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스타니 후미오: 불교개론
- 책 밑줄긋기/책 2012-22
- 2019. 7. 5.
불교개론 - 마스타니 후미오 지음, 이원섭 옮김/현암사 |
1. 불교의 본질
2. 사상의 체계
3. 실천의 요목
4. 불교의 역사
5. 경전과 종파
지은이의 말
5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나, 불교학은 오랜 기간에 걸쳐 역사의 개념이 결여된 학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 단적인 보기를 요구하는 이가 있다면, 나는 경전을 이해해 온 태도를 주시해 보라고 하고 싶다. 누구나 아는 일이지만 모든 경은 "이같이 나는 들었다."라는 말로 시작된다. 팔리 어 경전의 "Evam me sutam", 한역의 "여시아문"이 그것이다. 그것을 현대학자들은 한 문학 양식으로 보지만, 옛날의 불교인들은 글자 그대로 받아들임으로써 모든 경은 붓다가 직접 그렇게 설한 것이라고 믿었다. 따라서 그런 경전 해석에는 역사의 개념이 개입할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6 이런 태도가 바뀐 것은 이른바 '대승비불설'이 나온 다음의 일이다. "대승은 붓다가 설한 것이 아니다."라는 말은 좀 지나친 표현이어서 오해와 마찰이 생기기도 했지만, 귀착한 곳은 결국 경전은 각기 자체의 역사를 지니고 있으며, 결코 붓다가 한꺼번에 설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이리하여 불교학에도 역사의 개념이 도입되어, 지금은 많은 학자들이 각 경전에 대해 그 성립 과정을 해명하고자 비상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실정이다. 그 성과는 아직도 앞날을 기다려야 할 것이 많으나, 어쨌든 불교는 이제야 겨우 역사에 입각해서 재정리되고 논해지게 된 것이 사실이다. 그러기에 현대의 불교개론은 불교사의 정리를 위한 원리를 제공해야 한다는 의무를 피할 길이 없다고 생각된다.
1. 불교의 본질
22 그런 불교의 사고 방식은 긴 불교의 역사 속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겼으며 현재의 불교인 중에도 그것을 신봉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특히 일본에 널리 퍼져있는 정토문의 불교는 그 전형적인 것이어서, 오늘날 불교의 주류의 하나를 이루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 또는 '그렇기 때문에'라고 말하는 쪽이 더 적당할지도 모르지만 - 나는 이제 사상의 광장에 서서 세계의 온갖 종교인 및 사상가들과 '크나큰 대화'를 나누게 된다면, 역시 "불교는 상대주의의 입장을 취한다."는 이 명제를 무엇보다도 앞서 제시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이것이야말로 명확히 붓다가 취한 입장이었고, 이것이야말로 불교를 다른 종교와 구별케 하는 가장 기본적인 성격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22 대승 경전이 붓다를 절대화하는 과오를 범했다고 해서 거기에 담긴 많은 진리까지도 부정할 마음은 나에게 없다. 또 과거의 고승 대덕들이 도달한 종교적 경지에 대해서도 나는 겸허하게 고개를 숙일 아량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나 그런 경전이 붓다를 절대시함으로써 일종의 절대주의에 빠져들었던 것은 결코 붓다의 뜻을 따르는 것이 될 수 없다는 점만은 여기에서 분명히 할 필요를 느낀다. 그리고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다. 불교는 어디까지나 상대주의의 입장에 선다고.
29 연기란 결국 상대성의 원리인 것이다. 비유로 말하자면 두 묶음의 갈대 단은 서로 의지함으로써 존재한다는 것, 그것이 연기이다. 붓다가 보리수 밑에서 깨달은 내용은 바로 이런 이치이다. 그리하여 붓다는 이 원리 위에 불교라고 일컬어지는 사상과 실천 체계를 구축한다. 또 무상의 원리가 그 위에 세워지고 무아의 도리가 그것을 근거로 하여 주장된다. 그뿐 아니라 중도의 사상도 그것에 의해 이루어진 실천의 원리라고 할 수 있다.
30 절대자란 그 자신에 의해 존재하고 남에게 제약 받지 않는 존재를 이르는 말이다. 그런데 이런 절대자의 존재를 완전히 부정하고 상대주의의 원리를 제시한 곳에 그 시대에 획기적이었던 불교의 성격이 드러난다 하겠다.
35 그렇다고 해서 천상 세계가 있고 죽은 다음에 거기 가서 태어나기도 하건만, 그것을 원치 않는다는 뜻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적어도 그것은 붓다의 뜻이 아니다. 모든 것이 연기의 법칙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할 때 마음을 떠난 육체, 육체를 떠난 마음(영혼)이란 인정할 수 없는 까닭이다. 죽은 다음에 다시 태어난다는 따위의 생각은 발을 붙일 여지가 없다고 보아야 옳다. 세상에서는 흔히 윤회 사상을 불교 특유의 것인 양 오해하지만, 그것은 인도에 보편화된 하나의 상식이었을 뿐 결코 붓다의 생각은 아니다. 물론 후세의 불교가 그것을 받아들인 것까지는 부정할 수 없지만 말이다.
67 이 '선지식'이라는 말을 산스크리트에서는 '칼야나미타(kalyapamitta)', 팔리어로는 '칼야나미트라(kalyanamitra)'라고 한다. 나는 그것을 요즘 학자들의 관례를 따라 '좋은 벗'이라고 번역했거니와, 과거의 중국인들은 '선지식'이나 '선친우' 또는 '승우'라고 번역했다. 그 중에서 선지식이라는 말이 지금까지 생명을 유지하여 여러 가지 뜻으로 쓰이고 있는 것이다. 결국 선지식이란 요즘 말로 한다면 '좋은 벗'이라는 뜻이다. 오늘날은 한자를 제한해서 쓰고 있기 때문에 구별도 할 수 없게 되었지만, 지식(知識)이란 벗을 가리키는 말이어서 지식(智識)'과는 전혀 다른 말이다.
2. 사상의 체계
83 절대자란 다른 것들로부터 완전히 독립하여 그 자신만으로서 존재하며, 그리하여 조금도 남에 의해 제약 받지 않는 존재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것을 이제 붓다의 사유 형식과 표현을 빌려 나타낸다면 조건 없이 존재하는 것, 제약이 없이 존재하는 것이라 해야 되려니와 이 세상에 그런 식으로 존재하는 것은 하나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이 붓다의 견해이다. 그러므로 불교가 무신론을 취하고 상대주의의의 입장에 서게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었다고 볼 수 있다.
83 어쨌든 보리수 밑에서 깨달은 만유의 진상이란 이런 것이다. 일체의 존재는 어느 것이나 그럴만한 조건이 있어서 생긴 것, 즉 '말미암아 생긴 것'이다. 그렇다면 일체의 존재는 또한 원인과 결과의 관계로 생각할 수도 있는 것이겠다. 연기의 문제가 마침내 인과의 문제로서 논해지게 된 것은 이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이 불교 속에서 강조된 것은 좀더 세월이 지난 다음의 일이며, 초기 경전이 전하는 것에 의하면 붓다는 별로 인과를 강조한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때로 인이라는 말을 쓰기도 했으나, 그것은 대체로 연이라는 말과 병용하여 두 말을 같은 뜻으로 쓴다.
87 결국 모든 존재의 양상에 대해 객관적인 입장을 취한다면, 이 존재론은 상이성의 것, 연기성의 것이라고 표현될 터이다. 그러기에 완전히 사상가의 입장에 서서 발언할 때에는 주로 연기라는 말을 쓴다. 그와는 반대로 무상이라는 표현으로 이 존재론이 설명되는 경우에는 언제나 주체성의 문제가 많든 적든 개입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다시 말하자면 그것에서 이 존재론이 바로 각자의 인생관에 연결되고 실천과 관련이 맺어지는 것이며, 따라서 필연적으로 정서성이 따르기 마련이다.
100 무연이란 무조건이라는 뜻이다. 만일에 고가 무조건이요 절대적인 것이라면, 어떤 노력으로도 그것을 극복할 수는 없을 터이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무엇 하나라도 무조건으로 이루어진 것은 없다는 것. 그것이 붓다가 깨달은 존재론의 근본이다. 그렇다면 고도 역시 유연임이 명백하다. 조건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성립한 것이며, 조건이 제거된다면 소멸할 수밖에 없다. 결코 무조건·무제약적인 것은 아니다. 생각이 이에 미쳤을 때, 붓다는 개가를 올린 것이다. "고는 연생이다."라고. 얼른 보기에 "고는 연생이다."라는 구절은 참으로 무미건조한 말인 듯이도 생각되리라. 그러나 잘 생각해 보면 이 한 마디의 배경에는 출가 이래 7년에 걸친 피나는 정진·추구의 역사가 도사리고 있음을 알게 된다. "벗이여. 고는 연생이라고 세존께서 말씀하셨소."
105 훌륭한 인간 형성이 이루어 질 때, 사람은 더 없는 의지처를 얻을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런 뜻에서 불교란 본래부터 인간 형성의 길이라고 보아야 한다. 범부가 차차 자기의 인격을 형성한 끝에 '붓다'라고 불리는 이상적인 인간상을 실현하는 것, 그것이 불교의 전부이다. 적어도 붓다가 가르친 길이란 그런 것이다. 더욱이 이런 도정을 더듬는 모든 책임은 자기 스스로의 노력에 지운다. 이것을 붓다는 이렇게 설한 적이 있다. "그러므로 아난다여, 너희는 이에 자기를 섬으로 삼고 자기를 의지처로 하여 남을 의지처로 삼지 말며, 법을 섬으로 삼고 법을 의지처로하여 남을 의지처로 삼지 말고 주하거라."
110 붓다가 말한 무아의 주장은 그가 깨달은 존재론의 입장에 서서, 인간을 냉철하게 관찰한 결과로 얻어진 결론이라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그것은 인간을 대상으로 한 붓다의 사상적 입장을 밝힌 것이다. 만약 붓다의 인간론을 묻는 이가 있다면, 그때에야 말로 우리는 무아의 주장을 제시함으로써, 이것이 붓다의 인간 해석이라고 대답할 수 있는 것이겠다. 특히 그 당시, 바라문교의 사상적 계보 속에 우파니샤드라는 새로운 사상 조류가 생겨나서 아트만을 보편적 실재라 주장한 사실과 대조해 볼 때, 붓다가 말한 무아의 사상적 성격이 더욱 드러남을 느끼게 된다. 단 경전의 서술에서는 붓다가 우파니샤드의 사상가들과 그 어떤 직접적인 교섭을 한 증거는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는다.
3. 실천의 요목
165 나는 생각한다. 왜냐하면 연기의 법칙이야말로 중도의 이론적 기초로서 어느 것보다도 어울리는 까닭이다. 무릇 금욕주의란 하나의 고정적인 입장이며, 쾌락주의 또한 그런 것임이 확실하다. 그러나 중도의 입장은 그 중간에 있어서 고정적인 어느 한 점을 지키려는 태도는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 - 그도 역시 윤리학에서 '중'을 주장한다 - 의 말을 빌리자면 "중이란 수학적 중점이 아니다." 그것은 밸런스가 집힌 욕망의 처리 방식이다. 줄이 알맞게 죄여서 미묘한 제 소리를 낼 수 있는 거문고와도 같은 실천의 양상, 그것이 중도이다.
4. 불교의 역사
184 오늘날 우리는 이런 말로써 직접 붓다의 가르침을 받을 수는 없되, 그런 정신만은 우리의 것이어야 하리라. 우리는 끊임없이 초기 경전을 뒤적임으로써 붓다는 이것에 대해 무엇이라 하실까, 또는 이 문제에 대해 어떻게 보실까 하고 물어야 된다. 거기에 불교의 근본이 있고, 안목이 있고, 의지처가 있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그런 뜻에서 우리는 이른바 근본불교의 입장에 서는 사람들이다.
187 그들이 주장하는 내용은 명백히 붓다의 사상을 그대로 고수해 가려는 정통파에 대한 비판적 견해로 차있다. 먼저 자기 형성을 위해 전념할 것을 설한 붓다의 가르침에 대해, 대중의 구제가 선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이들이 그들이다. 또 붓다가 많이 쓴 분석적 방법을 고수하는 정통파에 대해. 그들은 직관적 방법이야말로 중요시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붓다 그 분까지는 비판하지 못하지만, 열반의 경지에 안주하는 성자의 이상을 비난하고, 보살이라고 불리는 새로운 불교의 이상상을 내세운다. 또 새로운 이상을 주장하기 위해서, 그들은 붓다나 그 제자들이 전혀 알지 못하는 새로운 경전들을 많이 만들어 낸다. 그것들이 이른바 대승경전이다. 정통파의 입장에서 이런 사실들을 바라본다면, 그들의 주장은 의심할 여지도 없이 이단으로 비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결코 불교 교단으로부터 추방되지 않는다. 그뿐만 아니라 불교의 새로운 생명이 거기에서부터 끝없이 흘러 나왔다고 하는 것이 많은 불교인들의 견해이다.
187 이 또한 불교 역사의 엄연한 사실이다. 이러한 역사의 전개는 그 뒤에도 끊임없이 불교사 속에서 반복된다. 이를테면 선종이라고 불리는 대표적인 중국 불교의 탄생도 역시 그러하다. 그들의 주장은 '교외별전'이라고 표현된다. 교란 결국 경전을 말한다. 중국의 역경승들은 장구한 시일에 걸쳐 경전 번역에 종사한다. 그리하여 그들의 눈앞에는 방대한 양의 한역 경전이 쌓이게 된다. 그런데 그들은 그것들을 가리키면서, 거기에는 진짜 불교는 전해 있지 않다고 선언한다. 진정한 붓다의 정신은 다른 곳에서 별도의 방법으로 전해졌으며, 이심전심 즉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해 내려왔다고 말한 것이다.
188 그리하여 이들은 장기간에 걸친 역경승들의 노고의 결정을 내던져 버리고, 지관타좌 즉 좌선에만 열중하는 길을 선택한다. 그들은 '염화미소'의 고사를 들어 그것이 붓다로부터의 전통적인 계승임을 주장한다. 그러나 그 근거라고 하는 「대범천왕문불결의경」은 위경이 틀림 없어서 대장경 속에는 들어 있지 않다. 하지만 '교외별전'임을 내세우는 그들에게는 그런 것쯤은 문제도 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의 의도는 결연한 전통 부정에 있던 바이니, 그리하여 새로운 중국적인 불교를 수립하기에 이른다.
199 돌이켜 생각해 보면, 이성의 빛은 그 즈음 겨우 비치기 시작했을 뿐이어서 무지와 몽매는 아직도 널리 인류 위에 덮여있다. 그런 시대에 능히 이 지혜의 길을 이해하고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을 것임에 틀림 없다. 연기의 법칙과 무상의 세계관과 무아 의 인간관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기란 그리 쉽지 않았을 것이다. 경전의 서술은 도처에서 그것이 쉽지 않았음을 말하고 있다. 이런 상태였으므로 붓다를 따르게 된 사람은 대개 지성이 뛰어난 양가의 아들이고, 고역에 종사하는 계급은 소외되는 결과가 된 것도 자연스러운 추세였다고 할 수 있다.
199 따라서 붓다의 가르침이 그런 역사적 제한을 걸머지고 있다는 것은 붓다에게 결코 부끄러운 일이 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의 역사적 임무를 다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이상은 만인에게 평등한 길이어야 하며 그것이 언제까지나 소수 엘리트의 것이어서 좋을 리가 없는 법이다.
219 선종이 홀로 좌선을 표방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그들이 '지관타좌'에 투철하기 때문이다. 지관타좌란 다만 앉아 있을 뿐이라는 뜻이다. 이 평범한 표현 속에 그들이 갈무리 하는 뜻은 매우 깊다. 거기에서는 좌선이 단순한 방법론에서 지양되어 완전히 하나의 독립된 종교로서의 지위를 확보하고 있다. 그런 뜻에서 선종의 좌선 같은 것은 일찍이 볼 수 없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방법론으로서의 선을 한 종파로까지 끌어올린 근거를 묻는다면, 그들은 다만 달마의 면벽 구년의 고사를 가리키면서 침묵해 버릴지도 모른다.
5. 경전과 종파
243 생각건대 붓다의 큰 활동은 죽음과 더불어 끝난 것은 아니다. 제자들은 결코 붓다의 재림을 꿈꾸지는 않는다. 천상 세계에서 활동을 계속하는 붓다를 생각한 적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붓다의 활동은 죽음 뒤에도 여전히 계속된다. 그것은 그가 설해놓은 교법과 계율이 엄연히 "내가 죽고 난 후의 너희의 스승"으로서 존재하기 때문임에 틀림없다.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붓다가 숨진 다음 제자들이 벌인 첫 사업이 그 교법과 계율의 편집이던 것도 그 때문임이 확실하다.
247 상좌부의 장로들이 엄격하게 전통을 고수하고자 하는 입장을 취한데 대해, 대중부의 비구들은 오히려 시대의 움직임에 순응하여 전통을 변경시키려는 입장을 취한다. 그런 입장의 차이는 사상의 영역에서나 실천의 영역에서나 여러 가지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그 역사적 시점에서의 그들의 의견 차이는 명백히 경 자체에 초점을 두고 있다. 그것을 앞에 인용한 『디파밤사』의 기록은 유감없이 말해 준다. 거기에는 대중부의 비구들이 새로운 집록을 만들었다느니, 편집의 일부에 변경을 가했다느니, 또는 문법이나 문체의 원칙을 버렸다느니 하는 기록이 있는데, 그것은 경의 견지와 변경을 둘러싸고 신구 사상의 충돌이 일어남으로써 마침내 분파를 낳기에까지 이른 역사적 사실을 반영하는 것이다.
250 기원 전후에 걸쳐 대승이라는 새로운 물결이 높아지자 상황은 크게 달라진다. 대승 불교의 출현에 대해서는 이미 말한 바 있거니와, 그 활동의 중심은 새로운 경전의 제작에 있던 것이 명백하다. 새로운 경들이 새로운 목표를 내걸고, 새로운 이상을 표방하고, 새로운 방법을 제시하고, 새로운 주장을 새로운 문학 형식에 담아서 꼬리를 물고 잇달아 생산된다. 그것들은 초기 불교인들이 전혀 알지 못한 사실이며, 제1 결집의 비구들과는 전혀 관련 없는 일이다. 대승 경전도 역시 모두가 "이같이 나는 듣자 왔다."라는 말로 시작된다. 그것이 전승되어 온 붓다의 말씀임을 표방하는 말이다. 그러나 그것이 뜻하는 바는 팔리 5부나 한역 4아함의 여러 경의 그것과는 거리가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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