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스 큉: 믿나이다

 

믿나이다 - 10점
한스 큉 지음, 이종한 옮김/분도출판사

머리말 : 믿나이다 - 오늘날에도
1 하느님 아버지: 하느님 상과 세계창조
2 예수 그리스도: 동정녀로부터의 탄생과 하느님의 아들됨
3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죽음의 의미
4 저승에 내려가심 - 부활 - 하늘에 오르심
5 성령: 교회, 성인들의 통공, 죄의 용서
6 죽은 자들의 부활과 영원한 생

 



22 중요한 사실: 그 누구에게도 하느님의 존재를 인정하라고 순전히 관념적 · 철학적으로 강요할 수 없다. "하느님"’이라는 초경험적 실재가 있음을 받아들이고자 하는 사람은, 자신을 그 실재에 온전히 실천적으로 내맡기는 것 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 칸트에게도 신의 존재는 실천이성의 요청(증명하기는 어려우나 불가결한 가정)이다. 그러나 나는 오히려 인간의 행위, 이성(데카르트!)과 마음(파스칼!)을 지닌 인간의 행위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다. 좀더 정확히 : 확실한 증거는 없으나 그래도 충분한 근거는 가지고 있는 이성적 신뢰의 행위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다. 마치 어떤 사람이 온갖 회의를 겪은 후 한 사람의 다른 인간을 사랑할 때 그는 엄밀히 보아 자신의 신뢰에 확실한 증거는 없지만, 그래도 가없은 "눈 먼 사랑"의 경우와는 달리, 충분한 근거는 가지고 있는 것과 같다. 눈먼 신앙은 눈먼 사랑과 마찬가지로 무서운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22 지금까지 말한 것에 비추어볼 때, 하느님께 대한 인간의 신앙은 이성적인 증명도 비이성적인 감정도 의지의 결정론적 행위도 아니며, 하나의 근거 있는 그리고 이런 의미에서 바로 이성적인 신뢰다. 이러한 이성적 신뢰는 사색과 의문과 회의를 끌어 안으며, 또한 동시에 오성과 의지, 정서에 밀접히 관계되는 일이다. 바로 이것이 성서적 의미에서 "믿는다"는 말이 뜻하는 것이다. 그것은 단순히 이러저러한 교리들을 옳다고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전체를 내어주는 일이다.
그것도 특정한 교의나 신조가 아니라, 하느님 자신인 그 실재에 스스로를 온전히 내맡기는 일이다. 라틴 교회의 위대한 스승 히뽀의 아우구스티누스가 일찍이 구분했던 대로다. "어떤 것을 믿고" "누구의 말을" 뿐 아니라, "어떤 분을 믿는" 것이다. 이것이 오래된 "믿나이다" Credo라는 말이 뜻하는 것이다.

45 그러나 그런 사정을 떠나 고백하건대 나는 아우슈비츠, 굴락,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겪은 후 정말 더 이상은 "전능하신 하느님"이라는 말을 입에 담을 수 없게 되었다. 그 하느님은 그때 그곳에 "섞이지 않고 떨어져 있는" ab-solut 주권자로서 인간의 온갖 고통으로부터 "벗어나 있었다" 그러면서도 모든 것을 주재하고 모든 것을 행하셨다. 아니 적어도 당신이 원했다면 행하실 수 있었다. 그후에도 그 하느님은 엄청난 자연의 재앙과 인류의 범죄 앞에서 침묵하고 침묵하고 침묵하고 …

47 그러므로 하느님은 세계 진행의 특별히 중요한 이런저런 순간들 또는 갈라진 틈바구니에만 끼어드는 분이 아니다. 오히려 하느님은 창조적이고 완전한 궁극 근원으로서, 이 세계의 세계 내적이고 세계 초월적인 주재자로서, 그분 자신이 원천인 자연법칙들을 온전히 존중하면서 역사하신다. 하느님 자신이 세계 진행의 모든 것을 포괄하고 주재하는 의미 근거다. 물론 이러한 의미 근거는 신앙 안에서만 받아들일 수 있다.

83 동정을 베푸는 게 아니라 오히려 동정심을 불러일으키는 사람, 자신 안에 평정을 이루어 머무르지 않고 스스로를 온전히 내주며 고통당하는 사람이 여기 있다. 그리스도교적 이해에 따르면 이렇게 예수는 헌신과 사랑 안에서 고통받는 자로서, 자비와 호의를 베푸는 붓다와 구별된다. 이렇게 예수는 또한 온갖 신적 존재들, 그리고 신격화된 종교 창시자들과도 뚜렷이 구별되며, 모든 종교직 천재와 스승들 그리고 세계 역사의 영웅과 황제들과도 구별된다: 고통당하는 자, 처형된 자, 십자가에 달린 자로서.

115 예수는 자신의 권위 주장의 근거를 어디서도 제시하는 법이 없다. 과연 그는 전권 논쟁(마르 11,28-33)에서 근거 제시를 단호히 거부한다. 예수는 예언자들처럼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라는 말로 자신을 정당화함이 없이 이 전권을 요구하고, 그것에 의해 행동한다. 여기서는 사제나 율법학자 같은 한 전문가나 전공자가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따지고 근거대고 함이 전혀 없이, 그저 말과 행동으로 하느님의 뜻을 선포하는 한 사람이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127 우리의 괴로움에 함께하시고 우리의 고통(제 탓이든 아니든)을 나누시는 분으로. 우리의 온갖 불행과 불의에 연루되어 숨어 계신 채 함께 고통당하시는 분으로,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끝없이 자비하시고 힘있는 하느님으로 당신을 드러내신다.

166 유대교 · 그리스도교 · 이슬람교 전통은 윤회사상에 맞서 하나의 대안적 해결책을 제공한다. 이 대안은 한국 · 일본 · 베트남에도 영향을 끼치는 중국적 전통에 의해서도 뒷받침되고 있다. 즉, 정화 · 순화 · 해방 · 완성을 위해 인간은 이 세상에서 여러 번의 삶을 거칠 필요가 없다. 인간의 운명은 현재의 삶과 현재의 삶 이후 은총의 하느님의 철회할 수 없는 최종 행위에 의해 결정된다.

180 "교회"는 오직 함께 모임, 집회, 특히 하느님 예배를 위한 집회가 그리스도의 영 안에서 언제나 다시금 새로이 이루어짐을 통해서만 생겨난다. 이것이 교회의 신학적 정당성이다.

193 그러면 누가 스스로를 가톨릭이 타고 말할 수 있을까? 가톨릭 교회, 즉 온전하고 보편적이며 포괄적인 전체교회에 특히 깊은 관심을 가지는 사람만이 근본 태도에 있어서 가톨릭이다.

193 그러면 "복음적 교회"’란 무엇을 뜻하는가? 복음적 교회는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자체에 정향된 교회를 의미한다. 전통을 처음부터 배척하지는 않지만 아주 단호히 교회 안의 모든 권위를 규정하는 권위인 복음에 종속시킨다. 그러면 누가 스스로를 복음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교회의 모든 전통, 교리, 실천을 복음(성서에 기록된)에 터하여 끊임없이 비판적으로 반성하고, 둘째로 이 복음의 규범을 따라 부단한 실천적 개혁을 이룩하는 일에 깊은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만이 근본 태도에 있어 복음적이다. 이러한 복음적 태도는 "로마 가톨릭" 전통주의나 혼합주의와 반대된다. 진정한 가톨릭 전통과 포용성은 이러한 전통주의 · 혼합주의와는 아무 관계도 없다.

204 신약성서에 의하면 속죄는 규정된 속죄 행위의 완수로 끝나버려서는 안된다. 근본적인 것은 세례(본래적인 성인세례)다. 세례는 "죄의 용서"를 위해 베풀어지며, 또한 실제로 새로운 시작을 가능하게 해야 한다. 그러나 이것 역시 분명하다: 세례는 죄의 마술적 소멸을 제공하지는 않는다. 유혹과 시련은 그대로 남아 있다. 악으로부터의 구원을 위해 언제나 다시금 기도해야 하며, 언제나 다시금 용서를 청해야 한다.

214 신약성서에 터해서 볼 때, 삼위일체론의 핵심 문제는 그렇게도 서로 다른 세 존재가 어떻게 본체론적으로 하나일 수 있는가라는 꿰뚫어 볼 수 없는 "신비"로 선포된 그런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예수(또 당연히 성령도)와 하느님 자신과의 관계를 성서에 맞갖게 진술해야 하는가라는 그리스도론적 문제다.

245 개별적인 성서 본문들을 어떻게 해석하든간에, 지옥벌의 "영원성"을 절대적인 것으로 규정해선 안된다.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영원한 고통의 장소의 존재와 동시에 인정한다는 것은 모순이다. 그렇다. 그렇다.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지옥벌" 역시 하느님께, 그분의 뜻과 은총 아래 종속되어 있다.

250 우리가 정직하다면 서로 쉽게 조화되지 않는 신약성서의 진술들에 직면하여, 이 문제를 해결되지 못한 것으로 놔두어 야 한다. 오히려 두 가지 모두를 동시에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즉, 남이 대신할 수 없는 인간 각자의 개인적 책임과, 모든 인간을 감싸는 하느님의 은총 말이다. 이것은 당사자의 태도와 상황에 따라, 실천적으로 2중의 경고를 의미한다.

260 지금까지 말한 것이 우리로 하여금 죽음에 대한 다른 태도를 가지게 할 수는 없을까? 더 정확히 말해: 적어도 죽음이 갑자기 닥치지 않고, 우리에게 죽음을 준비할 시간이 주어진다면, 어떤 다른 죽음이 가능하지 않을까? 필시 고통과 불안이 없지는 않겠지만, 죽음에 대한 공포 없이 죽는 것이 (물론 의사의 성실한 치료와 약품의 도움, 또한 바라건대 좋은 사람들의 보살핌과 동반 안에서) 가능할 수는 없을까? 인간들 및 사물과의 모든 관계가 천천히 끊어지는 가운데 우리는 저 유일한 결합, "되돌아가 결합됨"을 믿고 바란다. 모든 것과 이별하는 (아마 의식적으로 행해지며, 병자성사에서 힘을 얻는) 가운데서도, 죽음은 이미 그리스도인 삶의 한 부분이었다는 것을 깊이 인식하면서, 새로운 시작에 대한 희망을 가진다.

264 그리스도인 실존은 모든 긍정적인 것을 성취할 뿐 아니라, 온갖 부정적인 것 · 고통 · 죄 · 뜻없음 · 죽음을 극복할 수 있는 인본주의를 구체화한다. 그렇게 할 수 있는 힘은 흔들리지 않는 하느님 신앙,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을 믿고 바라는 결정적인 하느님 신뢰에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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