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릭 클라인: 고대 지중해 세계사 ━ 청동기 시대는 왜 멸망했는가?
- 책 밑줄긋기/책 2012-22
- 2021. 10. 4.
고대 지중해 세계사 - 에릭 클라인 지음, 류형식 옮김/소와당 |
도판목록 7
편집자 서문 _ 고대사의 터닝 포인트 9
저자 서문 _ 청동기 시대의 종말 12
서막 _ 문명의 붕괴 : 기원전 1177년 17
제1막 _ 고대의 민족들과 무기 : 기원전 15세기 39
제2막 _ 기억해야 할 사건 : 기원전 14세기 87
제3막 _ 신과 나라를 위하여 : 기원전 13세기 135
제4막 _ 시대의 종말 : 기원전 12세기 183
제5막 _ 퍼펙트 스톰 241
후기 _ 재앙의 여파 293
등장인물 305
미주 310
참고문헌 338
찾아보기 377
12 그리스의 경제가 흔들리고 있다. 내부 반란이 리비아, 시리아, 이집트를 집어삼켰다. 외부의 전사들이 불꽃을 더욱 키웠다. 터키는 불똥이 될 까봐 두려워하고 있다. 이스라엘도 마찬가지다. 요르단은 난민들로 넘쳐난다. 이란은 호전적으로 위협을 가하고 있고, 이라크는 혼란에 빠져 있다. 2013년 이야기일까? 그렇다. 그러나 기원전 1177년에도 똑같은 상황이었다. 무려 3천 년 전, 지중해 청동기 문명이 하나씩 차례로 무너졌고, 이후 서양 문명의 미래는 완전히 바뀌었다. 역사 속에서 핵심적인 순간, 즉 고대 세계의 터닝 포인트였다.
에게 해, 이집트, 근동의 청동기 시대는 기원전 3000년경부터 기원전 1200년 직후까지 지속되었다. 수백 년 동안 문화와 기술의 진보 끝에 마침내 종말이 찾아오자, 지중해 지역 대부분의 문명 사회 및 국제 관계는 극적으로 멈추어 섰다. 서쪽으로는 그리스와 이탈리아에서부터 동쪽으로는 이집트, 가나안, 메소포타미아에 이르는 방대한 지역이었다. 종말과 함께 변화의 시기가 찾아왔다. 한때 학자들은 그 과도기를 세계 최초의 암흑기로 간주하기도 했다. 그리스와 그 영향권 안에서 새로운 문화가 재탄생하기까지는 수백 년이 걸렸다. 그 때 재탄생한 무대 위에서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서양문화가 발전해 왔다.
비록 이 책은 주로 3000년 전 청동기 시대 문명의 붕괴와 붕괴를 초래한 요인들에 대해서 살펴볼 것이지만, 이 이야기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글로벌 국제 사회와 관련된 교훈을 담고 있다.
19 전사들이 세계사의 무대에 등장했다. 그들은 신속하게 움직이며 가는 곳마다 죽음과 파괴의 흔적을 남겼다. 현대의 학지들은 그들을 뭉뚱그려서 "해양민족"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그들의 침략을 기록으로 남겼던 이집트인들은 결코 그렇게 부르지 않았다. 그들은 함께 움직였지만 몇 개의 그룹으로 나누어졌다. 펠레셋, 제케르, 셰켈레쉬, 샤르다나, 다누나, 웨세쉬 등 이국적인 외모만큼이나 이국적인 이름이었다.
이집트의 기록 말고는 우리가 그들에 대해서 아는 것이 거의 없다. 우리는 해양민족이 어디에서 왔는지도 잘 모른다. 아마도 시칠리아나 사르디니아, 이탈리아 등지에서 왔을 것이다. 또 다른 시나리오에 의하면 에게 해나 아나톨리아 서부, 혹은 키프로스나 지중해 동부일 수도 있다. 고고학적으로 그들의 본거지 혹은 그들의 출발지로 확인된 지역은 없다. 그저 그들이 끊임없이 한지역에서 다른 지역으로 옮겨 다녔고, 가는 곳마다 이 나라 저 나라를 침략했던 것으로 추측할 뿐이다. 이집트의 기록에 의하면 그들은 먼저 시리아에 캠프를 차렸다가 이후 가나안 지역의 해안(현재의 시리아, 레바논, 이스라엘 포함)을 따라 내려왔고, 이집트의 나일 삼각주로 진입했다.
그 해는 기원전 1177년, 람세스 3세의 재위 8년째 되던 해였다. 고대 이집트인들의 기록에 의하면, 그리고 비교적 최근의 고고학적 증거에 의하면, 해양민족들 중 일부는 육지로 왔고, 다른 일부는 바다를 건너왔다. 무슨 제복을 갖추어 입지도 않았고 세련된 모습도 아니었다. 옛날 그림 속에 남아 있는 그들의 모습을 보면 일부는 깃털로 머리장식을 했고, 다른 일부는 챙이 없는 모자를 덮어쓰고 있다. 또 어떤 이들은 투구를 쓰고 있기도 하고, 맨머리를 드러내고 있기도 하다. 짧은 구레나룻 수염에 짧은 주름치마를 두른 이도 있고, 가슴을 드러내거나 얇은 외투를 걸치기도 했다. 또 다른 이들은 얼굴에 수염
이 없고 좀더 긴 옷을 걸쳤는데, 마치 스커트를 입은 것 같다. 이런 모습들을 보면 해양민족은 서로 다른 지역과 다른 문화권 출신의 다양한 그룹으로 구성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날카로운 청동검, 나무 막대 끄트머리에 번쩍이는 금속을 장착한 창, 활과 화살로 무장을 하고, 배나 마차, 수레, 전차를 타고 그들은 왔다. 핵심적인 연대로 기원전 1177년을 상정하긴 했지만, 사실 침략지들은 상당 기간 동안 여러 차례에 걸쳐 파도의 물결처럼 밀려들어왔다. 때로는 전사들끼리 왔고, 때로는 가족을 동반하기도 했다.
145 울루부룬 배를 누가 그리로 보냈는지, 어디로 가고 있었으며 그 이유는 무엇인지, 우리는 결코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기원전 13세기 초, 지중해 동부와 에게 해 전역에 걸쳐 수행되었던 국제적 무역과 접촉의 축소판이 그 배에 실려 있었다는 시실이다. 화물의 출발지가 최소한 7 군데 이상이었으며, 난파선이 가나안의 배였음에도 불구하고, 선원들의 소지품을 조사해본 결과 최소한 두 명 이상의 미케네인이 배에 타고 있었다. 분명 이 배는 어느 고립된 문명이나 왕국이나 지역에 속해 있지 않았다. 오히려 무역과 이주민과 외교와 심지어 전쟁이 벌어졌던 서로 연결된 사회에 속해 있었다. 그 때가 사실상 최초의 글로벌 시대였던 것이다.
195 우가리트는 파괴되었다. 그것도 굉장히 폭력적인 방식으로 그리되었음에 틀림이 없다. 암무라피 왕 재위 시절이었던 기원전 1190년에서 기원전 1185년 사이였다. 이후 다시 그 도시가 점령된 것이 페르시아 시대였으니까, 이후 거의 650년의 공백이 있었다. 발굴 보고에 의하면 "도시 전역에서 파괴와 화재의 흔적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무너진 성벽, 불에 탄 벽돌 회반죽, 잿더미" 등이었다. 장소에 따라 파괴된 잔해가 2 미터 높이로 쌓여 있는 곳도 있었다. 가장 최근의 발굴 책임자인 마그리트 욘에 따르면, 주거 지역 건물의 무너진 천장과 테라스가 발견되었다. 또한 "성벽은 사라지고 그 잔해가 무더기로 쌓여있었다." 욘은 이러한 파괴가 지진보다는 적들의 공격으로 인한 것으로 추정하였다. 이전에 섀퍼도 도시 내에서 시가전을 포함한 격렬한 전투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한 바 있다. 욘이 그렇게 추정한 근거는 "파괴된 잔해 속에 화살촉이 곳곳에 흩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246 섀퍼가 우가리트에서 발굴했다고 보고한 지진은 우가리트에서만 일어난 사건이 아니었다. 그것은 당시 여러 번에 걸쳐서 발생했던 지진 중의 하나였을 뿐이다. 고대 세계에 연속적으로 닥친 지진을 현대의 우리는 "지진 폭풍"이라고 한다. 당시 지진 단층이 "활성화"되어서 그 압력이 모두 분출되는 동안 수 년 혹은 수십 년 동안 지진이 연속적으로 일어났던 것이다.
에게 해 지역에서 당시 지진이 일어났던 곳은 미케네, 티린스, 미데아, 테베, 필로스, 키노스, 레프칸디, 메넬라이온, 테살리 지역의 카스타나스, 카라코우, 프로피티스 엘리아스, 글라 등이다. 동부 지중해 지역에서도 당시 여러 도시에서 지진 피해를 입은 것으로 드러났는데, 예를 들면 아나톨리아에서는 트로이, 카라오글란, 하투사; 레반트 지역에서는 우가리트, 메기도, 아쉬도드, 아코; 키프로스에서는 엔코미 등이다.
258 내부 반란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무역로의 단절은 필로스나 티린스나 미케네 같은 미케네 지역 왕국에 심각하고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이들은 청동을 만드는 데 필요한 구리와 주석을 모두 수입에 의존해야 했다. 또한 다른 원자재들도 막대한 양을 수입에 의존했던 것 같다. 예를 들면 금이나 상아, 유리, 에보니 목재, 향수의 원료인 테레빈유 등이다. 지진 같은 자연재해 때문에 무역로가 일시적으로 막혔을 수도 있다. 그러면 가격이 올라가 오늘날 인플레이션이라고 부르는 것과 유사한 현상이 나타나고, 외부의 침략자들이 해당 지역을 목표로 삼아 더욱 영구적인 파괴로 이어지게 된다. 그러나 그런 침략자가 누구였단 말인가? 우리가 해양민족이라고 불렀던 사람들이 그들일까?
259 최근 밝혀진 바에 의하면 북쪽으로부터의 침략은 없었고, "도리아인의 침략"으로 미케네 문명이 무너졌다는 생각은 근거가 없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후대의 고전 그리스 시대 전통에도 불구하고 도리아인은 청동기 시대 후기의 종말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으며, 그 일이 있은 다음에야 그들이 그리스 지역으로 진출했다.
262 우가리트가 파괴된 이후 다시 사람들이 그곳에 살지 못했던 가장 합리적이고 완벽한 이유는, 도시가 철저하게 파괴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국제무역 시스템이 완전히 붕괴되었기 때문이었다. 학자들의 말을 빌리자면, "청동기 시대 후기 우가리트와 비슷한 운명을 겪었던 레반트 지역의 다른 도시들과 달리 우가리트가 잿더미를 딛고 다시 일어서지 못했던 것은 도시의 파괴로 인한 고통보다 더더욱 근본적인 어떤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278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 청동기 문명의 붕괴 양상은 렌프류가 설명한 기준에 부합한다. 전통적인 엘리트 계급이 소멸했고, 중앙 행정과 중앙집중화된 경제가 붕괴했으며, 주거지가 이동했고, 인구가 줄었고, 사회정치적 통합의 단계가 더 낮아졌다. 8세기 이후 호메로스가 쓴 트로이 전쟁 이야기는 말할 것도 없다. 우리가 확인한 것은 기원전 1207년과 기원전 1177년 해양민족의 침입을 넘어서는, 기원전 1225년에서 기원전 1175년까지 그리스와 지중해 동부 지역을 휩쓸었던 지진을 넘어서는, 같은 시기 해당 지역을 휩쓸었던 가뭄과 기후 변화를 넘어서는 "퍼펙트 스톰"의 결과였다. 이로써 번성했던 청동기 시대 문화와 민족들, 미케네와 미노아로부터 히타이트, 앗시리아, 카시트, 키프로스, 미타니, 가나안, 심지어 이집트도 마찬가지였다.
284 실제로 어떤 문명이 침략자나 지진으로 인해 예전의 상태로 회복되지 못하는 경우도 있고, 가뭄이나 반란으로 무너지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청동기 시대 후기의 종말에 대해서는 이 모든 요인들이 다 함께 문명의 종말을 초래했다고 설명하는 것보다 더 나은 대안은 없다. 따라서 기존에 제시된 증거들로 보자면, 우리는 시스템 붕괴가 원인이 되어 일련의 사건이 서로 연결되면서 "복합 효과"가 나타났고, 그 속에서 하나의 요인이 다른 요인들에 영향을 미쳤고, 각각의 요인들이 극대화되었던 것이다. 아마도 지진이나 가뭄 둥의 재난 가운데 하나만 닥쳤다면 사람들은 살아남았을 것이다. 그러나 지진, 가뭄 침략 등의 재앙이 빠른 속도로 연이어서 나타났다면 살아남기 힘들었을 것이다. "도미노 효과"가 이어졌고, 그 속에서 하나의 문명이 떨어져 나가자 그 결과 다른 문명이 무너지게 되었다. 당시의 세계화된 특성 때문에 국제 무역로나 심지어 하나의 사회가 무너짐으로 인해 다른 여러 문명들이 사망에 이르렀을 수 있다. 만약 실제로 그러한 상황이었다면 종말을 초래하는 데 꼭 거대한 사건이 있어야만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295 이상으로 청동기 시대 후기의 3세기 이상(기원전 1500년경 하트셉수트 재위 때부터 기원전 1200년경 모든 것이 무너졌을 때까지) 지중해 지역에서 미노아, 미케네, 히타이트, 앗시리아, 바빌론, 미타니, 가나안, 키프로스, 이집트가 참여했던 국제적 사회와, 이들 모두가 함께 만들었던 범국제적이며 범세계적인 시스템을 살펴보았다. 이러한 국제적 시대는 그 이후로 근대에 이르기까지 거의 형성된 적이 없었다. 청동기 시대의 마지막에 전례 없는 대재앙을 초래했던 것은 바로 이러한 국제성이었다. 근동 지역과 이집트 및 그리스의 문화는 매우 얽혀 있었고 상호의존적이었다. 기원전 1177년에 하나가 무너지자 궁극적으로 다른 사회들도 하나씩 차례로 무너졌다. 번성했던 문명들은 사람에 의해 혹은 자연에 의해 혹은 그 둘의 조합으로 인해 치명적인 붕괴에 이르렀다.
302 청동기 시대 후기는 당연히 세계의 역사상 황금기 중의 하나로, 고대 글로벌 경제가 번창했던 시기로 평가되어 왔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의문을 갖게 된다. 이 지역에 종말이 오지 않았다면 세계사는 다른 방향으로, 다른 길을 걷게 되었을까? 그리스와 지중해 동부 지역에 연속된 지진이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가뭄도 없고, 기근도 없고, 이주민과 침략자도 없었다면 어쨌을까? 청동기 시대 후기는 어쨌거나 막을 내렸다. 그것은 모든 문명이 성장하면 무너지기 때문일까? 어찌되었거나 이후에는 발전을 하게 되는 걸까? 발전은 계속될 수 있을까? 기술과 문학과 정치 등이 실제로 역사상 등장했던 시점보다 더 앞서 발전할 수는 없었을까?
물론 이는 수사학적 질문에 불과하며 누구도 대답을 줄 수 없는 질문들이다. 청동기 문명은 어쨌거나 멸망했고, 그리스에서 레반트까지, 그리고 그 너머 지역에서도 근본적으로 새로운 발달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새로운 사람들, 그리고/혹은 새로운 도시 국가들, 지중해 동부의 이스라엘, 아람, 페니키아, 이후 그리스의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일어섰다. 그들로부터 새로운 발전과 혁신적인 아이디어가 나왔다. 알파벳 유일신, 민주주의 같은 것들이다. 때로는 크게 번진 들불이 오랜 숲에 새로운 생태환경을 만들어 새롭게 번창하도록 해주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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