곰브리치의 불교 강의 - 리처드 곰브리치 지음, 송남주 옮김/불광출판사 |
머리말
배경 지식
제1장 붓다는 왜 위대한 사상가인가
제2장 업설과 사회적 배경
제3장 브라만교에서 발견되는 업설의 선례
제4장 자이나교에서 발견되는 업설의 선례
제5장 붓다의 ‘무아(No Soul)’는 어떤 의미인가
제6장 붓다의 긍정 가치관, 자비
제7장 증거 문헌의 검토
제8장 모든 것은 불타고 있다: 붓다 사상에 있어서 불의 중요성
제9장 인과율 그리고 비우연적 작용
제10장 인식·언어·열반
제11장 붓다의 실용주의와 지적 성향
제12장 붓다의 풍자, 비유로서의 브라만교 용어들
제13장 이 책은 믿을 만한가
부록
참고 문헌
색인
역사적 맥락에서의 업
붓다의 사상을 내가 서 있는 지점에서 해설하기 시작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붓다의 업설부터 시작하려면 자료의 이해가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업설은 한편으로는 제의를 윤리로 대체하였고 이 지점에서 붓다는 말하자면 브라만들에 대적하고 있다. 이 점에 있어서 자이나교는 붓다를 앞섰겠지만그들의 이론은 철학적으로 부족했다. 붓다의 가장 위대한 지적 업적 중 하나는 추상화 능력이었다. 업에 대한 붓다의 논의를 자이나교와 비교하면 이 점은 분명해진다.
3장에서 설명한바와 같이 베단따에 나타난 브라만교의 형이상학은 실제의 모든 아뜨만이 세계 아뜨만(즉 브라만)과 동일하며 그 결과 모든 개체적 아뜨만은 동일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개체성은 환상이며, 따라서 개체적 책임성 또한 환상이다. 붓다는 자신의 업설에서 개체적 책임성을 확립하였을 뿐 아니라 좀 더 광범위하게는 개체성의 원칙을 주장하였다.
붓다는 윤리로 제의를 대체했을 뿐 아니라, 개인적 문제인 의도를 윤리적 가치 판단의 최종적 기준으로 만들었다. 이것은 인류 문명사에서 일대진보였다. 왜냐하면 타당한 도덕적 판단을 할 능력에 각자 차이가 있더라도, 윤리의 차원에서 전 인류는 보편적으로 동등하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붓다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극히 대담한 주장, 즉 우리가 자기 운명의 주인이며, 각자 자기 운명에 책임이 있다는 주장을 펼쳤다. 앞서 주장하였듯, 이러한 주장은 당시의 사회적 환경에서 그의 청중에게 타당성을 갖기에는 매우 생소한 것이었음이 틀림없다. 인류역사상, 꽤 최근까지도 이러한 개인적 책임을 주장하는 교리가 널리 수용된 적은 거의 없다.
사상의 이러한 기원뿐 아니라 그 특징 또한 역사적 맥락에서 고려할 때 이해하기 더 용이하다는 점이 증명되었기를 바란다. 해당 맥락의 두드러진 특징 중 자이나교와 사회경제적 환경은 분명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여타 요소보다 훨씬 강력한 영향을 끼친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브라만교이다. 후대의 불교는 붓다와 브라만교의 관계, 그리고 무엇보다도 붓다가 브라만교 용어를 사용한 상징적 방식을 이해하지 못하였기에 막대한 오해가 초래되었다고 생각한다. 사실 그러한 오해들은 심지어 붓다 재세 시에 시작되었을지도 모른다. 6장의 주제이기도 했던 가장 주요한 오해는 자비심이 그 마음을 최고조로 함양하는 이에게는 구원적일 수 있다는 붓다의 가르침을 파악하지 못한 것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중대한영향 중 두번째는 붓다가 타 문화에 대해 알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붓다는 카스트제도와 그에 따른 브라만교의 사회 이론 전체가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며 다른 사회에는 전혀 해당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이는 유사한 방식으로 붓다의 언어관에도 영향을 미쳤음이 틀림없다. 붓다는 산스끄리뜨어가 실재와 유일무이한 관계에 있다는 브라만적 시각을 연중에 그러나 충분히 분명하게 부정하였다. 제자들이 가르침을 간직할 수 있도록 자신이 말한 그대로를 정확히 기억하도록 권장한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붓다는 자신의 뜻이 여러 다른 언어와 방언으로 전달될 수 있다고 보았다.
비우연적 작용
붓다가 업을 작용으로 여겼다는 점은 철학적으로 지극히 중대하다. 나아가 주체에게 자유의지가 없다면 윤리는 작동하지 않으므로 업은 비결정적 작용이다. 다른 한편으로 업은 우연적일 수도 없다. 만약 우연적 작용이라면 행위와 결과 간의 연관성을 보장할 수 없을 것이다.
보통은 개체로 간주되는 것을 붓다가 작용으로 재해석하게 된 계기는 단지 업설뿐이 아니다. 붓다는 불에 관한 베다의 고찰로부터 영감을 얻어 불을 욕망적이지만 주체 없이도 작동하는, 연료가 떨어지면 단순히 꺼져버리는 비우연적 작용으로 보았다. 그는 불에 대한 사유를 의식에 대한 표본, 좀 더 광범위하게는 삶 및 살아있는 존재의 경험이 어떻게 자기 발생적 작용일 수 있는지에 대한 표본으로 삼았다. 붓다는 주체로서 기능하는 불변의 실체를 부가적으로 상정하는 것이 불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우리를 둘러싼 세계에서 일반적으로 개체로 여기는 것이 실제로는 안정적이지 않고 다만 작용일 뿐이며, 느리든 빠르든 모두 변화하는 것이라면 비록 우연적으로는 아닐지라도 감각의 인지 내용에 대한 우리의 해석은 절대로 완벽히 정확할 수 없다. 여기서 주법은 언어이다. 우리는 우리가 인지하는 것에 이름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우리를 오해로 이끄는 가장 큰 원인은 이 이름들의 고정성이다.
따라서 개념 기관을 낳는 언어를 통해서만 작동한다면, 우리는 항상 진실로부터 얼마간 떨어진 곳에서 지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붓다의 비유가 아닌, 내가 언어의 장막이라 부르는 것을 붓다는 스스로 돌파하는데 성공하였고, 그 결과 무상과 고를 뛰어넘었다. 자기계시의 이 경험은 윤회와 그 결과로 불가피하게 수반되는 모든 고통을 멈추게 할 것이었다. 따라서 그 경험은 진정 성취할 가치가 있는 것이었다. 어떤이는 스스로도 성취할 수 있겠지만 스승이 있다면 그 방향을 제시해줄 수 있을 것이다. 동시에 지시적 언어의 부적절함은 그러한 방향 제시에 유추와 비유를 사용하는 강력한 원인이 되었다.
불교도의 신앙: 의도하지 않은 결과
경전에 따르면 입멸 직전에 붓다는 승단을 이끌 후계자의 지명을 거부했다. 붓다가 말하길 승려들은 다른 누구도 아닌 지신에게 의지하고, 다른 무엇도 아닌 법에 의지해야 한다. 이는 붓다가 깔라마인에게 했던 것처럼 사람들로 하여금 스스로 생각할 것을 촉구했음을 보여줄 뿐 아니라, 사람들이 지신의 가르침을 최상으로 여길 것이라는 붓다의 확신 또한 보여준다.
붓다에 대한 찬양 및 붓다를 초인의 경지에 위치시키는 것은 붓다 재세 시에 이미 시작되었던 것이 분명하다. 종교와 사상의 역사는 모순으로 가득 차 있다. 기독교와 마르크스주의가 가난하고 힘없는 자들에 대한 연민으로부터 싹텄다고 주장할 수 있으나, 가끔은 무자비한 통치자의 손에서 압제의 도구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변화의 창시자들이 아무리 숭고하고 지적이었더라도 자신의 말과 행동으로부터 의도치 않은 결과가 초래하는 것을 막기는커녕 예상할 수도 없다. 복종에 너무나 익숙한 사람들이 기계적으로 따라 말하는 것처럼, 붓다의 추종자들은 항상 되풀이해왔다. "나는 붓다에 귀의합니다. 나는 법에 귀의합니다. 나는 승단에 귀의합니다." 이 세 문구는 정전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이 문구는 감정을 표현하지만, 생각의 거부를 암시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것을 생각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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