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 만: 마의 산(상)


마의 산 - 상 - 10점
토마스 만 지음, 윤순식 옮김/열린책들


<제1장>

도착 13

34호실 26

식당에서 32


<제2장>

세례반(洗禮盤)과 두 얼굴의 할아버지에 관하여 43

티나펠 영사의 집에서 그리고

한스 카스토르프의 도덕적 상태에 관하여 61


<제3장>

근엄하게 찌푸린 얼굴 77

아침 식사 82

농담, 임종의 영성체, 중단된 웃음 95

악마 112

명석한 두뇌 129

너무 심한 말 한마디 140

물론, 여자야! 147

알빈 씨 155

악마가 무례한 제안을 하다 160


<제4장>

필요한 물건 사들이기 181

시간 감각에 대한 보충 설명 199

프랑스어로 대화를 시도하다 205

정치적으로 수상쩍은 음악 214

히페 224

사랑과 병의 분석 241

의문과 숙고 253

식탁에서 나눈 대화들 260

고조되는 불안, 두 분의 할아버지와

해 질 녘의 뱃놀이에 관하여 273

체온계 311


<제5장>

영원히 계속되는 수프와 갑자기 밝아지는 방 355

아, 보인다! 396

자유 428

수은주의 변덕 439

백과사전 459





9 우리가 하고자 하는 한스 카스토르프의 이야기는 — 그를 위한 것이 아니라(비록 호감이 가는 젊은이이기는 하지만, 그가 매우 평범한 젊은이란 사실을 독자들은 알게 될 것이므로), 상당히 얘기해 줄 만한 가치가 있어 보이는 이야기 그 자체를 위한 것이다(그렇지만 이 이야기는 그의 이야기라는 것, 그리고 누구에게나 일어나는 그런 일이 아니라는 것, 이 두 가지는 카스토르프를 위해서도 기억해 두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이야기는 아주 오래된 옛날이야기로, 소위 말하자면 벌써 역사에 의해 녹이 잔뜩 슬어 버려서 반드시 멀고 먼 과거의 시칭으로 서술되어야만 한다.


9 이러한 사실은 이야기 그 자체를 위해 불리하다기 보다는 오히려 유리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이야기란 지나간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더 지나간 과거의 것일수록 이야기로서의 속성에 더 어울리며, 또 이야기를 과거 시제로 속삭이듯 불러내는 마법사인 작가에게도 그게 더 어울린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이야기는 오늘날에도 사람들 사이에 해당되는 일이며, 특히 그들 중 이야기를 들려주는 작가들에게 더욱 해당되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이야기는 이야기되는 그 순간보다 훨씬 더 오래된 이야기이므로 그 나이를 날짜로 셀 수 없을뿐더러, 또한 이야기가 품고 있는 세월의 햇수는 태양 주위를 도는 행성의 무수한 회전수로도 헤아릴 수 없다. 한마디로 말해 이야기의 과거성 정도는 사실 시간과는 관계가 없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시간이라는 비밀스러운 요소의 의문성과 독특한 이중성을 암시하기 위해서 잠시 언급하는 게 좋을듯 싶어서이다.


10 우리는 이 이야기를 자세하게 할 것이다. 그것도 아주 세밀하고도 철저하게. 이야기가 요구하는 공간과 시간 때문에 이야기가 재미있게 느껴지거나 지루하게 느껴진 적이 도대체 언제였던가? 이야기가 고통을 준다는 악평을 두려워하기보다는, 오히려 철저한 것만이 정말로 재미가 있다는 견해가 옳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작가는 한스 카스토르프의 이야기를 손바닥 뒤집듯 금방 끝내 버리지는 않을 것이다. 일주일의 7일도 부족할 것이고, 7개월로도 모자랄 것이다. 가장 좋은 것은, 작가인 내가 이야기에 휘감기는 동안 지상의 시간이 얼마나 나를 스쳐 지나가는지 미리 정하지 않는 것이다. 설마 7년이나 걸리지는 않겠지! 자 그럼, 이제 이야기를 시작해 보기로 하자.


13 어느 평범한 젊은이가 한여름에 고향 도시인 함부르크를 떠나 그라우뷘덴 주의 다보스 플라츠로 여행을 떠났다. 3주 예정으로 누군가를 방문하러 가는 길이었다. 하지만 함부르크에서 그곳까지는 긴 여정이다 3주라는 짧은 기간을 머물기에는 사실 너무 먼 거리이다. 여러 나라를 지나 산을 오르내리고, 남독일의 고원에서 슈바벤의 호숫가로 내려가, 거기에서 배를 타고 넘실거리는 파도를 헤치며 그 옛날부터 밑바닥을 알 수 없던 심연을 건너가야 한다. 지금까지는 편안하게 일직선으로 진행되던 여행이 이제부터는 다소 복잡해진다. 멈춰 기다려야 하는 일이 자주 생기고 또 갖가지 번거로운 일들이 생긴다. 스위스 국경 지역인 로르샤흐 마을에서 다시 기차를 타게 되지만, 그것도 일단 알프스의 작은 역인 란트쿠아르트까지만 가기 때문에 거기서 기차를 또 갈아타야만 한다. 기차라고 해봐야 바람도


13 세게 불고 이렇다 할 경치도 없는 곳에서 오랫동안 기다리다가 타는 협궤 철도이다. 작지만 그래도 힘이 대단한 기관차가 움직이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이제 정말 대단한 모험적인 여행이 시작된다. 즉 깎아지른 듯 험준한 오르막길이 계속되며, 그것이 언제 끝날지도 모른다. 란트쿠아르트 역은 비교적 높지 않은 중턱에 있지만, 여기서부터는 점점 거칠고 험준한 바윗길을 따라 높은 알프스 고산 지역 깊숙이 들어가야하기 때문이다.


13 한스 카스토르프 — 이것이 그 젊은이의 이름이다 — 는 회색 쿠션이 깔려 있는 작은 칸막이 객실에서 바둑판 무늬 담요를 두르고 혼자 앉아 있었다. 옆에는 자신을 길러 준 양 아버지인 외종조부 티나펠(이 이름도 여기서 곧 소개하지만) 영사가 선물한 악어 가죽 손가방이 놓여 있었고, 옷걸이에는 겨울 외투가 걸려 흔들거렸다. 그는 닫힌 차창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그런데 오후가 되어 날씨가 점점 차가워지자, 가족의 귀여움을 받으며 응석받이로 자라난 그는 당시 유행하던 넓은 여름 외투는 비단으로 가공되어 있었다.


15 한스 카스토르프 역시 이와 같은 경험을 하였다. 그는 이번 여행을 특별히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고, 이 여행에 큰 의미를 부여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오히려 그는 어차피 끝내야 하는 여행이므로 이 여행을 빨리 끝내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래서 여행을 떠날 때와 똑같은 인간으로 되돌아가서 잠시 중단했던 일상생활을 바로 그 지점에서 다시 시작하려 했다.


43 한스 카스토르프는 자신의 집안에 관해서는 희미한 기억 밖에 없었다.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해서는 거의 아는 게 없었다. 부모님은 그가 다섯 살과 일곱 살이 되던 해 짧은 간격을 두고 세상을 떠났다. 먼저 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 정말 뜻밖의 죽음이었다. 어머니는 해산을 앞두고 정맥염으로 인한 혈관 폐색증으로 사망했던 것이다. 하이데킨트 박사의 표현을 빌리면 순간적으로 심장마비를 일으키는 색전증에 의한 사망이었다. 어머니는 침대에 앉아서 웃고 있었는데, 너무 웃다가 침대에서 굴러떨어진 것 같았지만, 사실은 죽어서 굴러떨어진 것이었다. 아버지 한스 헤르만 카스토르프에게는 쉽게 납득하기 힘든 일이었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진심으로 사랑했고 그 자신도 그렇게 강한 체질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러한 충격을 견뎌 낼 수 없었다.


77 한스 카스토르프는 너무 피곤해서 혹시 늦잠을 자지나 않을까 염려했지만, 필요 이상으로 일찍 일어났고 또 그의 아침 습관을 빠짐없이 이행할 시간적 여유가 충분했다. 매우 문명화된 그의 습관을 이행하는 데에 필요한 주요 도구는 고무 대야를 비롯해 녹색의 라벤더 비누가 든 나무 쟁반, 거기에 부속된 밀짚 솔이었다. 세수와 몸치장에 이어 짐을 풀고 정돈할 시간도 충분했다. 라벤더 향내가 나는 비누 거품을 볼에 바르고 은도금한 면도기로 수염을 깎으면서, 그는 간밤에 꾼 혼란스러운 꿈들을 생각해 보았다. 그는 이성의 빛 속에서 면도를 하고 있는 인간으로서의 우월감을 느끼며 그런 엉터리 같은 꿈에 대해 너그럽게 미소 지으면서 머리를 흔들었다. 푹 쉬었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지만 새로 맞이할 하루를 생각하니 기분이 상쾌하였다.


355 여기서 독자 쪽에서 너무 놀라지 않도록, 차라리 이야기를 하는 화자 자신이 대신하여 놀라는 편이 나을 것 같은 일이 한 가지 있다. 말하자면 한스 카스토르프가 이 위의 사람들과 함께 지낸 첫 3주에 관한 우리의 보고는(신이 아닌 인간으로서의 예상에 따라 그는 이번 여행의 총 날짜를 한여름의 21 일간으로 잡았다), 우리 자신이 반쯤 보증하는 예상과 너무도 일치하는 공간과 시간의 너비를 필요로 했다. 그러나 그 다음 3주간 그의 방문 기록은 처음 3주간을 보고 하는 데 필요했던 페이지와 종이, 시간과 날짜 수만큼 많은 행간들, 즉 말과 순간들을 필요로 하지는 않을 것이다. 앞으로 알게 되겠지만, 다음 3주간은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 버리고 말 것이다.


358 뜻하지 않은 운명의 장난에 압류되어 이곳에 머무르게 된 우리 이야기의 주인공 젊은 한스 카스토르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시간이 우리에게 길어지기도 짧아지기도 하고, 또 우리의 체험에서 볼 때 시간의 폭이 넓어지기도 줄어들기도 하는 것이 순리에 맞는 일이며, 이야기의 법칙에도 상응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간의 불가사의한 점을 고려하여, 여기서 우리가 그와 함께 경험하게 되는 것과 전혀 다른 놀라운 일과 현상에 대해서도 독자에게 알려 주는 것이 유익할지 모르겠다. 우리가 환자로서 침대에 누워 보내는 나날이 아무리 〈길다〉 하더라도, 그것이 얼마나 빨리 지나가 버리는가를 독자들 누구든지 상기한다면 지금으로서는 충분하다. 매일이 언제나 되풀이되는 똑같은 나날이기는 하지만, 언제나 똑같기 때문에 〈되풀이된다〉고 말하는 것은 사실 그렇게 정확한 표현이 아니다. 그것은 단조로움이라든지 언제나 계속되고 있는 현재, 또는 영원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어제 당신에게 제공되었던 것과 똑같은 정오의 수프가 오늘 제공되고, 내일도 마찬가지로 오늘과 똑같은 정오의 수프가 제공될 것이다. 그리고 당신은 이와 똑같은 순간, 즉 영원의 바람결을 느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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