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쿠치 요시오: 결코 사라지지 않는 로마, 신성로마제국
- 책 밑줄긋기/책 2012-22
- 2021. 9. 29.
결코 사라지지 않는 로마, 신성로마제국 - 기쿠치 요시오 지음, 이경덕 옮김/다른세상 |
서장 신성로마제국이란 무엇인가
제1장 서로마제국의 부활
제2장 오토 대제의 즉위
제3장 카노사의 굴욕
제4장 바르바로사―참된 세계제국을 꿈꾸며
제5장 프리드리히 2세―‘제후들의 이익을 위한 협정’
제6장 ‘대공위시대’와 윤번제 천하 지배
제7장 금인칙서
제8장 카를 5세와 환상의 합스부르크 세계제국
제9장 신성로마제국의 사망 진단서
종장 매장 허가증이 나오기까지의 150년
글을 마치고 255
글을 옮기고 259
신성로마제국 연대표 262
찾아보기 268
26 초이머는 사료에 나타난 제국 칭호의 변천사를 꼼꼼하게 살펴 역사 학파가 지닌 비역사적인 성격을 폭로했다. 이 변천사는 '신성로마제국'에서 시작해서 15세기부터는 '독일 국민의'라는 말이 추가되고 점차 위압적인 이름인 '독일국민의 신성로마제국'이라고 불러온 제국의 생태사였다. 그는 다음과 같은 여러 가지 소박한 질문을 던졌다.
먼저 왜 '신성로마제국'인가? 무엇이 '신성' 한가? 신성하다고 말하는 것은 제국이 제정일치 신권국가였기 때문인가? 다음으로 무엇이 '로마적' 이라는 것인가? '로마'라는 말을 쓸 정도로 세계제국이었던가? 도대체 왜 독일이 이런 엄청난 제국 칭호를 내건 것인가? 독일은 그 이름 때문에 어떤 역사를 짊어져야 했는가? 그 엄청난 이름 때문에 오히려 독일이 초라해진 것은 아닌가? 이름은 그것이 가리키는 몸을 나타내는데 과연 독일은 유럽 역사의 중심을 유유하게 활보했는가?
그리고 '신성로마제국'이라는 칭호의 원형인 '로마제국'이라는 이름은 중세 이후 유럽인 전체의 심성에 어떤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는가? 21세기 현재 유럽연합(EU) 가맹국은 영국을 제외하고 통화통합을 이루었다. 이렇게 유럽연합은 19세기 이후 민족주의를 뛰어넘어 유럽 통일을 꿈꾸고 있다. 이것은 과거 유럽에서 통일 국가를 체현한 '로마제국'의 사적이 유럽인의 유전자에 없었다면 불가능한 실험이다.
유럽에서 10세기 이후 매우 더디기는 했지만 '신성로마제국' 이라는 칭호를 확립시키고 18세기에 그 칭호를 망각의 연못에 묻은 독일은 과연 어떤 역사를 지나왔는가?
나는 이 책을 통해 '신성로마제국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계속하며 독일을 중심으로 한 유럽의 역사를 더듬어가 보려고 한다.
44 프랑스왕이 프랑스중 화사상을 버리면서까지 얻기를 원했던 황제권이 알프스 북쪽으로 이동한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황제권의 북방 이동은 황제의 로마 귀환론과 밀집한 연관을 맺고 있다. 즉 로마가 세계를 지배한다는 중세적 제국 이념은 훗날 독일의 역대 황제들에게 "이탈리아를 지배하지 않고 어떻게 황제라 할 수 있겠는가?'라는 강박관념을 심었다. 여기에 독일 황제뿐만 아니라 프랑스 왕도 제위 찬탈을 노리며 끊임없이 이탈리아로 손을 뻗쳤다. 이렇게 이탈리아를 둘러싼 독일과 프랑스의 격돌은 중세 유럽의 역사를 팽팽한 긴장 속으로 몰아넣었다. 좀 이야기가 앞서 가지만 800년 크리스마스에 거행된 카를 대제의 황제 대관식은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유럽 세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62 황제는 독일과 이탈리아를 다스렸다. 그러나 프랑스는 손에 넣지 못했다. 어쩌면 그는 아직 '로마제국 황제'라는 이름을 쓰기에 부족하다고 생각했던 것이 아닐까? 아무튼 작센 왕조의 황제가 지배한 제국은 정식 명칭이 없었다. 게다가 오토 대제가 시작한 '제국 교회 정책'과 이탈리아 지배 또한 장밋빛이 아니었다.
'제국 교회 정책'은 양날의 검이었다. 오토 대제, 오토 2세, 오토 3세 등 황제는 교회 조직을 통해서 제국 전역에 퍼져 있는 통치 조직을 만드는데 어느 정도 성공했다. 그러나 이 통치 시스템이 기능하기 위해서는 교회 조직이 황제의 뜻에 따라야 한다는 대전제가 필요했다. 황제의 서임권과 교황 선출에 대한 승인권이 그것이다. 그러나 교황을 비롯한 로마 교회가 일단 황제에게 반기를 들면 제국의 통치 조직은 곧바로 그림의 떡이 되고 만다. 그리고 로마 교회는 끊임없이 황제로부터 독립하기 위해 몸부림을 쳤다.
100 제후들로부터 버림을 받은 바르바로사는 어쩔 수 없이 당시 군사 기구의 바깥에 있는 용병을 불러 모았다. 황제 스스로 봉건 정규군 대신 용병 부대를 군대의 중심에 배치한 것이다. 황제가 비합법적이었던 용병 부대에 합법성을 부여한 꼴이 되었다. 이후 출세 유럽의 수많은 전쟁을 담당한 것은 이들 용병들이었다.
122 1231년 5월에는 독일의 세속 제후에게 대폭적인 권한을 부여하는 '제후의 이익을 위한 협정'을 체결했다. 이를 통해 독일은 되돌아올 수 없는 길을 일사천리로 달리게 된다. 독일의 무수한 연방국가의 형성이 그것이다. 이후 독일은 갈기갈기 찢긴 분열국가가 되었다.
148 독일이 '대공위 시대'로 불리던 시대에, 이탈리아의 세력 분포가 급변했다. 시칠리아 왕국은 슈타우펜 집안의 대가 끊어진 뒤 프랑스 왕가와 관계가 있는 앙쥬 집안의 것이 되었다. 그리고 로마 교황청은 완전히 프랑스 왕가의 지배 아래에 놓여 있었다. 이 사실은 독일 왕이 황제로서 로마 교황을 보호한다는 구도가 붕괴된 것을 의미하며 교황권의 쇠퇴가 명확해졌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을 상징하는 것이 바로 '아나니 사건(Anagni Incident)'이다.
195 막시밀리안은 1512년 쾰른 제국 회의 최종 의결 문서에서 '독일국민의 신성로마제국'이라는 국호를 사용했다. 이것은 이 칭호가 공식문서에 처음 등장한 예이다. 이탈리아를 거의 상실한 시점에서 이 국호를 채용한 것은 제국의 판도가 독일에 한정된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그것은 '이웃 국가인 프랑스나 이탈리아에 대해 적대적으로 선을 그은 국민 감정의 맹아'이기도 했지만 19세기 역사학파의 주장처럼 독일 민족이 로마제국을 지배했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었다.
200 19세기에 나폴레옹이 그랬던 것처럼 16세기의 프랑스 왕이 프랑스 황제라고 칭할 수는 없었다. 당시 서유럽 사람들이 보기에 황제의 자리는 그 빛나던 고대 로마제국이 남긴 인류 공통의 세계 문화유산과 같은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 황제가 지배하는 제국의 실체가 세계 평화를 보장한다는 제국 이념과 거리가 멀다고 해도 황제의 자리는 의연히 빛을 뿜어냈다. 멋대로 황제를 칭할 수는 없었다. 그것은 제위 찬탈과 다름없었다. 그러므로 프랑스 왕은 현재 시점에서 인정을 받을 수 있는 정식 절차를 밟아서 황제의 자리에 올라야 했다. 이것이 프랑소와 1세가 황제 선거에 뛰어든 이유였다.
221 '오스만투르크는 프로테스탄트의 아군'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종교개혁의 제2세대, 제3세대에 이르면 제후사이의 종교적대립은 순수한 교리 문제보다 세속적인 이해가 중요한 관심사였다. 1555년에 조인된 아우구스부르크의 종교 화의의 슬로건은 "영주의 종교는 영지에 사는 백성들의 종교!" 였다. 이것은 영주가 영지 속에 벌레 먹은 자국처럼 존재하고 있는 교회는 영지를 자신이 믿는 종교로 바꿔도 상관없다는 사실을 의미했다. 한마디로 프로테스탄트 후의 영지에 있는 가톨릭 교회를 프로테스탄트 교회로 바꾼다는 말이다. 그리고 제후는 막대한 교회 재산을 자신의 주머니에 넣었다. 이게 바로 이른바 '교회 영지의 세속화'라고 부르는 현상이었다.
230 독일 삼백 제후에게 각각 동맹권이 있다는 것은 신성로마제국이 완전히 시체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그 때문에 이것을 정한 베스트팔렌 조약은 일반인들 사이에서 '신성로마제국 사망 진단서'라고 불렸다. 이제 신성로마제국은 신성하지도 않았고 로마적인 요소도 없었으며 제국도 아니었다.
244 7년 전쟁의 키워드 가운데 하나는 '동맹국의 교체'였다. 놀랍게도 오랜 숙적이었던 오스트리아와 프랑스가 손을 잡았다. 그리고 그때까지 계속 오스트리아를 지원해 왔던 영국이 변심해서 프로이센과 손을 잡았다. 여기에 러시아가 오스트리아, 프랑스 진영에 가담해 아메리카대륙에서 벌어진 영국과 프랑스의 식민지 전쟁과 함께 7년 전쟁이 일어났다.
252 16세기 합스부르크 집안은 이 유럽 세계 경제라는 세계 시스템을 '제국'화하려는 시도를 했지만 수포로 돌아갔다. 17세기 30년 전쟁 이후 베스트팔렌 조약을 채용해서 유럽은 결정적으로 세계 경제 시스템의 길을 선택했다. 이것은 세계제국 시스템의 포기를 의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성로마제국은 세계제국을 표방한 '제국'의 간판을 내리려고 하지 않았다. 제국을 대표하는 황제들은 삼왕조 시대부터 초지일관으로 세계제국 수립이라는 환상 속에서 자기들의 주체성을 뒷받침할 증거를 찾아내려고 했다. 그러나 그들의 개인적 주체성은 역사를 실제로 움직이는 사회적·경제적 시스템의 변천에 농락당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기들의 정체성이 이런 역사 구조의 그물망 속에만 존재한다는 것을 결코 자각하지 못했다. 그들은 이 작은 그물망 속에서 자기들의 세계제국 이야기를 환각처럼 바라보았다. 그런 그들을 각성시키고 세계제국 환상을 포기하게 만든 것은 그들의 주체성을 훨씬 능가하는 그들과는 전혀 다른 이질적이고 압도적인 주체성의 등장밖에 없었다. 그것이 바로 나폴레옹이었다.
사람은 결국 사람에 의해 움직이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사회적·경제적 시스템의 변천을 알아차리는 것은 언제나 그 변천이 이미 오래 전에 시작되어 슬슬 끝나가려고 할 때이다. 그러한 시간의 틈새에서 많은 사람들이 드라마를 만들어 냈고 신성로마제국은 마침내 세상에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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