쇠얀 키에르케고어: 공포와 전율 ━ 코펜하겐 1843년


공포와 전율 - 10점
쇠얀 키르케고르 지음, 임춘갑 옮김/치우



서언 007


1. 조율 015

2. 아브라함 찬사 027

3. 문제 047

(1) 서론적 구상·47

(2) 윤리적인 것의 목적론적 정지라는 것은 존재하는가?·108

(3) 하느님에 대한 절대적 의무라는 것은 존재하는가?·137

(4) 아브라함이 자신의 기도를 사라와 엘리에셀과 이삭에게 말하지 않은 것은 윤리적으로 책임을 져야할 일이었던가?·166


결론 249

역자 후기 256


■ 부록 키에르케고르의 생애에 대한 짧은 이야기 271





역자 후기 


『공포와 전율』에 대하여

『공포와 전율』의 주제는 '믿음'이다.


키에르케고르는 이 주제를 구약성서에 나오는 믿음의 사람인 아브라함과 이삭의 이야기를 통하여 핵심에 파고들고 있다. 구약성서 창세기에 서술되어 있는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너무나도 유명하기 때문에 새삼스레 여기에 되풀이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키에르케고르는 이 너무나도 널리 알려진 이야기를 그 자신의 날카로운 눈으로 특이하게 파헤치며 믿음의 본질로 파고든다.


땅 위의 모든 국민이 그의 자손으로 말미암아 축복을 받을 것이라는 약속을 받은 아브라함은 그의 외아들을 바치라는 하느님의 분부를 받는다. 이것은 부조리한 일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이삭을 되돌려 받을 것이라는 것을 믿고 하느님의 분부에 따른다. 이것이 믿음이고, 하느님을 두려워하고, 하느님을 믿고서 그의 분부에 절대복종하는 것이 곧 자신의 영혼의 구원이다. 이 믿음으로 그는 잃어버린 것을 되찾는다. 이리하여 키에르케고르는 신약성서에 수록된 빌립보서 2장 12절에 나오는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자신의 구원을 이루어 나가시오'에서 따온 '공포와 전율'이라는 말을 저서의 제목으로 삼았던 것이다.


서언

키에르케고르는 그 당시 덴마크를 풍미하고 있던 풍조를 야유하고 있다. 그 당시 덴마크에서는 모두가 헤겔 철학에 도취되어, 믿음에 머물 생각은 않고 더욱 앞으로 전진하려고 야단들이었다. 헤겔적인 철학체계에 편승하여 거리낌 없이 믿음을 뛰어넘으려고 했다. 여기서 키에르케고르는 그들의 수고가 믿음의 전단계도 이르지 못한 처지에서의 헛수고임을 깨우쳐 주며 오히려 믿음을 얻는 것이야 말로 모든 인간의 필생의 과제라고 하며 믿음의 문제를 제시한다.


1. 조율

조율이란 음악을 연주하기에 앞서 각 악기의 음조를 맞추는 일이다. 여기서 키에르케고르는 이하에서 전개될 문제들을 암시하며, 한편으로는 그가 겪은 사랑의 고통을 어린애의 젖을 떼야만 하는 어머니의 괴로움으로 표현하고 있다.


2. 아브라함 찬사

문학사를 통틀어 보아도 아브라함을 찬양하는 문장 중 이렇게 아름답게 서술된 문장은 없을 것이다. 여기에서는 믿음의 본질이 역설적으로 제시된다.


주목해야 할 사실은, 아브라함은 미래를 위해서가 아니라 '이 세상에서의 삶을 위하여 믿었다'는 점이다. '자신의 염원을 버리고 난 후에도 그 염원을 꽉 붙들고 놓지 않는', '시간적인 것을 버리고 나서도 역시 그 시간적인 것을 꽉 붙들고 있는' 이것이야 말로 믿음의 참다운 모습이다. 이런 삶을 사는 사람이야 말로 진정한 '믿음의 기사'라고 한다. 다음 장에서는 이런 '믿음의 기사'가 '체념의 기사'와 대립되어 묘사된다.


3. 문제

(1) 서론적 구상

다음에 계속되는 세 가지 문제를 거론하기에 앞서, 여기서 저자는 미리 자신의 입장을 밝힌다.


아브라함의 행위는 윤리적으로 표현하면 이삭을 죽이려고 한 일이고, 종교적인 표현을 빌리면 이삭을 하느님에게 바치려고 한 일이다. 이것은 무서운 모순이다. 이 모순 속에 잠을 이룰 수 없게 하는 불안이었다. 그런데 이 불안이 없으면 아브라함의 존재는 의의를 잃는다. 이 모순은 무서운 변증법적인 투쟁이고 이 불안을 극복하는 거인적인 열정이 믿음이고, 이 믿음이야 말로 자식을 죽이려고 하는 무시무시한 행위까지도 산성한 행위로 바꾸어 놓는다. 우리가 아브라함이 되려고 하는 일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아브라함을 이해하기조차도 어려운 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아브라함은 어떻게 하였을까? 그는 모리아산으로 가는 도중에도 한결같이 믿었다. 만약 하느님께서 이삭을 요구하시면 그는 언제든지 이삭을 기꺼이 바칠 생각이었지만, 하느님께서는 이삭을 요구하시지 않으실 것을 믿었다. 그는 부조리의 힘으로 믿었다…. 어느 날엔가 저승에서 축복을 받을 것이라고 믿은 것이 아니라, 여기 이세상에서 행복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믿었다. 그리하여 그는 이삭을 다시 얻었다. 즉, 아브라함은 이 세상의 것, 인간적인 일체의 타산을 버리고 유한한 것을 단념하고, 그러고 나서 부조리한 것의 힘을 빌려 믿었고, 이 힘으로써 단념한 바로 그 유한한 것을 다시 되찾을 것이다.


유한한 것을 체념한 후에 부조리한 것의 힘으로 그것을 다시 되찾는다는 이것이 '믿음의 변증법'이고, 이 '이중운동'을 할 수 있는 사람이 곧 '믿음의 기사'인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무한한 것을 위하여 일체의 유한한 것을 체념하는 일 밖에 못하는 사람은 '무한한 체념의 기사'에 불과하다. 그러나 무한한 체념은 '믿음'이 아니다. 무한운동을 하고나서 유한운동을 하여 유한성을 잃음이 없이 이것을 완전히 얻는 것이 '믿음의 운동'이다.


무한성을 위하여 유한성을 버리기 위해서는 믿음이 필요 없고, 단지 인간적인 용기만 있으면 족하다. 이런 일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지만 그 이상의 일은 믿음이, 즉 믿음의 용기가 필요하고, 이 믿음의 운동은 항상 부조리한 것의 힘을 빌려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살인까지도 신성한 행위로서 이삭을 되돌려 준다는 역설, 이 무서운 역설이야말로 아브라함의 생명의 내용을 이룩하고 있는 믿음이다. 이것은 사유로써는 파악할 수가 없다. 키에르케고르는 이런 역설적인 믿음의 변증법을 사유로써가 아니라, 즉 철학적으로가 아니라 서정시적으로 기술하려고 한다.


(2) 윤리적인 것의 목적론적 정지라는 것은 존재하는가?

여기서는 '보편적인 것'과 '개별자'의 관계를 통하여 믿음의 자리를 정립하려고 한다. 일단 칸트의 도덕률을 인정하면서 윤리적인 것은 보편적인 것, 즉 누구에게나 타당한 것이라고 규정하고 시작한다.


개별자는 보편적인 것 속에 자기의 목적을 가지는 개별자이고, 그의 윤리적인 과제는 자기 자신을 항상 보편적인 것 속에 표현하고, 자기의 개별성을 지양하고 보편적인 것이 되는 일이다. 이 개별자가 보편적인 것에 대하여 자기의 개별성을 주장하려고 하면 그 순간 개별자는 죄를 범한다. 그리고 이 자기의 죄를 승인하지 않고서는 다시 보편적인 것과 화해할 수 없다.


만일 이것이 인간과 인간의 이 세상에서의 생존양식에 관해서도 그렇다고 말할 수 있는 최고의 것이라고 한다면, 윤리적인 것은 영원히 그리고 모든 순간에 있어서 인간의 목적인 인간의 영원한 축복과 같은 성질을 갖는다. 


만일 그렇다면 윤리적인 것은 자족적인 것이고, 그 외의 것 혹은 그 이상의 것은 필요하지 않기 때문에, 믿음 내지는 종교적인 것이 개입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믿음이란 개별자가 보편적인 것보다 높은 곳에 있다는 역설'이고, 개별자가 개별자로서 보편적인 것 밑에 종속되어 있었다가, 후에 이제는 보편적인 것 위에 군림하는 개별자가 된다는 역설, 즉 개별자가 개별자로서 절대자에 대하여 절대적인 관계에 선다는 역설이다. 이 입장은 매개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모든 매개는 바로 보편적인 것의 힘을 빌려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사유가 근접하기 힘든 것이다.


이것이 아브라함의 입장이고,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이야기에는 윤리적인 것의 목적론적 정지가 내포되어 있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그의 행위로써 윤리적인 것의 경계를 돌파하여 그 영역을 벗어난다. 그의 목적은 윤리적인 것 바깥에, 보다 높은 곳에 있고, 이 목적을 위하여 윤리적인 것을 정지시킨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윤리적인 것으로써는 불가능하고, 오로지 믿음으로써만 가능하다.


(3) 하느님에 대한 절대적 의무라는 것은 존재하는가?

믿음의 역설은 개별자가 보편적인 것보다 높이 있다는 것이고, 개별자가 절대적인 것에 대한 그의 관계로써 보편적인


것에 대한 그의 관계를 규정한다는 것이지, 보편적인 것에 대한 그의 관계로써 절대적인 것에 대한 그의 관계를 규정한다는 것이 아니다.


이 역설은 하느님에 대한 절대적 의무가 존재한다는 식으로도 표현될 수 있다. 왜냐하면 이 의무관계에 있어서는 개별자는 개별자로서 절대자에 대하여 절대적으로 관계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그간의 사정을 아브라함의 이야기에서 풀어간다. 그리하여 내면성이 외면성보다 높이 있다는 결론을 이끌어 낸다. 여기서 소상히 서술할 수는 없지만 하느님에 대하여 절대적인 의무를 진 자는 '외로운 길'을 걸을 수밖에 없다. 여기에 '인간적으로 말해서 절대로 자기를 남들에게 이해시킬 수 없다'는 고뇌와 불안이 있다. 그러나 이 고뇌와 불안이 없이는 믿음의 축복도 없다.


(4) 아브라함이 자신의 … 책임을 져야할 일이었던가?

여기서는 '드러난 것'과 숨겨져 있는 것, 즉 '침묵'의 문제가 등장한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침묵'의 본질이 곧 그의 믿음의 비밀이라고 한다. 여기서 저자는 ①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에 나오는 예와, ② 아그네테와 물의 요정의 북유럽신화, ③ 토비아와 사라의 이야기, ④ 리차드 3세 및 파우스트의 예를 들어 침묵이란 무엇인가를 전개한다. 아마도 문학사에 있어서 유례가 없을 멋진 문장론이라 하겠다.


이상의 아브라함에 관한 세 가지 문제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윤리적인 목적보다 더욱 고차원적인 목적이 있어서, 이런 입장에서는 윤리적 목적은 그 타당성을 지닐 수 없고, 자식을 죽인다는 반윤리직 행위마저도 시인된다. 둘째, 그것이 가능한 것은 하느님에 대한 절대적 의무라는 보다 고차원적인 목적이 존재하기 때문이고, 이 의무는 개별자가 개별


자로서 보편적인 것보다 높이 있게 하고, 절대자에 대하여 절대적 관계를 맺게 한다. 즉 인간을 홀로 하느님 앞에 서게 한다. 셋째, 그러한 하느님과의 관계는 '침묵'이고 믿음이란 이런 역설이다.'


결론

무릇 참으로 인간적인 것은 어떤 세대도 앞선 세대로부터 그것을 배울 수가 없다. 각개의 세대는 처음부터 제각기 시작해야 한다. 참으로 인간적인 것은 정열이고, 믿음은 인간에게 있어서의 최고의 정열이다. 한 인간의 생애는 이 과제를 수행하기에도 항상 벅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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