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티오의 책들 | 숨은 신을 찾아서 — 06

 

⟪숨은 신을 찾아서 - 신념 체계와 삶의 방식에 관한 성찰⟫, 6장

❧ 인간 실존의 물음
“나는 어떤 존재인가, 나는 왜 여기에 있는가,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나의 삶은 의미 있는가, 있다면 그 의미는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내가 참으로 여기는 것은 참으로 참인가, 내가 신을 믿는다고 말한다면, 그러한 믿음은 어떠한 댓가도 바라지 않는 경건한 것인가, 경건한 삶을 살겠다는 소망은 경건한 것인가… 자기 성찰적 물음들”

 

❧ 형이상학적 물음
“자기 성찰을 더 밀고 내려가면 — 사실 나아갈 수는 없다. 자기 성찰은 자신을 절대적 무화의 지점까지 떨어뜨려야 그것이 본래 하려던 것을 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니까 — 자기 자신이 세계의 여타 사물과, 저 앞산에서 잠시 피었다 스러지는 풀꽃과 다르지 않다는 자각에 이르게 되고, 그리하여 자신을 포함한 세계의 모든 사물이 과연 무엇인가를 묻게 된다.”

 

❧ 철학이 하는 일
“철학은 자신이 만들어낸 것을 포함한, 세상의 모든 이야기들을, 믿음의 체계들을 음미한다.”

 

 

2021.05.08 숨은 신을 찾아서 — 06

오늘은 《숨은 신을 찾아서》 제6장을 설명하겠다.
우리가 좀 제대로 살아봐야겠다, 똑바로 살아겠다고 할 때 현대인들은 내가 어떤 사람인가, 내가 사는 환경이 어떤가 이런 것을 따져서 묻는다. 그런데 철학의 역사를 살펴보면 그런 것보다는, 철학은 그런 환경의 관심도 없지 않아 있긴 있었겠지만 정말 그런 삶의 궁극적인 의미를 따져보는 것이 철학이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필멸하는 인간 존재에게 뭔가 의존하기 보다는, 인간이 만들어 놓은 것에 의존하기보다는, 비록 종교나 이런 것들이 인간이 만들어 놓은 것이라고는 하지만, 인간의 가장 큰 소망을 응축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을 아테나이 헬라스 철학에서는 신이라고 하는 이름을 붙이기는 했어도 절대적으로 불변하는 그 어떤 것도 상대가 되지 않는 법칙으로 생각을 했을 것이고, 또는 그것만 가지고는 조금 믿음이 안 생기는 경우에는 신이라고 하는 존재에 인격적인 성격을 붙여서 화도 내고, 벌도 주고 하는 그런 신인 예루살렘의 신이 있었겠다. 그런데 비겁한 것 같기도 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래서 아테나이의 신, 예루살렘의 신에 이어서 하나 더 검토해야 하는 것이 신이 없는 삶에 대한 철학적인 태도, 또는 신념체계이다. 여기서 신이 없다는 것은 절대적으로 불변하는 법칙이나 또는 인격적인 존재에 대한 믿음이 없고 비록 인간은 필멸하는 존재이기는 하지만 그런 필멸성을 안고서라도 내가 사람이 접근 가능할 수 있는 그런 것에 대한 신념을 가지고 그것에서 최선을 다해보겠다는 태도도 있을 수 있겠다. 그래서 4장, 5장, 6장이 한 덩어리라고 할 수 있다. 인간중심의 태도. 정말 권장할 만하다. 유약한 사람이 아니면 계속 끊임없이 추구할 수 있다. 그러나 괴롭다. 계속해서 자기가 자기를 점검해야 하는 것이 괴롭다. 자기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라도 있으면 모르겠는데 그것 없이 바쁘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그냥 내가 나를 돌아볼 틈 없이 산다. 그런 사람에게는 손쉬운 믿음의 대상이 있는 것이 훨씬 나을 수도 있다. 

6장의 첫 문장을 읽겠다. 
Ⅵ 인간존재의 절대적 무를 자각할 때, 그때에야 비로소 신앙이 시작되고, 그것으로써만 신앙이 가능하다는 테제, 이 테제는 용인이 어렵다.

제 정신인 사람은 이렇게 안된다. 내가 절대적으로 아무것도 아니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 

Ⅵ 우리는 그렇게 절박한 세계에 살고 있지 않다. 우리의 나날이 평화롭지는 않아도, 모든 것을 내버린 상태, 즉 무에 스스로를 처하게 할 만큼 우리의 나날이 위험에 처하여 있지는 않다. 그러한 위험만이 우리를 신앙으로 이끈다는 것은, 우리의 삶 전체에 극단적인 선택을 강요하는 것이다. 이것은 상식적 문제 제기이다.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당연히 뭐가 그렇게 인생이 절박하다고 신앙이야라고 한다는 것이다.

Ⅵ 문제 제기를 다시 생각해본다. 신앙은 지성과 다르다는 상식이 있다. 지적으로 자기를 성찰하지 않아도, 날마다 기도를 열심히 하는 것으로, 그것 만으로 신앙은 충분하지 않는가 하는 상식이 있다. 인간 자신이 나약하다는 것을 굳이 지적으로 통찰하지 않아도, 절실하게 신을 간구할 수 있다. 인간의 힘을 넘어서는 위력에 기대어 지적인 사유를 접고 위안을 얻겠다는 태도, 전적인 신앙의 태도, 이것이 그릇된 것이라 말할 수 없다. 

다시 말해서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절대적인 무에서 시작되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이다.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내 영혼의 닭고기 수프 그 정도 아닌가. 그렇다 해도 아무리 자기에 대한 절대적인,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에 신앙이 시작되는 것은 아니라 해도, 자기성찰은 신앙의 필수적 전제이다. 그러나 그것이 신앙은 충분조건은 아니다. 어쨌든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오만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Ⅵ 신앙을 갖지 않아도 도덕적으로 건전한 삶을 산다면 훌륭한 삶을 산 것이라는 상식도 있다. 참으로 논박하기 어렵다.

교회를 다니고 성당을 다니고 절에 다녀도 신앙이 아니라 도덕적, 그게 칸트가 쓴 책인 《이성의 한계 안에서의 종교》이다, 독일 경건주의가 그런 것이다. 그런데 한번쯤은 물어봐야 한다. 뭐냐. 자신들의 도덕적인 신념은 확고한 근거를 가지고 있는가.

Ⅵ 그렇지만 한 가지를 그들에게 물어볼 여지는 남아 있다. 자신들의 도덕적 신념은 확고한 근거를 가지고 있는가? '그렇다'는 대답을 들으면 우리는 물러나야 한다.

제6장이 생각할 것이 이것 저것 있다. 그러고 나서 7장은 분량이 좀 된다. 그런 저런 삶의 태도에 대해서 검토를 해 놓은 것. 그래서 7장이 이론적으로는 중요한 부분이다. 목차를 보면 점이 아니라 숫자가 써있다. 6장은 아테나이의 신, 예루살렘의 신, 그리고 그런 것이 없는 삶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7장은 한번 근본적으로 생각해보자는 장이다. 

Ⅵ 그러한 물음이 그들 자신의 신념 체계에 대한 잠깐의 회의라도 불러일으켜 그들을 더 깊은 의심에서 제기되는 물음들로 나아가게 한다면 우리는 무엇을 더 물어볼 수 있을 것인가. 흔히 철학적 질문으로 간주되는 것들을 나열할 수 있을 것이다. 철학적 질문들, 그것도 사실은 상식적인 것이다.

Ⅵ 나는 어떤 존재인가, 나는 왜 여기에 있는가,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나의 삶은 의미 있는가, 있다면 그 의미는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내가 참으로 여기는 것은 참으로 참인가, 내가 신을 믿는다고 말한다면, 그러한 믿음은 어떠한 대가도 바라지 않는 경건한 것인가, 경건한 삶을 살겠다는 소망은 경건한 것인가… 자기 성찰적 물음들은 끝이 없을 것이다.

자기 성찰적 물음들은 끝이 없고, 이 물음들은 사실 신앙의 물음이 아니라 실존의 물음이다. 굳이 신앙의 물음이 아니라 실존철학이 바로 이런 물음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실존철학이라고 하는 것은 무슨 특정한 철학적 사조라기 보다는 그냥 철학이다. 철학이 물어보는 것이 실존철학의 물음이다.

Ⅵ 도덕적으로 완결된 삶을 추구하는 사람이라 해도 그 추구의 궁극에서 반드시 제기하는 물음들이다. 굳이 철학을 학습하지 않아도 사람들이 내 놓은 물음들이다. 이것을 내놓으면 비웃음을 사기도 한다. 답이 없으니 그러하다. 그래도 한 번쯤은 물어보는 것들이기도 하다.  삶을 다 살아봐도 답을 알 수 없으니 아예 안 물어보는 게 낫다는 사람과, 답을 낼 수 없다는 것을 빤히 알면서도 사람이라면 물어야 하지 않느냐는 사람 사이에 경멸과 냉소를 담은 언쟁이 벌어지는 물음들이기도 하다.

그래도 물어봐야 하지 않겠는가, 물어보는 것이 낫다는 입장에 서야 하지 않는가. 적어도 《숨은 신을 찾아서》를 읽거나 지금 이것을 듣는 분들이라면 물어보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아니겠는가. 

Ⅵ 신앙이 자기 성찰적 물음들을 끊임없이 제기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으로써 신앙이 완성될 수는 없지만, 신앙의 필수적인 단게임을 전제하고 나아가보려는 것이다. 

즉 아무리 신앙심이 깊은 사람이라 해도 그 신앙 이전에 이런 것들을 한 번쯤은 물어봐야 한다는 것이다. 성당을 열심히 다닌다고 하자. 이들의 걱정은 내가 하나님을 제대로 믿고 있나 이런 것들이다. 그런데 이것보다 먼저 있는 물음이라는 것이 이런 물음이다. 무엇인가. 끝없이 자기 성찰적인 물음들을 물어 봐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물음에 대한 응답으로 내가 지금 신앙을 가지고 있는가, 과학적인 법칙을 탐구하고 있는가. 이게 인간학적 물음이다. 

Ⅵ 자기 성찰을 더 밀고 내려가면 — 사실 나아갈 수는 없다. 자기 성찰은 자신을 절대적 무화의 지점까지 떨어뜨려야 그것이 본래 하려던 것을 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니까 — 자기 자신이 세계의 여타 사물과, 저 앞산에서 잠시 피었다 스러지는 풀꽃과 다르지 않다는 자각에 이르게 되고, 그리하여 자신을 포함한 세계의 모든 사물이 과연 무엇인가를 묻게 된다.

자기 성찰을 더 밀고 가면, 위로 가는 것은 안된다. 지극히 사적인 고백. 
자학을 하는 것이 아니라 좀 자기 연민에 빠질 위험을 무릅쓰고 해봐야 한다. 세계의 여타 사물과 저 앞산의 잠깐 피었다 스러지는 풀꽃과 다르지 않다는 자각에 이르게 되고, 그리하여 자신을 포함한 세계의 모든 사물들이 과연 무엇인가를 묻게 된다. 

Ⅵ 자신을 포함한 세계의 모든 사물이 과연 무엇인가를 묻게 된다. 

제6장의 가장 중요한 문장이다. 자신을 포함한 세계의 모든 사물이 과연 무엇인가를 묻게 된다. 이 순간들을 놓치고 가버린 힘들다. 이게 실존의 물음보다 더 근원적인 형이상적 물음이라도 할 수 있다. 

Ⅵ 앞서의 물음들이 이른바 '실존'의 물음이었다면 이는 그것보다 더 넓은 범위의 물음이다. 이 물음은 나 자신을 포함한 세계의 모든 사물들, 즉 존재에 관한 것이요, 좀 더 엄밀하게 말하면 '여기, 이곳'에 있는 존재, 이렇게 공간과 시간으로 규정되는 존재, 즉 정재定在에 관한 것이다. 우리 눈앞에 있는, 현전하는 세계에 관한여 우리는 이야기를 내놓아야만 한다.

정해진 존재, 즉 정재定在. 《철학고전강의》에 나온 부분이다.

Ⅵ 이야기, 그것은 우리가 구성하는 것이다. 

이야기를 해야 한다. 자기가 이 물음에 대해서 답을 내놓아야만 나아갈 수 있다. 아니 나아가는 것은 어려우니까 더 이상 내려가지 않을 수 있다. 

Ⅵ 우리는 비로소 그 사태를 이해하였다고 믿는다. 즉 현전하는 사태들, 정재들에 대한 그럴 듯한, 믿을만한 설명을 꿰어서 체계적으로 만들어낼 때에라야 만족에 이른다. 그렇게 만들어진 이야기는 '신념의 체계'이다. 과학도, 철학도, 종교도, 예술도 이러한 체계들을 만들어내는 일이다. 그런데 철학이 하는 일은 하나 더 있다. 그렇게 만들어진 신념의 체계들이 잘 된 것인지 검토하는 것이다. 철학은 자신이 만들어낸 것을 포함한, 세상의 모든 이야기들을, 믿음의 체계들을 음미한다.

음미라는 말이 중요하다. 이 책은 '신념 체계와 삶의 방식에 관한 성찰'이다. 철학은 이렇게 만들어 놓은 것들을 '음미'다. "철학은 자신이 만들어낸 것을 포함한, 세상의 모든 이야기들을, 믿음의 체계들을 음미한다." 이것이 철학의 개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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