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비 콕스: 세속도시 ━ 현대 문명과 세속화에 대한 신학적 전망
- 책 밑줄긋기/책 2012-22
- 2020. 11. 3.
세속도시 - 하비 콕스 지음, 이상률 옮김/문예출판사 |
저자 서문: 《세속도시》 출간 후 25년
개정판 서문
서론 세속도시의 시대
제1부 세속도시의 도래
챕터1 세속화의 성서적 원천
챕터2 세속도시의 형태
챕터3 세속도시의 양식
챕터4 교차문명적 전망에서의 세속도시
제2부 세속도시에서의 교회
챕터5 사회 변화의 신학을 향하여
챕터6 하나님의 전위대로서의 교회
챕터7 문화적 악령 추방자로서의 교회
제3부 도시의 악령 추방으로의 여행
챕터8 세속도시에서의 일과 놀이
챕터9 성과 세속화
챕터10 교회와 세속대학
제4부 신과 세속적 인간
챕터11 신에 대해 세속적인 방식으로 말하기 위하여
참고문헌
역자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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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첫 번째 전제는 모세에게 그랬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신학적 반성을 위한 중지가 아니라 세계의 정의를 위한참여 행위가 신에 대한 적절한 응답의 첫 번째 '순간'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포로들을 해방시키는 일을 시작하라. '이름'은 그 다음에 올 것이다. 신학은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은 행하는 것, 즉 몇몇 사람들이 아직도 "제자도(discipleship)" 라고 부르는 것에 헌신하기 이전이 아니라 그 다음에 온다. 이것은 올바른 행동은 정확한 관념에서 나와야 한다는, 즉 생각이 생활에 앞선다는 서양의 기존 가정을 뒤집는다. 이러한 전복은 해방신학이 이룬 가장 유익한 공헌 중 하나다.
36 세속화란 무엇인가? 네덜란드 신학자 판 푀르선은 세속화란 "처음에는 인간의 이성과 언어에 대한 종교적인 통제에서, 그 다음에는 형이상학적 통제에서" 인간이 구원되는 과정이라고 말한다. 세속화는 세계가 자신에 대한 종교적인 또 유사 종교적인 이해에서 느슨해 지는 것, 모든 폐쇄된 세계관을 일소하는 것, 모든 초자연적인 신화와 신성한 상징을 깨뜨리는 것이다. 세속화는 '역사
의 탈운명화', 즉 세상이 자기 손에 맡겨져 있다는 것, 다시 말해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서 더는 행운의 신이나 복수의 신을 탓할 수 없다는 인간의 발견이다. 세속화는 인간이 저 너머 세상에서 이 세상과 지금(이 현재의 시대)으로 주의를 돌릴 때 일어난다. 그것이 디트리히 본회퍼가 1944년에 "인간의 어 른됨"이라고 부른 것이다.
39 우리 시대의 세속적이고 정치적인 운동들을 '종교적'으로 강화함으로써 우리의 종교에 매달리는 것이 정당하다고 느낄 수 있도록 하는 노력은 결국 지는 싸움이다. 세속화는 계속 밀어닥친다. 우리의 현시대를 이해하고 또 그것과 의사소통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현시대의 끊임없는 세속성을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 본회퍼가 말한 바와 같이, 우리는 하느님을 세속적인 방식으로 말할 수 있어야 하며, 성서의 개념들을 비종교적으로 해석하는 법을 찾아야 한다. 언젠가는 종교나 형이상학이 다시 구심력을 회복할 것이라는 안일한 희망 속에서 기독교에 대한 종교적 · 형이상학적 해석에 매달리는 것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종교나 형이상학온 훨씬 더 주변화 할 것이며, 이것은 우리가 이제는 해방되어 세속도시라는 새로운 세계에 깊이 몰두할 수 있음을 뜻한다. 이러한 몰두의 첫걸음은 그 독특한 성격에 대해 무언가를 배우는 것이다.
57 세속화란 독일 신학자 프리드리히 고가르텐이 예전에 언급했듯이 성서적 신앙이 역사에 끼친 영향의 정당한 결과다. 이 점은, 역사를 통해 성서적인 종교들이 가장 두드러진 영향을 미치는 동안, 이른바 기독교의 서양문화 안에서 세속화가 가장 먼저 나타났다는 것이 단순한 우연이 아닌 이유다. 자연과학, 민주주의 정치제도, 문화적 다원주의의 발생 — 이 모든 발전을 우리는 보통 서양문화와 관련시킨다 ― 은 성서의 원초적인 자극 없이는 거의 이해될 수 없다. 의식적인 연관성은 오래전부터 사라졌지만 관계들은 아직도 남아 있다. 문화적 충격은 그 원천이 잊힌 후에도 오랫동안 계속 작용한다.
59 라틴어의 모호함이 깊은 신학적 문제를 일으킨다. 그것은 현실에 대한 그리스인의 공간적 견해와 헤브라이인의 시간적 견해 사이의 중대한 차이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리스인들에게 세상온 장소이자 위치였다. 홍미로운 일들이 세상 안에서 일어날 수 있지만, 의미 있는 일은 세상에 결코 일어나지 않았다. 세계사 같은 것은 없었다. 반면에 헤브라이인들에게 세계는 본질적으로 역사이다. 즉 천지창조로 시작해서 종말을 향해 나아가는 일련의 사건들이다. 따라서 그리스인들은 존재를 공간적으로 인식한 반면에 헤브라이인들은 시간적으로 인식했다. 그 둘 사이의 긴장은 기독교신학을 시작 때부터 괴롭혔다.
59 초기 기독교인들을 통해 헬레니즘 세계에 전해진 헤브라이 신앙은 현실에 대한 지배적인 인식을 '시간화하는'데 영향을 끼쳤다. 세계는 역사가 되었다. 코스모스는 이온이 되었고, 문두스는 새쿨룸이 되었다. 그렇지만 그 승리가 완전하지는 못했다. 2세기 교부 시대부터 그 이후 기독교 신학의 역사 전체는, 부분적으로는 급진적인 헤브라이 충격을 반대하거나 약화하려는 지속적인 시도, 즉 공간 범주 속에 역사적인 것을 흡수하려는 시도로 이해할 수 있다. 반대되는 압력과 반대되는 경향은 항상 있어왔다.
62 세속화는 사회와 문화가 종교적 지배와 폐쇄된 형이상학적 세계관의 감독을 벗어나는 거의 되돌이킬 수 없는 역사적 과정을 의미한다. 우리는 그것이 기본적으로 해방시키는 발전이라고 주장했다. 반면에 세속주의는 하나의 이데올로기, 즉 신흥종교와 비슷한 기능을 매우 많이 하는 새로운 폐쇄적 세계관의 이름이다. 세속화는 그 근거를 성서 신앙자체에서 찾으며 어느 정도는 성서 신앙이 서양사에 끼친 영향의 진정한 결과인데 반해, 세속주의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 세속주의는 폐쇄된 주의ism다. 그것은 세속화가 낳은 개방성과 자유를 위협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것이 새로운 기득권 세력의 이데올로기가 되지 않게끔 조심하고 경계해야 한다. 특히 세속주의가 세계관이 아닌 양 가장하면서도, 국가의 기구들을 통해 그 이데올로기를 강요하려는 것을 막아야 한다.
128 역사가 인간의 책임이라고 간주될 때 심문의 정당성 여부가 문제가 된다. 형이상학적 유령이 아닌 인간이 역사적 삶의 의미를 떠안는다면, 자기 씨족의 것과는 다른 목적들을 배척하기보다는 그 진가를 인정할 수 있다. 각기 다른 세계관들은, 서로 간의 파멸이 아닌, 그러한 다양성이 북돋아지고 자라날 수 있는 하나의 사회적인 틀을 만들기 위한 기회를 부여한다. 이상적으로 말하면 세속도시는 그러한 사회다. 세속도시는, 각각의 인간의 목적과 계획이 스스로를 일시적이고 상대적인 것으로 인정하기 때문에, 그 목적들과 계획들이 뒤범벅이 되어도 잘 번성할 수 있는 배경을 제공한다. 진정한 세속성은, 그 어떤 세계관도 그 어떤 전통도 그 어떤 이데올로기도 다른 것들을 용납하지 않는 공식적으로 강요된 유일한 세계관이 되지 않도록 요구한다. 이것은 또 다시 다원주의적 사회 · 정치제도를 요구한다.
146 바르트 신학의 빛나는 업적은 인간을 필요로 하지 않는 신이다. 그러므로 신은 인간으로 하여금 실아가게 할 수 있다. 신과 인간이 서로 충분히 분리되었을 때에만 신은 인간을 제한하거나 억압하지 않으면서 그에게 가까이 갈 수 있다. 이것은 본회퍼가 "...... 우리는 이 세계의 불신앙을 그럴싸하게 얼버무려서는 안 되고 오히려 그것을 새로운 관점에서 드러내야 한다. 이제 세계는 어른이 되었고, 세계는 더욱 신을 믿지 않으며 바로 그러한 이유에서 세계는 전보다 더 신에 가까이 있다"고 썼을 때 뜻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148 신학은 하나의 살아있는 정신이다. 복음은 인간에게 자신의 발전 이전 단계로 돌아가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복음은 인간에게 의존, 두려움, 종교성으로 후퇴하라고 권하지 않는다. 오히려 복음은 상상력이 풍부한 도시성과 성숙한 세속성을 부른다. 복음은 인간에게 이 세계의 문제에 관심을 끊으라고 요청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계의 문제가 지닌 온 무게를 창조자의 선물로 받아들이라는 초대다. 복음은 이 기술 시대의 인간이 되어, 기술 시대가 의미하는 모든 것을 가지고, 그 시대를 모든 이들이 살아갈 인간적인 거처로 만들도록 노력하라는 부르심이다.
231 교회와 이러한 신국의 징표들 사이의 관계는 이중적이다. 교회는 그 징표들 가운데 하나지만 그것은 또 다른 징표들을 가리키고 지원한다. 교회를 신국과 동일시하는 것은 잘못이다. 교회의 존재 전체는 신국이라는 앞선 실체에 완전히 의존하는 파생적인 것이다. 교회의 코이노니아적 또는 예시적인 기능은 교회의 케리그마적 기능과 들어맞는다. 교회의 일은 세계를 향해서 신국의 징표가 어떤 것인지를 선언하며 보여주는 것이다. 즉 교회는 과거가 아니라 미래로부터 역사에 뛰어들어가는 어느 한 실체의 전조들이다. 그것들은 우리가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최선으로잘 대처해야 할 미래의 경고다. 하느님의 전위대는 자신의 삶을 미래의 신국(과거의 전통이 아니라)에 맞추어 형성함으로써, 또한 그 언행을 통해 신국의 다른 징표들이 어디서 나타나는가를 가리켜줌으로써 그 선포를 행한다.
241 예수는 악령과 바리새인들 모두를 패배시켜야 했다. 맹목적이지 않은 복종과 책임 있는 결정을 위해 자유로워지려면, 사람들은 현실관을 왜곡시킨 고대적 유산과 또 그들의 행동을 위축시킨 소심한 율법주의 모두에서 해방되어야만 했다. 예수는 사람들에게 어른이 되라고 요청하는데 이는 그들이 종과 자아가 지닌 유아기적 이미지의 속박을 벗어나는 상태를 말한다. 악령 추방은 마을과 부족의 끈질긴 과거 잔재를 인간의 사회의식에서 벗겨내어 그가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게끔 자유롭게 해주는 과정이다.
242 세속도시에서 교회의 직무는 악령 추방의 현대적 확장을 다뤄야한다. 사람들에게는 다른 세계 ━ 점성학적, 형이상학적 또는 종교적 ━의 매혹에서 벗어나 이 세계의 구체적인 문제들과 맞서도록 권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 세상 안에서만 하느님의 진정한 부르심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주변의 사회 현실을 잘못 인식하게 하는 마취적인 엉뚱한 짓에서, 또 이러한 환상이 불러오는 습관적인 형태의 행동이나 비행동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이 사회적인 악령 추방의 일이다. 이것은 예수에 힘입어 행해졌다. 그의 교회는 이와 똑같은 일을 계속 수행해야 할 것이다.
270 복음은 필요하다면 가족, 종교 또는 종족 관계를 희생시켜서라도 개인적인 결단을 하도록 요구했다. 교회라는 새로운 공동체는 그 이전의 모든 전통 질서와 결정적으로 단절하기를 요구했다. 그것은 민족이나 인종에 따라 무리를 이루는 것을 철저히 상대화 했으며 완전히 새로운 종류의 통합 원리를 낳았다. 교회는 자유로운 선택에 바탕을 둔 공동체였지 혈연관계나 종족 관계에 바탕을 둔 공동체가 아니었다. 초대 기독교인들은 이전의 종교적 · 인종적 금기를 깬 생활을 함께 했다. 그들은 신성한 전통을 소중히 간직하기보다 곧 다가올 미래를 준비하면서 살았다. 결국 여기서 서구 역사의 토양에 조직 원리의 씨앗이 심어졌다.
287 성서에서 인간에게 오는 부름, 즉 소명 vocatio은, 그를 직업으로 불러내는 것이 아니라 그가 무엇을 하고 있건 간에 기쁨과 감사로 불러내는 것이다. 그것은 일과 놀이에 — 또는 일이 놀이의 성질을 갖게 될 수 있는 '새로운 여가'와도 — 똑같이 관계를 갖는다. 여가를 어떻게 이용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성서에서 직접적인 지침을 거의 얻을 수 없다. 왜냐하면, 성서를 쓴 사람들의 시대에는 최소한의 에너지를 들여서 충분한 생산을 할 가능성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성서는 사람이 사람인 한 이마에 땀을 흘리며 애써 일해야 할 것이라고 가정한다. 그러나 일과 땀조차도 언제나 사람의 성장을 저해시키고 왜곡시킬 필요는 없다. 그것들도 또한 사람을 향상시킬 수 있다. 우리는 역사적으로 결정된 일에 대한 성서적 이미지의 형태를 넘어서 그 본질적인 깊이를 보지 않으면 안 된다. 성서에서는, 인간은 그의 창조자이며 부양자이신 하느님 앞에 그가 하는 모든 것에서 성숙과 점검을 실천해야 할 자로 서 있다.
381 인간의 종교적 강박이 신화적인 형태를 지녔건 형이상학적인 형태를 지녔건 간에, 예수로는 결코 만족하지 못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예수 안에서 신은 부족적인 기대를 충족시키거나 철학적인 곤경을 해결해주는 것을 거부한다. 본회퍼가 말하는 바와 같이, 예수안에서 신은 인간에게 신 없이도 잘 살아가고 성숙해지며 유아적인 의존심에서 벗어나 완전한 인간이 되라고 가르친다. 따라서 예수 안에서 신의 활동은 어떤 최종적인 체계를 세우는 데 실마리를 얻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는 얼마 안 되는 찌꺼기를 제공할 뿐이다. 신은 이런 식으로는 이용되지 않을 것이다.
392 우리는 단순히 하나의 새로운 이름을 상상하여 만들어낼 수 없다. 그렇다고 우리가 옛 이름을 제멋대로 내버릴 수도 없다. 신은 역사적 세력들간의 충돌을 통해서, 그리고 신의 현존을 알아내어 그의 부름에 응답하려는 사람들의 신앙심 깊은 노력을 통해서, 자신의 이름을 역사 속에 드러낸다. 새로운 이름은 신이 준비할 때 올 것이다. 그 다른 자the Other를 개념화하는 새로운 방법은 우리 이전의 지나간 역사와 앞에 놓인 사건들 간의 긴장 속에서 나타날 것이다. 그것이 나타나는 때는 도시 문명의 문제들을 과거의 재경험, 현재에 대한 숙고, 미래를 위한 책임에 끌어들일 때일 것이다. 그것이 역사다.
392 이것은 우리가 '신'에 대하여 말하기를 당분간 멈추는 것, 즉 새 이름이 나타날 때까지 어느 정도말에 대한 중지 기간을 가져야 한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새로 나타날 이름이 세 글자로 된 단어 신God이 아닐지도 모르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를 낙담시키지는 않을 것이다. 이름을 짓는 것은 특정한 사회 문화적 환경에 깊이 뿌리박은 인간 활동이기 때문에 거룩한 언어 그 자체는 없다. 그리고 신 God이라는 말도 신성한 것은 아니다. 모든 언어는 역사적인 것이다. 그것들은 태어나고 죽는다. 추측하건 대 신은 영어와 다른 모든 현재의 언어들이 완전히 잊힌 다음에도 영원히 살아 계실 것이다. 신과 특정한 언어의 어휘 사이에 어떤 필수적인 연관이 있다고 믿는 것은 말의 마술에 지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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