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 헨리 부처: 아리스토텔레스의 창작예술론

 

아리스토텔레스의 창작예술론 - 10점
사무엘 헨리 부처 지음, 김진성 옮김/세창출판사(세창미디어)

옮긴이의 말 5

1장 기술과 자연 15
2장 미학 용어로서 ‘모방’ 25
3장 창작적 진리 69
4장 예술의 목적 107
5장 예술과 도덕성 127
6장 비극의 기능 155
7장 드라마의 단일성 191
8장 이상적인 비극 주인공 223
9장 비극에서 플롯과 성격 259
10장 희극의 일반화 능력 293
11장 그리스 문학에서 창작적 보편성 317

참고 문헌 338
찾아보기 344

 



옮긴이의말
창작이란 무엇인가? 아리스토텔레스가 50세쯤에 쓴 것으로 추정되는 『창작술』에서 던지는 물음이다. 이 저술은 르네상스 이후로 서양의 문예비평사에서 그 영향력이 지대했다. 로스(W. D. Ross)가 그의 저술이 이것 말고 전혀 남아 있지 않았더라도 그를 위대한 사상가 중 한 명으로 손꼽을 수 있다고 평가할 정도다. 이 저술의 그리스어 제목은 Peri poiētikēs이다. 라틴어 명칭은 De arte poetica인데, 그리스어 제목에서 생략된 tekhnē를 오늘날 art(예술)의 어원이 되는 ars로 보충해 주고 있다. 이들 제목을 그대로 우리말로 옮기면 '창작술에 관하여' 또는 '창작론' 정도가 될 것이다. 옮긴이는, 전치사를 생략하고 제목을 다는 서양 번역서들의 관행에 맞춰, 앞의 제목을 약간 바꿔 '창작술'을 아리스토텔레스의 작품에 대한 제목으로 쓰고자 한다.

그리스어 poiētikē(포이에티케)는 원래 건축술, 의술 등의 실용 기술과 순수 기술, 즉 예술을 포괄한다. 앞의 기술은 '제작 기술'로, 뒤의 기술은 '창작 기술' 줄여서 '창작술'로 옮길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관련된 행위, 즉 ‘만듦을 뜻하는 poiēsis(포이에시스)도 그에 맞춰 '제작'과 '창작'으로 각각 옮기는 편이 낫다고 본다. 이렇게 하면 '시창작', '드라마 창작', '음악 창작’ 등의 조어가 쉬워진다. 마찬가지로, 창작에 종사하는 사람을 뜻하는 poiētēs(포이에테스)도 흔히 그렇듯 '시인'이라 옮기지 않고 넓게 '작가'로, poiēma(포이에마)는 '시'가 아니라 '작품'으로 옮겨야 할 것이다.

일본학자들이 번역한 ‘시학'(詩學)이란 말이 현재 통용되고 있지만, 여기에는 몇 가지 문제점이 있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첫째, '시학’에서 '시'(詩)란 말이 문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우리가 흔히 이해하는 특정 문학 장르인 '시'만을 좁게 다루고 있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리스어는 앞서 말한 대로 그 의미의 범위가 제한적이지 않고 넓다. 그의 논의는 언어를 매체로 한 창작 예술, 그중에서도 서사시와 비극에 맞춰져 있지만 음악, 무용, 회화 등 다른 예술 장르에까지 확장된다. 둘째, '시학'에서 '학'(學)이란 말이 문제다. 창작은 여러 가지 언어적, 시청각적 수단을 매개로 인간 삶에 든 보편적 요소를 개연적 · 인과적인 연결로써 재현한다. 이 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창작이 헤로도토스식의 단편적인 역사 서술보다 더 철학적일 수 있다고 본다. 그렇다고 창작이 곧 학문이 되는 것은 아니다. '학문’의 명칭을 얻기에는 그가 요구하는 엄밀한 논증의 요소가 그곳에 없다. '시’가 과연 무엇을 엄밀하게 증명하는 분야인지 의문이 든다. 따라서 '시'라는 말 대신에 '창작'을, '학'이란 말 대신에 '술'을 받아들여, '시학'이란 제목보다는 '창작술'이란 제목을 아리스토텔레스의 작품에 달아야 적절하다고 본다.

아울러 흔히 우리가 '시’라는 말과 연결 짓는 운율이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창작의 절대적 조건인 것은 아니다. 창작의 본질은 운율에 있지 않고, 삶의 예술적 재현과 그 내용에 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르면, 철학자 엠페도클레스의 글은 육보의 운율로 되어 있지만, 창작이 될 수가 없다. 반대로, 호메로스의 서사시가 운문이 아닌 산문으로 쓰여 있더라도 아리스토텔레스는 아마도 창작이라고 부를 것이다. 운문은 언어의 양념에 지나지 않는다. 비극은 이것이 없으면 미적 쾌감을 완전히 산출하지는 못하겠지만, 제 기능을 수 행할 수는 있다.

 

 


'기술은 자연을 모방한다'는 말은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자연의 방법들을 따르고 자연의 결점들을 보완하는 실용 기술에 특히 적용된다

'기술은 자연을 모방한다'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한다. 그리고 이 표현은 반복되었고 예술에 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교설을 요약하는 것으로 통용되었다. 그렇지만 원래의 말은 결코 예술과 실용 기술을 차별하도록 의도되지 않았다. 예술은 자연물의 복사물 또는 재생물이라는 의미를 지닐 가능성도 전혀 없었다. '자연'(nature) 이란 용어가 사용된다는 점만 보더라도 그 문제는 논외일 것이다. 왜냐하면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자연은 창조된 사물들로 된 외부 세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창조력, 우주의 생산 원리이다. 그 표현이 나오는 각 경우의 맥락이 그것의 정확한 적용을 결정한다. 『자연학』에서 비교의 요점은 기술과 자연에서 모두 재료(hyle) 와 본질적 형상(eidos)의 결합이 있다는 점, 그리고 이 두 가지 요소에 관한 앎은 의사와 건축가와 마찬가지로 자연 철학자에게도 필요하다는 점이다. 『기상학』에서 요리는 자연계에서 열의 우발적인 작용에 의해 산출된 결과들과 비슷한 결과들을 산출하는 인위적인 방식으로 언급된다. 당시의 의학 이론에 따른다면 소화는 바로 자연에 의해 신체 안에서 수행되는 요리 과정의 사례로 주어진다. 앞에서 인용된 곳에서 '기술'은 문맥상 실용 기술에 국한된다. 그러나 유비는 그곳에 머물지 않는다. 넓은 의미로 받아들인 기술은 자연처럼 일정한 목적들을 기도하고, 수단들을 목적들에 적응시키면서 이미 어느 정도 부지중 기술자인 자연으로부터 암시를 얻는다.

기술 전반이 자연의 방법을 모방하지만, techne란 표현은 실용 기술을 특히 언급하는데, 이 기술은 겨눠야 할 정확한 목적을 자연으로부터 배운다. 목적을 선택할 때 자연은 틀림없는 본능으로써 행동하고, 그 목적을 얻고자 하는 노력은 전반적으로 성공적이다. 그러나 교사와 의사가 실수하듯 때로는 자연도 실수한다. 그것은 실수라기보다는 실패라고 불려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자연이 잘못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자연의 합리적인 의도는 자연이 부릴 수밖에 없는 물질에 내재한 결함에 의해 좌절되기 쉽다. 자연은 제한 조건들에 종속되어 있고, 그것이 가진 물질로부터 최선의 것을 만들 수 있을뿐이다.


예술에 공통된 특징으로서 '모방':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새롭게 해석된 통용된 표현

'예술'(fine art)이란 용어는 그리스인으로부터 우리에게 전해 내려온 것이 아니다. 그들의 표현은 '모방 기술들', '모방양식들' 또는 때때로 '자유 기술들'이었다. 창작을 포함한 예술에 공통된 특징으로서 '모방'(imitation) 은 아리스토텔레스에 기원을 두지 않았다. 어쩌면 예술과 산업적 생산 간의 대조를 두드러지게 하는 말로서 이미 대중 언어에 통용되었을 것이지만, 그 표현이 문학에서 그렇게 적용된 경우는 플라톤에서 처음 등장한다. 모방 개념은 우리 마음속에서 창조적 자유의 결핍과, 그대로의 또는 예속적인 복사와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그 단어는 플라톤에서 아리스토텔레스로 전달되면서 이미 얼마간 그러한 비난의 연상들에 물들어 있었다. 현실 세계는 이상적인 원형의 약한 또는 불완전한 반복이라는 플라톤의 견해는 어떤 의미에서, 그리고 보다 더 낮은 차원에서, 현실 세계를 단순한 모방 세계로 간주하는 데에 이르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방식이 그랬듯이, 통용되는 표현을 수용하고 그것을 새롭게 해석했다. 사실, 그는 때로는 그 표현에 의해 잘못 인도되었을지도 모르고, 드물지 않게 그의 의도는 그가 낡은 정형화된 표현을 고집함으로써 불분명해진다. 그러나 그는 그리스 예술과 문학의 걸작들에 비추어 여러 측면에서 그 표현에 주목함으로써 그 의미를 심화시켰고 풍부하게 만들었다.

 


미적 모방의대상은
인간의 성격 (ethos), 감정 (pathos), 행동(praxis) 이다

‘자연을 모방한다는 것'은 그 말을 대중적인 의미에서 받아들일 때,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예술의 기능이 아니라는 점이 이미 언급되었다. 미적 모방의 실제 대상들은 세 가지 ━ 성격 (ethe), 감정(pathe), 행동 (praxeis) ― 이다. ethe는 특징적인 도덕적 성질, 지속적인 정신 성향을 의미하는데, 그것들은 일정한 의지 상태를 드러낸다. pathe는 보다 일시적인 감정, 지나가는 감정 양상들이다. praxeis는 고유한 내적인 의미에서의 행동이다. 외부 과정이나 결과, 즉 일련의 외부 현상들 중 하나로만 간주된 행위는 미적 모방의 진정한 대상이 아니다. 예술이 재생산하고자 하는 praxis는 주로 내부과정, 즉 외부로 작용하는 심리적 에너지이다. 행위, 사고, 사건, 상황은, 내부의 의지 작용으로부터 나오거나 사유나 감정의 어떤 활동을 꾀어내는 한, 그것 아래에 포함된다.

'행동하는 인간'은 예술에 의해 ― 극 창작이나 서사시 창작뿐만 아니라 행동이 보다 분명하게 재현되는 모든 창작에 의해― 모방되는 대상들이라는, 『창작술』 2장에 사용된 다소 놀라운 표현에 대한 설명이 여기에 놓여 있다. 정신적 삶을 표현하는 모든 것, 이성적 개성을 드러내는 모든 것은 그러한 넓은 의미의 '행동'에 포함될 것이다. 그러한 행동들이 반드시 일정 기간에 걸쳐 일어나는 과정들인 것은 아니다. 그것들은 한순간에 실현될 수도 있다. 그것들은 특정한 분위기, 주어진 상황에서 집약될 수 있다.


예술 작품은 원본의 유사물(homoioma)이지
그것의 상징적 재현물(semeion)이 아니다

예술 작품은 원본의 유사물 (homoioma)이나 재생물이지, 그것의 상징적 재현물이 아니다. 그리고 이 말은, 예술가가 실제 세계의 모델에 기대든, 아니면 마음속의 실현되지 않은 이상에 기대든, 유효하다. 그 구분은 아리스토텔레스 자신의 예증들에 의해 보일 수 있다. 기호나 상징은 표현된 사물과 어떠한 본질적인 유사성도 자연적인 연관도 갖지 않는다. 말한 단어들은 정신 상태들의 상징들이고, 쓰인 단어들은 말한 단어들의 상징들이다. 이것들의 관계는 합의적이다. 다른 한편으로, 정신적 인상들은 기호들이나 상징들이 아니라, 외부 존재의 복사물들, 사물들 자체의 유사물들이다. 감각적 지각 행위에서 대상들은 정신에다 도장 반지처럼 자신들의 각인을 찍고, 그렇게 기억에 새겨진 그림은 초상에 비유된다. 그래서 예술 창작품들은 말하자면 '상상'(phantasy)을 위해 존재하는 그림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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