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릭 홉스봄: 극단의 시대 ━ 20세기 역사: 하



극단의 시대 : 20세기 역사 -하 - 10점
에릭 홉스봄 지음, 이용우 옮김/까치


제2부 황금시대
3. 사회혁명―1945-90년
4. 문화혁명
5. 제3세계
6. '현실사회주의'

제3부 산사태
7. 위기의 몇십 년
8. 제3세계와 혁명
9. 사회주의의 종식
10. 전위예술의 사멸 ― 1950년 이후의 예술
11. 마법사와 도제 ― 자연과학

12. 새로운 천년기를 향하여




제2부 황금시대

3. 사회혁명―1945-90년

402 20세기 후반의 가장 극적이고 가장 영향이 널리 미친 사회적 변화이자 우리를 과거세계로부터 영원히 단절시킨 변화는 농민층의 사멸이다. 왜냐하면 신석기시대 이래 대부분의 인간은 토지와 가축에 의존하여 살아왔거나 어부로서 바다에서 먹을 것을 수확해왔기 때문이다. 영국을 제외하고는, 공업화된 나라들에서조차 20세기가 상당히 흐른 뒤까지도 여전히 소농과 농업경영자가 경제활동인구의 큰 부분을 차지했다. 너무도 큰 부분을 차지해서, 필자의 학생시절인 1930년대에도 여전히 농민층의 소멸에 대한 거부가, 농민층이 사라질 것이라는 카를 마르크스의 예언에 대한 반증으로 널리 사용될 정도였다.


412 종종 그들의 부모가 치른 희생은 대단한 것이었다. 한국의 교육기적은 소농들이 자신들의 자녀를 명예롭고 특권적인 식자층의 지위로 상승시키기 위해서 팔아버린 암소의 시체들에 기반한 것이라고 전해진다.


415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약간 풀기 힘든 문제를 남겨 준다. 학생이라는 이러한 새로운 사회집단의 운동은 왜 ― 황금시대의 신구 사회세력들 중 유일하게 — 좌파 급진주의를 택했는가? (공산주의체제에 대한 반란을 차치한다면) 민족주의 학생운동조차 1980년대 이전까지는 그들 깃발 어딘가에 마르크스나 레닌이나 모택동의 붉은 배지를 다는 경향이 있었던 것이다.


4. 문화혁명

447 가족의 위기는 성적 행동, 파트너 관계, 출산을 지배하는 공적 기준의 매우 극적인 변화와 연관되어 있었다. 공식적인 것과 비공식적인 것 둘 다 변했으며, 양자 모두 주된 변화는 1960-70년대에 일어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공식적으로 이 시대는 여타 형태의 문화적, 성적 이단들에게뿐만 아니라 이성애자(주로, 남성보다 자유를 훨씬 덜 누렸던 여성)와 동성애자 둘 다에게 유별난 자유화의 시대였다.


450 청년이 별개의 사회계층으로서 가지는 새로운 '독립성' 규모상으로 아마도 19세기 초의 낭만주의시대 이래 필적할 만한 것이 없을 한가지 현상에 의해서 상징되었다. 삶과 젊음이 함께 끝난 영웅이 바로 그것이다.1950년대에 영화스타 제임스딘이 예기한 바 있는 이러한 인물은 청년의 특징적인 문화적 표현이 된 록 음악분야에서 흔하게 볼 수 있었고 아마도 이상형이기까지 했다. 버디 홀리, 재니스 조플린, 롤링 스톤즈(1962년에 창단한 영국 출신의 록 음악밴드)의 브라이언 존스, 밥 말리, 지미 헨드릭스, 그밖의 수많은 대중적 신들이 조기 사망이 예정된 생활방식의 희생물이 되었다.


459 1950년대의 새로운 점은, 적어도 갈수록 세계적인 경향을 지배하는 앵글로색슨 세계의 상층계급 및 중간계급 젊은이들이 도시 하층계급의 음악과 옷, 심지어는 언어조차 — 또는 그들이 도시 하층계급의 것이라고 여긴 것을 — 자신의 모델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는 데에 있었다. 록 음악은 가장 놀랄 만한 예였다. 1950년대 중반에 록 음악은 미국의 가난한 흑인들을 겨냥한, 미국 레코드사의 레이스(Race)나 리듬앤드블루스 목록의 게토를 갑자기 박차고 나와 젊은이, 특히 백인 젊은이의 보편적인 언어가 되었다.


467 서방에서 새로운 개인주의 도덕으로 가장 심각한 타격을 받은 제도는 전통적인 가족과 전통적인 교회조직들이었다. 이것들은 20세기 3/3분기에 극적으로 무너졌다. 특히, 카톨릭 교도 집단들을 결속시켜온 접합제가 놀랄 만한 속도로 부스러졌다. 1960년대 동안에 퀘벡 주(캐나다)의 미사 참석률이 80퍼센트에서 20퍼센트로 떨어졌고 전통적으로 높았던 프랑스계 캐나다인의 출생률이 캐나다인의 평균 출생률 이하로 떨어졌다. 여성 해방, 보다 정확히 말해서 낙태를 포함한 산아제한과 이혼할 권리에 대한 여성의 요구가 교회와, 19세기에 기본적인 신자층이 되었던 사람들 사이에 아마도 가장 깊은 골을 팠다. 이러한 사정은 아일랜드와 교황 자신의 이탈리아처럼 카톨릭 국가로 유명한 나라들과 심지어는 ― 공산주의의 몰락 이후에 一 폴란드에서조차 갈수록 명백해졌다.


475 우리가 숨쉬고 있고 우리의 모든 활동을 가능케 하는 공기를 우리가 당연한 것으로 여기듯이, 자본주의는 그것의 작동이 이루어지는 환경, 그것이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환경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 공기가 희박해졌을 때에야 비로소 자본주의는 그러한 환경이 얼마나 중요했던가를 발견했다. 바꾸어 말하면 자본주의는 자본주의적이기만 했던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성공했다. 이윤의 극대화와 축적은 자본주의 성공의 필요조건이었지만 충분조건은 아니었다. 자본주의가 물려받은 역사적 자산을 잠식하기 시작했고 그러한 자산 없이 작동하는 것의 어려움을 입증하기 시작한 것이 바로 20세기 3/3분기의 문화혁명이었다. 신자유주의가 더 이상 예전처럼 그럴 듯하게 보이지 않게 된 바로 그 순간에 승리했다는 것은, 1970-80년대에 유행하게 되고 공산주의체제들의 몰락을 경멸의 시선으로 지켜본 신자유주의의 역사적 아이러니였다. 시장은 자신의 적나라한 모습과 부적절성을 더 이상 은폐할 수 없게 되었을 때 승리했다고 주장한 셈이다.


5. 제3세계

477 세계의 빈국들에서의 이러한 인구폭발 ━ '황금시대'가 끝날 무렵에 처음으로, 심각한 국제적 우려를 낳았던 ━ 은 아마도 단기 20세기의 가장 깊은 변화가 될 것이다. 세계인구가 21세기 언젠가에는 100억 명 선(또는 현재의 추정치가 몇 명이 되었든)에서 결국 고정될 것이라고 가정하더라도 말이다.


508 1950년대의 움직임이 어떠한 것이었든, 1960-70년대에 이르면, 커다란 사회적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정후가 서반구에서 꽤 명백하게 드러났고, 남아시아 및 동남아시아의 주요 국가들과 이슬람 세계에서도 그러한 움직임을 부인할 수 없게 되었다. 역설적이게도 그러한 징후는 아마도, 제3세계에 해당하는 사회주의권 지역들, 이를테면 소비에트 중앙아시아와 카프카스에서 가장 덜 두드러졌다.


6. '현실사회주의'

515 지구상의 사회주의 지역에 관해서 말할 수 있는 첫번째 것은 그것이 존재했던 시기 대부분 동안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독립적이고 대체로 자기 완결적인 소우주를 형성했다는 것이다. 그 지역이 나머지 세계경제 ― 자본주의 세계경제, 즉 선진국들의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세계경제 — 와 가진 관계는 놀랄 만큼 미약했다.


516 두 '진영'이 분리된 근본적 이유는 의심할 바 없이 정치적인 것이었다. 앞서 보았듯이 10월 혁명 이후에 소련은 세계 자본주의를, 세계혁명을 통해서 가능한 한 빨리 전복해야 할 적으로 보았다. 그러나 혁명은 일어나지 않았고, 소련은 자본주의 세계에 둘러싸인 채 고립되었다. 자본주의 세계의 가장 강력한 정부들 중 많은 수가 이러한 전지구적 체제전복 중심지가 수립되는 것을 막고 나중에는 가능한 한 빨리 그것을 제거하고 싶어했다.


518 소련이 당분간 — 확실히, 짧지는 않을 시기 동안 —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승리한 유일한 나라가 될 것이라는 사실이 명백해지자 볼셰비키에게 논리적인, 사실상 유일하게 설득력 있는 정책은 소련의 경제와 사회를 가능한 한 빨리 후진적인 것에서 선진적인 것으로 변화시키는 것이었다. 이렇게 하는 알려진 가장 분명한 방식은, 우매하고 무지하고 문맹이고 미신적이기로 악명 높은 대중의 문화적 후진성에 대한 전면적인 공격을, 기술의 근대화 및 산업혁명의 전면적 추진과 결합시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소련 모델에 기반한 공산주의는 우선적으로, 후진국을 선진국으로 변화시키는 프로그램이 되었다.


538 소련에서의 권력은 볼셰비키들이 10월혁명을 통해서 얻은 유일한 것이었고, 권력은 그들이 사회를 변화시키는 데에 사용할 수 있는 유일한 도구였다. 사회를 변화시키는 일은 끊임없이 난관들 ― 이런 저런 방식으로 끊임없이 부활하는 ― 에 부딪쳤다(이것이 프롤레타리아가 권력을 장악하고 나서 몇 십 년 동안은 계급투쟁이 더욱 강화될 것이라는, 다른 점에서는 불합리한 스탈린의 테제의 의미다). 따라서 사회를 변화시키는 과정에 대한 가능한 모든 장애물들을 제거하는 데에 일관되고 가차없이 권력을 사용하기로 한 결단력만이 궁극적인 성공을 보장할 수 있었다.


제3부 산사태

7. 위기의 몇십 년

555 1973년 이후 20년의 역사는, 세계가 방향을 잃고 불안정과 위기에 빠져드는 역사다. 그러나 1980년대 이전까지는 황금시대의 토대가 어떻게 돌이킬 수 없이 무너졌는가가 분명하지 않았다. 세계의 한 쪽 부분 ━ 현실사회주의의 소련과 동유럽 ― 이 완전히 무너지기 전까지는, 위기의 전지구적 성격이 비공산주의 선전지역들에서 인정되는 것은 고사하고 인식되지도 않았다. 그 점이 인식되었을 때조차 여러 해 동안 경제난은 여전히 경기후퇴였다. 파국의 시대를 떠올리는 불황이나 공황이라는 용어의 사용에 대한 반세기간의 금기는 완전히 깨지지 않았다. 그 말을 쓰기만 하면 그것을 불러내는 셈이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1980년대의 경기후퇴가 50년 동안 있었던 것 중 가장 심각한 것 ━ 1930년 대라는 실제 시기를 직접 명시하는 것을 신중하게 피한 구절 ━ 이기는 했지만 말이다.


8. 제3세계와 혁명

595 제3세계의 변화와 점진적인 해체 및 분열을 어떻게 해석하든지 간에 그 세계 전체가 한 가지 근본적인 점에서 제1세계와 달랐다. 제3세계는 전세계에 분포한 혁명지대 ― 방금 이루어진 혁명이든, 임박한 혁명이든, 일어날 수 있는 혁명이든 ━ 였던 반면, 제1세계는 전세계적 냉전이 시작되었을 때 정치적, 사회적으로 대체로 안정적인 상태였다. 제2세계의 경우는 지표 밀에서 분노가 아무리 부글부글 끓더라도 당의 지배력과 소련의 군사개입 가능성에 의해서 그 폭발이 억제되었다. 반면에 일정한 규모를 가진 제3세계 국가들 가운데 1950년(또는 그 나라가 건설되었을 때)부터의 시기에 혁명이나, 혁명을 억누르거나 예방하거나 촉진하기 위한 군사 쿠데타나, 그밖의 형태의 국내 무장투쟁을 겪지 않은 나라는 극소수에 불과했다. 


630 그러나 세계 또는 적어도 세계의 대부분이 폭력적인 변화들로 가득 찰 것임이 사실상 확실하다 해도, 이러한 변화의 성격은 불분명하다. 단기 20세기 말의 세계는 혁명적 위기라기보다는 사회적 붕괴의 상태에 있다. 물론 그러한 세계에는 1970년대의 이란처럼, 정통성을 상실한 증오받던 체제를 전복할 만한 — 그러한 체제를 대체할 수 있는 세력이 이끄는 민중봉기를 통해서 — 조건들이 존재하는 나라들도 포함되지만 말이다.


631 게다가 고도로 파괴적인 무기와 폭발물을 손에 넣기란 오늘날 너무도 쉬운 일이 되어서, 선전사회에서 평소에 국가가 무기를 독점하는 것은 더 이상 당연한 일이 아니게 되었다. 또한 전 소비에트권을 대체한 빈곤과 탐욕의 무정부상태에서는, 핵무기나 핵무기를 만드는 수단이 정부가 아닌 집단의 수중에 들어가는 상황이 더 이상,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이 아니게 되었다. 따라서 세번째 천년기의 세계는 계속해서, 폭력적인 정치와 폭력적인 정치적 변화의 세계로 남을 것임에 거의 틀림없다. 그러한 정치와 변화에 관해서 유일하게 불확실한 것은 그러한 정치와 변화가 어디에 이를 것인가라는 것이다.


9. 사회주의의 종식

634 중국 공산주의는 사회적인 동시에 민족적 ━ 그 말이 논점을 교묘히 피하는 것이 아니라면 — 인 것이었다. 공산주의혁명에 불을 붙인 사회적 기폭제는 중국 민중(처음에는, 외국의 제국주의적 통제가 통제가 행해지고 때때로 근대적 공업이 존재한 이문화지역들인 중부 및 남부 중국의 연안 대도시들 — 상해, 광동, 홍콩 ━ 의 노동대중, 나중에는 그 나라의 막대한 인구의 90퍼센트를 차지한 농민층)의 엄청난 가난과 억압이었다. 농민들의 상태는 중국의 도시주민보다 훨씬 열악했다. 도시민들의 1인당 소비량은 농민들의 약 2.5배에 달했다. 중국의 엄청난 가난은 서구의 독자들로서는 상상도 하기 어려울 정도다. 


679 공산주의에 대한 대중의 동의는 자신들의 이데올로기적인 확신이나 그 밖의 확신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공산주의체제하에서의 삶이 자신들에게 이로운가 그리고 자신들의 상황이 다른 이들의 상황에 비해서 어떠한가에 대한 판단에 달려 있었다. 주민들이 다른 나라들과 접촉하는 것이나 심지어 다른 나라들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는 것 조차 철저히 막던 것이 일단 불가능해지면 그러한 판단은 회의적인 것이 되었다. 또한 공산주의는 기본적으로 도구적인 신념이었다. 현재는 막연한 미래에 도달하는 수단으로서만 가치를 가졌던 것이다. 그러한 신념체계는, 드문 경우 ― 이를테면 승리가 현재의 희생을 정당화해주는 애국전쟁 ━ 를 제의하고는 보편적인 교회들보다는 분파들이나 엘리트들에게 더 적합한 것이다.


681 소련의 붕괴로 '현존사회주의'의 실험은 끝났다. 왜냐하면 중국에서처럼 공산주의 체제들이 살아남고 성공한 곳에서 조차 그 체제들은, 완전히 집단화된 국가(또는 협동조합)소유경제 ━ 사실상 시장이 존재하지 않는 ━ 에 기반하고 중앙에서 통제하며 국가가 계획하는 단일한 경제라는 원래의 이상을 포기했기 때문이다.


681 다른 곳에서의 혁명의 실패로 소련은, 1917년의 마르크스주의자들 ━ 러시아 마르크스주의자들을 포함한 ━ 의 전반적인 여론에 따르면 사회주의를 건설하기 위한 조건이 전혀 존재하지 않았던 나라에서 홀로 사회주의의 건설에 전념해야 했다.


10. 전위예술의 사멸 ― 1950년 이후의 예술

685 과학기술은 예술을 어디에나 존재하는 것이 되게 함으로써 가장 명백히 혁명적으로 변화시켰다. 라디오는 이미 소리를 선전국들의 대부분 가정에 가져왔고, 후진국들에서도 계속 확산되었다. 그러나 라디오를 보편화시킨 것은 그것을 작고 휴대할 수 있게 만든 트랜지스터와, 라디오를 공식적인(따라서 주로 도시의) 전력망에서 독립시킨 오래 가는 전지였다.


685 자신이 선택한 음악을 진정으로 운반 가능하게 만든 것은, 갈수록 작아지고 전지로 작동하는 휴대용 녹음기/재생기로 들을 수 있는 카세트테이프였다. 카세트테이프는 1970년대에 세계를 휩쓸었고, 쉽게 복사할 수 있다는 이점을 추가로 지녔다. 


701 고급예술 및 문학의 고전적 장르의 쇠퇴는 물론 인재의 부족에 기인한 것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인간들 사이의 예외적인 재능의 분포 및 그 변화에 관해서 우리가 아는 바는 거의 없지만, 급속히 변화한 것이 이용할 수 있는 재능의 양이라기보다는 그 재능을 표현하게 되는 동기나, 재능을 표현하는 출구나, 특정한 방식으로 표현하도록 고무하는 요인이라고 가정하는 것이 보다 무난하기 때문이다.


704 고급예술의 토대를 침식한 훨씬 더 강력한 요인은, 19세기 말 이래 비공리주의적인 예술창작을 정당화해왔고 모든 구속으로부터의 자유에 대한 예술가들의 요구에 대해 합리적인 근거를 확실히 제공해왔던 '모더니즘'의 사멸이었다. 혁신이 모더니즘의 핵심이었다. '모더니티'는 과학과 기술에서 유추하여, 예술은 항상 진보하며 따라서 오늘의 양식은 어제의 양식보다 우월하다고 암묵적으로 가정했다. 그것은 정의상, 1880년대에 비판적인 용어가 된 아방가르드(avant-garde, 전위예술가들)의 예술, 즉 이론적으로는 언젠가 다수를 획득하기를 기대하지만 실제로는 아직 그러지 못한 데에 만족하는 소수파의 예술이었다.


11. 마법사와 도제 ― 자연과학

718 20세기가 과학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은 굳이 증명할 필요도 없다. 고등과학, 다시 말해서 일상적 경험으로는 얻을 수 없고, 다년 간의 학교교육 ― 비의적인 대학원교육으로 절정에 달하는 — 을 받지 않고는 실행될 수도, 이해조차 될 수도 없는 종류의 지식은 19세기 말 이전까지는 현실에 대한 적용범위가 비교적 좁았다. 17세기의 물리학과 수학이 기사들을 지배했고, 18세기 말과 19세기 초의 화학 및 전기 분야에서의 발견이 빅토리아조 중반에 이미 공업과 통신에 필수적인 요소가 되었으며, 전문적 과학연구자들의 탐구가 기술전보를 선도하는 데에 없어서는 안 될 것으로 인정되었다. 요컨대 과학에 세계의 중심에 위치했다.


761 사실, '과학(대부분의 사람들이 '순수'자연과학이라는 의미로 쓰는)'은 자기 생각대로 하게 내버려두기에는 너무도 크고, 너무도 강력하며, 일반적으로는 사회에게, 특수하게는 과학에 돈을 대는 자들에게는 너무도 필수적인 존재였다. 그것이 처한 상황의 역설은, 결국 20세기 과학기술의 거대한 발전소와 그러한 발전소가 가능케 한 경제가 갈수록 상대적으로 아주 작은 집단의 사람들에게 의존하게 되었는데 그들에게는 자신들의 활동의 엄청난 결과들이 부차적으로만 중요하며 종종 사소한 것이었다는 데에 있었다.


12. 새로운 천년기를 향하여

764 단기 2세기는 아무도 그 해결책을 가지지 않았거나 심지어 해결책을 가졌다는 주장조차 하지 않는 문제들을 남기는 것으로 끝났다. 세기말의 시민들이 자신들을 둘러싸고 있는 전지구적인 안개를 뚫고 세번째 천년기를 향하여 나아갔을 때 그들이 확실히 아는 것은 오직 역사의 한 시대가 끝났다는 것뿐이었다. 그들이 그 밖의 것에 대해서 아는 것은 너무도 적었다. 일례로 1990년대의 세계에는 두 세기 전 이래 처음으로 어떠한 국제적인 체계나 구조도 없었다. 1989년 이후 수십 개의 새로운 영토국가들이 자신의 국경선을 결정할 독립적인 기구도 전혀 가지지 않은 채 ― 심지어 일반적인 중재자로 기능할 만큼 충분히 공평무사한 것으로 인정되는 제 3자조차 없는 상태에서 ━ 출현했다는 사설 자체가 이를 말해준다.


769 단기 20세기는 종교전쟁의 시대였다. 그 종교들 가운데 가장 전투적이고 가장 피에 굶주린 것이 사회주의와 민족주의 같은 19세기형 세속 이데올로기들이었지만 말이다. 그러한 이데올로기들에서 신에 해당하는 것은 신처럼 숭배되는 추상적 개념들이거나 정치가들이었다.


770 소련의 붕괴는 당연히도 주로 소비에트 공산주의의 실패, 즉 사실상 시장이나 가격결정기구에 전혀 의지하지 않은 채 경제 전체의 기반을 생산수단의 보편적인 국유와 전면적인 중앙계획에 두려는 시도의 실패에 주의를 집중시켰다. 그러나 사회주의적 이상의 다른 모든 역사적 형태가 모든 생산수단, 분배수단, 교환수단의 사회적 소유(반드시 중앙에서의 국유가 아니더라도), 사기업의 제거, 경쟁적인 시장에 의한 자원할당의 억제에 기반한 경제를 상정해왔으므로 소비에트 공산주의의 실패는 또한 비공산주의적 사회주의 ━ 마르크스주의적이든 아니든 ━ 에 대한 열망 역시 손상시켰다.


771 소비에트 모델의 실패는 자본주의 지지자들에게 주식거래 없는 경제는 어떠한 경제도 굴러갈 수 없다는 신념을 확증시켜 주었고, 초자유주의 모델의 실패는 사회주의자들에게 경제를 포함한 인간사는 시장에게 내말기기에는 너무도 중요하다는, 보다 근거 있는 신념을 확증시켜 주었다. 또한 그것은 한 나라의 경제적 성패와 그 나라 경제 이론가들의 탁월성 사이에는 눈에 띄는 상호관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회의적인 경제학자들의 가정을 뒷받침해주었다.


772 양극단의 명백한 몰락보다 더 심각한 것은 20세기의 가장 인상적인 경제기적들을 지배했던 중간적인 또는 혼합적인 프로그램 및 정책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의 방향상실이었다. 그것은 상황에 따라, 그 나라의 이데올로기에 따라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 시장과 계획, 국가와 사기업을 실용주의적으로 결합한 것이었다.


772 혁명의 시대와 19세기가 낳은 프로그램적 이데올로기들이 20세기 말에 방향을 잃었다면, 속세의 방황하는 자들을 위한 가장 오래된 길잡이인 전통적인 종교들은 그럴 듯한 대안을 전혀 제공하지 못했다.


773 전통적 종교의 이러한 쇠퇴와 몰락은 적어도 선전세계의 도시사회의 경우, 전투적으로 종파적인 종교의 성장이나 신흥종교 및 종교집만의 부상으로도 보상되지 않았다. 그렇게도 많은 남녀들이 자신들이 이해할 수도, 통제할 수도 없었던 세상으로부터 비합리성 그 자체가 힘이 되는 다양한 종류의 신념으로 도피하려는 명백한 욕구에 의해서 보상되지 않은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말이다. 그러한 종파, 종교, 신념이 크게 눈에 핀다고 해서 그것들에 대한 지지도가 비교적 낮았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영국의 유태인 가운데 초정통파 종파나 집단들 중 어느 하나에라도 속한 사람은 3~4퍼센트를 넘지 않았고, 미국의 성인 인구 가운데 전투적 선교 종파에 속한 사람은 5퍼센트를 넘지 않았다.


795 대중매체도, 보통선거 정치에 의해서 선출된 의회도, '인민' 자체도 실제로 어떠한 현실적 의미의 통치도 할 수 없었다. 다른 한편 정부든, 어떤 유사한 공적인 정책 결정 기구든 더 이상 인민에 맞서서 또는 심지어 인민 없이 통치할 수 없으며 이는 '인민'이 정부 없이 또는 정부에 반해서 살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다. 좋든 나쁘든 20세기에 보통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집단적 명의를 내건 행위자로서 역사에 들어왔다. 신정(神政)을 제외한 어떠한 체제 ━ 시민들을 겁에 질리게 하고 대규모로 살해한 체제조차도 ━ 도 이제는 자신의 권위를 보통 사람들로부터 끌어냈다. 


796 가장 번창한 종류의 신정인 이슬람 근본주의 체제조차 알라신의 의지에 의해서가 아니라 인기 없는 정부에 대항해서 보통 사람들을 대규모로 동원함으로써 성공을 거두었다. '인민'이 자신의 정부를 선출할 권리를 가졌든 가지지 않았든 공적인 문제에 대한 그들의 개입 — 능동적이든 수동적이든―은 결정적으로 중요했다.


796 사실상 20세기에는 비길 데 없이 무자비한 체제들과 ━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아파르트헤이트처럼 ━ 소수의 의지를 다수에게 힘으로 부과하고자 하는 체제들의 예가 많았으므로, 강압적이기만한 권력의 한계가 더욱 쉽게 입증될 수 있었다. 가장 무자비하고 잔인한 지배자들조차 무제한적인 권력만으로는 권위의 정치적 자산들과 기술들, 이를테면 정권의 정통성에 대한 대중적 의식, 어느 정도의 적극적인 대중적 지지, 분할통치 능력 그리고 ━ 특히 위기의 시대에 ━ 시민들의 자발적인 복종 등을 대신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799 우리는 우리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모른다. 우리는 역사가 우리를 이 지점까지 몰고 왔으며 ━ 독자들이 이 책의 논의를 공유한다면 ━ 왜 그러했는가를 알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하다. 인류가 인정할 수 있는 미래를 가지려 한다면 그것은 과거나 현재를 연장함으로써 이루어질 수 없다. 그러한 기반 위에서 세번째 천년기를 건설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실패할 것이다. 그리고 실패의 대가는, 즉 사회를 변화시키지 않을 경우의 결과는 암흑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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