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톤 파블로비치 체호프: 갈매기 / 세 자매 / 바냐 아저씨 / 벚꽃 동산


갈매기 / 세 자매 / 바냐 아저씨 / 벚꽃 동산 - 10점
안톤 파블로비치 체호프 지음, 동완 옮김/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갈매기…9

세 자매…77

바냐 아저씨…161

벚꽃 동산…223

곰…293

청혼…311

싫든 좋든 비극배우…329

고니의 노래…339

결혼 피로연…351





갈매기 4막 中


누군가가 책상 가까운 곳 창문을 두드린다.


트레플료프 이게 무슨 소리지? (창문을 본다)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유리문을 열고 정원을 내다본다) 누군가 계단 아래로 뛰어가는 소리가 들렸어. (소리친다) 거기 누구요? (밖으로 나간다. 테라스를 따라 서둘러 걸어가는 소리가 들린다. 잠시 뒤 그가 니나 자레츠나야와 함께 돌아온다) 오, 니나! 니나!


니나가 그의 가슴에 머리를 묻고 숨죽여 흐느낀다.


트레플료프 (격정적으로) 니나! 니나! 당신, 당신이었어. 당신을 보려고 온종일 내 마음이 아프고 괴로웠나 봐. (그녀의 모자와 외투를 벗긴다) 오, 내 사랑, 내 연인, 그녀가 돌아왔어! 울지 말아요, 울지 말아요.

니나 여기 다른 누가 있나요.

트레플료프 아무도 없어.

니나 문을 잠그세요. 누가 들어올지 모르니까요.

트레플료프 아무도 들어오지 않을 거 야.

니나 당신 어머니가 여기 계시다는 거 알아요. 문을 잠그세요…….

트레플료프 (오른쪽 문을 잠그고 돌아온다) 이쪽 문은 자물쇠가 없어. 소파로 막아 놓을게. (문 앞에 소파를 가져다 놓는다) 아무도 들어오지 못할 테니 겁내지 말아요.

니나 (그의 얼굴을 골똘히 들여다본다) 당신 얼굴을 보여줘요. (주위를 둘러보면서) 이곳은 따뜻하고 포근하네요. 예전에 여긴 응접실이었어요 나, 많이 변했죠?

트레플료프 그래, 조금 더 마르고, 눈은 예전보다 더 커졌어. 니나, 지금 당신을 보고 있다는 게 믿기지가 않아. 왜 좀 더 빨리 날 만나러 오지 않은거야? 어째서 날 만나주지 않았지? 당신이 이곳에 온 지도 거의 일주일이 다 되어 가잖아. 난 알고 있었어. 매일 몇 번씩이나 당신의 숙소로 찾아가서 동냥하는 거지처럼 창문 아래 서 있곤 했지.

니나 당신이 날 미워할 거라는 생각에 두려웠어요. 매일 밤 꿈속에서 당신은 물끄러미 날 바라봤어요. 하지만 알아보지는 못하더군요. 아, 당신은 모르실 거예요. 도착한 날부터 줄곧 호수 주변을 서성였어요. 당신 집 근처에도 여러 번 왔었지만, 차마 들어갈 용기가 나지 않더군요 우리 앉아서 얘기해요. (둘 다 자리에 앉는다) 이렇게 앉아서, 그 동안 밀린 이야기나 해요 여긴 좋아요. 따뜻하고, 안락하고…… 저 바람 소리 들리세요? "밤에 자기 집 지붕 아래서 쉴 수 있는 자는, 따스한 구석자리에서 쉴 수 있는 자는 행복하다." 라고 투르게네프가 말했죠. 하지만 나는 갈매기예요…… 아니, 그게 아니에요. (이마를 문지른다) 무슨 말을 했죠? 아, 참……그래요. 투르게네프 얘기를 했지요. "또한 하느님께서는 집 없이 방황하는 나그네를 도우시리라……." (흐느껴 운다)

트레플료프 니나, 당신 또 울고 있군. 니나!

니나 괜찮아요. 울고 나면 마음이 훨씬 가벼워질 거예요. 지난 2년 동안 한번도 울어보지 못했어요. 우리 무대가 아직 있는지 보려고 지난밤 정원에 왔었어요. 여태까지 서 있더군요. 그걸 보고서 2년 만에 처음으로 울어 봤어요. 그랬더니 속이 후련하고 마음도 훨씬 밝아진 것 같았어요. 보세요, 이제 울지 않아요. (그의 손을 잡는다) 그러니까, 당신은 이제 작가가 됐군요. 당신은 작가, 난 배우……. 우리는 둘 다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든 거예요……. 아침에 일어나 노래하는 어린아이처럼 난 즐겁게 살았었죠. 당신을 사랑했고, 명성을 꿈꾸기도 했어요. 지금은 어떤지 아세요? 내일 아침 일찍 농부들로 가득한 삼등열차를 타고 엘츠로 가야 해요……. 엘츠에서는 교양 있는 상인들이 갖은 달콤한 말을 하면서 추근추근 귀찮게 따라다닐 거예요. 고달픈 생활이죠.

트레플료프 엘츠에는 왜 가는 거지?

니나 겨울동안 계약이 돼 있거든요 이제 가야 해요.

트레플료프 니나, 나는 당신을 저주하고 미워했고, 당신의 사진을 찢어버렸어. 하지만 난 내 마음과 영혼이 영원히 당신 것이라는 걸 한시도 잊은 적이 없어. 니나, 나는 당신을 미워할 수 없어. 당신을 잃고 작품을 쓰기 시작한 그때부터 내 생활은 견딜 수 없이 괴로웠지... 젊음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벌써 90년은 산 것 같은 기분이었어. 과거에 난 당신을 소리쳐 부르며 당신이 지나간 땅에 키스했었지. 당신의 미소는 세상을 환하게 밝혀 주었고 나는 그렇게 평생에 가장 행복한 몇 년을 보냈었어.

니나 (절망적으로) 어째서, 어째서 그는 이런 말을 내게 하는 걸까?

트레플료프 나는 너무나 외로워. 날 따스하게 감싸 줄 사람이라곤 아무도 없어. 마치 지하 동굴에서 사는 것처럼 추위. 그래서 무엇을 쓰든, 내 작품은 모두 메마르고 음울하고 거칠기만 하지. 여기 있어 줘, 니나, 부탁이야. 아니면 나도 당신과 함께 떠나게 해 줘.


니나가 서둘러 모자를 쓰고, 외투를 입는다.


트레플료프 니나, 대체 왜……? 제발 부탁이야, 니나! (그녀가 옷 입는 것을 바라본다)


사이.


니나 마차가 뒷문에서 기다리고 있어요. 제발 나오지 마세요. 혼자 가겠어요……. (눈물을 글썽이며) 물 좀 주시겠어요?

트레플료프 (물 컵을 건넨다) 어디로 가려고?

니나 시내로 돌아가야죠. 어머니가 이곳에 와 계시죠?

트레플료프 그래, 지난 목요일부터 외삼촌 건강이 안 좋으셔서, 어머니께 전보를 쳐서 오시라고 했어.

니나 내가 지나간 땅에 키스를 했다니 왜 그런 말을 하세요? 나 같은 건 죽여도 시원찮은 여잔데요. (책상에 기댄다) 너무나 지쳤어요. 조금 쉴 수만 있다면. (머리를 든다) 난 갈매기예요. 아니, 아니지……. 난 배우예요. (멀리에서 아르카디나와 트리고린의 웃음소리가 들려오자 왼쪽 문으로 달려가더니 자물쇠 구멍으로 들여다본다) 그 사람도 여기 있군요……. (트레플료프 곁으로 돌아오면서) 이제 아무렇지 않아요... … 그래요…… 그이는 연극을 믿지 않았고, 내가 가진 연극에의 꿈을 비웃곤 했어요. 그래서 난 점점 의기소침해져 갔고 결국엔 나 자신도 연극을 더 이상 믿지 않게 됐어요. 게다가 그 사람과의 관계나 아기에 대한 걱정에 쫓겨서…… 점점 초라하고 하잘 것 없는 여자가 돼 버렸고, 허수아비 같은 연기를 하곤 했어요. 무대에서 손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어떻게 서 있어야 할지도 몰랐어요. 목소리마저 내 목소리를 낼 수가 없었죠. 당신은 배우가 스스로 졸렬한 연기를 하고 있다고 느낄 때의 그 기분을 이해하지 못할 거예요. 난 갈매기예요. 아니, 아니에요……. 예전에 당신이 어떻게 갈매기를 총으로 쏘아 죽였는지 기억해요? 한 사내가 길을 지나가다가 우연히 만난 여자를 심심풀이로 파멸에 이르게 하는……. 단편소설에 쓸 이야깃거리에요……. 아, 하고 싶은 말은 이게 아닌데……. (이마를 문지른다) 무슨 말을 했더라? 무대 이야기를 하고 있었군요. 이제 난 변했어요. 이제 난 진짜 여배우죠. 연기를 하면서 기쁨과 희열을 느끼고, 무대에 서면 완전히 도취되어 우월한 존재가 된 기분을 느껴요. 이곳에 머무는 동안 걷고 또 걸으면서 생각하고 또 생각했어요. 그러면서 나날이 내 정신적인 힘이 성장하는 걸 느낄 수 있었어요……. 이제 난 알아요, 코스챠, 우리가 하는 일은 모두 마찬가지예요, 당신이 글을 쓰건 내가 무대에서 연극을 하건,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명예가 아니었어요. 중요한 것은 견뎌내는 능력이에요. 자신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짊어지고 견디는 법을 배우고, 또 신념을 잃지 말아야 해요. 난 믿어요, 그래서 난 그렇게 괴롭지 않아요. 나의 사명을 생각할 때면, 난 삶이 두렵지 않아요.

트레플료프 (슬픈 듯이) 당신은 자신의 길을 찾았고, 어디로 가야 할지를 분명히 알게 됐군. 그런데 난 여전히 혼란스러운 망상과 꿈속을 헤매며 이 모든 것들이 도대체 누구를 위한 것인지, 무엇 때문에 필요한 것인지도 모르고 있어. 그 어떤 것도 믿을 수 없고, 무엇이 내 사명인지도 모르겠어.

니나 (귀를 기울이며) 귓! 난 가야 해요. 안녕. 제가 유명한 배우가 되거든 꼭 찾아와 주세요. 약속해 주시겠어요? 그럼 오늘은 이만…… (그의 손을 잡는다) 너무 늦었어요. 난 지금 겨우 서 있는 거예요. 너무 지쳤어요. 배도 고파요.

트레플료프 여기 있어요. 저녁식사를 내올 테니까…….

니나 아니, 아니에요……. 나오지 말아요. 혼자 갈 수 있어요. 가까운 곳에 마차가 있어요……. 그러니까 당신 어머니가 그이를 데려온 거로군요? 뭐 마찬가지죠. 트리고린을 보게 되면 아무 말도 하지 마세요. 난 그이를 사랑해요 전보다 훨씬 더 많이 사랑하죠……. 단편에 쓸 이야깃거리라...... 사랑해요, 그이를 사랑해요. 열렬하게, 그리고 절망적으로 예전엔 얼마나 좋았어요, 콘스탄틴. 기억나요? 얼마나 쾌활하고 밝고 따뜻하고 순수한 생활이었나요! 우리 마음은 피어나는 꽃처럼 부드럽고 달콤한 감정에 취했었죠……. 생각나요? (낭독한다) "사람, 사자, 독수리, 뿔 달린 사슴, 거위, 거미, 물속에 사는 말없는 모든 물고기, 불가사리, 그리고 눈으로 볼 수 없는 것들, 한 마디로 목숨 가진 모든 것들은 슬픈 순환을 마치고 나서 죽어 버렸다……. 수천 세기가 지나는 동안 결국 지구가 품은 생명들 가운데 단 하나도 살아남지 못했으니, 가련한 달은 자신의 등불을 헛되이 밝히고 있을 뿐. 풀밭에서는 학들이 울면서 잠을 깨지도 않으며, 보리수 숲에서는 5월의 쇠똥구리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돌발적으로 트레플료프를 포옹하고는 테라스 쪽으로 달려 나간다)

트레플료프 (사이를 두고) 정윈에서 누가 니나를 보기라도 하면 안 되는데. 어머니가 괴로워하실 거야……. (몇 분간 말없이 서있던 그가 원고를 갈기갈기 찢더니 책상 아래로 던져버린다. 그러고는 오른쪽 문을 열고 나간다)

도른 (왼쪽 문을 열려고 애쓰면서) 이상하군. 문이 잠긴 것 같은데……. (마침 내 안으로 들어와서는 소파를 제자리에 가져다 놓는다) 장애물 경주 같군.


아르카디나, 폴리나가 들어온다. 그 뒤로 몇 개의 술병을 든 야코프와 마샤, 샤므라예프와 트리고린이 들어온다.


아르카디나 포도주와 맥주를 탁자로 가져와요. 카드놀이를 하면서 마실 테니까요 앉으세요, 여러분.

폴리나 (야코프에게) 얼른 차도 내오게. (촛불을 켜고 카드용 탁자에 앉는다)

샤므라예프 (트리고린을 찬장 쪽으로 데리고 간다) 이게 아까 말씀드린 그 물건입니다……. (찬장에서 갈매기 박제를 꺼낸다) 부탁하신 물건이요.

트리고린 (갈매기를 들여다보며) 기억나지 않는군요……. 이런 물건은 제 기억에 없어요.


무대 뒤 오른쪽에서 총성. 모두가 전율한다.


아르카디나 (겁에 질려서) 무슨 소리죠?

도른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무래도 제가 가져온 약병 가운데 하나가 터졌나봅니다. 걱정하실 것 없어요. (오른쪽 문으로 나간다. 잠시 뒤 돌아온다) 짐작했던 대로군요. 에테르가 들어 있던 유리병이 터졌어요. (노래한다) "나는 다시 그대 앞에 넋을 잃고섰노라……."

아르카디나 (탁자에 앉으면서) 휴우, 깜짝 놀랐어요. 어쩐지 소리가 예전의 그…… 그 소리와 비슷해서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다) 눈앞이 캄캄해지더라고요.

도른 (잡지를 넘기면서 트리고린에게) 두 달 전에 여기 실린 미국발 기사와 관련해서 물어보고 싶은 게 한 가지 있었습니다만……. (트리고린을 무대 앞쪽으로 데려간다) 예전부터 꽤 관심을 갖고 있던 문제라서 말이죠……. (어조를 낮추어 낮은 목소리로) 아르카디나를 데리고 이곳을 떠나세요. 트레플료프가 권총 자살을 했습니다…….


―막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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