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클 스콧: 기원 전후 천년사, 인간 문명의 방향을 설계하다


기원 전후 천년사, 인간 문명의 방향을 설계하다 - 10점
마이클 스콧 지음, 홍지영 옮김/사계절


시작하며

고대 세계는 하나인가 여럿인가

이 책에 관하여


1부. 축의 시대의 정치

1장 아테네 민주주의: 민중의 힘을 향한 갈망

2장 로마 공화국 정부의 완성

3장 공자와 성군


2부. 전쟁과 변화하는 세계

4장 새로운 세대의 부상

5장 관계의 성립

6장 동방과 서방의 제국


3부. 연결된 세계의 종교

7장 내부와 외부로부터의 종교 혁신

8장 종교의 강요, 공존, 결합

9장 종교와 통치


마치며

감사의 말

옮긴이의 말




시작하며

13 우리는 글로벌 공동체”에 살고 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역사를 쓰고 읽을 때는 과거가 연결되지 않은 개별적인 뭉치인양 취급한다. 이제 더 큰 그림을 보면서 하나의 ‘고대 세계’가 아니라 연결된 고대 세계 ‘들’을 이야기해보는 건 어떨까?


15 이 기간 가운데서도 특히 세 시기에 집중할 예정이다. 1부에서는 기원전 6세기에 정치를 통해 협의가 이뤄진 사회를 알아본다. 2부에서는 기원전 3세기부터 기원전 2세기까지 전쟁을 통해 구축된 고대 공동체의 관계를 살펴본다. 마지막으로 3부에서는 기원후 4세기에 종교 신앙의 도입 적응, 혁신을 통해 형성된 인간과 신(들)의 관계 발전을 탐색한다. 1부는 아테네 민주주의가 시작된 기원전 508년, 2부는 한니발이 코끼리 부대를 이끌고 알프스산맥을 넘어 로마를 침공한 기원전 218년 , 그리고 3부는 콘스탄티누스 1세가 밀비우스 다리 전투에서 승리한 기원후 312년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15 세 시기를 선택한 이유는 그 해에 지중해 지역에서 중요한 사건이 발생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각각의 시기가 특별한 이유는 지중해에서 중국에 이르는 광범위한 지역의 다양한 문화권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유사한 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주목한 세 시기는 고대 세계의 연결이 강화되는 각 단계에 해당한다 우리는 먼저 서로 동떨어진 세계 여러 지역에서 비슷한 문제의 해결책을 모색하던 기원전 6세기를 살펴볼 것이다. 그런 다음 기원전 3~2세기에 끊임없이 확대되는 문명의 상호작용이 어떻게 개인들의 결정을 좌우했는지, 그리고 세계들 간의 연결 고리가 생성되면서 이것이 어떻게 사상을 전파하고 다른 세계와 관계를 맺는 방식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는지 살펴본다. 이 모든 과정에서 글로벌화의 진전과 이로 인한 변화가 각각의 사회가 자신들의 성취, 제도, 종교를 바라보는 시각에 미친 영향도 살펴볼 것이다.


1부. 축의 시대의 정치

28 세 지역에서 변화를 촉발한 원인의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각 사회의 전통과 당면한 문제의 차이는 서로 다른 결과를 도출했다. 한 사람의 덕망 높은 통치자가 권력을 장악한 중국, 사회계급별 권력의 균형을 이루고자 한 로마의 중도, 그리고 아테네의 직접민주주의에 이르기까지 서로 다른 사회계약과 관계 개념을 바탕으로 근본적으로 다른 3개의 통치체제가 등장했다.


48 클레이스테네스의 개혁은 '데메스'라는 촌락 공동체를 정치의 기본 단위로 삼고 거기에서 정치적 · 군사적 대표를 직접 선출하는 것이 핵심이었다. 데메스의 구성원들은 지역 의회에 모여 자신들의 문제를 논의하고, 의원을 선출하고, 공동체 운영 방식을 결정했다. 클레이스테네스의 개혁은 전통적인 4부족 체제를 해체하고 10부족제로 재편하여 그것을 군대와 정치 참여의 기초로 삼았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멀리 떨어진 복수의 지역공동체를 하나의 단위로 묶어 함께 전투에 나가고 정치에 참여하게 함으로써, 특정 지역과 그곳을 지배하는 귀족 가문의 유착 관계를 끊었다.


49 아테네 민주주의를 향한 첫걸음이었던 민중 봉기로부터 반세기가 지난 기원전 460년대에 이르러, 아테네 성인 남성 시민 모두가 천부의 권리로 누리게 된 정치체제를 기리기 위해 아테네에서 태어난 한 남자아이에게 데모크라테스라는 이름이 주어졌다.


68 기원전 510~509년 로마에서 혁명이 일어나기 반세기도 더 전에 세르비우스 툴리우스에 의해 도입된 선거제도는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가 축출된 후 구성된 새 정부의 중심을 이뤘다. 새로운 체제는 '로마인의 공공제'라는 의미의 라틴어 '레스 푸블리카 로마나 res publica romana'로 불렸다. '공화국republic'과 특정 종류의 정체를 의미하는 '공화정체republicanism'라는 용어가 여기서 유래했다. 리비우스에 따르면 로마인들은 켄투리아회를 통해 두 명의 집정관(공동리더)을 선출하고 그들에게 시민과 군대를 소집하고 지휘하는 권한인 임페리움imperium(명령권)을 부여했다.


83 살라미스 해전의 승리는 아테네가 그리스의 맹주로 부상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스동맹은 페르시아에 복수할 기회를 바라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방어적 성격의 동맹이었고, 에게 해를 장악한 아테네의 트라이렘 함대가 핵심 전력이었다. 살라미스 해전이 있던 기원전 480년부터 로마사절단이 아테네를 방문한 기원전 454년 사이에 아테네의 역할은 완전히 변모했다. 로마사절단이 도착했을 때 아테네는 에게해 중앙 델로스섬에 있던 동맹의 금고를 아테네로 옮겨왔다. 이 사건은 아테네가 에게해 제해권을 장악하고 제국주의화한 기점이다.


89 헤로도토스는 아테네가 압도적인 군사력을 가질 수 있었던 이유가 모든 이들이 자신과 자신의 삶의 방식을 지키기 위해 싸웠던 민주주의체제 덕분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반해 폴리비오스는 혼합정의 도입을 로마의 성공 이유로 꼽았는데, 혼합정이 서로 다른 기술과 전문성(그리고 경제력)을 가진 각 사회 집단의 잠재력을 최대한 끌어내고 그것이 계급 구조 안에서 효율적으로 작동하도록 했을 뿐만 아니라, 결정적으로 어느 한 계급이 국가를 독점하거나 다른 계급을 배제할 수 없도록 했기 때문이다.


92 아테네에서 민주주의가, 로마에서는 공화국이 발달하던 시기의 중국을 살펴보는 일은 사회혁명, 민중 봉기, 대중에 의한 정치 변화 대신에 소수의 헌신적인 추종자를 거느린 한 개인이 군주에게 새로운 정치사상과 통치 방식, 그리고 인간 대 인간의 새로운 관계를 받아들이도록 차분하게 설득하려고 애썼던 역사적 순간을 관찰할 기회가 될 것이다.


93 로마나 아테네에서 실제로 구현된 정치체제는 처음 그들이 지향했던 목표가 현실화된 것이라기보다는 시간이 후면서 시대 상황을 반영한 타협의 결과물이다. 반면 중국에서 공자는 군주에게 정치적 법적 · 도덕적 지침 일체를 제공하려는 목적으로 자신만의 사상을 발전시켰다. 아마도 그는 중국 역사상 이런 일을 해낸 최초의 인물일 것이다. 정작 본인은 자신이 새로운 사상을 전파하는 혁신가가 아니라 과거 성인의 말씀을 전할 뿐이라고 하지만 말이다.


118 노자가 당시 사상계에서 공자의 유일한 경쟁자였던 것도 아니다. 공자와 시대가 겹치는 또 다른 인물로 묵자가 있다. 그는 공자가 중시했던 의례나 음악이 시간낭비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며 검약과 절제, 간소화를 강조했다. 성공을 무엇보다 중시 했던 병가도 자신의 사상을 소리 높여 주장했다. 또한 과거의 선례나 역사적 사례에 의지하기보다는 논쟁을 통해 답을 내야 한다고 주장했던 명가도 있다. 춘추시대와 이후 도래한 극심한 패권 투쟁의 시기인 전국시대라는 백가쟁명의 상황에서, 공자의 가르침은 이 시기에 등장한 여러 사상가와 학파 중 하나에 불과했다. 초기에 단지 몇몇 제자들에 의해 명맥을 이어가던 공자의 가르침은 훗날 새로운 해석가와 대변자를 만나면서 확장된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정의로운 통치자라는 개념을 논하던 기원전 4세기에, 중국에서는 공자를 사숙하고 후계자를 자처한 맹자가 등장했다.


124 기원전 첫 밀레니엄이 막을 내리기 전에 아테네, 로마, 중국은 모두 단독 통치자의 권력 장악을 목도한다. 아테네에서 민주주의가 출현한 지 두 세기가량 지난 후, 아테네를 포함한 그리스 전체는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2세, 알렉산드로스 대왕, 그리고 이후 헬레니즘 왕조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로마는 폴리비오스가 이상적 형태로 여겼던 혼합정체를 기반으로 하여 기원전 2세기 초에 지중해(와 그리스)를 장악했으나, 정치적 균형이 무너지면서 내전 끝에 다시 제정이 이어졌다. 중국에서는 계속해서 한 사람의 단독 통치가 이어졌으며, 로마 공화국이 지중해의 패권을 장악했던 것과 같은 시기에 진나라가 나머지 제후국을 정복하고 새 왕조와 새시대를 열었다.


2부. 전쟁과 변화하는 세계

132 한니발의 원정은 궁극적으로 지중해의 주인을 결정하게 될 일련의 사건을 촉발하게 된다. 한니발의 용맹은 의심할 여지가 없지만, 그럼에도 工가 활동했던 시대의 맥락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 그는 강대국 간의 세력 균형을 바꿔놓고, 글로벌 공동체 관계의 성격과 균형을 재정의한 소수 집단의 활동을 잘 보여주는 예이다. 기원전 3세기 말부터 기원전 2세기 중반까지는 지중해에서 중앙아시아를 거쳐 중국에 이르는 '고대 세계'에서 대부분 젊은이로 구성된 일단의 통치자들과 장군들이 국경을 다시 긋고, 새로운 영토를 개척하고, 생존을 보장하기 위해 행군하고 항해하고 전투를 벌이고, 계략을 꾸미고, 통치하고, 목숨을 잃던 파란만장한 역사의 한 시기였다.


143 기원전 229년 무렵의 고대 세계는 지중해에서 중국에 이르기까지 격동에 휩싸였다. 서방의 로마는 세력을 확장하는 과정에서 여러가지 난관과 저항에 부닥쳤고, 중앙부는 격렬한 경쟁과 왕위 쟁탈전으로 불안정했으며, 동방에서는 진나라가 파죽지세로 성장했다. 이 시기는 각 지역에서 대두한 젊은 통치자 및 사령관 집단의 의식구조와 그들이 주도한 군사적 · 정치적 지형이 점차 구체화된 중요한 기점이다.. 불과 10년만에 전 세계에서 권력의 세대 교체가 일어났다. 이십대 중반의 한니발은 카르타고군을 전장으로 이끌었다. 필리포스 5세는 열여섯 나이로 마케도니아를 장악했고, 갓 스물을 넘긴 안티오코스 3세는 거대한 셀레우코스제국을 통치했다. 이집트는 스물한 살의 프톨레마이오스 4세가 장악했다. 이제 젊은이들이 국가의 운명을 걸고 도박을 벌이는 새 시대가 열었다.


160 당시 인도 사회가 가진 복합적인 성격뿐만 아니라 아소카의 제국이 방대한 지역을 다스리면서 주변의 다양한 공동체들과 관계를 맺었음을 보여준다. 아소카는 자신의 업적을 제국 안팎의 가능한 한 많은 사람이 읽을 수 있도록 그리스어(이 지역에서 그리스어가 계속 사용되었다는 증거), 이란 · 아람어, 그리고 프라크리트어로 새겼다. 비문에는 지중해 동쪽을 지배하는 대부분의 왕조가 등장하는데, 이 또한 당시 지중해와 인도가 서로 연결되어 있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187 한니발과 로마가 대치하고 필리포스 5세가 술에 취해 허송세월하고 있을 무렵 동쪽으로 8,000킬로미터 떨어진 땅에서는 진시황제가 승리를 만끽하고 있었다. 전국시대 제후국 중 마지막 남은 제나라를 점령하고 천하통일을 이룬 그는 제국을 더욱 긴밀하게 통합한다는 목표를 가차없이 추진했다. 그는 로마는 아직 꿈꾸지 못하는 성공을 거두었다.


204 기원전 205년, 20년 전보다 더 성숙하고 현명해졌지만 전쟁에 지친 리더들이 고대 세계의 체스판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들이 처한 상황은 제 각각 달랐다. 사십대에 집어 든 한니발은 로마를 협상 테이블에 앉히려는 노력이 실패로 돌아갔음을 깨달았을 것이다. 서른 살의 로마 장군 스키피오는 스페인에서의 승리에 한껏 고무되어 한니발과의 정면승부를 고대하고 있었다. 삼십대의 필리포스 5세는 더 이상 자신이 로마의 목표물이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했다. 역시 삼십대인 안티오코스 대왕은 지중해에서 중앙아시아를 연결하는 통일 제국의 전성기를 만끽하고 있었다. 그는 분열된 지중해에서 벌어지는 전쟁과 정치에 발을 들일 준비를 마쳤다. 한편 그의 오랜 적수였던 이집트는 프톨레마이오스 4세 사후극심한 혼란에 빠졌다.


211 진나라의 옛 수도 함양은 그부터 몇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새로 지어진 도시에 자리를 내어주었다. 이 신도시가 바로 장안이다. 기원전 195년에 건설되어 다른 지역으로부터 강제 이주된 15만 인구로 시작한 장안은 머지않아 학자 관료층, 정치가, 군사고문으로 북적대고 나중에는 외국 상인들까지 모여드는 대도시로 번창한다.


212 한나라는 공주와 함께 엄청난 양의 비단을 흉노에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흉노는 이 고급품을 사용하기보다 서방에 판매하는 것을 더 선호했다. 중앙아시아 유목민의 탁월한 운송 기술과 박트리아 및 셀레우코스제국의 무역 네트워크를 따라 지중해까지 도달하여, 이후 수세기 동안 로마에서 가장 인기있는 수입품이 되었다.


246 당시 폴리비오스는 로마의 완벽하게 균형잡힌 혼합정체 —압박을 받을 때 최고의 능력을 발휘하는—가 로마를 현재의 위치에 올려놓은 원동력이라고 평가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고대 아테네의 민주주의는 "민중이 무작위적 충동에 따라 모든 결정을 내리는 선장이 없는 배"와 같았다. 그 결과 아테네는 민주주의와 국력이 모두 쇠퇴하고 그저 문화적·역사적 상징으로만 남았다. 폴리비오스의 견해에 따르면, 카르타고도 탐욕과 과도한 민중의 힘이 시민사회의 쇠락을 초래했다.


250 기원전 2세기 말에 여러 가지 요인 — 중앙아시아에서 벌어진 문화권 사이의 무력 충돌과 이후 중국의 확장, 생존을 위해 기동성과 연결성이 요구되었던 혹독한 물리적 환경, 그리고 장사와 무역에 타고난 수완을 보인 인간 공동체들의 노력―이 맞물려, 아시아 대륙을 가로지르는 공식 상업망이 출현했다. 수십 년 내에 이 네트워크는 중국(한나라 장안의 대규모 서시西市)에서 티레(지중해 동부 연안에 위치한 카르타고인 선조의 도시), 그리고 마침내 로마까지 연결된다. 훗날 이 동서 교역로는 주요 거래 상품의 이름을 따서 실크로드로 알려진다.


251 이 새로운 통로를 통해 물품뿐만 아니라 사상이 이동했다. 그중에서도 특히 신에 관한 다양한 개념이 고대 사회 전역에 거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3부. 연결된 세계의 종교

258 로마제국과 한나라의 교류가 시작된 이 래 약 450년 동안 고대 세계는 거대한 사건들 위대한 강대국과 개인들에 의해 변화를 거듭했다. 예수가 탄생할 무렵, 두 제국은 세계 인구의 절반을 지배할 정도로 규모가 커졌다.


258 통칭 실크로드라고 알려진 무역 네트워크를 보호하기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동양인들이 서쪽의 보배라고 여겼던 중앙아시아와 서아시아 평원의 빠른 말 중국 사료에서 한혈마라 찬사를 보내는 명마를 확보하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261로마가 '세계 제국'으로 변모하는 과정에서 '민주주의'라는 용어에도 기묘한 변화가 일어났다. 원래 아테네와 에게해 도시국가들의 급진적인 직접민주주의를 의미했던 용어가 기원후 1세기경에는 역사속으로 사라진 로마 공화국을 지칭하는 말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아일리우스 아리스티데스는 거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이렇게 찬양한다. "단한사람, 이 보편 제국의 가장 훌륭한 통치자이자 지도자 아래 온 세상에 민주주의가 확립되었다." 민주주의가 한 사람의 통치가 가져 온 결과로 찬미되는 놀라운 왜곡이 벌어졌다


239 인도에서는 힌두교와 불교의 상호작용이 가져온 종교적 변화를 등에 업고, 그리고 유목 민족의 이동과 실크로드 개척이 유발한 사회 변화를 바탕으로 굽타왕조가 정권을 장악했다. 굽타왕조는 점차 힌두교의 새로운 요소와 오래된 요소를 독특하게 조합하여 그들의 통치를 뒷받침하는 종교와 신의 세계, 사회를 창조함으로써 세속적 권위와 종교적 권위를 통합했다. 굽타왕조는 종교적 다양성과 문화 발전을 이루며 인도 역사의 황금기를 구가했다.


239 중국에서는 한나라의 수도 낙양으로 곧장 이어지는 실크로드를 통해 상품뿐만 아니라 여러 사상이 유입되었다. 그중 하나가 축의 시대에 인도에서 탄생한 불교다. 기원후 수세기에 걸쳐 중앙아시아와 인도를 통해 들어온 다양한 형태의 불교가 서서히 중국 사상에 뿌리를 내렸다.. 특히 한나라가 멸망하고 중국이 정치적 · 군사적으로 분열되었던 4세기는 불교가 중국에 도입 번역, 형성, 수용되는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280 콘스탄티누스 1세가 밀라노에서 자신의 동생을 나이 많은 리키니우스와 결혼시키면서 두 황제의 친선이 수립되었다. 이와 더불어 두 사람은 종교 문제에 신중하게 접근하기로 했다. 멜라노 칙령은 로마인들의 기독교 개종을 강요하거나 이교 신전의 파괴를 요구하지 않았다. 대신 모든 신앙에 대한 관용, 다양성의 존중, 그리고 이교로부터 압수한 재산을 돌려주겠다고 공식적으로 선포했다. 즉 "기독교도를 비롯한 모든 이들에게 각자 원하는 신을 믿을 자유"를 주었다. 주로 기독교인들이 혜택을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칙령 자체는 특정 종교를 우선시하지 않았다. 리키니우스와 콘스탄티누스 1세에게 사람들이 어떤 종교를 선택하는지는 더 이상 문제되지 않았던 듯하다. 그들은 제국 내부의 종교적 균형을 원했다.


286 콘스탄티누스 1세는 그들에게 기독교도들이 제국의 질서 특히 군대에 더 잘융화될수 있는 방법을 검토하라고 명령했다. 기독교와 이교의 긴밀한 융합을 재촉한 것이다.


293 불교의 중국 유입이 어느 한 시기에 한 곳으로부터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예를 들어, 2세기와 3세기 중국에는 18개의 외국인 포교단이 활동하고 있었다. 인도인 포교단이 넷, 인도-스키타이인 포교단 넷, 파르티아인 포교단 셋, 소그디아나인 포교단 넷, 그리고 호탄인 포교단이 셋이었다.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여러 종파가 중국에 동시에 전해졌다는 사실이다. 불교는 인도에서 진화한 힌두교나 중국의 유교와 마찬가지로 (그리고 로마 세계에서 기독교의 형태가 변화했듯이) 고정된 교리가 아니었다. 기원전 5~4세기 부처 입멸 후, 인도에서 중앙아시아 쿠샨제국에 이 르기까지 다양한지역에서 불교사상과 규율을 공식화하고 다듬기 위해 여러 차례의 집회(상기티Samgiti, 결집結集)가 열렸다


294 중앙아시아로 확산된 불교는 서쪽에서 전래된 그리스 로마 전통의 영향을 받았으며, 특히 예술 분야에서 그런 경향이 두드러졌다.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가장 오래된 부처의 이미지 중 하나가쿠샨제국의 카니슈카왕이 주조한 동전에 남아있는데, 곱슬머리에 그리스 로마 복장을하고 있다 .


340 중국 역사 연대기에서 한나라와 6세기 말에 시작되는 수 · 당 시대 사이에 위치한 4~6세기는정치적 · 군사적으로 극심한 혼란과 분열의 시기다. 이런 난세에 불교가 중국 사회에 뿌리내려 번창할 가능성이 얼마나 되었겠는가? 여태껏 불교는 중국 지식층과 왕실에서만 받아들인 종교에불과했으며, 수행자도 외국인이 대부분이었다. 게다가 외국으로부터 수업된 많은 경전은 그 내용이 혼란스럽고 때로 모순되기도 했다.


347 각 종교와 그 지지자들의 위치는 여전히 불안정했다. 로마제국에서 기독교는 콘스탄티누스 1세의 관심과 개입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소수종교였고, 나아가 황제 자신은 기도교가 아니었다. 아르메니아에서는 그레고리우스의 기적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기독교가 일반 백성들 사이에 어떻게 뿌리내릴지 불분명했으며, 왕과가톨리코스의 관계 또한 점차 갈등 속으로 빠져들었다. 중국 화북과 강남의 빠르게 변화하는 정치적 군사적 정세 속에서 불교의 운명은 여전히 불투명했다. 기독교와 불교가 로마와 아르메니아, 그리고 중국에서 각각 국교로 받아들여지기까지는 시간이 더 필요했다. 이 지역은 인도의 굽타제국과 달리 종교와 통치의 관계가 아직 완전한 합의에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350 콘스탄티누스 1세가 세상을 뜰 당시 로마제국은 공식적으로 기독교 국가가 아니었다. 실제로 7,500만 명이 넘는 로마인들 가운데 기독교인은 절반에 채 못 미쳤다. 이후 60년간 지중해 전역을 휩쓴 거대한 정치적 · 군사적 격동을 거치고 나서야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진정한 국교로 자리 잡는다. 이 과정에서 하나의 교파만 남고 나머지는 모두 이단으로 선포되었다. 단일한 정통 기독교회를 향한 최후의 여정 끝에 콘스탄티누스 1세가 구축한 종교와 통치자의 관계 ― 황제가 기독교와 제국의 위계 구조를 연결하는 — 는 좌절되었고, 기독교 주교들의 종교적 권위와 황제의 세속적 권위 사이의 새로운 투쟁이 전개되었다.


351 아르메니아에서는 종교적 권위와 세속적 권위의 갈등이 훨씬 더 피비린내 나는 양상을 띠었다. 중앙집권 체제를 강화하려는 통치자의 야심, 기독교를 기존의 종교적 ·사회적 지형에 이식하려는 분투, 그리고 로마제국과 사산제국에 좌우되는 정치적 · 군사적 · 종교적 결정이 이를 더욱 부채질했다. 한편 4세기 후반의 인도 굽타왕조에서는 통치자들이 구축해놓은 종교와 통치의 전략적 결합이 한층 강화되었다. 이와 함께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 안정이 도래했고, 이것은 — 로마와 아르메니아에서 특정 계열의 기독교만 수용하고 나머지는 죄다 불법화했던 것과는 달리 — 종교적 다양성 존경 관용의 만개로 이어졌다.


351 중국에서는 불교를 바라보는 부정적인 시각을 중화하기 위한 불교계의 노력이 꾸준히 지속되었다. 그 결과 황제가 불교로 개종하고 황실의 지속적인 지원을 약속하기에 이르렀다.


375 찬드라굽타 2세와 후계자들의 치세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점은 특정 종교와 지배 계급 사이에 강력한 유대 관계가 존재하는 동시에 제국의 다양한 신앙이 포용, 권장, 보호되 었다는 점이다. 찬드라굽타 2세의 즉위 5년째인 380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마투라 석주는 시바를 최고신으로 숭배하는 힌두교 종파가 번영했다는 증거다. 석주의 내용을 살펴보면 이 종파의 한 구루가 마투라에 전대 구루들의 상을 세웠다고 전한다. 석주는 이 종파에 의해 시바교 숭배의 상징으로 세워진 것으로, 이를 손상하는 자는 그 죄로 인해 영원히 고통 받을 것이라는 위협이 함께 적혀 있다.


377 굽타왕조가 불교에 보여준 관용은 기원전 6~5세기 축의 시대에 불교와 함께 출현한 자이나교에까지 확장되었다. 자이나교가 굽타제국의 종교와 사회의 위계적 성격에 불교보다 더욱 격렬하게 반대했음을 감안하면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자이나교는 금욕과 출가가 구원으로 가는 유일한 길이라 믿었다. 그들은 모든 과시적인 요소들을 극단적으로 멀리하면서 일부는 흰옷만을 고집하고 어떤 이들은 완전히 나체로 지냈다.


389 한 세기 전까지만 해도 세 종교는 소수·외국인의 종교이거나 박해의 대상이었다. 4세기 후반에 각 종교는 내부적 교리 토론과 논의를 거치고, 외부적으로 정치적 · 사회적 위계질서와 군사적 현실은 물론 해당 지역의 전통과 신앙을 반영하여 탈바꿈하는 과정을 거쳤다. 인간과 신의 관계가 공

동체와 개인의 관계와 함께 다시 정의되었다. 그 결과 로마와 아르메니아에서 기독교 단일 교리를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이단시되었다. 반면 인도와 중국에서는 다양한 토속 종교의 존재로 인해 그리고 불교가 매우 다양한 형태로 전파되었기 때문에 종교의 다양성이 존재할 수밖에 없었다.


390 4세기는 역사의 결정적 순간이라 불릴 만하다. 이 시기에 고대 세계 전역에서 종교적 정치적 구성이 역동적으로 변화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변화가 오늘날 세계가 작동하는 방식과 사상에 여전히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392 교류와 혼합에 더해 4세기가 주요 종교의 역사와 고대 세계사에 결정적으로 중요한 시기인 또 다른 이유는 새로 등장한 종교가 로마 세계, 아르메니아, 그리고 인도에서 통치자들이 영토를 통합하고 안정시키고 강화하는 난제를 풀어나갈 또 다른 길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400 인구가 크게 늘어나고 다양한 사회 집단이 (적어도세계의 많은 지역에서) 더 큰 정치적 발언권을 갖게 된 오늘날에도 우리가 사회 조직과 정치 조직을 선택할 수 있는 범주는 고대인들의 그것과 동일하다. 그들처럼 우리도 동의하는 자와 동의하지 않는 자 모두와 상호작용을 해야 한다. 그리고 이런 지속적인 참여와 상호작용 속에서, 고대사의 이 중요한 시기에 탄생한 사상들은 여전히 유효하다. 축의 시대의 유산 중에서 아마도 가장 역동적 인 사상은 공자가 남긴 유교 사상일 것이다.


401오늘날 중국에서 유교는 두 가지 관점에서 장려된다. 하나는 서구의 오염을 중화하는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는 종교로서, 다른 하나는 동양에 적합한 민주주의의 잠재적 형태로서다.


401 4세기 무렵 단 100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세계의 주요 종교 중 셋이 방대한 지역에 전파되었으며, 종교 발생지에서는 해당 종교의 이론적 형식적 구성이 근본적으로 변화했다. 종교와 통치자의 상호작용 ― 무자비한 통치자와 평화와 선의를 핵심 메시지로 하는 종교의 기묘한 조합 ― 은 대부분의 통치자가 세력권을 통제하고 유지하기 위한, 즉 자신의 성공을 정당화하고 경쟁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이루어졌다. 고대 세계가 점차 복잡한 상호작용의 네트워크로 변해갔던 것과 마찬가지로, 사회 관계, 공동체 관계, 그리고 인간과 신의 관계도 갈수록 근본적으로 맞물렸다. 그러나 많은 경우 통치자와 종교의 결합은 세속적 권력자의 지지를 확보한 종교가 여타 종교에 경직된 태도를 보이는 결과를 불러왔다. 이는 이후 수세기 동안 공동체 관계를 저해하는 요인이었으며, 종교의 지속적인 확장에 걸림돌로 작용했다.


407 과거 사례들로 보건대, 정치적 지평이 축소되면 역사관도 위축된다. 디오도로스와 그의 뒤를 이은 역사가들이 추구했던 보편 역사와 접근 방식은 로마가 성장하면서 퇴보하였다. 로마는 서구역사의 유일한 구심점이 되었으며, 이런 추세는 5세기에 로마가 분열과 쇠락을 겪을 때까지 계속 되었다. 5세기는 고대 사회 발달의 '첫번째 대분기점'이기도 하다. 중국은 붕괴하는 로마 세계와 뚜렷한 대조를 이루며 재통일을 이룩하고 정치적 · 경제적 패권국으로 가는 여정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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