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유병자들 - 크리스토퍼 클라크 지음, 이재만 옮김/책과함께 |
옮긴이의 말
감사의 말
1914년 유럽 지도
서론
1부 사라예보로 가는 길들
1장 세르비아의 유령들
2장 특성 없는 제국
2부 분열된 대륙
3장 유럽의 양극화, 1887~1907
4장 유럽 외교정책의 뭇소리
5장 얽히고설킨 발칸
6장 마지막 기회: 데탕트와 위험, 1912~1914
3부 위기
7장 사라예보 살인사건
8장 확산되는 파문
9장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프랑스인들
10장 최후통첩
11장 경고사격
12장 마지막 날들
결론
11 이 책의 주제인 1차 세계대전 발발 직전의 '7월 위기'는 역사상 가장 복잡한 위기, 쿠바 미사일 위기마저 무색케 하는 위기 중의 위기로 꼽힌다. 이 전쟁의 기원 또는 원인을 다룬 문헌만 해도 하나의 ‘산업'이라 불릴 만큼 방대하다. 이런 이유로 저자의 말마따나 "이 전쟁의 기원에 관한 관점들 가운데 일군의 선별한 자료들로 뒷받침할 수 없는 관점은 사실상 없다." 이를 잘 아는 저자는 특정한 개전 원인에 초점을 맞추어 또 하나의 가설 또는 관점을 내놓기보다는 전쟁을 불러온 핵심 행위자들의 결정을 시간순으로 차근차근 따라가는 접근법을 택한다. 다시 말해 그들 간 상호작용의 연쇄를 면밀히 추적한다. 같은 맥락에서 저자는 그들의 결정을 최대한 그들 자신의 위치에서 이해하기 위해 전쟁이 '왜' 일어났느냐는 물음보다는 ‘어떻게' 일어났느냐는 물음에 주목한다. 저자의 지적대로 전쟁이 '왜' 발발했느냐는 물음은 무려 2000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대참사가 ‘누구' 때문에 일어났느냐는 책임론으로 흐르기 십상이다. 이런 책임 지우기는 개전 이전부터 시작되어 1919년 베르사유조약의 ‘전쟁 책임' 조항(전쟁 발발의 책임은 독일과 그 맹방들에게 있다)과 그에 따른 막대한 배상금부과, 1960년대 독일 역사가 프리츠피셔의 ‘피셔 테제'(독일 카이저 빌헬름 2세와 그의 각료들이 유럽에서 독일의 고립을 타파하고, 국내 불만 세력을 억누르고, 무엇보다 세계 강국으로 발돋움하기 위해 사전에 전쟁을 계획하고 결국 실행에 옮겼다는 관점)를 거쳐 지금까지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
12 '왜'가 아닌 ‘어떻게'에 초점을 맞추는 저자는 핵심 의사결정지들이 당시 상황을 어떻게 경험하고 바라보았는지, 정책을 세우면서 어떤 계산을 했는지, 그들의 결정 이면에 어떤 이유나 감정이 있었는지 이해하고자 한다. 저자는 그들의 미래가 닫혀 있었다고 전제하는 우를 범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에게 다양한 선택지가 열려 있었고 그들 각자 실제 역사와는 다른 미래의 씨앗을 품고 있었다고 힘주어 말한다. 그들은 역사의 비인격적인 전진 운동에 보조를 맞춘 조력자, 체제의 논리에 따라 움직인 꼭두각시에 불과했던 것이 아니라 행위능력으로 가득하고 충분히 다른 미래를 실현할 수 있는 주역이었다. 전쟁은 불가피한 귀결이 아니라 그들이 내린 연쇄 결정의 정점이었다.
13 1차 세계대전 이전 유럽은 어느 나라든 내게는 ‘방어적' 의도가, 상대에게는 ‘공격적' 의도가 있다고 말하는 세계였다. 오스트리아 참모총장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처럼 초지일관 전쟁을 역설한 호전파가 있기는 했지만, 실제로 집행부 전체를 놓고 볼 때 전쟁을 적극적으로 계획한 국가는 없었다. 그럼에도 믿음과 신뢰의 수준은 낮고(심지어 동맹들끼리도) 적대감과 피해망상의 수준은 높은 집행부들이 서로의 의도를 제대로 알지 못한 채 속사포처럼 상호작용한 결과, 사상 최악의 대참사가 일어났다. 핵심 의사결정자들은 자국을 최우선하는 이해관계에 매몰되어 지신의 노력이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 결코 전망하지 못했다. 요컨대 저자의 비유대로 "1914년의 주역들은 눈을 부릅뜨고도 보지 못하고 꿈에 사로잡힌 채 자신들이 곧 세상에 불러들일 공포의 실체를 깨닫지 못한 몽유병자들이었다."
[…]
853 두 가지는 특히 강조할 필요가 있다. 하나는 발칸전쟁으로 강국들과 약국들 간 관계가 위험한 방식으로 재조정되었다는 것이다. 오스트리아 지도부와 러시아 지도부 모두 발칸반도 사태를 통제하려는 투쟁이 특히 1912~1913년 겨울 위기 동안 새롭고 위협적인 국면으로 접어들었다고 보았다.
그 결과 중 하나가 프랑스-러시아 동맹의 발칸화였다. 프랑스와 러시아는 서로 다른 속도와 이유로 오스트리아-세르비아 접경지역에 지정학적 방아쇠를 설치했다. 발칸 개시 시나리오는 시간을 두고 꾸준히 숙성시킨 정책이나 계획, 책략이 아니었으며, 두 나라가 1912년과 1913년에 채택한 입장과 이듬해 전쟁 발발 사이에 어떤 필연적이거나 선형적인 관계가 있었던 것도 아니다. 발칸 개시 시나리오(사실 상 세르비아 개시 시나리오)가 1914년 실제로 일어난 전쟁을 향해 유럽을 몰아간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이 시나리오는 위기가 발생할 경우 그것을 해석할 개념적 얼개를 제공했다. 그리하여 러시아와 프랑스는 세계 최강 반열에 드는 양국의 운명과 소란스럽고 때때로 난폭하게 구는 세르비아의 불확실한 운명을 매우 비대칭적인 방식으로 한데 묶게 되었다.
854 문제는 세르비아 당국이 암살을 초래한 영토회복주의 활동을 어느 정도는 억압하지 않으려 했고 어느 정도는 억압할 수 없었다는 것만이 아니다. 베오그라드에 대한 요구사항에 약속 이행을 감독하고 강제할 수단을 집어넣으려던 빈의 권리를 세르비아의 우방들이 인정하지 않은 것도 문제였다. 그들은 세르비아의 주권과 양립할 수 없다는 이유로 그런 요구를 거부했다 2011년 10월 유엔 안전보장 이사회에서 시리아의 반체제 시민들이 학살당하는 것을 막기 위해 아사드 정권에 제재를 가하자는 제안(나토 국가들이 찬성했다)을 두고 벌어진 논쟁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연출되었다. 이 제안에 맞서 러시아 대표는 서구 열강 특유의 부적절한 "대결접근법"이 반영된 생각이라고 주장했고, 중국 대표는 시리아의 "주권"과 양립할 수 없으므로 제재는 부적절하다고 주장했다.
854 유책성 문제는 어떻게 되는 걸까? 베르사유 강화조약 제231조에서 전쟁 발발의 책임이 사실상 독일과 그 동맹들에게 있다고 명시한 이래 유책성 문제는 1차 세계대전의 기원을 둘러싼 논쟁에서 줄곧 중심이나 그 언저리에 있었다. 책임 공방은 결코 호소력을 잃지 않았다. 이 전통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주장은 '피셔 테제'다. 이는 1960년대에 프리츠 피셔와 이마누엘 기이스, 그리고 이들보다 어린 스무 명 남짓한 독일동료들이 개진한 일군의 주장을 가리키는 약칭으로, 이들은 전쟁 발발의 주된 책임이 독일에 있다고 보았다. 이 견해에 따르면(피셔 학파 내 여러 견해차는 제쳐놓고) 독일 정부는 발을 헛딛거나 미끄러져서 전쟁에 말려든 것이 아니다. 그들은 전쟁을 선택했다.
856 1914년 전쟁 발발은 온실 안에서 연기 나는 권총을 손에 쥔 채로 시체를 지켜보는 범인을 발견하며 끝나는 애거서 크리스티 류의 드라마가 아니다. 이 이야기에는 연기 나는 총이 없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주요 인물들 모두가 연기 나는 총을 쥐고 있다. 이렇게 보면 1차 세계대전 발발은 범죄가 아닌 비극이었다. 이를 인정한다고 해서 프리츠 피셔와 그의 역사 서술을 지지한 동료들이 올바로 주목한 오스트리아와 독일 정책수립지들의 호전성과 제국주의적 피해망상을 꼭 최소화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독일인들만 제국주의자였던 것도 아니고, 그들만 피해망상에 굴복했던 것도 아니다. 1914년에 전쟁을 불러온 위기는 유럽 국가들이 공유한 정치문화의 소산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다국적이고 진정으로 상호적인 위기이기도 했다. 그랬기 때문에 1914년 위기가 현대의 가장 복잡한 사건이 된 것이고, 가브릴로 프린치프가 프란츠 요제프 거리에서 치명적인 총알 두 발을 발사한 지 한 세기가 지난 지금까지도 1차 세계대전의 기원을 둘러싼 논쟁이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857 한 가지는 분명하다. 1914년에 정치인들이 얻고자 다투었던 상들 가운데 그 무엇도 뒤이은 대재앙을 감수할 만큼 가치 있지 않았다. 그 주역들은 판돈이 얼마나 큰지 이해하고 있었을까? 다음 번 대륙 분쟁은 18세기에 군주들끼리 벌인 전쟁처럼 짧고 격렬한 전쟁이 될 것이고 남자들은 속담처럼 '크리스마스 전에 귀향' 할 것이라는 착각에 1914년 유럽인들이 동조했다는 것이 지난날의 통념이었다. '단기전 환상'이 만연했다는 이런 견해는 훗날 의문시되었다.
858 그들은 위험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위험을 실감하기도 했을까? 이것은 1914년 이전과 1945년 이후의 차이점 중 하나일 것이다 1950년 대와 1960년 대에는 의사결정자들과 일반 대중 모두 핵전쟁의 의미를 직관적으로 파악했다(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위에 생긴 버섯 구름 이미지가 일반시민들의 악몽에 나왔다). 그 결과 인류 역사상 최대 규모의 군비 경쟁이 벌어졌음에도 초강대국들 간 핵전쟁으로 귀결되지 않았다. 1914년 이전에는 상황이 달랐다. 많은 정치인 들의 마음속에서 단기전에 대한 기대와 장기전에 대한 두려움은 이를테면 서로를 상쇄하여 위험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게 막았다.
859 저널리스트는 이렇게 논평했다. "우리는 그의 너그러운 동기를 이해하지만, 언젠가 전쟁에서 수적 열세일 것으로 예상할 수밖에 없는 이상 우리가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해 그런 무기를 두려움의 대상인 무기를 가지고 있음을 우리의 적들도 아는 편이 나을 것이다." 기사는 프랑스가 자국무기의 끔찍한 위력에, 그리고 "우리가 자신 있게 경이롭다고 말할 수 있는 의료조직"을 갖추고 있다는 사실에 기뻐해야 한다는 선언으로 끝난다. 우리는 전전 유럽 어디서나 이렇게 언변 좋은 견해를 발견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1914년의 주역들은 눈을 부릅뜨고도 보지 못하고 꿈에 사로잡힌 채 자신들이 곧 세상에 불러들일 공포의 실체를 깨닫지 못한 몽유병자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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