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성욱: 사신을 따라 청나라에 가다 ━ 조선인들의 북경 체험

 

사신을 따라 청나라에 가다 - 10점
손성욱 지음/푸른역사

 

책머리에

제1부 유람하다
북경의 첫인상 | 청나라 사행의 필독서 | 사라진 코끼리, 사라진 청나라 | 원명원, 청나라 성쇠의 극치 | 사찰을 유람하다 오르는 법장사 백탑 | 북경 공중목욕탕에 몸을 담근 조선 선비 | 큰 코 오랑캐가 사는 아라사관 | “이 무슨 술수인고!” 러시아인이 찍어 준 사진 | 사진, 위험한 만남의 흔적

제2부 교유하다
우정을 전하는 선물 | 조선 사신 숙소 옆에 인삼국 | 부유한 금석학자와 교유하다 |
북경에서 꿈을 펼친 역관 이상적 | 고염무 사당에서 제사를 올린 박규수 | 사행으로 오경석 컬렉션을 만들다 | 오경석 사진에 담긴 기묘한 희망

제3부 교섭하다
청나라가 유일하게 거절한 책봉 | 왕의 동생, 국본國本이 가당한가 | 전례에 어긋난 왕세자 책봉 | 조선 사신단의 북경 숙소 | 신하 된 자가‘ 외교’를 할 수 있는가 | 조선 최초의 외교 공관 | 전쟁통에 떠난 사행, 마지막이 되다

제4부 사행 이후
옛 황제의 수도에 세워진 공사관 | 북평잡감

참고문헌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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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그때 나는 조선 사신이 청나라에 다녀온 여정을 기록한 연행록을 한창 읽고 있었다. 19세기 중국적 세계질서의 동요와 변화에 관심이 있었기에, 청나라와 가장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던 주변국인 조선의 기록에서 그러한 흔적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우선 잘알려진 김창업의 《노가재연행일기》, 홍대용의 《을병연행록》,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읽었다. 이런 얘기가 왜 영화나 드라마로 만들어지지 않나 의문이 들 정도로 흥미진진했다. 재미와 함께 사행록과 연행록에 대해서도 감도 잡았다. 이제 격변의 시기에 쓰인 19세기 연행록으로 진격하면 됐다.

19세기 연행록만 해도 100종이 넘는다. 이들 이야기도 3대 연행록 만큼 재미있으리라 생각했지만 착각이었다. 한편 한편 읽어 나기는 것이 곤혹스러웠다. 내용이 비슷비슷해 읽을수록 모래알을 씹는 기분이었다. 조선시대는 중국에 관한 정보를 쉽게 얻을 수 있던 시대가 아니었다. 오직 그곳을 다녀온 이들의 이야기를 통해서만 알 수 있었다. 연행록은 재미있는 외국 여행기이자, 조선 사신들이 사행을 준비하며 읽는 가이드북이었다. 그런데 이전의 연행록을 통해 사행을 준비하면서 비슷한 경험을 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비슷한 여정이라도 모든 경험이 똑같을 수 있는가. 어떤 이는 흔한 일을 별일처럼 쓰기도 하고, 감추고 싶은 이야기를 과감히 드러내기도 한다. 지겨워 더는 못 읽겠다 싶을 때, 그런 얘기가 툭툭 나왔다. 1862년 청나라에 사행을 갔던 이항억은 《연행일기》에 한국 최초의 사진 촬영 기록을 남겼다. 유리판에 사람을 옮기는, 조선인이 이해하기 힘든 마법 같은 경험이었다. 이제 북경에서 사진 찍는 것이 새로운 유행이 됐을 것 같다는 촉이 왔다. 1871년까지 사행 기록 20여종을 읽으며 관련 기록을 찾았다. 하지만 사진을 찍었다는 이야기는 어디에도 나오지 않았다. 체념하려는 순간 1872년 청나라에 다녀온 이면구의 《수사일록》에서 사진 이야기를 발견했다. 유레카! 나는 이런 발견의 발견의 즐거움을 나누고 싶었다.

20 조선인들은 오랑캐의 운은 100년을 못 간다며 청나라가 망하길 기대했다. 하지만 청나라는 쇠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점점 강성해졌으며, 중화의 정수를 계승해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청은 명을 부정하지 않았다. 명의 수도였던 북경에 수도를 세운 것에서 알 수 있듯 그들은 명을 계승했다. 명은 천운이 다해 사라진 것이며 청은 그 자리를 대신한 것이다. 그러한 기반 위에 주변을 복속시키고 천하의 질서를 만들어 갔다. 오랑캐가 100년이 지나도 망하지 않고 더욱 흥하니, 분명 천운을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39 북경 사람들이 황제의 행차를 어떻게 봤는지는 알 수 없다. 황제의 모습을 기록하는 것은 불경죄에 해당한다. 발각되기라도 하면 사달이 날 수 있으니 감히 기록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조선 사람들은 달랐다. 언제 또 황제를 볼수 있겠는가. 평생 한번 있을까 말까 한 경험이니 적지 않은 기록을 남겼다. 다만 그리 좋게 보지는 않았다.

52 법장사 백탑은 조선 사신의 또 다른 흥취를 돋구웠다. 바로 탑에 올라 제명을 쓰는 것이었다. 말 그대로 나 여기 왔다 갔노라 하고 흔적을 남기는 것이다. 이러한 낙서를 시작한 이는 《노가재연행일기》로 유명한 김창업이다.

57 조선에는 원래 공중목욕탕이 없었다. 공중목욕탕은 1880년대에 들어서야 등장했다. 강화도 조약으로 부산을 개항하자 부산 동래에 많은 일본인이 몰려들었다. 목욕 문화가 발달한 일본인들은 온천을 만들었고, 이후 목욕업을 들여왔다. 1880년대 부산, 인천, 원산 등 개항징에 일본인이 운영하는 공중목욕탕이 등장했다. 1900년 전후 한성에 한국인이 운영하는 목욕탕도 생겼다. 이항억은 이보다 앞서 목욕탕을 체험했다.

60 조선 양반은 체면 때문에 목욕탕에 가지 않았을까, 아니면 체면 때문에 기록을 남기지 않은 것일까. 이항억처럼 기록을 남길 용기가 없었으리라. 조선 사람은 사정만 된다면 '고린내'를 풍기기보다는 깔끔을 떨었기 때문이다. 19세기 후반 유명 사진작가였던 존 톰슨의 목격담이 이를 증명한다. 그는 북경에서 우연히 조선 관원의 사진을 찍을 일이 있었는데, 그들의 정결함에 상당히 놀랐다.

62 18세기 조선 선비의 눈길을 끈 학문으로 북학北學과 서학西學이 있다. 18세기 초반 조선과 청의 관계가 점차 안정화되면서 청의 문물과 학문에 관심을 두었으며, 선교사들에 의해 청에 유입된 서학에도 큰 관심을 두었다. 당시 조선 사회에 서학에 관한 관심을 중폭시킨 것은 사신들의 북경 천주당 관람을 통해서였다. 18세기 후반에 북경으로 오던 조선 사신은 너나없이 천주당을 구경했다.

62 서양인과 서양 문물을 접촉할 수 있는 곳으로 아라사관도 있었다. 아라사는 러시아를 음역한 것이다. 청나라 문헌에서는 아라사, 나찰, 알로사 등으로 표기되기도 했는데, 아라사가 가장 많이 쓰였다. 아라사관은 이름 그대로 러시아인들이 북경에서 머물던 공간이다.

65 조선인들은 러시아에 관해 잘 알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부정적 인상을 갖고 있었다. 우선 러시아인들에게 명나라 시절부터 조선 사신들이 머물던 회동관을 뺏겼다고 생각했다. 북경에 외국 사절을 위한 관사가 여럿 있었다. 그중 가장 크고 위치가 좋은 관사를 러시아 사절단이 차지했다. 그곳은 조선 사신이 주로 머물던 곳이지만, 러시아 사절단이 오면 숙소를 내줘야 했다.

69 조선 사신과 러시아인은 빈번하게 교류했다. 하지만 그 교류는 비대칭적이었다. 러시아인은 조선에 관해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조선말도 조금 배웠고, 역사와 지리에 관한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조선인에게 러시아는 모피, 청동거울 등 사치품을 팔고, 19세기 들어 천주당을 대체한 유람 공간에 불과했다. 그저 호기심을 만족하는 데에만 그쳤고 러시아가 얼마나 크고 어디 있는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그들과 학문과 종교에 대해서는 거의 무지했다. 여전히 그들은 흉포하고 야만스러운 이들이라 생각했다.

136 사역원에 소속된 역관은 수백 명에 달했다. 그중 사행에 참여하는 역관의 수는 30명이 되지 않았다. 사행의 기회조차 잡기 쉽지 않다. 순번을 정해 놓고 북경에 다녀오면 다행이다. 하지만 기회라는 것이 그리 공평한 것이 아니다. 일 잘하는 사람을 자꾸 보내게 되는 것이 당연한 이치고, 인맥에 좌지우지되기도 했다. 역관 명문가 출신이었던 이상적과 오경석이 열 차례 이상 사행을 다녀온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144 오경석은 신미양요 때 미국이 힘없이 돌아가는 바람에 흥선대원군은 조선이 서양을 대항할 능력이 있다고 생각했지만, 이는 망상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급변하는 정세를 볼 때 조선은 청나라 일본처럼 조만간 외국 국가들과 교류하게 되겠지만, 그것이 평화적으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보지 않았다.

145 오경석에게 절실했던 것은 신분적 속박을 벗어날 개혁이었을 것이다. 그는 메이어스에게 서양도 조선처럼 통역관
을 경멸하고 무시하는지 물은 바 있다. 그 누구보다도 바깥세상을 잘 알고 있는데, 중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그의 의견은 무시되었다. 신분의 한계에 갇혀 무력감과 좌절감을 느꼈다.

197 사신이 파견되는 것은 대부분 조공과 책봉에 관한 것이다. 실질적인 사무에는 정식 사신이 파견되지 않았다. 칙사는 황제의 대리인이요, 조선사신은 국왕의 대리인으로 외교문서를 전달할 뿐이지 임의로 외교 교섭에 나설 수 없었다.

239 북경 공관은 1905년 11월 대한제국과 일본이 을사늑약을 체결하며 철수하는 운명을 맞이한다.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박탈되면서, 일본은 대한제국이 해외에 설치한 상주 공관은 모두 철수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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