감을 안겨주었으며, 몇십 년 동안 하나의 '산업사회'를 이뤄내지는 못했다. 실제로 산업도시 빈민가를 방문했던 비평가들은 적잖이 충격을 받지 않을 수밖에 없었는데 이는 그들의 감성이 그들이 살던 전원의 삶에 머무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제4장. 제국의 도구들, 1840~1914년

164 이러한 군사비용뿐만 아니라 제국 관리들의 교통 숙소, 식량, 연금 비용을 대느라 결국 제국은 창출한 수익을 모조리 소비했다. 또한 우리는 이미 제3장에서 동인도회사가 제국에 1,200여 명의 인건비를 청구했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이것은 단지 런던의 직원들만 고려한 숫자였다.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이 같은 제국의 기타 비용이 결국에는 무역에서 얻은 이익을 모조리 상쇄시켰다고 한다. 인도에서의 제국주의는 부를 창출하지 못했다. 오히려 제국주의는 인도와 영국의 납세자로부터 제국의 수혜자인 무역상이나 투자가, 군 장교, 또는 관료들에게 부를 이동시켰다.


199 제국주의의 유산은 현재 탈식민지 시대의 관점에서도 여전히 논란이 가득하다. 세계회를 비판하는 많은 이들이 세계화를 제국주의의 최신 버전에 지나지 않는다고 맹렬히 비난하기 때문에 세계화에 대한 토론 이후에 제국주의에 대한 주장 또한 더 날카로워졌다. 확실히, '문화적 사명'을 내세우며 아편을 팔거나 전선을 잇고, 철도를 건설하는 것이 아시아나 아프리카, 그리고 남미에 서양 문명의 편익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 주장한 제국주의 시대의 역사적 인물에게 동정심을 느끼기는 어렵다. 오늘날의 시선으로는 그런 사업들이 수반한 포탄과 탄약통, 또는 기관총들만이 명백하게 보일 뿐이다.


200 지배 국가에도 제국주의는 엇갈린 경제적 결과를 낸 사업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전에 이미 언급했듯이, 아무리 계산을 잘해 봐도 영국은 결과적으로 제국주의 통치 시스템에서 수익을 남기지 못했다. 물론 많은 무역가와 사업가, 또한 제국의 팽창주의를 이용한, 선견지명 있었던 기술자들이 개인적으로 많은 부를 축적했을 것이다. 하지만 제국 경제의 수익은 군사의 해외파곤, 제국 관료체제 유지, 또 기술개발에 쓰인 막대한 비용을 감당할 만큼 크지는 못했다.


201 이런 관점에서 우리는 제국주의가 단순히 이전의 상업이나 산업시대의 연속선상에 있는 것이 아니며, 제국주의는 오히려 기술자들의 주목적을 산업과 경쟁하거나 심지어 대체시키는 일에 둔 것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증기선, 공작기계, 기관차, 철 그리고 면직물을 내다 팔 수 있는 확실한 식민지 해외시장을 가지고 있었던 영국 기업가들은 떠오르는 경쟁자들과 경쟁을 할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오히려 그 때문에 장기적인 측면에서 영국의 세계 경쟁력 하락이 가속화되었을지도 모른다.


제5장. 과학과 시스템, 1870~1930년

231 에디슨은 투쟁하고, 톰슨은 부정하고, 인설은 받아들였지만, 기술 변화의 새로운 양식은 새 시스템을 개발하는 것보다는 대규모 시스템을 안정시키는 일에 중점을 두었다. 철도, 철강, 화학, 그리고 전기 분야 등 가장 자본 집약적인 산업에서 J.P 모건이나 리 히긴슨과 같은 자본가들은 끊임없는 경쟁이나 자유분방하고 빠른 기술적 혁신에 사실상 종말을 고했다. 그리고 그들은 안정적이고 조직화된 자본주의의 탄생의 선두주자가 되었다.


235 안정성의 추구는 비단 자본가, 기업, 기술자 사회, 그리고 연구소에 국한 된 것이 아니었다. 1900년, MIT의 전기공학 과정을 살펴보면 공학기술 그 자체 또한 안정성을 추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시기의 안정성의 확보는 전기 공학자에게 있어 기술적 의미 그 이상이었다.


242 수십 년 동안, 무언가 현저한 변화가 생겼다는 것을 알려주는 확실한 표식은 산업, 특히 과학 기반 산업에서 영국의 쇠락과 독일과 미국의 번영이었다. 제1차 산업혁명을 대표하는 영국의 섬유산업과 제2차 산업혁명을 대표하는 독일의 합성염료 산업과 미국의 전기산업 사이에는 확연한 대조점이 있다.


243 물론 문화적 아이콘으로서의 에디슨의 명성은 나날이 증가했다. 하지만 GE는 에디슨과 같은 기발한 발명가보다는 연구를 통해 노벨상을 받거나 수익을 안겨 줄 수 있는 안정적인 산업과학자들이 더 필요했다. 산업과 재정이라는 막대한 영향력을 등에 업은 시스템의 안정적 혁신은 곧 전기, 전화, 자동차, 가전제품, 실내 장식, 라디오 등에 대한 거대 소비자 시장을 형성했다.


제6장. 모더니즘의 재료들, 1900~1950년

286 모더니즘 운동을 전체적으로 살펴보면, 미학적 모더니즘과 근대적 재료 역사는 그 관계에서 모순점이 수두룩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적어도 1920년대에는 확실히 주요 근대주의자들이 좌파 활동가로서 노동자들에게 더 좋은 주거지를 제공하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1950년대의 모더니즘은 명백히 반사회주의적인 IBM, 시어스, 그리고 수많은 자금력 풍부한 보험회사와 관련된 기업적 양식으로 변모했다.


287 전반적인 모더니즘 운동이 그랬던 것처럼 디자이너와 건축가도 기술시대에 대량생산된 유리와 강철의 가능성을 능동적으로 받아들였다. 저렴하고 대량 공급이 가능한 공장 생산 재료는 이전의 수공 석재나 목재 건설로는 할 수 없었던 대중을 위한 주거단지 건설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또 근대적 재료 또한 문화를 변화시키자는 주장을 펼쳤던 기술 근본주의자에게는 일종의 핵생성 반응과도 같았다. '문화를 바꾸는 기술'을 살펴보며 우리는 문화 깊숙한 곳에서 기술 근본주의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심미적 이론이나 본보기가 될 만한 물건, 적절한 교육 사업, 그리고 자신의 관점을 새긴 광범위한 사회 정치적 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런 기술 문화적인 활동가가 실패하면 그들은 잊힌다. 하지만 만약 그들이 성공하면 우리는 기술 그 자체가 문화를 변화시켰다고 믿는다.


제7장. 파괴의 도구 1936~1990년

297 1945년 8월 6일, 독일과 미국, 영국의 핵 개발 수준의 격차가 얼마나 큰 지를 확인할 수 있는 사건이 발생했다. 1945년 5월 초, 구소련의 탱크가 베를린에 도착했고, 제2차 세계대전은 서서히 종식됐다. 연합군은 곧 독일 최고의 물리학자 10명을 영국으로 불러 모았다. 아시아에서는 여전히 전쟁 중이었기에 연합군 정보원은 핵 연구에 관해 자세히 물었고 독일 물리학자들은 진행해온 연구에 자신감을 보이며 거만하게 대답했다. 그리고 그날 저녁, 미국이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떨어뜨렸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미국이 원자폭탄을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독일 학자들을 놀라게 하기엔 충분했다. 게다가 2만 톤의 위력을 지닌 원자폭탄이었다는 소식과 연합군의 핵 연구를 위한 공장을 짓는 데 12만5천 명, 폭탄 물질을 만드는 데 6천 5백명이나 투입된다는 사실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독일의 핵연구에 투입되는 인력은 연합군의 겨우 1000분의 1정도 수준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314 맨해튼프로젝트는 원자력 발전에 기여했지만, 핵무기 공단조성은 미소간 수년에 걸친 치열한 경쟁을 가져왔다. 1942년 중반부터 에드워드 밀러가 개발을 주도한 핵융합 폭탄에 비하면 핵분열 폭탄의 위력은 새 발의 피에 불과했다. 핵분열은 원자핵을 분열시키는 것인 반면, 핵융합은 원자핵을 합치는 것이다. 핵융합 폭탄의 폭발력은 TNT 화약 수 메가톤을 일시에 폭파했을 때의 위력과 같고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폭탄의 수천 배가 된다.


315 핵문기 군비경쟁은 두 강대국 첨단산업이 핵융합 폭탄의 '투사 중량'과 정확성을 누가 더 빨리 고안, 개발, 생산, 그리고 어디에 배치하는가의 경쟁이었다.


331 서방과 비교했을 때, 구소련의 국가 중심적 이데올로기와 기술은 냉전과 잘 맞았다. 구소련 체제의 붕괴는 엄청난 군사 비용을 감당할 만큼 경제적 성장을 이루지 못해 결국은 정부의 파산과 정치적 붕괴로 이어진 것이다.


제8장. 글로벌 문화를 향해, 1970~2001년

351 맥도날드는 거대한 세계화의 상징이라는 면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1950년대 캘리포니아의 자동차 문화에서 탄생해 베이비부머 세대와 함께 성장한 맥도날드는 글로벌 패스트푸드 정글에서 800파운드에 달하는 고릴라로 성장했다. 맥도날드는 소고기, 감자, 닭고기를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소비하며 엄청난 존재감으로 120여 개국의 문화 식습관, 식품 산업을 바꿔놓았다. 그들이 1995년 미국 외 국가에서 기록한 수입은 전체 수입의 50%에 달했다.


359 맥도날드는 분명 아시아인들의 식습관을 변화시켰다. 맥도날드는 1971년 도쿄, 1975년 홍콩, 1984년 타이페이, 1988년 서울, 1992년 베이징에 상륙했다. 본래 소고기를 즐겨 먹던 한국을 제외하고는 맥도날드가 등장하기 전까지 햄버거는 문자 그대로 미지의 음식이었다.


376 세계화는 과거에도, 지금도 기술을 통해 구현되었다. 글로벌 요소가 의도적으로 팩시밀리, 맥도날드, 인터넷에 '설계'되어 녹아들어 간 것이라고 과장 없이 말할 수 있다.


377 1990년대에는 세계화가 국경 없이 뻗어 나갈 것이라 예상했다. 그러나 2001년 9월 11일 테러가 발생하며 세계화의 확장도 끝나버렸다. 테러와의 전쟁이 시사하는 바가 무엇이든지 간에, 세계화 유토피아주의자들의 희망과는 현재 민족국가의 힘이 그 어느 때보다 건재하고 번창하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맥도날드가 공황에 생긴다 해서 보안이 강화되지 않는다. 냉전시대 종식 이후 군비감축으로 인해 기술회사는 글로벌 미디어, 엔터데인먼트, 제조업 등 민간시장으로 눈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2002년 미국의 강력한 군비증강은 이런 추세를 뒤바꾸어 놓았다. 안보 관련 기술시대가 코 앞에 다가왔을지 모른다.


제9장. 불안정으로 가는 길, 2001~2010년

426 현대사회는 상품의 생산과 관리가 아닌 리스크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이다. 1990년대의 세계화는 민족국가를 쇠퇴시켰고 새로운 사회 질서를 만들어냈다. 이들은 명백한 사회적 혁명 없이 새로운 사회가 등장하는 역설적 현상에 주목했으며, 강력한 경제 성장, 선진 기술화, 높은 고용 안정성은 산업사회를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게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긍정적인 주장은 사회계급에 관한 이론 등 구시대의 사회 이론이 유물이 될 수도 있음을 보여주었다.


427 성찰적 사회적 과정도 기술이 가져온 구조적 리스크를 대처하지 못한다. 한 가지 내재된 문제점은 이상하게도 위험사회와 성찰적 현대화가 현대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기술에 대해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는 점이다.


제10장. 기술을 둘러싼 문제들

434 과학은 많은 기술 분야에서 분명히 유용하기는 하지만, 기술에 꼭 필요한 요소도 아니고 핵심요소도 아니다. 과학자 외에 엔지니어, 자본가, 정부 관리, 노동자 때로는 소비자들까지도 과학만큼이나 기술창조에 깊숙이 참여하고 있음은 명백한 사실이다. 실제로 오늘날의 과학지는 저온초전도체, 고주파반도체, 버키볼이라고도 불리는 미세구형탄소판 등 자연 발생적이지 않은 물질, 즉 인공물의 속성을 조사하는 일이 많다. 시카고 세계박람회의 구호를 뒤바꿔 '기술이' 전혀 새로운 과학적 연구대상을 '발견한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440 지금까지의 사례들을 통해, 우리는 기술이 경제 사회적 요구를 만족시키는데 사용되어왔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하지만 그것은 전체 그림의 일부일 뿐이다. 기술은 기술의 변화 과정을 통해 사회목표와 상호작용한다. 기술은 사회가 정해놓은 고정된 '요구'에 응답하는데 그치지만은 않는다. 아니 오히려 열정적이고 에너지가 넘치는 작용 주체에 의해 새로운 요구가 생겨나고, 그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새로운 기술이 개발되는 경우가 많다. 발명가, 엔지니어, 기업가, 공무원, 그리고 사회운동과 같은 변화의 작용 주체는 보통 마케팅, 광고, 정부의 홍보 · 조달 · 조정 활동을 통해 새로운 요구를 만들어낸다. 에디슨은 단지 전구 발명만 한 게 아니다. 그는 경쟁 상대의 교류전류를 사형에 쓰이는 '죽음의 전류'로 몰아가기 위해 국가권력을 이용하기도 했다. 또한 르네상스의 불안정한 도시국가든, 군사시대의 강력한 민족국가든, 위험이 분산된 현대국가든, 국가는 물론 기술 변화의 작용 주체이기도 하지만 또한 기술 변화 때문에 변형된 결과물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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