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스타니 후미오: 아함경
- 책 밑줄긋기/책 2012-22
- 2019. 9. 16.
아함경 - 마스타니 후미오 지음, 이원섭 옮김/현암사 |
지은이의 말
1. 그 사람
2. 그 사상
3. 그 실천
지은이의 말
6 전과는 다른 시각으로 불교를 연구하여 경전 비판을 새롭게 한 결과 이 『아함경』(한역의 네 아함경도 포함)만이 근본 성전임을 주장할 수 있게 되었다. 오늘날 불교 연구를 하고자 할 때, 붓다의 가르침을 그 원래의 형태대로 전하는 경전으로서 학문적으로 음미할 만한 것은 이 경전들 외에는찾아볼 수 없다. 일찍이 붓다는 무엇을 설했던가, 그리고 어떻게 말했던가, 그것을 있던 그대로 알고자 한다면 이 경전으로 달려갈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이 경전을 돌보지 않았던 중국과 일본 불교인들은 원시 불교 즉 붓다의 사람됨과 그 사상의 진상을 전혀 몰랐던 것이라고 아니 할 수 없다. 또 오랫동안 불교의 영향 밑에 있었으면서도, 우리는 이제야 비로소 교조 붓다의 본래의 면목을 우러러볼 수 있게 되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8 이 경에 나타난 문답식 방법을 후세 사람들은 대기 설법이라고 불렀다. 사람들의 소질과 문제, 때로는 그 장소와 시기에 따라 거기에 적절하도록 자유로이 말씀해 간 까닭이다. 따라서 여기에 나타난 말씀이 다기 다양한 것은 당연한 결과라고 하겠다.
1. 그 사람
23 후세의 선승들이 말하는 것을 들으면 지관타좌하여 신심탈락 할 때, 꽃은 붉고 버들은 푸르러 삼라 만상은 그 진상을 있는 그대로 나타내 보인다고 한다. 이런 것이 불교를 일관하는 진리관이다. 이것은 고독한 사색가가 그 머리 속에서 얽어 낸 종류와는 다르다. 또는 흥분한 예언자가 갑자기 하늘로부터 계시를 받은 것과도 다르다. 오직 사람이 아무것에도 가리어지지 않은 눈을 뜨게 될 때 일체의 존재는 있는 그대로 그 진상을 우리의 눈앞에 드러내 보인다는 것이다. 이것이 제법실상이며, 이것이 불교의 진리관이거니와, 이런 진리의 관념은 결코 불교만의 것은 아니다.
58 생각건대 붓다가 "많은 사람들의 이익과 행복을 위하여."라고 말씀하기까지의 거리는 매우 멀었다. 그러나 일단 확신을 가지고 전도를 떠나라고 말했을 때, 거기에 나타난 전도의 정신은 일체의 제한을 넘어서 모든 생물에게까지 미치는 것이었다. 붓다는 "이방인의 길로 가지 말라."고는 하지 않았다. 또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라."고도 하지 않았다. 오직 모든 세상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고, 인천(人天)의 이익과 행복과 안락을 위해 가라고 타일렀다. 그것은 참으로 붓다다운 전도의 선언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이런 정신을 가장 구체적으로 나타내고 있는 것이, 이 대목의 마지막 말씀 즉 "‘둘이 한 길을 가지말라"는 구절이다.
60 잘 알려져 있는 바와 같이 불교는 오랜 세월에 걸쳐 아시아 대부분의 지역에 전파되었지만, 언제 어디서나 그 전도는 평화와 환영 속에 수행되었고, 불교의 이름 밑에 피를 흘린 역사는 거의 없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이 모두가 교조 붓다의 정신을 이어받은 것으로 여겨진다.
60 그리고 붓다의 '전도 선언'에서 둘째 부분을 이루고 있는 것은 설법의 이상적인 양상이 제시된 대목이다. 거기에는 먼저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끝도 좋으며"라고 설해져 있다. 이것을 후세의 불교인들은 간략히 '초중종(初中終)의 선(善)’이라고 불렀다. 또 "조리와 표현을 갖추어서 법을 설하라"’고 되어 있기에, 이를 '의문 구족(義文具足)'이라고 했다.
62 그런데 붓다가 생각한 이상적인 설법의 양상도 역시 마찬가지로 호모 사피엔스의 입장을 취하는 그것이었다. 그것은 노호하고 절규하는 예언자의 그것과는 전혀 다른 방식이었다. 또 신령에 충만하여 권위 있는 듯이 말하는 종교가의 그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격렬한 말을 내뱉어서 청중의 감정을 뒤흔들어 놓는 연설 태도와도 전혀 궤를 달리하고 있었다. 그리스 인의 웅변이 흥분 없는 고요한 어조로 끝나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면, 여기에서도 또한 처음과 중간과 결말을 일관하여 잘 설할 것이 요구되었고, 또 이론과 내용의 구비와 이성을 가지고 고요히 이성을 향해 호소할 것이 요청되었다. 거기에는 붓다의 사람됨과 그 사람의 성격이 단적으로 나타나 있는 듯이 생각된다.
2. 그 사상
76 "넘어진 것을 일으키심과 같이"라는 말은 전도한 것을 바로 잡는다는 뜻이다. '전도'란 어떤 판단을 할 때 순서가 엇바뀌고 진상을 오해하는 일이다. 작은 것을 크다고 하는 것도 그것이다. 추한 것을 아름답다고 여기는 것도 그것이다. 변화하는 것을 불변·영원한 듯이 아는 태도도 그것이다.
76 후세의 불교인들은 '사전도'라는 말을 썼는데 이는 상(常)·낙(樂)·정(淨)·아(我)의 전도를 말한다. 첫째 상(常)전도는 이 무상한 세상이나 사람을 영원한 듯이 생각하는 일이며, 둘째 낙(樂)전도는 이 괴로운 인생을 즐겁다고 여기는 일이다. 셋째 정(淨)전도는 이 부정한 것을 깨끗하다고 잘못 아는 일이며, 넷째 아(我)전도는 이 무아인 존재를 내 것이라고 착각하는 일이다. 이런 착각을 없애고 그릇된 생각을 바로잡는 것이 붓다의 가르침의 중요한 일면이었다. "넘어진 것을 일으키심과 같이"라는 말에는 이런 뜻이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안다.
84 첫번째의 "현실적으로 증험되는 것"이란 말은 흔히 '현견(現見)'이라고도 번역되듯이, '현실적으로 볼 수 있는 것’이라는 뜻을 포함하고 있다. 단적으로 말한다면 붓다의 가르침은 철두철미하게 이 현실에 입각하고 있다는 뜻이다. 붓다가 "이는 고이다."라고 말할 때, 그것은 어디까지나 우리의 현실임에 틀림없다. 보이지 않는 신을 믿어라, 또는 천국이 가까웠다고 하는 따위의 말과는 다르다. 또 "이는 고의 멸진이다."라고 말하고, "이는 고의 멸진에 이르는 길이다." 라고 할 때, 그것들은 모두 현실의 문제이니까 눈을 떠서 그 진상을 직시한다면 누구라도 그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현실적으로 볼 수 있고, 현실적으로 증험할 수 있는 것이겠다.
108 ‘"비구들아, 연기란 무엇인가 비구들아, 생(生)이 있는 것으로 말미암아 노사(老死)가 있느니라. 이 사실은 내가 세상에 나오든 안 나오든 법으로서 확정되어 있는 바이다. 그것은 상의성(相依性)이다. 나는 이를 깨닫고 이를 이해하였다. 이를 깨닫고 이를 이해하였기에 이를 가르치고, 선포하고, 설명하고, 나타내고, 분별하고, 명백히 하여, '너희는 마땅히 보라.'고 말하는 것이니라."
이 설명 속에는 세 가지 중요한 사항이 포함되어 있다. 그 하나는 연기의 성격에 대한 언급이다. 그것은 계시도 아니고 영감도 아니며 더구나 붓다가 발명한 도리일 수도 없는 노릇이어서, 붓다의 존재 여부와는 관계없이 예로부터 이제까지 엄연히 정해져 있는 법칙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이 원리가 본래 존재 사실 자체임을 말하는 것이겠다.
109 일체의 존재 는 모두가 그럴 만한 조건이 있어서 생겨났다는 것, 홀연히 또는 우연히 또는 조건 없이 존재하는 것은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다는 것, 이것이 연기 사상의 내용이다. 또 그것을 뒤집어서 말한다면 일체의 존재는 그것을 성립시킨 조건이 없어질 때 그 존재 또한 없어져 버린다는 것 따라서 독립·영원하여 불변하는 것이란 이 세상 어디에도 존재할 수 없다는 것 이것이 연기 사상이다.
112 붓다의 과제가 되었던 고(苦)니 생로병사니 하는 것은 어찌 될까? 일체의 존재가 조건에 의해 성립되었다면, 그런 존재의 성질에 불과한 고나 생로병사가 영원·불변한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바이다. 그러므로 붓다가 "고는 연생이다"라고 할 때, 그것온 고의 고유성·실재성의 부정이라고 보아야 되는 것이겠다. 생로병사도 어떤 조건에 의해 생겼다면 그 조건을 변경시킴으로써 그런 것을 극복할 수 있을 것임에 틀림없다.
147 결국 그 연소하는 욕망을 가라앉혀야 한다는 것 일터이다. 그리고 번뇌의 불꽃이 완전히 꺼질 때, 거기에 나타나는 시원하고 편안한 경지, 그것이 열반임에 틀림없다. 열반이라는 술어는 이런 인생의 현실에 대한 생각을 배경으로 하여, 이상의 경지를 뜻하는 말로서 생겨났던 것이리라. 열반이라는 말은 그 성립 과정에서 본다 해도 어디까지나 소극적인 표현이다. 깊은 생각 없이 이를 대하면 천국이니 극락이니 지복이니 하는 말에 비겨 매우 매력이 없는 말이라고 여기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또 후세의 불교인 중에는 이것을 소극 무위의 경지라고 잘못 생각한다든지, 회신 멸지의 경계로 판단한다든지 하여 마침내는 열반으로써 죽음을 뜻하게까지 한 사람도 있다. 그러나 이런 것이 가당치 않은 해석임은 말할 나위도 없는 일이다.
151 붓다가 열반을 말씀할 때, 결국은 이런 예속 없는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다. 그것은 결코 공적 무위의 소극적인 경지라고 할 수 없다. 거기서 불이 꺼지듯이 소멸되어야 하는 것은 갈애이다. 그리고 번뇌의 불꽃이며, 탐욕과 노여움과 어리석음일 뿐이다. 인간 자체가 여기에서 "소멸하여' 어딘가에 가서 태어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여전히 여기 이 땅에 있는 것이다. 그를 예속하던 갈애가 소멸됨으로써, 그는 완전한 자유와 안온 속에서 여전히 살아가는 것이다. 진리의 길, 평화의 길을. 그리고 그것이 열반이다.
167 제행무상이란 불교가 내세우는 존재론이다. 물론 그 밑받침이 된 것은 앞에서 설명한 연기의 법칙이다. 일체의 존재는 서로 어떤 의존관계에 있으며, 그것들은 여러 조건의 결부에 의해 생겨났고, 그 조건이 없어지는 데 따라 소멸한다는 것이 연기설인바, 그것을 단적으로 표현한 것이 이 제행무상이라고 할 수 있다.
167 다음으로 제법무아란 불교가 주장하는 인간론으로서 그것을 뒷받침하는 것은 제1 명제인 무상관이다. 일체가 무상하다면 영원 불변하는 자아 같은 것은 생각할 수 없는 까닭이다. 말하자면 제행무상의 존재론을 배경으로 하여 인간 또한 무상하다고 결론을 내린 것이 이 인간관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셋째 명제인 열반적정은 불교가 이상적인 경지라고 여기는 열반을 가리킨다. 이것을 목적론 또는 행복론이라고 하여도 되리라. 그런데 이 삼법인에는 붓다가 그처럼 역설했던 고(苦)에 대한 주장이 빠져있다. 즉 이 인생을 어떻게 관찰할 것인가 하는 소견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일체개고의 명제를 세워, 이것을 삼법인에 추가하면 사법인이 되는 것이다.
3. 그 실천
182 이런 불교 교단의 성격을 곰곰이 생각할 때, 붓다가 좋은 벗의 소중함을 역설한 까닭이 차차 이해되어 오는 것처럼 여겨진다. 거기에는 은총을 드리울 신도 없고, 믿고 의지할 중개자도 없거니와, 그 대신 손짓하여 부르는 붓다의 수범이 있고, 힘이 되어 주는 좋은 벗의 큰 격려가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붓다 조차 좋은 벗의 하나라는 것을 명확히 이해할 때, 불교의 진정한 면목을 파악한 것이 되는 줄 안다.
242 적당히 얼버무리는 말을 좋아하는 이에게는 오직 전락의 길이 있을 뿐이다. 또는 가공에 취하고 환상을 뒤쫓는다면, 구제의 문은 영원히 열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붓다는 신을 내세우지 않는다. 그러므로 붓다는 어떤 천국, 어떤 극락도 약속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붓다는 자기만 의지하면 어떤 죄라도 소멸한다는 그런 계약을 남발하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붓다는 영생을 제공함으로써 인간의 본능적 욕구를 만족시켜 주려고도 하지 않는다. 붓다는 그런 환상과 오류와 비합리적인 것을 일체 부정하고 타파하였다. 그러고 나서 비정하리만큼 냉철한 눈을 가지고 존재와 인간의 진상을 관찰하고 투시하였다. 그리고 그 위에 참다운 구제의 길을 세웠다. 그런 뜻에서 보면 붓다가 간 길은 어디까지나 이성의 길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인간 구제의 대업을 신에게 의탁하지도 않았고 기적에 맡기지도 않았다.
244 아힘사는 '불해'라고 번역된다. 또는 '불상생(不殺生)'이니 '불상해'라고도 번역되는 수가 있다. 그 원어 역시 "해한다" 또는 "죽인다"의 뜻인 himsa에 a라는 부정사가 붙은 말이다. 그러기에 아마도 이 덕목을 어딘지 소극적인 것인 양 생각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으리라고 믿는다. 이렇게 말하는 나 역시 전에 이 말로부터 그런 인상을 받은 적이 있다. 그러나 잘 생각해보면 그것은 큰 오류임을 누구나 이해하게 될 것이다. 도리어 모든 덕목 중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이 불해임을 알게 될 줄 믿는다.
245 어느 소원도 자기의 생존과는 바꾸지 못하는 것이 인간이다. 살고 싶다는 것이 인간의 기본적이요 가장 강렬한 소망이며, 죽고 싶지 않다는 것이 인간 최대의 비원임이 분명하다. 이런 자기의 비원을 남에게까지 확장시킨 것 그것이 아힘사의 정신이다. 거기에서 사랑과 자비도 생겨나는 것이며, 평화와 번영도 그 위에 구축되지 않으면 안된다. 오늘 핵무기의 위험으로부터 인류를 지키고자 하는 움직임도 이 이성의 소리라고 할 수 있다.
256 우리가 신(神)을 설정하고 들어간다면, 신이란 모든 미덕을 구비한 절대자로 생각되므로, 신에게는 어떠한 과오도 있을 수 없다는 논리가 성립한다. 그러나 붓다는 그런 신의 관념을 배척하였다. 있는 것은 인간이며, 이 인간으로서 올바르게 살아가는 것만이 문제가 된다 할 때, 인간으로서 이제는 과오가 절대로 없다
는 경지가 있을 수 있겠는가. 앞에서도 말한 바 있지만, 붓다는 명백히 그런 가능성을 부정하였다. 붓다도 끝없이 정진을 계속했는데, 하물며 다른 사람들이 어떤 경지에 도달했다고 하여 그것으로 문제가 끝난 것일 수는 절대로 없다. 더욱이 이제부터는 어떤 짓을 하든 관계없다는 그런 경지가 있을 턱이 없는 것이다. 이런 문제를 앞에 놓고 머리에 떠오르는 것은 후세 불교인들이 취했던 행동이다. 이른바 깨달았다는 사람 중에는 가끔 엉뚱한 짓을 하여 세상을 놀라게 한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리고 그런 행위까지도 그것이 보살행인 까닭이라느니, 대승이기 때문이라느니 하여 변호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서 다시 한 번 붓다의 생애를 돌이켜 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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