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쩌화: 중국정치사상사 1 ━ 선진


중국정치사상사 1 - 10점
류쩌화 지음, 장현근 옮김/글항아리


작은 서문

한국어판 서문

옮긴이 서문


제1장 상商대의 정치 관념: 신우왕권神佑王權

제2장 서주西周의 정치사상: 경천보민敬天保民과 천하왕유天下王有

제3장 춘추 시대의 정치사상: 신 중심에서 인간 중심으로의 전환

제4장 백가쟁명과 정치이성의 발전

제5장 유가 윤리 중심의 정치사상

제6장 법가의 법法, 세勢, 술術 중심의 정치사상

제7장 도가의 자연 본위 정치사상

제8장 묵자의 겸애론과 상동의 이원정치론

제9장 명가 정명실正名實의 정치사상

제10장 음양가의 천인배합을 특징으로 한 도식화된 정치사상

제11장 『관자管子』의 각 학파 정치사상의 융합

제12장 『여씨춘추呂氏春秋』의 모든 것을 수용한 정치사상

제13장 제자백가의 정치 문화 총론







작은 서문

━ 세마디로 말함


중국 고대 정치사상의 주제는 무엇인가? 대답은 천만 갈래일 수 있으나

다음 세 가지로 귀납될 수 있다.


군주전제주의

신민臣民의식

성인숭배관념


고대 정치 관념에서 근대 정치 관념으로의 전환은 주로 위 세 가지를 넘어섬을 의미한다. 즉,


군주 전제주의로부터 민주주의로의 전환

신민의식으로부터 공민公民의식으로의 전환

성인 숭배 관념으로부터 자유 관념으로의 전환


하느님이 나에게 시간 여유를 주신다면 제4권과 제5권에서 이 논의를 이어갈 생각이다.

이로써 서문을 삼는다.


한국어판 서문

09 필자가 말하는 왕권주의는 사회 형태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며 통상 이야기하는 권력 체계에 한정된 이야기도 아니다. 일종의 사회적 통제와 운행기제를 가리킨다. 대체로 세 가지 차원으로 나누어볼 수도 있겠다. 하나는 왕권을 중심으로 한 권력 체계이고, 둘째는 이러한 권력 체계를 골격으로 하여 형성된 사회 구조이며, 셋째는 이상의 상황에 어울리는 관념체계다.


10 왕권의 형성 과정에서 그에 상응하는 사회 구조 체계가 동시에 형성되었다. 왕권은 어떤 중간 단계를 거칠 필요도 없이 직접 무력에 입각하여 '천하'를 소유하고 지배할 수 있다. 이른바 "하늘 아래 모두가 왕의 땅 아닌 곳이 없으며, 땅 기슭 어디에도 왕의 신하 아닌 자가 없다" "천지 사방은 황제의 땅이다" '사람의 발자취가 닿은 곳이면 신하가 아닌 자가 없다" "천자는 사해를 집으로 삼는다" "땅이란 땅은 모두 왕의 소유다" 등등은 허상을 비유한 말이 아니라 역사적 사실의 반영이다. 그 시대에 정치적 통치권과 토지 및 인민 점유, 지배권은 한데 섞여 있었다. 토지와 사람의 육신 모두를 다층적으로 소유하는 왕은 곧 모든 소유권의 꼭대기에 위치했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관념과 명의상의 최고 소유는 때로 '허상'이기도 했으나 또한 언제든 '실상'으로 바뀔 수 있었다. '허'와 '실'이 결합하고 '허'로써 '실'을 통섭할 수 있는 그런 것이었다.  따라서 권력의 조합과 분배 과정은 동시에 사회적 재화와 사회적 지위의 조합, 분배과정이기도 했다.


11 관념상 왕권주의는 전체 사상 문화의 핵심이었다. 각종 사상을 볼 때, 전부는 아니지만 대부분의 사상이 기본적으로 왕권주의로 귀결된다. 춘추 전국 시대의 백가쟁명은 중국 역사상 사상 문화의 형태가 변화한 시기일 수 있다. 제자백가가 창립한 학설과 사유 방식은 그 후 2000여 년의 문을 열었다. 후인들에게 창조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근대 이전까지 기본적으로 그 시대의 창조적 사유 방식과 틀을 벗어나지는 못했다. 그 여운을 계승했을 뿐이라고 이야기할 수도 있다.  따라서 제자백가 사상에 총체적 평가를 내리는 것은 그 후 2000여 년의 사상을 파악하는 데 극히 중요한 참고가 된다.


제1장 상商대의 정치 관념: 신우왕권神佑王權

53 '여일인'이란 말은 천하의 광대함을 표시하는 동시에 사해 안에 '나 한 사람'이 가장 높다는 뜻을 포함하고 있다. 이 표현이 갖는 의미는 다음과 같다.

'여일인'은 하늘을 받들고, 조상을 숭계하며, 백성을 구제할 지위에 있다. 천제는 지고무상한 존재인데 왕만이 하늘의 명령을 받들 수 있으니 왕은 곧 하늘의 화신이다. 조종祖宗은 신명한 존재이니 왕만이 그 계승자가 될 수 있다. 모든 사람과 백성은 왕으로 말미암아 구제되며 지배되는 존재다.


제2장 서주西周의 정치사상: 경천보민敬天保民과 천하왕유天下王有

75 주공의 말을 보면 상제의 절대 권위를 추호도 의심하지 않는다. 은나라와 주나라의 상제를 일컫는 칭호에는 약간의 변화가 있었다.  갑골문을 보면 은나라 때의 '천天'과 '상재'는 하나의 개념이 아니었다. '천'에는 신비로운 의미가 없었다. 그런데 주나라는 '천'과 '상제'를 함께 지칭했다. 주나라 사람들의 관념에는 천 또는 제帝가 지상신이었다. 은나라 때와 마찬가지로 주공은 무슨 말을 하든 무슨 짓을 하든 모두 천의 의지와 명령이라고 일컬었다. 이러한 권위는 ‘"어진 사람에게 명하시며, 길하도록 또는 흉하도록 명하시며, 통치의 연속을 명하시리라"는 말에 집중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75 주공은 은나라 때 상제지상의 신념을 수정하여 계승했다. 그 핵심은 명이 항상 일정치 않은 바이니 오로지 덕있는 자만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76 천명이 너희 선조인 성탕에게 하나라를 뒤바꾸라는 큰 명을 내려 유능한 사람들을 임용하여 사방을 다스리라고 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역사상 '성탕 혁명'설의 시초다.


77 천명이 일정치 않다는 말은 하늘이 누가 정권을 장악하든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다. 그 핵심은 하늘이 상황에 따라 권력을 장악한

사람을 바꾼다는 데 있다. 즉 덕 德에 의거하여 ‘"백성의 주인民主을 구한다"는 것이다. '민주民主'라는 말은 「주서, 다방」에 맨 처음 보인다. 『시경』에도 여러 번 나타난다. 이때 '민주'는 '군주君主'이며 뭇 백성의 주인衆民之主이라는 말이다. 누가 민주할 수 있는지는 하늘에 의해 선정될 것이다. 


79 하늘의 의지는 어디에서 알 수 있는가? 점을 쳐 아는 것 외에 백성의 정서, 즉 민정民情을 살펴야 한다. 민정을 통해 천명을 보는 것이다.  「강고」 편은 "하늘이 두려워하고 진정으로 도와줌은 민정으로 대략 알 수 있다"고 말한다.


87 덕이란 종합적인 개념이다. 신앙, 도덕, 행정, 정책이 녹아 일체가 된 개념이다. 덕의 원칙에 의거하면 하늘과 조상에 대해 성실해야 하고, 자신에 대해서는 엄격해야 하며, 다른 사람과 선한 관계를 맺어야 한다. 이를 정치에 적용하면 가장 중요한 것은 보민保民과 신벌이 된다.


96 서주의 국가 체제는 분봉제와 종법제를 기초로 한 주권의 다층분산형 가부장적 전제였다. 주나라 천자天子는 천하가 다 같이 받드는 공주共主이고, 최고 권력의 상징이며, 유한한 권력의 실현자였다. 주 천자는 제후에게 땅을 나누어주었고, 제후는 경과 대부에게 분봉했다. 이는 그들 사이가 상하 예속관계였음을 나타낸다. 또한 제후는 주 천자에 대하여, 경, 대부는 제후에 대하여 모두 일정한 범위 내에서 독립적 정치 주권과 경제권을 갖고 있었다. 주 천자와 제후, 경대부는 자신의 정치 구역 내 정치권력 구조와 운행 방식에서 모두 전제의 유형에 속했으며 가부장적 체제의 특징을 띠고 있었다. 


98 주왕의 권력과 지위는 하늘로부터 받았다. 이는 당시로 볼 때 가장 신성하고 권위 있는 관념이었다. 동시에 가장 설득력이 있었다. 이 관념은 종교적 권위와 정치적 권위가 하나로 결합된 것이다. 지금까지의 사료로 판단할 때 이 시기에는 주 천자의 권력만이 하늘로부터 주어졌다. 제후 등의 권력은 하늘의 부여, 하늘의 보우 등과는 아무런 관계가 생길 수 없었다. 춘추시대에 이르러 비로소 천명이 아래로 옮겨진다는 관념이 생겨났고 이로써 제후들도 천명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106 천자와 희씨 제후는 군신 관계이면서 동시에 아버지, 형, 숙부, 백부, 아들, 조카의 관계이기도 했다. 주 천자는 여러 희씨의 큰 종가大宗이며 종가의 주인宗主이었다. 효孝야말로 혈연관계와 혈연 정치를 유지하는데 가장 중요한 윤리 관념이며 정치 관념이다. 주공은 효도하지 않고, 우애하지 않음을 최고의 악으로 취급했다. 이는 그가 효를 극단적으로 중시했음을 설명해준다.


제3장 춘추 시대의 정치사상: 신 중심에서 인간 중심으로의 전환

159 '천'과 '도'는 서주 시대에 각기 다른 두 관념이었다. 도는 도로로서 『서경』과 『시경』의 몇 부분에서는 규칙이란 의미로 쓰이기도 했다. '천도'는 『서경』 「강고』 편에 최초로 보인다. "하늘이 그 도道를 가르치시어 사방을 이끌라고 당부하셨다" 「필명」 편에도 ‘천도’라는 개념이 보이지만, 학자들은 「필명」 편을 후대인의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춘추 시대에 이르면 '천도'는 이미 매우 광범하게 유행하는 개념이 된다. 그러나 그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사람마다 견해가 일치하지 않는데, 대체로 다음 두 가지로 귀결한다.

하나는 신비주의적인 것이다. 천도, 천명 모두를 '상제' '천'의 의지의 표현으로 보는 것으로 서주 시대의 '천'과 크게 구분되지 않는다. 이런 관념은 여전히 상당히 유행하고 있었으며 수많은 사람이 그에 따랐다. 또 한 가지는 천도란 모호한 개념으로 그 가운데 다양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는 것이다. 


163 이상의 이야기들을 종합하면 춘추 시대에는 인간을 정치 세계의 주체로 삼게 되었고 인간 스스로에게 정치의 흥망성쇠가 잠재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이는 신이 정치를 결정한다는 관념을 사실상 한쪽으로 밀어내버렸다. 천을 자연으로 생각하게 된 것과 천도를 객관 필연적 범주로 사용하게 된 것도 천의 신비적 관념을 근본적으로 바꾸어버렸다. 이 두 가지 인식이 발전하면서 서로 합심 협력해 신권정치神權政治를 쇠락의 길로 힘껏 밀어냈다.


175 춘추 시대의 통치자들은 권력 분배 측면에서 군권의 절대 우세를 특히 강조했다. 이것이 군신 관계에 반영되어 군주의 신하에 대한 필연적인 절대 지배를 강조했으며 신하의 의무에 대해 몇 가지 규정을 마련하기도 했다. 그리고 신하들에게 군주에 대한 절대복종을 요구하기도 했다. 이를 한마디로 개괄하면 "‘군주의 명령은 둘일 수 없다"이다. 진晉 도공이 말했다. "사람들이 군주에게 요구하는 것은 명령을 발해달라는 것이다:" 이 말은 곧 군주의 직책은 명령 발포이고, 신료들의 의무는 무조건 복종이라는 것이다.


177 군신, 부자의 이중 관계 압제하에 신하는 고개를 숙이고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으며, 오로지 군부君父의 명령에 따를 뿐이다. 신하는 추호의 정적 주동성이 없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독자적으로 사고할 수도 없다. 진나라 비정은 말한다. "나는 마음이 없다. 따라서 군주를 섬기는 사람은 군주를 나의 마음으로 삼는다" 이런 신하여야 군주 전제 통치의 필요에 맞는다. 종범적 가부장 전제를 정치 관계 속에 끌어들인 것은 중국 고대 정치의 커다란 특징 가운데 하나다. 이렇게 '군신' '부자' 관계를 병론하는 것이 중국 고대 정치사상의 특색이 되었다.


189 예가 관습과 전통이 된 데에는 깊은 사회적 기초가 있다. 그러나 법은 대부분 그때 그때의 사건에 따라 만들어진 것으로 비교적 풍부한 시대성을 함유하고 있다. 그러므로 예는 역사의 진행 과정에서 타성을 더 현저히 드러내는 것이다.


190 형은 법보다 더 협애한 개념이다. 예는 전통 습속을 가지고 사람들을 이끌어가거나 금지하는 것이며, 법은 법조문의 규정으로 이끌어가거나 금지하는 것인 데 비해 형은 금지만을 주로 한다. 『설문해자』에는 "형이란 목을 자르는 것이다"라고 쓰여 있다. 형벌은 매우 일찍 생겨났다. 아마도 계급의 대립과 더불어 인간 세상에 왔을 것이다. 억압 수단으로서의 형벌은 어떤 통치자든 한 번도 포기한 적이 없다.


195 정치는 권력權炳 현상이기 때문에 반드시 쟁탈이 있게 된다. 각국의 통치자는 내부 투쟁을 통해 먼저 정권을 다투었고, 정권이 있고서야 다른 권력을 소유할 수 있었다. 예컨대 정권만 있으면 예법도 바꿀 수 있었다.


195 정치권력의 작용은 다양한 경제 조건에 따라 각기 다른 성질을 갖는다. 경제가 발달하지 못한 곳일수록 권력의 초경제적 성질이 분명히 드러나며, 권력이 경제를 지배하는 힘 또한 커진다. 권력이야말로 특정 인물이나 집단이 경제적 이익을 획득할 수 있는 가장 직접적이고 유효한 수단이다. 이 때문에 경제적 이익을 쟁취하려면 무엇보다 먼저 정권을 탈취해야 한다. 춘추 시대는 무력으로 권력과 이익을 쟁탈하던 때였다.


196 군주와 신하, 주인과 노복의 예속관계가 관념적으로 반영된 것이 충忠의 요구였으며, 가족, 종법宗法 관계에서는 효孝를 요구했다. 충, 효는 윤리 관념일 뿐만 아니라 종족 관계와 정치 체계가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정치사상이기도 하다.


196 춘추 시대에는 군신 간의 주종 관계가 여전히 매우 강한 편이었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급변하는 시기이기도 했다. 신하가 군주를 죽이는 등 하극상이 적잖이 노정되었고, 이는 관념적인 측면에도 반영되어 충에 대한 이해를 달리하게 되었다.


201 갑골, 금문, 『서경』 「주서」에는 모두 '仁'이라는 글자가 없다. 인 개념은 대체로 서주 시대 후기에 생겨났다. 『설문해자』에는 "‘인이란 친근함으로 두 사람의 관계에서 나왔다"고 쓰여 있다. 맹자는 "인이란 사람다움이다" "인이란 사람의 마음이다"라고 말한다. 이에 근거하여 혹자는 인을 인학, 즉 사람을 연구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식의 견해는 지나치게 포괄적이다. 『좌전』 『국어』 등으로 볼 때 인은 사람 사이의 관계를 설명하는 새로운 개념이었다. 여기서 특히 중요한 것은 정치 관계와 윤리관계다. 


221 안자의 화동설은 군주가 잘못이 없을 수 없다는 사실을 논증한다.  그러니 군주 한 사람이 말했다고 다 되는 것은 아니며, 신하는 순종을 최상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응당 군주의 부족을 보충해주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삼아야 한다. 이 관점은 의심할 바 없이 민주적 요소를 포함하 백양보의 화동설을 발전시킨 것이다.


제4장 백가쟁명과 정치이성의 발전

258 '백가'란 사상 유파가 많음을 가리킨다. 계급, 계층 정치적 입장 및 사유 방식의 차이에 따라 사상가들은 당연히 각기 다른 유파로 나뉘었고, 이 때문에 사람들은 유파를 '가家'라고 불렀다.


261 백가쟁명을 촉진한 또 하나의 원인은 각국의 정치 변혁과 상호 경쟁이었다. 정치가 이론적 지침을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당시 각 제후국은 모두 내정과 외교라는 양대 과제를 어떻게 잘 해결할 것인가라는 문제에 직면해 존망의 선택을 해야 하는 중대한 기로에 놓여 있었다.


272 권력과 인식의 이원화는 군주의 권위와 정치 운용을 골치 아프게 하거나 심지어 곤란하게 만들 수 있다. 만약 권력 장악자가 이 양자 관계를 잘만 처리한다면 실제 정치에서는 절대적으로 유익할 뿐 해로움은 없다. 뭔가 뜻을 가지고 개혁을 도모했던 군주는 대부분 언로를 활짝 열고 지

식인을 존중했던 사람들이다. 권력과 인식의 이원화는 인식을 깊고 넓은 쪽으로 발전시켜 가는데 필수 불가결한 것이다. 전국 시대에 권력과 인식의 이원화라는 조건과 분위기가 있었다는 것은 백가쟁명을 발전시키고 깊이 있게 만드는 데 아주 훌륭한 환경을 마련해주었다. 다시 말해 이는 백가쟁명의 전개를 위한 전제 조건이었다.


280 제자백가의 쟁명은 정치이성의 발전을 대대적으로 촉진했는데, 이는 주로 다음 몇 가지 방면에서 드러난다. 첫째, 제자백가의 대부분은 정치를 인식과 파악이 가능한 대상으로 간주하고 신비주의가 정치에 간여하는 것을 배제 또는 약화시켰다. 백가를 개창했던 노자와 공자는 근본적으로 신을 부정하지는 않았지만, 정치에 관해 논술할 때는 기본적으로 신을 한편에 따로 떼어놓았다. 공자의 "정치란 올바름이다"라는 말은 정치를 완전히 인간 행위 속의 일로 간주한 것이다.


281 인성 문제는 거의 모든 제자백가가 정치 문제를 토론하는 출발점이며 귀결점이었다. 정치의 주체는 사람이고 정치 활동은 사람의 활동이다. 정치의 기본 기능은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다루는 데 있다


제5장 유가 윤리 중심의 정치사상

288 공자가 유가 학파를 창립했다. 그런데 왜 유자儒者, 유사儒士, 유기儒家라 불렀는가? 이는 공자 이전에 유儒가 있었는가 없었는가 하는 문제와 관련이 있다. 이 문제에 관해 학계에서는 지금까지도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전통적인 견해는 공자 이전에 유가 이미 존재했다는 것인데, 근세에 어떤 학자는 공자 이전에 유라는 이름이 없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사료로 보면 전자의 학설이 비교적 사실적이다


289 유들은 교육에 종사하는 것 외에 상례 활동에도 종사했다. 주周나라 사람들은 특히 예를 따졌다. 사람들의 일거수일투족 모두에 일정한 예의 규정이 있었다. 그런데 일반 사람들은 때로 예의 형식과 진행 순서 등을 명확히 알 수가 없다. 그래서 전문가를 데려다 예식을 주재케 한다. 유는 바로 이 예식을 주재하는 일에 종사했던 사람들이다.


290 춘추 시대 중엽 이전에 유는 대체로 관리 집단의 구성원이었는데 나중에 차츰 사회로 훝어져 교육과 상례를 주업으로 삼았다. 공자는 이 유자들 가운데 가장 뛰어난 사람이었다. 공자는 유를 업으로 삼았지만 그저 답습만 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유라는 직업 위에서 특별한 연출을 했는데, 주로 다음 세 가지로 요약된다.


296 공자를 종사로 받들었다. 유가 내부는 수많은 분파로 갈렸고 서로 비난도 잦았다. 그러나 그들 모두 공자를 조사로 삼았으며 자기가 공자의 정통을 이어받은 사람이라고 선포했다. 이런 싸움을 한 번 거칠 때마다 공자의 지위는 내려갈 수가 없었고 오히려 한 걸음씩 올라갔다.


302 공구의 주된 공헌은 교육에 있다. 그는 유교무류 (신분고하를 가리지 않고 가르침을 베품) 정신에 입각하여 갖가지 신분이 다른 제자들을 받아들였다. 그중 대부분은 사士였다. 당시는 관료 제도가 막 생기는 중이었는데, 사는 바로 관료 후보자였다. 공자가 학교를 운영하는 목적은 정치 종사자를 배양하기 위함이었다. 자하의 "배워서 출중하면 벼슬한다"는 말은 그런 뜻이다. 공자 자신도 "배우면 녹이 그 가운데 있게 된다"고 이야기했다: '학學(배움)'과 ‘사(벼슬)'를 함께 취급하는 것은 당시의 시대정신이었다. 배워 출중하면 벼슬한다는 말은 배우지 않고도 벼슬을 한다거나 '친친(가까운 사람과의 친한 관계)'으로 벼슬하는 것보다 훨씬 더 진보적이다. 배워서 출중하면 벼슬길에 나가는 것이 당시와 그 이후의 조류가 되었다.


304 춘추 시대 이래 신으로부터 인간 지향으로 전환하려는 정치적 사유가 급속히 발전했다. 공자는 이런 흐름을 집대성한 사람이다. 그와 노자가 어깨를 나란히 한 것은 이런 역사적 전환의 징표다. 노자는 사람을 자연으로 환원시켰고, 공자는 사람을 사회로 환원시켰다. 정치는 사회적 인간을 향해야 한다는 것이 공자의 정치사상의 주제였다.


306 공자가 인치를 강조하는 또 하나의 근거는 사람이야말로 도의 체현자이고 담당자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공자가 말하는 '도'의 내용은 매우 방대하다. 대체로 정신, 정책, 도덕, 전통 및 그에 상응하는 여러 제도 모두를 포괄한다. '도'라는 것은 역사적 과정의 산물이며, 주나라 문, 무의 도가 지속적인 영향력을 갖듯이 역사적 삶의 한가운데 존재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일정한 인재를 통해서만이 생명력을 가질 수 있다. 사람과 도의 관계에서 사람이 도에 생명을 불어넣는 요인이 된다. 공자는 말한다. "사람이 도를 키울 수 있지, 도가 사람을 키우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도를 더욱 발전시킬 수 있는 것이지, 도가 사람의 재능을 확대시켜 줄 수는 없다는 말이다. 


309 현명한 인재를 선발해야 하고, 관료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배우라는 공자의 주장은 당시로서는 그런대로 진보적이었다. 이는 친인척을 관료로 삼고, 배우지 않아도 관료가 되는 풍토에 일격을 가한 것이다. 그런데 그가 말하는 현인은 예禮와 인仁을 준칙으로 삼고 있다. 따라서 그의 현인 정치론이 강조한 것은 도덕적 품격이지 재능과 지식이 아니다. 그 밖에 '현명한 인재 선발'과 '대중 가운데서 뽑음'이 가리키는 것은 윗자리에 있는 사람이 위로부터 아래를 선발한다는 것이지 민주적 선거 제도는 아니다.


310 예는 공자의 정치사상 중 사회 구조에 대한 체계다. 『좌전左傳』 『국어國語』에는 예에 관한 논의가 매우 많다.  요컨대 예란 등급을 중심으로 하는 사회 질서, 사회 구조이며 사람들의 행위 준칙에 관한 기본 규범이다. 바로 이 때문에 예는 나라를 다스리는 근본으로 여겨져 왔다. "예란 국가를 경영하고, 사직을 획정하며, 백성을 질서 지우고, 후대를 이롭게 하는 것이다."


313 기물器과 명분名을 타인에게 양도해서는 안 된다는 것과 정명론은 공자의 예학에 대한 중요한 발전이고 보완이었다. 기란 예기를 가리키며, 명이란 예 규정에 따른 명분을 가리킨다. 서주 역사로 볼 때 등급에 따라 사용하는 기물이 각기 달랐으며 서로 넘나들 수 없었다. 기물의 차별이야말로 등급 제도의 외재 규정이며 정형화의 징표다.


318 개괄적으로 말하면 예는 정치 실체이고 인은 그 정신이다. 예는 인의 실천 규범이다. 바꿔 말해 인으로써 예에 충실케도 하고, 예를 관철시키기도 한다. 공자는 말한다. "지식이 있어도 인仁을 지킬 수 없으면 민심을 얻었다 하더라도 반드시 다시 잃게 된다. 지식이 있고 인을 지킬 수 있어도 위엄있게 임하지 않으면 백성이 존경하지 않는다. 지식이 있고, 인올 지킬 수 있고, 위엄있게 임해도 행동이 예에 맞지 않는다면 아직 잘한다고 할 수 없다."


343 '중용' 개념은 공자에 의해 제기되었다. "중용을 덕으로 삼는 것은 지극한 일이로다! 백성 가운데 이룰 지닌 사람이 오랫동안 드물었다." 공자가 말하는 중용의 덕이란 품덕, 품질이 아니라 사물에 대한 태도를 가리킨다. 


343 일정한 표준에 따라 일을 하는 것, 대립하는 양측의 연결점을 찾아 대립하는 쌍방의 평형을 추구하는 것, 어떤 행위에 한계를 정하고 명확한 행동 목표를 정해주는 것, 그리하여 사물들로 하여금 옛 것을 지키고 질적 안정을 갖도록 하는 것을 가리킨다.


353 『중용』과 『대학』 모두 정치적으로 수신을 정치의 근본으로 삼고 있다. 마치 물에 던진 돌에서 둥그런 파문이 퍼져가듯 개인이 정치적 파문의 근원이자 중심이 된다. 그리하여 개인의 작용을 더할 나위 없이 높은 정도로 강조한다.


367 공자가 죽은 뒤 유가는 대단히 불경기였고 양주, 묵적 등의 학설이 물 좋은 시장을 만났다. 이를 맹자는 이렇게 표현했다. "공자의 도가 드러나지 못하고 사악한 학설이 백성을 그르치며 인의를 틀어막는다." 맹자는 자신을 공자학의 계승자로 보고 유학을 회복하는 데에 뜻을 세웠다. 그는 "인심을 바로잡고, 사악한 학설을 그치게 하며, 그릇된 행위를 못 하게 하고, 음란한 말을 막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여겼다.


370 맹자는 말한다. 사람의 본성이 선함은 물이 낮은 데로 임하는 것과 같다. 성선의 핵심은 "사람은 모두 차마 참지 못하는 마음이 있다"는 데 있다. 이 차마 참지 못하는 마음은 '측은지심'이라고도 부르며 다른 사람의 불행에 동정심을 갖는 것을 말한다. '불인인지심'을 둘러싸고 또 '수오지심', '사양지심', '시비지심'이 있다. (『맹자』 「공손추상」) 이룰 개괄하여 사심四心’이라 부른다.


379 맹자의 인간동류설에는 두 가지 함의가 있다. 하나는 인간이 자연세계에서 하나의 부류를 이루고 있어 다른 동물과 다르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사람이 동류인 까닭은 내재적 통일성을 갖추고 있다는 것 때문이며 그 통일성은 바로 성선이라는 것이다.


387 인정설은 이론적으로 성선설에서 나왔다. "차마 참지 못하는 마음이 있으니 차마 참지 못하는 정치가 있다. 차마 참지 못하는 마음으로 차마 참지 못하는 정치를 하면 천하를 다스리기를 마치 손바닥 놀리듯 할 것이다."


406 왕과 패 문제는 춘추 시대에 일찍이 제기되었다. 그 후 공자, 묵자도 왕, 패 개념을 사용한 적이 있다. 그러나 맹자 이전에 왕과 패는 뚜렷이 대립하는 개념이 아니었다. 정치적으로 구분이 있었을 뿐 왕은 통일을 이룬 군주를 패는 제후가 왕의 역할을 한 경우를 지칭했다. 왕과 패가 모두 긍정적 의미로 쓰였으므로 정치 노선에서 왕, 패가 다른 함의를 지니지는 않았다. 중국 역사상 왕과 패를 서로 다른 정치 노선 개념으로 만들어 사용한 최초의 사람은 맹자였다.


407 이른바 패도는 곧 힘으로 사람을 복종시킴이다. 패도 또한 인의를 이야기하지만, 그것은 인의를 간판이나 깃발로 삼아 사람을 속이기 위한 것이다. 맹자는 말한다. "힘으로 인을 가장하는 사람이 패다."


409 맹자의 인정설은 실제보다 이상이 더 많다. 그의 이상은 현실과 너무 동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좀 진부하게 보인다. 그가 짜낸 이상은 실현 가능성은 없었지만 현실과 대립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의 이상은 현실 생활을 고도로 추상화한 것이었다. 그가 그린 그림은 현실의 등급 관계, 군신관계, 착취와 피착취 관계 및 가족 관계를 긍정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들 관계를 위해 물감을 발라 채색함으로써 부드러움이 넘쳐나도록 했다.


410 순자의 주요 기본 사상은 유가에 속하지만, 동시에 제자백가의 사상을 비판적으로 흡수하기도 하여 보기에 따라 좀 잡박하다. 그러나 잡하되 어지럽지 않고 오히려 웅혼하고 충실하며 용량이 커 보인다. 


411 순자의 사상은 한漢대 유가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당, 송 이후 리학의 흥기로 순자는 액운을 맞았는데, 매우 많은 사람이 그를 잡박하여 순수하지 못하다고 비판했다. 어떤 사람은 그를 공자 유교의 문에서 축출하자고 주장했다. 또 어떤 사람은 그가 유가를 외치지만 사실은 법을 말한 것이므로 법가 계열에 집어넣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따지면 순자 사상 가운데 법가적 냄새가 상당히 농후하기도 하다. 중국 사상사에서 그는 유가와 법가를 결합시킨 최초의 사상가 가운데 하나라고 말할 수 있다. 정치사상에서 순자의 가장 주요한 특징은 예치 주장이다. 그의 예는 유가의 예와 법가의 법을 한 화로에 녹인 것이다. 순자의 예법일체론은 2000년간 봉건 통치자들에게 채택되었다.


462 성악론과 인성개조론은 순자 정치사상의 이론적 기초다. 외부로부터의 개조와 스스로의 수신이 개조를 행하는 두 가지 길인데 하나라도 없어서는 안 된다. 다만 외부로부터의 개조가 더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을 따름이다. 


490 이 책의 성질로 볼 때 『주례』는 국가 체계에 관한 설계도이며, 그 가운데 수많은 고대 자료가 흡수되어 있는 것이라고 봄이 적절하다.


490 전국 시대 후기에 군주 전제 제도가 신속히 발전하고 전국은 통일로 치달아갔다. 이에 어떤 국가 기구를 수립해야 군주 전제의 수요에 더욱 적절한가 하는 것이야말로 정치가와 사상가들이 관심을 기울인 가장 큰 문제였다. 묵자와 맹자가 일찍이 이 문제에 관하여 토의했으나 아직 좀 간략했고 체계적이지 못했다. 순자는 이 문제를 비교적 많이 논의했는데 그의 「왕제」 편에 집중적으로 반영되어 있다. 『관자』의 몇 편에 일부 이야기되고 있으나 전문적 논술은 아직 없었다. 따라서 『주례』가 국가 기구 체계에 관한 첫 번째 저작인 셈이다.


제6장 법가의 법法, 세勢, 술術 중심의 정치사상

546 법가 사이에 사승관계를 이야기한 사람은 극히 적지만 사상적으로 그들에게는 공통된 특징이 있는데, 주로 다음 몇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그들은 법의 작용을 특별히 강조한다. 법이야말로 나라를 다스리는 데 둘도 없는 방법이라고 주장한다. 간단히 말하면 법으로 나라를 다스리고, 일체를 법으로 처리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사람들의 모든 행위 규범을 입법의 형식으로 명확히 규정해야 하며, 법의 핵심 내용에 대해서 상세히 알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모든 사람이 법에 따라 일을 하도록 하려면 법은 반드시 대중에게 공개되어야 하며, 사람마다 모두 알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548 둘째, 경전(일하면서 싸우기)를 창도했다. 법가는 특히 실력을 중시한다. 실력이야말로 사회 모순을 해결하는 기본 수단이라고 생각한다.


548 오직 웅후한 힘만이 천하를 통일할 수 있다. 사회의 여러 요소 가운데 그들은 농사와 전쟁을 힘의 원천이라 여겼다. 이에 상응하여 그들은 모두 경전을 강화시키는 일련의 정책들을 가지고 있었다.


548 셋째, 군주 전제와 독재의 강화다. 법가는 군주 전제를 구가한 사람들로 일마다 어디서든 군주를 위해 계산했다. 그들은 선진 제자 가운데서 군주 전제주의 사상을 꼭대기까지 밀고 올라간 사람들이다.


549 넷째, 법가의 사회에 관한 기본 이론은 역사 진화설과 인성호리설이다. 법가 대다수의 인물은 사회 역사는 진화의 과정이라고 주장한다. 최초의 인류는 개화되지 못했고, 경제 또한 지극히 원시적으로 낙후되어 정장(정치지투자)이 없었고 사회에는 질서가 없었다. 


549 그들의 구호는 "옛 것을 흠모하지 않고, 지금에 미련을 두지 않으며, 시대와 더불어 변화하고 풍속과 더불어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570 국가 기구와 기능의 대부분은 군주의 종족 관계와 상호 분리되었으며, 국사와 군주의 사사로운 일은 뚜렷이 구분되었다. 춘추 시대 중, 후반기부터 일부 사상가는 군주개인과 사직, 국가를 차츰 구분하기 시작했다. 신도는 여기서 양자를 더욱 명확히 구분했다. 이 구분은 국가 관념의 발전에 중대한 돌파구였다는 점에서 이론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국가는 군주와 둘로 나누어 분석해야 할 뿐만 아니라 국가의 이익은 군주 개인의 사적 이익보다 높다고 주장했다.


581 군주와 신하 사이는 권력과 이해가 맞서 있다. 그럼에도 군주는 신하를 쓰지 않을 수 없다. 군주가 경시되고 신하가 중시되는 현상의 발생을 막기 위해 신도가 제기하는 신하 제어술은 군주를 위한 처방전인 셈이다. 이 처방전의 핵심 성분은 "법을 숭상하고 현인을 숭상하지 않음"이다.


582 법의 제도화는 정치에서 일반성을 지닌 규범으로 표현되며, 그것은 보편적인 물건을 반영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제도가 아닌 사람은 제아무리 성현이라 하더라도 역사 과정의 우연한 요소일 뿐이다. 정치의 운명을 우연의 요소 위에 둠은 틀림없이 위험한 짓이다.


585 신도는 충과 법을 대립적인 것으로 본다. 법의 규정에 따르면 신하는 규정된 직무 범위 안에서만 지혜와 힘을 다할 수 있을 뿐이다. "충성으로 직무를 넘을 수 없으며, 직무가 관직을 넘어서는 안 된다." 보통 이야기되는 충신이란 언제든 법의 범위를 넘어서, 제 지위에 있지도 않으면서 정치적인 것을 도모한다. 그렇다면 충신의 행위는 법을 파괴하는 것이다.


588 신도가 소리 높여 외친 것, 즉 국가 관념의 제창, 국가정치를 규범화할 것, 법제의 건립, 군주는 마땅히 법을 준수할 것, 국가의 이익이 군주 개인의 사적 이익보다 높다는 것 등이다.


590 신불해는 정치사상사에서 매우 중요한 지위를 차지한다. 후세 사람들은 보통 신불해와 상앙을 동급으로 취급한다. 세, 법, 술은 법가 정치사상의 세 축이다. 신도가 세에 치중했다면, 신불해는 술에 치중했으며, 상앙은 법에 치중했다. 이들이 전국 시대 중기 법가의 3대 거두다.


591 술은 법과 다르다. 법의 대상은 전체 인민이지만, 술의 대상은 관리와 신료이다. 법은 군주와 신하가 공히 지켜야 하지만, 술은 군주가 홀로 잡고 있다. 법은 공개해야 하지만, 술은 가슴속에 감춰두어야 한다. 법은 명확한 규정이지만, 술은 마음속의 계산으로 존재하여 뒤집으면 구름이요 엎으면 비가 된다.


597 술은 관료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각종 속임수와 이해 다툼을 이론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전국 시대 관료제의 확충에 따라 신속히 발전했다. 술은 이론상 인의도덕과는 상호 배척되며, 이해관계를 중심으로 문제를 생각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군주가 신료들을 제어하는 술이 있는가 하면 신하가 군주를 속이고 농간을 부리는 술도 있다.


597 신불해의 술은 전제 군주를 위한 착상이다. 정책의 하나가 아니므로 과도한 권모술수 놀음은 때로 자신의 반대 면으로 치달을 수 있으며, 오히려 아귀다툼으로의 발전을 조장하여 통치 집단을 흐트러뜨리게도 할 수 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한비자는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신불해는 법에 능숙하지 못하고, 법령을 통일시키지 못했는데, 이것은 간계가 많은 까닭이다."


600 상앙은 그들의 수구복고적인 황당한 논조를 진화적 역사관에 의거하여 논박하면서, "이전 세상의 가르침이 모두 같지 않았는데 옛날의 무슨 법을 본받는 단 말인가? 성왕들이 [옛 예법을] 서로 회복하지 않았는데 무슨 예를 따른단 말인가"라고 주장한다. 나라를 다스리려면 반드시 현실 상황에서 출발하여 대책을 마련해야지 고루한 전통으로 역사의 수레바퀴를 밀고 갈 수는 없다는 것이다.


605 『상군서』 저자들의 가장 중요한 공헌 가운데 하나는 이런 진부한 이론 형식을 철저히 포기하고 역사 진화 이론을 제기했다는 점이다. 그들은 중국 사상사에서 첫 번째로 시대 구분 방법을 이용해 역사 과정을 분석하고 오늘이 옛날보다 낫다는 결론을 얻어냈다.


628 법과 경전정책은 상부상조 관계다. 『상군서』는 법이 경전 정책의 실현을 보장하는 수단이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경전을 보장하기 위해 저자는 '이출일공(이익이 한 구멍에서만 나와야 함)'이라는 주장을 제기한다. 이출일공이란 입법의 방법으로, 이익을 얻는 한 길만을 남겨두고 다른 길은 모조리 막아버리는 것을 말한다. 그 이익의 길은 바로 경전이다


632 인민을 무지몽매하게 만든다. 「약민」 편은 백성의 어리석고 투박함이 민약과 군강의 기본 요소라고 주장한다. 「산지」 편은 지적한다. "성인의 다스림은 금지 사항을 많이 두어 재능 발휘를 그치게 하고, 힘에 맡겨둠으로써 속임수를 그치게 한다." 『관자』에도 승민에 관한 주장을 제기한 적이 있지만 충분히 전개시키지는 못했다. 『상군서』는 정부 명령, 경제, 문화, 사람들의 상호 관계 등 여러 방면에서 약민의 구체적 조치들을 제기하고 있다. 약민의 길이 가장 분명하게 표명하고 있는 바는 법치가 법으로 인민의 권리를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 모두를 법의 노예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법은 또한 군주의 수중에 단단히 장악되어 있다.


633 형벌 9, 상 1과 어울리는 것이 경죄중벌 이론이다. 저자의 논리는 가벼운 죄를 중벌로 다스리면 사람들이 감히 가벼운 죄마저 범하지 못하게 되므로 자연히 무거운 죄는 더더욱 짓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645 한비는 역사 진화의 원인에 대해 새롭게 탐구했다. 그는 인구 중가 속도가 생산 중가의 속도를 넘어섰기 때문에 사람들이 생활 공간을 다투어 사회 모순과 투쟁이 일어난다고 생각했다.


654 "현명한 군주의 신하 길들이기 또한 이와 같다. 신하로 하여금 군주를 이롭게 하지 못하면 녹을 받지 못하게 하며, 위에 복종함이 없으면 명예를 얻지 못하게 한다. 군주를 이롭게 하면 녹을 받고, 군주에게 복종하면 명예를 얻는데 어떻게 복종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상대방을 먹어 치우거나 절대적으로 상대방을 압도하는 것이야말로 한비가 모순을 대하는 기본 사상이다. 이 사상은 그의 전 정치 이론 가운데를 관통하며 그의 정치사상을 독특하게 특징짓는다.


654 사회의 모순관계에서 한쪽을 먹어 치우고 싶거나 한쪽을 절대적으로 압도해버리고 싶을 때 가장 유효하고 믿을 만한 수단은 바로 힘이다. 힘이야말로 건곤을 결정짓는 둘도 없는 법문이다. 「외저설좌상」 편은 말한다. "선왕이 기대한 바는 이익이었으며, 사용한 것은 힘이었다."


662 세, 법, 술 삼자 가운데 한비는 세를 더욱 중시했다. 제왕이 제왕일 수 있는 까닭은 먼저 세가 있기 때문이다. 


662 자연의 세란 기존의 객관적 조건에서의 권력 장악과 그 권력에 대한 운용을 가리킨다. 인위의 세란 가능한 조건에서 능동적으로 권력을 운용하는 것을 가리킨다. 군주에게 있어 자연의 세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기정사실이기 때문이다.


681 농업과 공상업과의 관계 문제에 법가들은 두 가지 상이한 주장을 펼친다. 혹자는 공상을 보호하자고 주장하는데 『관자』 중 법가 학파 가운데 이런 견해를 가진 자가 있다. 『상군서』는 공상업의 억제를 주장한다. 한비는 『상군서』의 사상을 계승하여 농업을 본本으로 공상업을 말末로 취급했다.


686 표면적으로 보면 전국 시대의 사상 영역은 제자가 병존하고 백가가 쟁명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각 학파의 정치사상 맥락을 조금만 자세히 살펴보면 사상가 모두가 상대방의 존재를 자기존재의 조건으로 삼아 응당해야 할 존중은 하지 않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사상가마다 거의 모두 자기 견해의 독존과 타 학설의 금절을 요구한다. 쟁명과 쟁패는 동전의 양면과 같다. 그래서 쟁명이 만들어낸 통합은 문화전제주의의 방향으로 빠져드는데, 법가는 이 방면으로 가장 빨리 달려간 학파다.


690 한비가 보기에 인의든 난폭함이든 모두 망국의 도다. 인과 폭은 심치의 두 극단으로 인자와 난폭한 자는 본질적으로 차이가 없다. "인과 폭은 모두 나라를 망치는 것이다." 현실적인 면에서 한비의 이 견해는 상당히 일리가 있다. 법을 버리고 심에 따름은 정치의 표준을 잃은 것인데, 표준이 없는 상황에서 인의와 난폭함을 대립된 것으로 보기보다는 한 문제의 두 측면으로 보는 것이 오히려 낫다.


690 한비가 유가, 묵가와 기타 제자들을 비판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유가, 묵가 등이 언변을 일삼을 뿐 검증이 없으며, 진부하여 현실적이지 못하다는 것이다. 유가와 묵가는 입만 열면 요, 순을 이야기하는데 「현학」 편에서는 이를 얼토당토 않는 거짓말이라고 비판한다.


제7장 도가의 자연 본위 정치사상

716 선진 시대에는 '도가道家’라는 명칭이 없었다. '도가'라는 명칭은 사마담의 『논육가요지」에서 시작하여 '도덕가'와 '도가'로 불리게 되었다. 사마천은 자기 부친의 스승 계보를 기술하면서 그의 아버지가 "황자에게 도론을 익혔다"고 말한다. 그래서 도가는 '도론'으로 불리기도 한다. 그 후 도가가 차츰 전통적 칭호로 자리 잡게 되었다.


716 그들도 깃발과 종사를 세우려는 경향이 있었다. 그들의 깃발과 종사는 바로 황제와 노자였다.


721 도가의 저작들을 보면 '도'란 다양한 층차의 개념으로 각기 다른 곳에서 각기 다른 함의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 이야기된다. 


724 『장자』라는 책으로 대표되는 장자와 그 후학들은 자연주의적 정치 주장을 극단으로 발전시켰다. 그들은 사람을 대자연의 일부로 생각했을 뿐만 아니라 사람에게 다른 자연물보다 높은 어떤 염두나  생각도 있어선 안 된다고 주장한다. 사람은 자신을 자연계의 소나 말처럼 취급해야 하며, 자신을 자연 속에 융화시켜야 한다. 이렇게 해야만 인성이 회복된다고 그들은 생각했다.


725 『관자』 가운데 도가 학파는 하늘과 사람 모두 자연의 과정이므로 하늘에 순응해야 하고 또 사람에 따라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책의 저자도 '무위' 정치를 주장한다.


726 『노자』와 『관자』 중의 도가 및 마왕퇴의 『노자 을본권 전고일서』는 한 부류로 볼 수 있다. 저자들은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하여 통치자를 위해 계책을 도모한다. 그렇지만 그들은 유가, 법가, 묵가 등의 학파와는 또 다르다. 만약 정치사상을 정치철학, 정치전략학, 정책 원리, 구체 정책 등 여러 측면 혹은 상이한 구성 분야로 나눈다면, 우리는 『노자』와 『관자』 중의 도가 및 고일서가 정치철학 문제를 비교적 많이 논술하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정치철학은 고도의 추상성을 갖고 있으며, 바로 이 때문에 광범한 적응성을 갖고 있기도 하다. 당시 통치자들이 어떤 성격을 지녔든지 그들 모두는 이런 정치철학으로부터 많든 적든 일정한 깨달음을 얻었을 것이다.


727 양주와 『장자』는 위의 상황과 다르다. 특히 『장자』는 일절 정치에 반대했을 뿐만 아니라 비협력주의를 선전했다. 그리고 당시의 모든 통치자에게 맹렬한 비판을 가했으며, 군주나 제후 왕은 모두 승냥이 무리라고 질타했다. 


732 '도'가 우주 자연관으로 드러날 때 이는 노자의 우주 본체에 대한 인식을 표현한 것이며, '도'가 사회 인생관으로 드러날 때 이는 노자의 사회 규율에 대한 총체적 견해를 우리에게 펼쳐놓은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우주 자연관을 구성하는 '도'의 사상적 내용을 분명히 알아야 사회 인생관을 구성하는 도의 기본 정신을 인식할 수 있다. 그리고 이로부터 도와 정치의 내재적 관계를 이해하게 된다.


767 어떻게 귀기하고 위아하는가? 양주는 두 방면에서 논의한다. 하나는 자신에게 손해를 입히지 말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털 한 올을 뽑으면 천하의 이익이 있어도 하지 않는다."이다.


771 양주 사상은 개인 본위론이라 말할 수 있다. 개인은 자연의 독립된 존재이며, 다른 사람과는 평등한 동시에 서로를 침범해서는 안 되는 성질을 갖고 있다. 이 사상은 당시로선 대단히 급진적인 사상 가운데 하나로 등급제와 신체의 예속관계에 항거한 강력한 사상적 무기라 할 수 있다.


776 우리는 『장자』라는 책이 장자와 전국 시대의 장자 후학들의 논문 모음집이라고 생각한다. 여러 사람의 손에서 나왔기 때문에 여러 편 간에 구체적인 견해가 모순, 저촉된 곳이 있다. 그러나 주체가 되는 사상이 서로 근접하므로 여기서는 함께 논술하고자 한다. 『장자』에서 정치적으로 주체가 되는 사상은 한마디로 인성자연설과 자연주의적 정치사상이다.


795 장자와 그 후학은 당시의 각종 사회관계가 사람의 본성을 속박하며, 전체 사회는 곧 큰 감옥이자 도살장이라고 생각했다. '선'한 것이든 '악'한 것이든 모두가 본성을 파괴하는 것이다. 사람들에게 아름답다고 칭송받는 물건일수록 『장자』가 보기에 나쁜 것이었다.


제8장 묵자의 겸애론과 상동의 이원정치론

884 묵자는 처음 유가에게서 배웠다. "유자들의 업을 배웠고, 공자의 술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나중에 유가의 반대편으로 치달아 유학에 맹렬한 비판을 가했다. 그는 스스로 체계를 갖춘 학파를 창립했다


921 묵자의 기본 주장은 "위아래의 조화"다. 농부에 대한 왕공대인 등의 압제가 너무 심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포악한 왕'이다. '아랫사람'들이 '윗사람'에게 반항해서는 안 되는데, 일단 일어나 반항했다면 통치자는 "음란 포학하고 혼란을 조장하는 도적"이 되니 죽여도 무방하다. 그래서 후기 묵가들은 "도적을 죽일 뿐 사람을 죽이지 않는다"는 황당한 논의를 전개했다. 묵자의 '조화론'은 통치자에게 적당히 양보하라는 내용을 담고 있으나 중요한 것은 역시 윗사람에 대한 '아랫사람'의 조화다. '위'가 주이고, '아래'는 종이다. "위에서는 정치를 하고, 아래에서는 [그것으로] 풍속을 삼는다." "위에서 정치를 바꾸면 백성은 교화 내용을 바꾼다." 그는 사회 개혁의 희망을 완전히 '위에서 정치를 바꾸는'데 기탁하고 있다.


제9장 명가 정명실正名實의 정치사상

930 전국 시대에는 변론의 풍토가 생겨났다. 제자백가는 학설을 세워 논박하고, 술사들은 종횡으로 갈리고 합하고 하면서 모두 도도한 웅변을 보여주었다. 그래서 순자는 이렇게 말했다. "군자면 반드시 변론한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잘하는 것을 말하기 좋아하는데, 군자가 특히 심하다." 명가는 바로 그때 전문적으로 변론을 일삼음으로써 이름을 떨쳤다. 순자는 변론하는 사람들을 성인 변론가, 군자 변론가, 소인 변론가로 나누었다. 그는 명가를 소인 변론가에 편입시켰다. 명가는 늦게 일어나 대체로 전국 중기 이후에 형성되었다.


932 명가의 정치 경향은 비교적 복잡하다. 한편으로 그들은 "정치에 힘쓰는" 사람들로 기본 정치 경향은 사마담, 반고가 말한 것처럼 왕권주의였으며, 다른 한편으로 그들의 이성은 왕왕 왕권주의의 울타리를 넘어 시대를 초월하는 사상의 불꽃으로 번쩍이기도 했는데 그 과학 정신은 왕권주의가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것이 명가가 빨리 망한 근본적인 원인 가운데 하나다.


제10장 음양가의 천인배합을 특징으로 한 도식화된 정치사상

1000 맨 처음 음양은 햇볕의 향배를 가리켰다. 해를 향하면 양이고, 해를 등지면 음이다. 이것을 나중에 사상가들이 빌려 쓰면서 두 가지의 대립하고 상호 성쇠하는 물질 역량과 그에 상응하는 현상을 표시하는 것이 되었다. 그리고 거기서 더 나아가 일체 사물이 모두 음과 양 두 측면으로 구성되었으며, 음양의 대립 투쟁으로 말미암아 사물의 운동 변화가 이루어진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오행이 가리키는 것은 물, 불, 나무, 쇠, 흙이다. 고대 사상가들은 이 다섯 가지 요소를 만물을 구성하는 원소로 여겼다.


1002 음양오행 이론이 사물의 연계를 연구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고, 사물의 연계에 관한 사상은 또 사람들이 가장 관심을 갖고 있으며 필요로 하는 사항이어서 당시 각양각색의 사상 유파들에 다각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각 학파 모두가 많든 적든 음양오행 관념을 빌려 사물의 관계를 설명했다. 음양오행 담론은 당시 사상과 학술계의 보편적인 분위기가 되었는데, 음양오행파는 바로 이와 같은 환경에서 형성되고 발전했다.


제11장 『관자管子』의 각 학파 정치사상의 융합

1018 『관자』가 한 권의 논문 모음집이라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바다. 다만 매 편의 저술 시기가 언제냐에 대한 학자 간의 견해차가 매우 크다. 가장 이른 일부 편은 춘추 시대 관중管仲의 저작이거나 관중의 어록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 가장 늦은 일부 편은 왕망王拜 시대 작품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각 편 저술 시기에 관해서는 아직도 더 깊이 연구해보아야 할 문제이므로 여기서는 구체적으로 논의하지 않겠다.


1019 직하학궁의 성과가 『관자』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지만 『관자』가 직하학궁의 중요한 수확 가운데 하나임은 분명하다.


1019 『관자』는 당시 각종 사상 및 사조 작품의 총 모음이다. 법가의 작품이 가장 많으며, 그 밖에 도가, 음양가. 유가, 명가, 병가의 것 그리고 잡가의 것도 있다. 극소수 몇 편의 저자가 규명된 것을(이것도 학계 견해가 다름) 제외하고 절대다수의 편이 오늘날까지 구체적인 저자를 찾아내지 못하고 있다.


1023 학술 종파적 관념으로 본다면 절충주의인데, 실제 정치에서 본다면 절충주의적인 것이 왕왕 더욱더 실용적인 가치를 지니곤 한다. 훌륭한 절충이야말로 정치적 지혜의 발전 징표 가운데 하나다.


제12장 『여씨춘추呂氏春秋』의 모든 것을 수용한 정치사상

1188 여불위는 제자백가 각 학파 인물을 모두 흡수했다. 『여씨춘추』로부터 우리는 그의 문하에 모인 유가, 도가, 묵가, 음양가, 법가, 종횡가, 병가, 농가, 명가 등 각 학파의 문도를 볼 수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어느 학파에 속하는 인물인지 구별하기 어려운 사람도 있다. 이는 참으로 위대한 쾌거이며 공전절후의 성대한 일이다. 그 의의는 여불위의 군사적 승리에 필적한다고 하겠다.


1190 잡존이란 말은 여불위가 어떤 학파의 의도도 없애지 않았으며, 일가 일파를 이용해 다른 학파들을 먹어치우거나 융합시킬 생각도 없었다는 이야기다. 그는 여러 학파의 학설을 모두 수용하는 방침을 채택했다.  여불위의 도량은 실로 위대한 것이었다.


제13장 제자백가의 정치 문화 총론

1239 하, 상, 서주 왕조는 기본적으로 신의 세계다. 춘추에서 시작하여 신의 지위는 차츰 하락하고 인간의 지위가 점차 상승한다. 노자와 공자는 인문 사상 발전 과정에서의 두 거두다. 이들은 중국 역사상 사유 방식이 전환하게 된 징표다. 두 사람은 종전의 산발적 인문 사상을 이론으로 상승시켰다. 노자는 사람을 자연으로 되돌렸으며, 공자는 사람을 사회로 되돌렸다. 이로써 중국 역사상 인문 사상의 기초가 다져졌다. 전국 시대 제자백가의 발전을 거쳐 인문 사상은 중국 전통문화의 주류가 되었으며 정치사상의 기초를 이루었다. 중국 전통적 인문 사상은 주로 다음 몇 가지 방면으로 요약된다. 첫째, 인간과 신의 관계에서 인간이 먼저이고 신은 나중이라고 주창한다.


1243 노자, 공자 이후 2000년간 지식인들이 토론한 주요 문제는 거의 줄곧 천인관계, 역사의 변동 심성, 치란, 도덕, 민생 등의 문제를 둘러싸고 전개된 것이었다. 여기서 인식 대상과 실천은 일치하고 있다. 장학성의 "옛사람들은 [현실의] 사건을 떠나서 이치를 말한 적이 없다."는 말은 바로 그것을 뜻한다. 현실 생활을 인식과 실천의 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에 인문 사상을 위한 광활한 길이 개척된 것이다.


1273 백가쟁명의 결과는 군주전제주의의 이론적 발전과 완성을 극대로 촉진했다. 실제적인 정치 발전과 사상의 이와 같은 추세가 서로 일치하면서 각 제후국은 군주 전제 제도를 부단히 강화시켰으며, 이 경향은 최종적으로 진왕조의 고도의 군주 전제주의로 모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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