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티오의 책들 | 숨은 신을 찾아서 — 07

 

⟪숨은 신을 찾아서 - 신념 체계와 삶의 방식에 관한 성찰⟫, 7장

❧ 자연과학의 방식
- 확증된 인과의 사슬에 근거한 앎을 추구
- 무지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 불교의 방식
- 무엇이 원인이고 무엇이 결과인지 알아내기 어려운 사태들 속에서 모든 것이 원인이고 모든 것이 결과라는 것
- 가운데 서서(중도中道) 본다(중관中觀)는 것
- “열반이라 하기도 하고, 적멸寂滅이라 하기도 하고, 적정寂靜이라 하기도 하고, 무위無爲라 하기도 하고, 종국終局이라 하기도 하고, 청정淸淨이라 하기도 하고, 해탈解脫이라 하기도 하고, 피안彼岸이라 하기도 한다.”


❧ 기독교의 방식
- 창조론은 의미부여론
- 인간은 신과 같이 스스로 계속해서 이 의미를 만들어 내야만 한다. “그분은 만물 위에 계시고 만물을 꿰뚫어 계시며 만물 안에 계십니다.”(에페소, 4:6)

 

 

2021.05.11 숨은 신을 찾아서 — 07

⟪숨은 신을 찾아서⟫ 제7장은 여러가지 종류의 신념체계들을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 제시하고 있는 신념체계들 중 첫번째로 이야기하는 것은 자연과학의 방식이다. 이게 제일 깔끔하고 가장 현대에 이르러서 제시된 신념체계이다. 이 신념 체계들이라고 하는 것은 사실 자연과학의 방식이라는 것도 여기 34,35,36 페이지에 설명을 해 놓은 부분에도 나와 있지만 우리가 기분이 좋다, 나쁘다 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신념이라는 말을 쓸 때는 기분이 좋다 또는 나쁘다라든가 선악과 관련된 가치판단의 영역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현대의 자연과학은 16세기 이래로 사실판단과 가치판단의 구분이 전제된 상태이다. 더러 자연과학의 판단을 냉담함이라든가 타인에 대한 무관심이라든가 또는 자기가 잘못을 저질러 놓고도 죄책감을 가지지 않는다라고 하는 일종의 사이코패스들의 신념체계와 동일시하는 경우도 가끔 있다. 

고대 희랍의 자연철학부터 생각해보면 굉장히 오랜 세월에 걸쳐서 하나의 신념체계로서 성립해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사실판단과 가치판단의 구분을 해놓고 그 위에 과학이 올라섰다는 것이 굉장히 중요한 과학의 출발점이다. 만약에 인간에게 있어 사실판단과 가치판단이 갈라지느냐고 묻는다면 과학에 대한 형이상학적인 논의가 들어간다. 그런 것을 따지는 것이 과학철학인데, 일단 가능하다고 전제로 과학도 신념체계로 볼 수 있다는 것이 대체로 합의된 내용이다. 과학이 가져다 주는 가장 이점은 관대하다는 것이다. "관대하다는 것은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 몹시 매력적인 요소이다." 

Ⅶ 이방식이 인류의 역사에서 표준적인 것 중의 하나로 받아들여지는 데에는 오랜 세월이 걸렸다는 것, 그것도 최근의 일이라는 것, 그리고 현재까지 발견한 방식 중에서는 가장 덜 폭력적이라는 것, 누구나 설득할 수 있는 절차를 지켜서 증거를 내놓기만 한다면 용인된다는 것, 굳이 이 방식을 신뢰하지 않는다 해도 심정에 괴로움을 주는 일은 없다는 것 ━ 이것은 틀림없다. 관대하다는 것은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 몹시 매력적인 요소이다.

어떤 사태가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을 때 자신이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가, 아주 좁은 의미에서의 삶의 태도, 삶의 방식을 정해야 한다고 한다면, 철학도 과학을 배제하지 않는다, 과학이 현재 내가 사용할 수 있는 과학의 성과와 데이터가 무엇인가를 확인해보는 것 거기서 출발하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 그러려고 노력을 한다. 

과학은 모든 사태를 인과관계로 설명하려고 한다. 과학은 간단하게 말하면 인과율에 근거해서 말하는 것, 원인에 대해서 확정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해서만 분명히 말을 하고, 그렇지 않은 것들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 것, 그것이 과학자들의 올바른 태도, 침묵이다. 뜻밖에도 과학과 철학은 친연성이 높다. 그런데 그 원인이라고 하는 것을 과학이 아무리 찾아낸다 해도 끝이 없다. 알 수가 없다. 무한한 원인, 그리고 무한한 원인에서 생겨난 알 수 없는 결과, 파스칼이 무한한 우주가 나를 두려움에 떨게 한다고 했을 때 석가모니 역시 이러한 심정이 아니었을까 한다. 그 두려움이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어디서 두려움이 생겨날까, 모르니까 그런 것이다.  파스칼은 숨어 있는 신 Deus absconditus이라고 말했는데, 자기가 활용할 수 있는 사상적인 자원이 기독교적인 것밖에 없으니 그렇게 말을 했을 것이다. 석가모니처럼 브라만교 배경에 있었다면 인연, 연기법을 이야기하지 않았을까 한다. 그래서 7장의 순서를 자연과학의 방식, 불교의 방식, 기독교가 말하는 초월적인 신의 방식으로 말했다. 이게 꼭 자연과학, 불교, 기독교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신념체계를 만들어내는 방식에 세가지가 있는 것이다.

일단 자연과학의 방식은 명확하다.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말해버리고 거기서 그친다. 그런데 그것만 가지고는 두려움이 해소되지 않고, 뭔가 좀 알고 싶은 점이 있다. 그럴 때에는 불교적 방식이 있다. 모든 것이 엮여 있다. 이 세상에 태어난 순간 인과의 한 자락을 손에 쥐고 나온다. 사태의 정체성을 확연히 밝혀서 드러낼 수 없는 것, 늘 그러한 것, 상재라고 말하는데 플라톤의 에이도스 같은 것을 상재라고 말한다. 정체성이 없다고 말하는 것인데, 진짜로 없다는 것이 아니라 있긴 있을 텐데 우리가 모르다, 불교의 기본적인 태도는 모른다이고 모르니까 겸손함해야 한다. 

있다고 말할 수도 없고 없다고 말할 수도 없는데 거기에 대고 뭐가 있다고 딱 붙들고서 말을 해버리면 그것이 망집인데 그런 태도를 버리라고 하는 것이 공이다. 그렇다고 해서 공이라고 해서 완전히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말할 수 없다는 뜻이다. 비겁한 것 같지만 사실이다. 그래서 중도라는 말을 쓴다. 가운데 서서 좌우로 봐야 하니까 관조이다. 

Ⅶ 열반이라 하기도 하고, 적멸寂滅이라 하기도 하고, 적정寂靜이라 하기도 하고, 무위無爲라 하기도 하고, 종국終局이라 하기도 하고, 청정淸淨이라 하기도 하고, 해탈解脫이라 하기도 하고, 피안彼岸이라 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렇게만 하면 무기력해질 수 있다. 또하나의 신념 체계를 만들어내는 방식이 바로 초월적 신이다. 사실 신이라고 하는 것은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창조론이라고 하는 것은 의미 부여론이라고 생각한다. 의미를 부여하려면 완전히 무로부터 생겨나야 한다. 창조라는 것이 만들었다는 것이 아니라 의미를 부여하였다는 것, 오늘부터 기점을 삼겠다는 것이다. 그러니 기독교와 과학은 떨어져 있는 것이다. 그래서 창조론과 진화론은 충돌하는 패러다임이 아니다.

신과 같은 존재가 되는 것, 신의 모상 imago dei을 본받고, 신의 눈을 가지고 보는 것 visio dei, 세계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도 그런 의미를 가지고 이해하는 것, 저 다른 사람도 visio dei 같은 것을 것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가게끔 도와주고 그러리라고 하는 것, 그런 메시지를 주기 위해서 예수가 우리에게 왔다는 것이 기독교이다. 그러면 예수를 굳이 그리스도로 영접하지 않는다고 해도 그런 의미를 긍정적이고도 적극적인 의미를 받아들이기 시작하면 그것이 바로 초월적 신의 관점에서 신념체계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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