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경: 유식무경 ━ 유식불교에서의 인식과 존재




들어가는 말


제1장 색의 실유성 비판

1. 유부의 극미실재론

2. 극미실유성에 대한 유식의 비판

3. 전오식의 소연경으로서의 개체


제2장 명의 실유성 비판

1. 유부의 명구문신실재론

2. 명구문신실유성에 대한 유식의 비판

3. 제6 의식의 소연경으로서의 관념


제3장 식의 심층 구조

1. 식전변의 사분설

2. 능변식의 심층분석

3. 식전변의 두 차원


제4장 식과 경의 관계

1. 연기적 관계

2. 식과 경의 순환성

3. 식의 실성


맺는말






들어가는 말

13 오식이 인식하는, 즉 연緣하는 감각 대상이 바로 색 · 성 · 향 · 미 · 촉의 오경五境이며, 이것이 곧 개체적인 물질적 존재로서의 색법色法 또는 색온이다. 그리고 감각과 구분되는 사유는 불교 용어로 표현하면 전오식前五識 다음의 제6 의식意識이 되고, 사유 대상으로서의 보편적 관념이란 바로 의식 대상인 법경法境 또는 18계 중의 법계法界에 해당한다. 법경은 색을 제외한 일체의 대상 존재로서, 색色과 구분하여 명名으로 표현될 수 있다.


13 우리는 흔히 감각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감각 대상이 감각과 독립적으로 그 자체로서 실재해야 하고, 사유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사유 대상이 사유와 독립적으로 그 자체로서 실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경우에만 그 감각이 착각이 아닌 바른 감각이 되고 그 사유가 그릇된 사유가 아닌 바른 사유가 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와 같다면 개체적인 물질 또는 보편적인 관념은 그것을 인식하는 주관의 마음을 떠나 그 자체로서 객관적 실유성을 가지는 것이 된다. 그 중에서 개체적 물질만이 객관적으로 실재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면 ‘유물론’이 되고, 보편적 관념만이 객관적으로 실재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면 ‘독단적 관념론’이 될 것이다. 그 둘을 모두 객관적 실재로 인정하는 경우라면 ‘이원론' 내지는 ‘다원적 실재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4 유부의 논사들은 다원적 실재론자이다. 그들은 인식 주체로서의 마음(心法)이나 ‘마음의 작용'(心所法)과 독립하여 개체적 물질(色法)이나 보편적 관념이 각각 그 자체로 실재한다고 보았다. 이에 반해 유식의 논사들은 일체 경境의 객관적 실유성을 부정한다. 심과 심소心所 이외에 물질이든 관념이든 그것이 인식 대상인 이상 인식 주관을 떠나 그 자체만으로 독립적으로 실재하는 것일 수는 없다는 것이다. 


15 엄밀히 말해 존재하는 것은 오직 식일 뿐이다. 식 너머에 식과 독립하여 그 자체로 실재하는 경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소위 외적 세계란 것도 실제로 식 너머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적 식 안에 나타나는 현상일 뿐이다.


21 전자와 같이 시작과 끝이 맞물린 완료된 원은 언제나 동일한 괘도를 달려야 하는 비역사적 순환만을 가능하게 하는 데 반해, 후자처럼 원의 끝(현행된 존재)과 시작(존재의 인식)이 서로 다른 이지러진 나선형 원에서는 언제나 새로운 지점에서 다시 시작해야 하는 변천하는 역사성이 가능해진다. 바로 그 끝과 시작 사이의 간격, 다시 말해 인식과 존재, 식과 경이 벌어져 있는 그 틈새 사이로 우리의 경험과 개념의 변천사, 우리 삶의 역사가 가능해지는 것이다.

  

22 가假의 현상 세계를 창출해 내는 아뢰야식의 전변 활동, 그 무한한 에너지의 심층 활동이 자각되지 않은 채 가려져서 의식되지 않는 상태를 유식에서는 무명無明이라고 한다. 그 무명으로 인해 욕망과 집착의 자기 의식(말나식)과 분별적 대상 의식(의식)이 발생하며, 그러한 표층적 의식 활동(業)이 종자를 낳고 그 종자가 다시 심층의 아뢰야식을 형성하며, 그 심층 아뢰야식의 종자가 다시 또 표층의 현상을 구성하는 순환이 계속되는 것이다.


25 대승 경전은 유식계 경전인데, 유식은 중관의 공 사상을 계승하여 아공 · 법공을 인정하면서도 공으로서의 마음이 만들어 내 는 가假의 현상 세계를 논의 대상으로 삼았다. 즉 일체가 공임에도 불구하고 경험적으로 대상 세계가 존재 한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으므로, 이러한 가의 현상 세계를 형성해 내는 마음의 활동성을 철학적 분석과 논의의 중심 과제로 삼은 것이다. 이 점에서 유식은 유부의 실재론과 중관의 공론을 비판적으로 종합한 것으로 평가된다.


제1장 색의 실유성 비판

32 불교 인식론에 따르면 현재적 인식이란의미에서 현량에 속한다. 현량의 감각 대상은 바로 시공간 상의 구체적 대상인 개체이다. 그리고 이러한 개체는 우리의 오감에 주어지는 구체적이고 물질적인 것이다. 사람이든 소돈 꽃이든 시공간을 점한 구체적 개체라는 점에서는 돌맹이와 다를 바 없으며, 그 점에서 그것은 돌맹이와 마찬가지로 물질이다. 이러한 물질을 불교에서는 색色이라고 한다.


33 궁극적으로 실재하는 것은 언제나 그 자체로서 실재하는 것, 없어질 수 없는 것, 한마디로 말해 더 이상 분석될 수 없는 것이어야 한다. 이와 같이 더 이상 분석될 수 없는 물질(색)의 궁극적 미립자를 불교에서는 극미極微라고 한다.


43 일체 존재에 대해 배중률은 지켜져야 할 원리이다. 그러므로 극미에 대해서도 극미는 방분을 가지거나 가지지 않거나 둘 중 하나라고 말할 수 있다. 방분이라는 말은 방향적인 부분, 즉 공간적인 부분을 말한다. 따라서 극미가 방분을 가진다는 말은 극미가 각각의 부분으로 분할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유부에 따르면 극미는 방분을 가지지 않으며, 경량부에 따르면 극미는 방분을 가진다. 그런데 유식은 그 두 경우를 다 검토해 보고는 두 경우가 모두 성립하지 않으므로 극미라는 것 자체는 있을 수 없다고 단정한다.


52 유식은 감각적 인식 상태인 현량에서는 그 대상이 인식 내적인 것인가 인식 외적인 것인가 하는 분별이 성립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런 의미에서 현량적 인식은 무분별적 인식이다. 현량의 대상은 분명히 존재하지만, 우리는 그 대상에 대해 그것이 우리의 식 외부에 실재한다고 말할 수 없다. 인식 내부와 인식 외부의 분별, 의식 내적 표상과 의식 외적 사물의 분별은 현량 차원에서 성립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는 결국 전오식의 대상으로서의 경은 그 대상을 반연하는 전오식을 떠나는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말해 준다.


60 근根이란 인식을 야기시키는 능력으로 설정된 일종의 가설이지, 객관적 물질 존재 즉 색법色法으로 실체화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능히 식을 일으키는 것으로서 시설된 것이지 그 존재가 객관적으로 확인될 수 있는 현량 대상인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제2장 명의 실유성 비판

65 만일 보편이 실재한다면 우리의 개념적인 분별적 인식은 단순한 허망분별이 아닌 참된 인식일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다. 그러나 만일 개념에 상응하는 보편이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면 개념적 분별은 객관적 기준을 결한 주관적이고 임의적인 분별이 되며, 그러한 보편적 개념으로 표현되는 인식은 모두 허망성을 벗어날 수 없다. 불교에서는 이 일반 명사를 명名이라고 하고, 개념들 간의 연관에서 성립하는 명제를 구句라고 한다.


69 명구문신은 바로 그러한 형식적 질서를 가장 일반적 방식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 중 명신名身이 개별적 현상 사물에 부여되는 '이름'에 상응하는 개념적 실재라고 한다면, 구신句身은 그러한 현상 사물들 간의 관계를 표현하는 ‘문장'에 상응하는 명제적 실재라고 할 수 있다. 유부는 이런 명신이나 구신이 그 이름이나 문장을 인식하는 우리의 식을 떠나 객관적으로 실재한다고 본 것이다.


70 유식唯識에서는 말은 객관적으로 실재하는 의미를 전달해 주는 매개적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말에 의해 비로소 의미가 생성된다는 의미생기론의 관점을 취한다. 한마디로 말해 객관적 실유로서의 보편 또는 보편적 의미체란 실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유식에 따르면 말소리와 그 말을 통해 생겨난 의미를 담고 있는 음운굴곡은 서로 구분되는 것이 아니다. 소리의 음운굴곡이 곧 뜻을 나타내는 것이되, 그 뜻은 소리를 떠나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말이 비로소 의미를 생성시키는 것이기에, 말을 떠난 독립적 의미체 또는 보편 실체로서의 명을 따로 상정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79 감각에 주어지는 사물의 속성은 감각의 순간에 개별적으로 포착되는 표상이다. 그처럼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표상을 그 각각의 자체 상이라는 의미에서 자상이라고 한다. 직접적 인식인 현량의 대상이 곧 자상이다. 반면 자상들을 비교 분석하고 추상화하여 개념으로 얻게 되는 표상은 더 이상 자상이 아니다.


79 속성 담지자로서의 실체, 의식 대상으로서의 법은 의식의 분별 구조에 따른 개념적 구성물일 뿐이다. 이 개념적 구성물은 추상적이므로 일반성을 지닌다. 이와 같은 추상적이고 일반적인 상을 공상共相이라고 한다.


83 존재론적으로 그렇게 서로 다른 것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일반적으로 어제의 장미와 오늘의 장미를 동일한 하나의 장미로 보고, 한 촛불이 다 타오르도록 그 불꽃을 동일한 하나의 불꽃이라 여긴다. 하지만 그것은 실제로 자기동일적 무엇인가가 변화하는 현상 배후에 실체로서 존재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다. 찰나생멸하는 현상의 배후에 상정되는 사물의 자기동일성이란 단지 우리의 언어 구조에 따른 개념적 동일성일 뿐이다. 유식 역시 이와같은 경량부적 통찰에 따라 의식에 의해 사유되고 집착되는 사물의 자기동일성은 의식 자체에 의해 분별되고 설정된 개념적 동일성일 뿐이라고 강조한다. 그러므로 개념적 분별은 실유의 보편이 상응하지 않는 허망분별일뿐이다. 개념에 상응하는 보편적 실재란 존재하지 않으므로 그 개념 또한 허망분별의 개념인 것이다. 즉 감각적 현량 안에서 구체적 자상으로 주어지는 개별적 존재를 넘어서서 일반화된 개념으로 표현되는 보편이란, 단지 우리들 식의 허망분별의 결과일 뿐이다.


90 가假는 실재하는 실實과 대립적으로 사용된 개념이 아니라, 단지 우리에 의해 잘못 집착된 실과 대립적으로사용된 개념일 뿐이다. 즉 가假 너머에 실實이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유식에 있어서는 개체이든 보편이든 색이든 명이든 모두 그것을 인식하는 식 너머에 그 자체로서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실유가 아니다. 실유적 존재가 아니기에 가라고 한다.


제3장 식의 심층 구조

92 인식이란 인식 주관이 인식 객관에 대해 무엇인가 알게 되는 활동 또는 그 활동 결과를 뜻한다. 이처럼 인식은 주관과 객관이 서로 관계를 맺음으로써 성립하게 되는데, 그러한 인식 작용을 '관계를 맺는다'는 의미에서 연緣이라 한다. 그리하여 인식하는 주관은 '능히 연하는 것'으로서 능연能緣이 되고, 인식되는 객관은 '연해지는 것'으로서 소연所緣이 된다. 유식은 인식 주관인 능연을 견분見分이라고 하고 인식 객관인 소연을 상분相分이라고 한다.


92 유식에서의 인식이란 능연의 식이 소연의 경을 연하는 활동으로서, 인식 주관인 견분이 인식 객관인 상분을 아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인식 활동을 헤아림이라는 의미에서 량量이라 하기도 하는데, 능히 헤아리는 능량能量은 인식 주관을, 능량에 의해 헤아려지는 소량所量은 인식 객관을 의미한다. 인식 활동이란 곧 능량과 소량 사이에서 성립하는 량이며, 그런 활동의 결과로서 발생하는 인식 자체는 헤아림의 결과라는 의미에서 양과라고 한다.


95 인식 주관과 인식 객관, 견분과 상분의 대립은 근원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본래 그 둘이 분리 대립되기 이전의 주객포괄의 초월적 근거로부터 이분화되어 나타난 결과로 이해된다. 따라서 인식이란 표면적으로 보면 견분이 상분을 연하는 것이지만, 그 내적 근거로부터 보면 그러한 견상이원화 이전의 통합적 근거인 식 자체가 견상으로 이원화되는 활동, 즉 식 자체의 주관과 객관으로의 자가이분화 활동이다. 유식에서의식의 개념 안에는 바로 이러한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96 이러한 견상 또는 주객을 초월해 있는 식 자체의 이원화 활동은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가? 견과 상, 주와 객이 분리되어 있는 지평을 초월해 있으면서, 또 그렇게 구분되는 두 부분으로 스스로 이원화하는 식자체의 활동은 과연 어떤 활동인가? 유식은 이와 같은 식 자체의 이원화 활동을 변變 또는 전변轉變이라고 칭한다.


97 우리가 객관적 · 독립적 실체라고 생각하는 식의 대상 즉 소연경은 실제로 식 자체의 전변 결과 즉 식소변이라는 것이 유식 식전변설의 요지이다. 그리고 결국 그와 같은 식소변으로서의 대상과 마주한 인식 주관인 능연식으로서의 견분 역시 식 자체가 아니라 식이 전변한 결과일 뿐이다. 이처럼 주객으로 관계하는 식이 소연경을 연하는 능연식이라면, 스스로 이원화하여 소연경 자체를 산출해 내는 식은 그와 구분되는 능변식이다.


99 자증自證이란 그 스스로 명증적이라는 뜻이다. 한 인식의 참을 다른 인식에 의거하여 증명하는 것을 타증이라고 한다면, 다른 증명을 필요로 하지 않고 그 자체로서 명중적인 것을 자증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식자체를 자증분이라고 하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엄밀히 말해 자증적인 것은 견분이 상분을 인식함으로써 이루어진 인식 결과, 즉 양과量果이다. 인식 객관은 소량所量이고 인식 주관은 능량能量이며 능량이 소량을 인식하여 얻은 결과가 곧 양과인데, 이 양과가 바로 자증분이다. 식 자체로부터 능량과 소량이 이원화되고 인식이 발생하여 양과가 얻어지므로 유식은 이 셋이 서로 분리된 별개의 실체가 아님을 강조한다.


103 자증분이 대상의 인식에서 견분(주관)과 상분(객관)을 매개하는 공동 근거라면, 증자증분은 반성의 순간에 자증분(현재)과 견분(과거)을 매개하는 공동 근거이다. 견분과 상분으로의 주객 이원화가 식체의 공간적 이분화 즉 공간화라면, 자증분과 견분 즉 기억 주체(현재 주관)와 기억 대상(과거 주관)으로의 이원화는 식체의 시간적 이분화 즉 시간화이다.


104 대상세계(상분)에 대한 인식의 확실성은 그 인식 주관(견분)을 확증하는 자증분에서 찾아지고, 그 인식 주관(견분)에 대한 인식의 확실성은 그것(견분)을 다시 인식하는 주관(자증분)을 확증하는 증자증분에서 찾아진다. 이처럼 자증분은 나와 세계, 견분과 상분으로 이분되는 식의 공간화 활동으로서의 주객을 포괄하는 공간적 지평을 함축하며, 증자증분은 현재의 나와 과거의 나, 인식하는 나{지증분)와 인식된 나(견분)로 이분되는 식의 시간화 활동으로서 과거와 현재를 포괄하는 시간적 지평을 함축한다. 그러므로 인식에 있어서의 공간적 · 시간적 지평은 자증분과 중자증분의 식체 자체의 변현으로 설명되므로 그 이상의 부분을 첨가할 필요가 없다.


105 제 1능변식인 이숙식은 제8 아뢰야식이고, 제2능변식인 사량식은 제7말나식이며, 제3능변식인 요별경식은 제6 의식과 전오식을 포함한 여섯 식(六識)이다.


110 말나식이 의식의 근인 의意의 식이라는 말은 곧 대상 의식의 소의근인 의意 자신에 대한 의식, 즉 자기 의식이라는 뜻이다. 제6 의식이 의意에 근거해서 법法인 대상을 인식하는 대상 인식이라면, 제7 말나식은 그처럼 대상을 인식하던 의意 자체의 자기 의식 또는 자기 인식이다.


110 여기서 말나식의 소의와 소연은 아뢰야식으로 규정되고 있으며, 그 행상은 사량思量이라고 설명되고 있다. 말나식의 고유한 인식 작용을 의식에서의 대상 요별과 구분하여 사량이라 부른 것이다. 그렇다면 사량이란 어떤 인식 작용을 말하는가? 사량의 사思는 마음의 인위적 조작을 의미한다.


112 이처럼 찰나생멸적 현상에 대해 자성을 가진 법을 실체로 상정하여 그에 따라 현상 세계를 요별해 내는 우리의 의식 활동 근저에는 바로 자기동일적 법이 존재한다는 생각이 자리잡고 있다. 이것을 유식은 법집이라고 한다. 의식의 자기 안과 밖, 자아와 외부 세계의 분별, 그리고 대상 세계를 실체와 속성의 관계로 구조짓는 분별 활동의 근저에는 이미 자기동일적 법이 실재한다는 헤아림, 즉 근원적 법집이 전제되어 있는 것이다. 이 근원적 법집이 말나식의 사량에 속한다.


112 제6 의식이 의식에 담겨지는 내용을 자신 밖의 세계로 대상화하는 식이라면, 그 의식의 소의근인 의章, 즉 말나식은 바로 대상화를 행하는 자신에 대한 식인 자기 의식이다. 자기 의식으로서의 이 말나식은 바로 자기 자신을 '의식을 가지는 자', 즉 '의식된 세계를 가지는 자'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의식의 내용이 바뀌고 사라져도 그 자신은 항상 동일하게 남아 있다고 생각하며, 자기 자신을 가리켜 이런저런 의식의 변화를 임의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주인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의식에 대해, 그리고 그 의식 안에서 인식된 세계에 대해 자기 자신을 주인으로, 주재적 존재로 생각하는 것이다.


113 말나식은 대상화를 수행하는 제6 의식(대상 의식)의 근저에서 작용하는 자기 의식으로서, 바로 그 안에 자기 자신을 보존하려는 무의식적인 본능과 충동이 자리잡고 있다. 말나식의 사량은 바로 이와 같이 세계를 객관적 실체로, 자아를 항상적 주재자로 헤아려 집착하는 번뇌적 작용을 뜻한다. 우리 마음의 표면에 등장하는 의식이란 바로 이러한 근본적 집착 위에 수행되는 제약된 분별 활동일 뿐이다.


114 의식이나 말나식의 심층에 존재하면서 그들 식이 남긴 흔적을 종자로서 간직하는 식을 유식에서는 제7 말나식 다음의 식이라 해서 제8식이라고 한다. 이 식은 종자들을 함장한 식이라는 의미에서 장식이라고 불리며, 이를 음역하여 '아뢰야식'이라고 한다. 아뢰야식은 잠재적인 종자들의 총체이다. 이는 의식이나 의지보다 더 깊이 감추어진 식으로서, 우리가 흔히 자기 자신과 동일시하는 마음이다. 제8 아뢰야식은 모든 식 작용의 근본 전제가 되므로 본식이라고도 한다.


119 불교는 우리의 업은 그 자체와는 구분되는 다른 형태의 흔적을 남긴다고 본다. 인간의 업이 남기는 흔적, 그것을 유식은 종자라고 말한다. 이 종자를 가리켜 업이 남긴 흔적, 남겨진 습관적 기운이란 의미에서 '습기'라고도 한다. 이 종자 또는 습기는 의식이나 의지보다 더 깊은 곳에 남겨진다. 이처럼 업이 남긴 종자가 함장되어 있는 곳, 또는 그 종자 자체의 흐름을 아뢰야식이라고 하는 것이다. 업이 사라지지 않고 그 흔적인 종자로서 계속 남아있다는 말은 그것이 어느 순간에는 다시 그 자신의 경과를 낳는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종자란 아뢰야식 내에 머물러 있다가 때가 되면 그 내용에 따라 다시 자신의 결과를 낳는 세력이다.


127 신체와 기세간 그리고 종자가 아뢰야식의 상분이라는 것은 그것들이 아뢰야식의 전변 결과인 식소변이러는 것을 의미한다. 우선 종자가 아뢰야식의 상분이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아뢰야식의 상분으로서의 종자는 아뢰야식에 훈습되어 함장 유지되고 있는 종자와 그대로 동일시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후자는 종자생종자의 과정 속에 있는 잠재태의 종자인 데 반해, 상분으로서의 종자란 그런 잠재적 종자가 인연이 갖추어져 현실화된 종자생현행 결과로서의 현실태이기 때문이다. 잠재적 종자가 현행화하여 견상으로 이원화됨으로써 비로소 상분으로서의 종자가 성립하는 것이다. 물론 이는 신체나 기세간의 색법으로가 아니라 관념적 또는 정신적 형태로 현행화한 종자를 뜻한다. 의식이 포착하는 관념의 세계가 이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127 유식은 감각 능력을 갖춘 우리의 신체를 아뢰야식의 전변 결과로 간주한다. 이는 곧 '인간의 신체란 인간 마음의 변형'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129 신체와 그 신체가 의지해 사는 세간이 아뢰야식의 전변이라는 말은 그것들이 바로 아뢰야식에 함장되어 있던 잠재적 종자가 현상으로 현실화되는 종자의 현행 결과라는 말이다. 종자는 이전의 업이 남긴 흔적, 즉 업력이다. 그 업이 개인적 업이 남긴 종자인 불공종자일 때 개인적 신체가 형성되고, 개인을 넘어서는 공동의 업이 남긴 종자인 공종자일 때 공동의 기세간이 형성된다는 것이다.


130 신체와 기세간이 아뢰야식 내의 종자의 변현이리는 것은 인간과 우주 존재의 시원에 대한 불교적 존재론 또는 우주론을 말해 주는 것이다. 


130 불교는 오히려 물질을 유정의 업으로부터 설명한다. 이 때 유정이라 함은 인간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과 인식 작용을 가진 존재, 즉 동물적 생명체 일체를 의미한다. 불교는 유정의 업으로부터 그 결과로서의 유정의 신체와 그 신체가 의지하여 살게 될 기세간이 형성된다고 보는 것이다.


138 우리는 그렇게 현상 세계를 생성하는 우리 마음의 심층의 활동을 의식하지 못한다. 우리가 의식할 수 있는 것은 이미 형성이 완료되어 나타난 현상 세계, 즉 이미 현행화된 아뢰야식의 식소변으로서의 현상 세계이지 현상을 형성하는 마음의 활동 자체가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현상 세계를 우리의 외부로부터 우리에게 주어지는 소여라고 생각할 뿐 우리 자신의 마음이 창출해 낸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139 의식과 말나식이 아뢰야식의 활동을 알지 못하기에, 그 무지로 인해 아뢰야식의 전변 결과인 견분과 상분을 마치 식 바깥의 객관적 실재인 듯이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아뢰야식의 견분을 객관적 실체인 자아로 아뢰야식의 상분을 또 다른 객관적 실체인 세계로 집착하는데, 이것이 곧 아집과 벌집이다.


146 이렇게 보면 아뢰야식의 전변은 의식이나 말나식의 전변과는 본질적으로 구분되는 것이다. 아뢰야식의 전변은 우리의 현상 세계를 형성해 내는 존재론적 전변으로서의 변현이며, 의식과 말나식의 전변은 그런 현상 세계를 인식하는 인식론적 전변으로서의 분별이다.


제4장 식과 경의 관계

156 아뢰야식 내의 잠재적 종자가 구체적인 현상 세계의 모습으로 바뀌는 것을 종자의 현행화라 하며, 이를 종자생현행이라 한다. 종자가 현행화한 결과가 바로 이 세계이다. 이는 세계를 아뢰야식의 외화, 종자의 자기실현으로 보는 것이다. 종자란 현상 세계를 창출하는 변화 차별의 공동이며, 현상 세계란 바로 그 공능의 자기실현이다. 종자가 현행화하여 구체적인 현상 세계를 이룬다. 현상은 종자의 현현인 것이다. 이렇게 해서 유식은 아뢰야식이 형성하는 세계를 아뢰야식 내에 함장되어 있던 잠재적 세력으로서의 종자들이 현상화되어 나타난 세계, 즉 식이 전 변화한 결과, 한마디로 식소변이라고 밝힌다.


157 의식과 말나식의 활동에 의해 우리 마음에 종자가 심어지는 과정을 유식에서는 종자의 훈습이라고 하는데, 이것이 곧 현행훈종자이다. 땅 밑 씨앗으로부터 자라난 나무가 다시 새로운 씨앗을 만들어 땅에 심는 것과 같다.


160 상분인 기세간과 견분인 마음의 작용, 이 둘은 아뢰야식 자체의 변현 결과이다. 그런데 이 식의 활동성을 알지 못하는 무명으로 인해 그들 식소변을 각각 별개의 실체인 것으로 집착하여 사량분별하는 현행식이 발생하게 되는데, 그것이 곧 의식과 말나식의 작용이다. 이를 아뢰야식의 변현과 구분하여 의식과 말나식의 분별이라고 한다. 앞서 논의하였듯이 현행훈종자로서 종자를 훈습하는 현행식은 현행 아뢰야식이 아니라 바로 현상을 집착 분별하는 현행 의식과 말나식인 것이다.


164 아뢰야식의 변현과 의식 · 말나식의 분별 사이에서 순환을 형성하는 결정적 요인은 바로 우리 식의 활동을 주도하는 종자이다. 의식 · 말나식의 분별 작용을 통해 아뢰야식 안에 심어졌다가 다시 현상 세계로 변현하게 되는 종자, 즉 명언종자인 것이다. 여기서 명언이 함의하는 바는 과연 무엇인가? 그것은 곧 세계가 어떤 모습으로 그려지고 또 그 세계가 어떤 방식으로 사량분별되는가를 결정하는 것은 바로 명언, 즉 개념 또는 언어라는 것이다.


169 이처럼 아뢰야식의 식소변으로서의 현상을 그 현상 근거로서의 식을 사상한 채 실체화하고 고정화하여 집착 · 분별하는 것을 '두루 계산하여 집착한다'는 의미에서 변계소집성이라고 한다. 


170 즉 인연에 따라 변현된 의타기의 현상 세계를 욕망과 집착에 따라 허망분별하지 않은 채 그 모습 그대로 인식하는 것이다. 이처럼 아집과 법집을 벗어 버린 의타기의 현실 자체를 유식은 원성실성이라고 한다.


172 아我와 법法이 의타기의 가유假有이고 실아실법의 실유實有가 아니라는 것을 앎으로써 변계소집을 벗어나면, 현실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서 그 여여如如한 본성을 드러내게 된다. 그 현상의 참된 모습을 원성실성이라고 하는 것이다. 아집과 법집에 기반한 의식과 말나식의 허망한 계탁분별을 벗어나면 현상은 심층 아뢰야식 내의 종자의 변현으로, 인연변의 의타기소생으로 원만성취된 모습을 보이게 된다. 한마디로 말해 의타기로부터 변계소집을 떠나면, 즉 아집 · 법집의 실체화를 떠나면 그것이 곧 원성실성이다.


179 아뢰야식의 변현 활동 자체를 자각함으로써 심층의 무명이 제거되고, 그리하여 식소변의 현상을 실체화하여 집착하는 변계소집이 극복된다. 아뢰야식의 변현 결과인 현상이 바로 아뢰야식의 변현 그 자체로서 올바르게 인식되므로 더 이상 의식이나 말나식의 변계소집에 의한 왜곡된 분별이 일어나지 않게 되는 것이다.


188 현상에 대한 일체의 앎은 무명으로 인한 집착이 배제된 차원에서 다시 긍정된다. 자각된 의타기는 곧 청정의타기이므로, 그 의타기에 따라 변현하는 현상 세계에 대한 인식은 변계소집을 벗은 무분별후득지가 된다. 깨달은 자는 다시 이 무분별후득지로써 의타기의 생사를 사는 중생의 고를 더불어 알게 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근본무분별로서의 지혜와 함께해야만 하는 보살의 자비를 뜻한다. 이와 같이 유식학파가 유식무경으로써 논하고자 한 것은 일체 현상 존재의 유식성이지만, 그러한 유식성을 밝힘으로써 궁극적으로 얻고자 한 것은 바로 그와 같은 유식성의 내적 자각 즉 마음의 활동성에 관한 내적 직관이다. 이 유식성의 자각이 곧 아공 • 법공의 깨달음이다. 


189 유식성을 자각한다는 것은 곧 자기 마음의 활동을 단 한 점의 무의식적 잔재도 남기지 않은 채 투명하게 통찰하는 것이다. 그처럼 투명해진 마음, 세계가 어떻게 마음의 활동을 통해 현현하게 되는가를 여실히 직관하는 그 진여심에서는, 나와 세계, 주관과 객관, 식과 경의 관계가 둘도 아니요 하나도 아닌 묘妙의 관계가 된다.


맺는말

192 그깨달음의 유식적 표현이 바로 유식무경이다. 그러나 유식 논사들의 위대함은 그 깨달음 자체에 있지 않다. 인간이 존재하는 전세계 그 어느 곳에 그와 같은 깨달음이 없는 곳이 있겠는가? 그들의 위대함은 단순히 수행적 깨달음의 차원에 머물러 있지 않고, 그 깨달음을 논리적으로 설명하여 이론화하고 체계화했다는 데 있다. 말할 수 없는 신비를 말로 드러내고자 한 것, 말을 떠난 진여眞如를 방편적 말로써 표현하고자 한 것, 현상초월적 깨달음의 의미를 현상 세계의 분석을 통해 밝혀 내고자 한 것이 그것이다. 그러므로 유식무경은 수행적 깨달음의 내용인 동시에 일체가 가상임을 논증하는 이론적 작업이기도 하다.


195 유한한 일체의 현상을 넘어서서 무한으로 비약하게 되는 초월의 경험이 바로 유식성의 자각이다. 초월의 경험은 곧 경계 너머로의 자유의 자각이며, 해탈의 깨달음이다. 그와 같은 현상초월적 눈의 주체는 우주 바깥의 신도 아니고 우주를 창조한 브라흐만도 아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 누구나의 마음 안에 이미 내재되어 있는 진실한 성품 곧 불성이자 여래장이며, 한마디로 말해 일심이다. 이것이 바로 유식이 유식무경을 통해 드러내고자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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