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븐 그린블랫: 아담과 이브의 모든 것
- 책 밑줄긋기/책 2012-22
- 2020. 12. 9.
아담과 이브의 모든 것 - 스티븐 그린블랫 지음, 정영목 옮김/까치 |
프롤로그:예배의 집에서
1 뼈대
2 바빌론 강가에서
3 점토판
4 아담과 이브의 삶
5 목욕탕에서
6 최초의 자유, 최초의 죄
7 이브 죽이기
8 체현
9 순결과 그 불만
10 낙원의 정치
11 현실이 되다
12 아담 이전 사람들
13 사그라지다
14 다윈의 의심
에필로그:에덴의 숲에서
부록 1 : 해석의 예들
부록 2 : 기원 이야기의 예들
감사의 말
주
참고 문헌
이미지 출처
역자 후기
인명 색인
10 책은 지금까지 전해지는 이야기들 기운데 가장 특별하다고 손꼽히는 이야기의 일대기이다. 하느님은 아담과 이브, 첫 남자와 첫 여지를 창조했고 벌거벗어도 부끄러움을 모르는 그들을 기쁨의 동산에 살게 했다. 하느님은 그들에게 단 하나만 빼고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어도 좋다고 말했다.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밀이라. 이 한 가지 금지 명령을 어기는 날에 그들은 죽을 것이다. 짐승 가운데 가장 교활한 뱀은 여자와 대화를 시작했다. 뱀은 여자에게 하느님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아도 죽지 않고 오히려 눈이 열려 신처럼 변하고 선과 악을 알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브는 뱀의 말을 믿고 금단의 열매를 먹었으며, 그것을 아담에게 주자 아담도 먹었다. 그들은 정말로 눈이 열렸다. 자신들이 벌거벗었다는 것을 깨닫고 무화과 잎을 엮어 몸을 가렸다. 하느님은 그들을 불러 무슨 짓을 했느냐고 물었다. 그들이 자백을 하자, 하느님은 여러 가지 벌을 내렸다. 뱀은 땅바닥을 기며 흙을 먹어야 한다. 여자들은 고통을 겪으며 아이를 낳고 자신을 다스리는 남자를 원하게 된다. 남자들은 실아가기 위해서 땀 홀려 노동할 수밖에 없고 그러다 결국 자신의 출처인 흙으로 돌아가야 한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인간들은, 다른 특별한 나무 一 생명의 나무 一 의 열매를 먹는 것을 막으려는 하느님의 명령에 따라 동산에서 쫓겨났다. 그들이 돌아오려고 시도를 할 경우에 대비해서 동산을 지킬 무장 천사가 배치되었다.
12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지상에 존재한 가장 명석하고 가장 날카로운 정신의 소유자 몇 명을 포함한 수많은 사람들이 성서의 아담과 이브 서사를 있는 그대로의 진실로 받아들였다. 지질학, 고고학, 인류학, 진화 생물학이 쌓은 엄청난 증거에도 불구하고, 우리와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계속 이 이야기가 우주의 기원을 역사적으로 정확하게 설명한다고 받아들이고, 자신을 에덴 동산의 첫 인간들의 진짜 후손으로 생각한다. 세계 역사에 이렇게 오래 지속되고, 이렇게 널리 퍼지고, 이렇게 집요하게 뇌리를 사로잡을 만큼 현실감이 있었던 이야기는 거의 없다.
52 여호와는 지역적인 신이 아니었다. 또는 거기에 머물지 않았다. 「창세기」 작가는 여호와가 우주의 '창조주'라고 단언했다. 그는 어디에나 있고 전능하다. 이것은 그가 첫 인간들을 창조한 것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는 뜻이었다. 그가 자신의 뜻에 따라서 예루살렘을 파괴하고 선택받은 백성을 불복종에 대한 벌로 추방한 것 또한 마찬가지로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거기에서 네부카드네자르는 그의 거룩한 손에 쥐어진 도구에 불과했다는 결론이 나왔다. 바빌로니아인이 예루살렘을 차지하고 여호와의 성전을 무너뜨렸다는 사실은 여호와가 가진 힘의 결정적 증거였다. 세상에서 가장 큰 제국은 히브리 신의 훈육적 목적에 봉사했을 뿐이기 때문이다.
53 그런 절대적 권력을 휘두르는 — 네부카드네자르 같은 존재를 가신을 부리듯이 부릴 수 있는 ― 신은 우주의 주인일 뿐 아니라 그 창조자였으며, 신들 가운데 으뜸일 뿐 아니라 오직 하나뿐인 진정한 신이었고 유대인을 만들었을 뿐 아니라 인류 전체를 만들었다. 포로 생활을 끝내고 돌아온 뒤에 아주 뛰어난 방식으로 엮이게 된 『히브리 성서』는 따라서 아브라함과 히브리인의 기원에서 시작할 수 없었다. 아담과 이브에서 시작되어야만 했다.
82 "너는 신처럼 되었다." 성전의 매춘부는 성적 입문 뒤에 엔키두에게 말한다. 「창세기」 작가는 이 구절을 기억했다가 남자와 여자의 상승이 아니라 파멸을 묘사할 때에 시용했다. 길가메시에게서 죽음을 피할 수 있게 해주는 나뭇가지를 훔치는 뱀은 남자와 여자에게서 영원한 삶의 희망을 빼앗는 뱀으로 바뀐다. 이때 뱀이 여자에게 금단의 열매를 먹으라고 설득하면서 주는 약속이 바로 샤마트가 엔키두에게 주었던 비전이다. "너희가 선들처럼 될 것이다." 엔키두는 실제로 신이 되지는 않았다. 옷을 입고 제대로 먹는 법을 배운 뒤에는 완전히 인간이 되어, 문명적인 삶을 살면서 깊은 우정을 나누고 영웅적 행동을 할 수 있었다. 대가는 치렀지만 ― 이제 자신의 필멸성을자각하게 되었다 ― 필멸성 자체는 처음부터 그의 운명이었다. 전에는 함께 달리던 영양들과 마찬가지로 그냥 그것을 모르고 있었을 뿐이다.
83 「창세기」의 남자와 여자 또한 열매를 먹은 뒤에야 완전히 인간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엔키두에게는 이런 변화가 궁극적으로 축복인 반면, 아담과 이브에게는 재앙이다. 옷은 부끄러움과 결핍에 대한 대응이며, 먹을 것은 잡초가 무성하고 가시가 많은 땅에서 뽑아내야만 한다. 무엇보다도 그들의 생명이 죽음으로 갑자기 종결되는데, 이것은 원래는 피할 수도 있는 것이었다. 그들 또한 더 큰 이해 ━ 선악에 대한 지식 — 를 얻게 되지만 이것은 거의 감당할 수 없는 대가를 지불하고 산 것이다. 만일 히브리 작가가 깊이 자리잡고 있던 메소포타미아의 믿음들을 흔들려고 했던 것이라면, 그는 뛰어난 성공을 거둔 셈이다. 그는 고대의 기원이야기를 거꾸로 뒤집어놓았다. 『길가메시』에서 승리는 「창세기」에서 비극이 되었다.
102 현대에 이루어진 조사에 따르면, 지금도 수백만의 사람들이, 그렇게 많은 과학적 증거들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아담과 이브의 이야기를 알레고리가 아니라 말 그대로 믿고 있다고 고백한다. 이렇게 말 그대로 믿는 이유는 무지와는 거의 또는 전혀 관계가 없다. 그것은 기독교의 역사, '술 수 없는 자' 오리게네스보다 더 튼튼한 철학자의 사상이 새겨진 기독교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 철학자는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였다.
122 황홀경의 순간 이후에 40여 넌 동안 ― 끝없는 논쟁과 권력 행사와 열띤 글쓰기의 세월이었다 — 사제이자 수사들의 공동체의 지도자이자 북아프리카의 도시 히포의 주교인 아우구스티누스는 아담과 이브의 이야기의 이해에 특별히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그는 손에 책을 쥐고 주교 의자에 앉아서, 엄숙한 집회에서 성직자와 회중에게 이야기를 하면서, 복잡한 신학적 쟁점들과 씨름을 하면서, 다양한 친구와 동맹자들에게 지칠 줄 모르고 편지에 또 편지를 구술하면서 그 생각을 했다. 이단에 대항하여 뜨거운 논쟁을 벌이는 내내 그 이야기를 곰곰이 생각했다. 410년 알라리크가 이끄는 서고트족 군대가 사흘간 로마를 약탈했다는 무시무시한 보고를 받았을 때에도 그는 그 신비를 계속 생각했다. 수십 년간 아우구스티누스는 그것이 전혀 이야기가 아니라고, 적어도 우화나 신화라는 의미에서의 이야기는 아니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그것은 말 그대로의 진실이었으며, 그러한 진실로서, 벌어진 모든 일을 이해하는 과학적 열쇠이기도 했다.
123 지적인 지배력, 제도를 이용하는 교활함, 압도적인 영적 카리스마로 이 한 개인은 천천히, 천천히 서구 기독교라는 방대한 기획 전체를 하나의 방향으로 이끌었다. 우리 세계에서 아담과 이브가 독특하게 중심적 역할을 차지하게 된 것은 그의 발군의 노력 때문이다. 많은 반대자들이 있었다. 그때도 지금과 마찬가지로 『성서』에 나오는 마법의 동산의 첫 인간들의 이야기는 첫 눈에는 역사보다는 허구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는 굴복하지 않았다. 그는 선의 계획, 따라서 인간과 나라의 운명 모두가 동산에서 일어났던 일의 현실성과 묶여 있다고 주장했다. 어떤 것도 그의 믿음을 흔들지 못했다. 그의 긴 인생의 마지막에 아프리카에서 로마의 지배가 무너지면서 반달족 전사 약 8만 명이 히포를 포위 공격했을 때에도 아우구스티누스는 여전히 태초에 아담과 이브가 한 일에서 그의 세계에 닥친 재앙의 바탕에 깔린 의미를 찾고 있었다.
149 아우구스티누스는 결코 세계의 모든 기독교인이 자신의 성적 감정이 부자연스럽다거나 악하다고 믿게 만들지는 못했을 지 모르지만, 마니교도나 펠라기우스파와의 중요한 교리 논쟁에서 승리를 거두고, 열정 없이 임신하게 된 동정녀의 기적의 자식이라는 교리 속의 예수의 모습을 강화하는 데에는 일조할 수 있었다. 교리의 문제에서 온건하고 상식적인 입장과 강경하고 비타협적인 급진적 입장이 마주칠 때에는 후자가 승리를 거둘 가능성이 아주 높았다.
150 아우구스티누스는 『신국론』에서 이렇게 썼다. 아담이 타락한 것은 뱀에게 속아넘어갔기 때문은 아니다. 아담은 자만 一 "과도한 고양에 대한 열망" 一 때문에, 또 "유일한 동무와 단절되는 것을 견딜 수 없었기" 때문에 죄를 짓는 쪽을 택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의 타락한 조건이라는 한계 내에서 최선을 다해 아담의 선택을 무효로 만들려고 노력했다. 그는 성자와 같은 어머니의 도움을 받아 열정으로부터 멀어지고, 흥분으로부터 달아나려고 노력했다. 물론, 그는 여전히 그 무의식적인 꿈을 꾸고 달갑지 않은 불끈거림을 느꼈지만, 순수의 상태에 있던 아담과 이브에 관해서 그가 알게 된 것은 그에게 약속해주었다. 그가 언젠가는 예수의 도움으로 자신의 몸을 완벽하게 제어하게 될 것이라고. 그가 자유로워질 것이라고 말이다.
280 그 다음 시의 마지막은 밀턴이 쓴 가장 아름다운 시행들로 꼽힌다. 이 시행들은 계속 선의 섭리에 대한 믿음을 표현하지만 그보다는 자유에 대한 믿음을 훨씬 강하게 표현한다. 밀턴이 믿기에 이것은 하느님이 첫 부부에게 부여한 자유이고, 여전히 모든 인간에게 속한 자유이다. 실락원은 종결부에서 아담과 이브를 그들을 낳은 이야기에서 해방시키고 그들이 함께 불확실한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것을 지켜본다.
그들은 자연스럽게 눈물을 몇 방울 떨어뜨리지만, 곧 닦아냈다.
그들 앞에 온 세상이 펼쳐져 있고, 그곳에서 그들은
쉴 자리를 찾을 것이며, 섭리가 그들을 안내할 것이다.
그들은 손에 손을 잡고 방황하는 걸음으로 천천히
에덴을 통과하여 외로운 길을 갔다. (12:646-49)
아우구스티누스 이후 1,000여 년이 지난 뒤에 아담과 이브는 마침내 현실이 되었다.
289 밀턴이 아담과 이브를 그 어느 때보다 강렬하고 충만한 현실체로 만드는 작업에 착수하던 바로 그 시기에 「창세기」 앞부분 몇 장의 신뢰성은 여러 전선에서 공격을 받고 있었다. 어쩌면 밀턴은 한편으로는 라 페이레르 등 그와 같은 시대 사람들을 동요시키고 있는 도전들을 자각했기 때문에 그것이 동력이 되어 실락원을 쓰는 일에 나섰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 도전들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반응하고 있었지만, 알려진 세계의 엄청난 확장, 그곳에서 사는 무리들 다수에게 보편적인 수치심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상황, 종교전쟁의 잔혹성,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오의 당혹스러운 주장 등 똑같은 지진의 진동을 기록하고 있었다.
302 라 페이레르의 생각이 맞이한 묘한 운명은 아담과 이브 이야기에 늘 잠복해 있는 평준화의 힘을 유용하게 일깨워준다. 중세의 사제 존 볼이 이 힘을 활용하여 귀족의 내재적 우월성이라는 환상에 문제를 제기했듯이 ― "아담이 땅을 파고 이브가 실을 지을 때, 그때 누가 귀족이었는가?" ━ 노예 소유지들은 모든 인류가 단일한 공동 조상 한 쌍으로부터 나왔다는 것은 자신들에게 문제가 될 수 있다고 느꼈다. 그들 모두가 다원발생을 지지한 것은 아니었다. 모든 인류가 아담과 이브의 후손임을 뜨겁게 믿은 유대인과 기독교인 가운데 다수가 얼마든지 같은 후손을 노예로 만들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노예 폐지론자들이 우리가 공유하는 인간성을 가장 강력한 도덕적 논거 가운데 하나로 삼을 것임을 알고 있었다.
342 다윈을 당황하게 했던 고민에 대한 해법은 나에게 없지만, 문제는 다시 아담과 이브 이야기의 지속되는 생명력으로 돌아간다. 오늘날,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에게 이 이야기는 신화이다. 오래된 추측에서 교조로, 교조에서 액면 그대로의 진실로, 액면 그대로인 것에서 현실적인 것으로, 현실적인 것에서 죽을 수밖에 없는 것으로, 죽을 수밖에 없는 것에서 사기에 이르며 뒤엉키는 오랜 역사는 마침내 허구에서 끝이 났다. 계몽주의가 자기 할 일을 했고, 인간의 기원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한때 강력했던 망상의 손아귀로부터 자유로워졌다. 이상한 나무들과 말하는 뱀이 있는 동산의 벌거벗은 남자와 여자는 원래 등장했던 상상의 영역으로 복귀했다. 그러나 그런 복귀가 매력을 파괴하거나 그것을 가치 없는 것으로 만들지는 않았다. 그것이 없다면 우리의 존재는 축소될 것이다. 그것은 여전히 순수, 유혹, 도덕적 선택에 관해서, 사랑하는 짝을 충실하게 대하는 문제에 관해서, 일과 성과 죽음에 관해서 생각하는 강력한, 심지어 불가결한 방법이다. 그들은 인간의 책임과 더불어 인간의 약함의 잊을 수 없는 구현체이다. 그들은 지식을 쫓아 지고의 권위에 복종하지 않는 쪽을 의도적으로 선택할 가능성, 또는 유혹에 빠져 어리석은 선택을 함으로써 그 참담한 결과를 늘 느끼며 살게 될 가능성을 예외적으로 생생하게 전달한다. 그들은 언젠가, 어떤 식으로든 잃어버린 행복을 향해 돌아가는 꿈을 열어두고 있다. 그들에게는 문학의 생명력 ━ 독특하고 강렬하고 마법적인 현실성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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