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티오의 책들 | 철학 고전 강의 — 26

 

⟪철학 고전 강의 - 사유하는 유한자 존재하는 무한자⟫, 제31강

❧ 존재론과 형이상학의 근본 구도
유한자(대상 세계) — (유한자이면서도 독자적 존재인) 인간 — (신이라 불리기도 하는) 무한자
칸트는 고전적 형이상학에 결정적 단절을 가져왔으므로 이후의 형이상학은 전혀 다른 경로를 취하게 되었다.

❧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무한자에 이를 가능성을 근본적으로 긍정한다.
플라톤은 무한자를 ‘좋음의 이데아’라 함으로써 곤란한 형이상학을 구축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무한자를 ‘부동의 원동자’라 하며, 인간의 실천적 행위의 영역에 관한 논의와 이론적 영역을 구별한다.

❧ 데카르트
인간 자신의 한계에 대한 철저한 고뇌가 있다.
자기의식이 신을 아는 근원이라는 것으로써 고뇌를 이겨내려 한다.

❧ 칸트
과감하게 무한자의 영역에 대한 앎을 단절시킨다.
신, 영혼불멸 등에 대한 사유를 단념할 수 없으므로 ‘이성의 사변적 사용’을 시도한다.

❧ 헤겔
인간의 정신이 가진 위력을 바탕으로 무한자를 향해간다.
칸트라면 무모하다고 여겼을 거대한 체계를 형성한다.

 

2021.05.04 철학 고전 강의 — 26

⟪철학 고전 강의⟫ 제31강, 칸트를 읽다 말고 갑자기 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데카르트·칸트·헤겔 형이상학의 핵심 문제를 정리하는 챕터가 들어갔다. 이 챕터를 칸트 중간에 넣은 이유는 칸트야말고 형이상학에 있어 근본적인 단절을 이룬 사람이기 때문에 형이상학의 역사는, 칸트는 물론 고전적인 의미의 무한자에 대한 탐구를 적극적으로 시도하는 형이상학을 제시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형이상학의 역사에서 칸트 이전과 이후는 분명히 다르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의 감각 기관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들만 탐구의 대상으로 삼는다. 그렇게 되면 아주 좁은 의미의 존재론이 된다. 있는 것. 있는 것이라는 것은 용이 '있다' 이렇게 있다라는 말을 쓰기는 하는데 있는 것이 아직 확인이 되지 않았다. 따라서 없다고 할 수도 없다. 그런데 그런 것은 아직은 머릿속에만 있는 것이다. 우리의 경험을 통해서 증거를 가져다댈 수 없으니까 그런 것만을 존재로 본다면 칸트 이후의 형이상학은 본격적으로 초월적인 것들, 즉 감각기관을 넘어서는 것들에 대해서는 탐구할 수 없는 그런 것이 되었다. 그에 반해서 칸트 이전에는 그런 것들도 있다고 여겼기 때문에, 틀림없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초월적인 것에 대해서도 탐구를 한다고 그러면 그것을 탐구하는 것도 존재론이지만 그 영역에 대해서는 형이상학이라는 말을 붙여서 따로 지칭을 했다. 예를 들어서 칸트 이후의, 칸트의 철학을 탐구의 기본 방법론이나 출발점으로 삼아서 연구를 한 사람들을 묶어서 신칸트학파라고 부른다. 신칸트학파에 속하는 니콜라이 하르트만이 제시한 존재론을 '비판적 존재론'이라고 말하는데 비판적 존재론이라는 말을 들어보면 칸트와 관계가 있다는 알 수 있다. 그런 것을 봐도 칸트가 형이상학과 존재론의 역사에서 후대에 끼친 영향을 봐도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아무리 어떤 철학자가 훌륭하다고 해도 그 사람이 후대에 끼친 영향도 굉장히 중요하다. 물론 시대가 잘못 타고 나서 또는 불운해서 대단히 훌륭한 철학자임에도 후대에 끼친 영향이 적을 수도 있다. 그런 사람은 우리가 발견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그러나 칸트를 읽어보면 대단한 생각을 하는구나를 알 수 있다. 

형이상학의 핵심 문제, 간단하게 말하면 유한자와 무한자의 대립. ⟪철학 고전 강의⟫의 부제가 '사유하는 유한자 존재하는 무한자'이다. 유한자와 무한자의 대립구도를 가지고 설명해 나가는데, 인간은 당연히 유한자에 속한다. 그런데도 무한자에 대해서 생각한다는 점에서는 유한자 중에서는 좀 별종이다. 특이한 존재라고 말할 수 있다. 유한자를 맨 왼쪽에 놓고 자연세계에 있는 대상, 눈 앞의 모든 대상이라고 한다면 그 다음에 중간에 인간을 놓고, 오른쪽에 무한자를 놓고 이렇게 세 가지 항목을 나열할 수 있을 것이다. 유한자가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새삼스럽게 형이상학에서 탐구할 필요가 없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소멸하는 것들, 변화에 내맡겨져 있는 것들, 사라질 것들, 덧없는 것들, 가멸적인 것들이라고 할 수 있다. 문제는 무한자가 무엇인가이다. 우리가 처음에 읽었던 플라톤에서 무한자는 바로 '좋음의 이데아', 즉 좋음이라는 형상이다. 엄청난 도전이다. 그냥 어떤 물질적인 것 또는 우주의 법칙이라고 해도 될텐데 좋음이라고 해버렸다. 그게 진짜라는 것, 그게 모든 우주 만물을 규율하고 지배하는 것이다. 그러면 우주 만물은 좋음의 이데아의 지배를 받으니까 좋아야 한다. 안좋은 것은 아직 좋은 것을 맛보지 못했기 때문이라도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좋음의 형상, 선의 이데아를 제일 위에 놓고 그 아래 인간, 유한자 한 통으로 엮어져 있다고 할 수 있다. holism, 전일론, 全一論이라고 부른다. 인간은 끝없이 그런 이데아를 향해서 좋음의 이데아를 향해서 올라가야 한다는 것이 플라톤이다. 그런 상승에 대한 끊임없는 갈망, 욕구 그런 것들이 바로 이제 아주 포괄적으로 플라톤주의라고 말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이런 플라톤과 같은 구도를 가지고 있는데 플라톤과 다른 점은 선의 이데아를 제일 위에 놓은 것이 아니라 움직이지 않는 최초의 운동 원인, '부동의 원동자'를 신이라는 이름으로 부리기도 했다. 이럴 때 기독교의 하느님을 생각하면 안된다. 그리고 플라톤에서는 인간이 결여되어 있다. 완전한 의미에서 선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니 결핍을 채우기 위해서 끊임없이 선을 향해 위로 올라가야 한다. 그게 바로 인간이 고통스러운 지점이다. 그것에 비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단순화해서 말하자면, 각각의 사물, 인간만이 아니라 모든 사물은 그런 부동의 원동자를 향해 가기는 하지만 그래도 그런 목적들이 자기 안에 있다고 이야기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서 특이한 점은, 플라톤에서는 좋음의 이데아에 대해서 끊임없이 그것을 향해서 지식을 쌓아올리면 알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알면 된다. 그러면 착한 일도 할 수 있다. 그런데 착한 일이라고 하는게 하루 이틀만에 안된다는 것이다. 알면 되는 것이다. 돈오돈수라는 말도 있지만 그런 말을 하신 고승대덕들도 그런 각오를 가지고 하라고 뜻으로 말씀하신 것 같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우리가 선함에 이르는 것은 품성hexis 상태를 날마다 닦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좋음을 안다는 것과 착하게 사는 것과는 딱 분리되지는 않지만 긴밀하게 붙어있지는 않다. 다시말해서 이론적 학의 영역과 실천적 행위의 영역은 서로 구별된다. 구분은 도대체 넘어갈 수 없는 것이고 구별은 영역이 이렇게 나뉘어 있어서 어느 순간에는 영역을 확장할 수 있어서 넘어갈 수 있는 것. 특히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이 하나의 정치적인 생활 공동체에서 그러한 올바름을 터득해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그게 바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과 정치학의 영역이 실천학을 다루고 있는 영역인데, 그게 바로 아리스토텔레스에서 품성을 다루고 있는 논의가 있다고 하겠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차이가 있다고는 해도 두 사람의 뚜렷한 확신은 무한자에 인간이 도달할 수 있다는 그런 가능성에 대해서는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람이 대단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어찌보면 오늘날 우리 인간은 자연세계를 정복하고 못하는 것이 없다. 그러니 겁이 없고 무한자에 이를 가능성에 대해서 굉장히 낙관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또 고대의 사람들은 속수무책으로 자연재해 당하고 그랬는데, 그래도 이 사람들은 무한한 신, 영원한 것에 대해서 우리 인간이 알 수 있다고 말한 것을 보면 무모함이랄까 또는 용감함이랄까 이런 것들이 어디서 나왔을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루카치의 《소설의 이론》의 첫 머리처럼 "별이 빛나는 하늘이, 갈 수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들의 지도였던 시대, 별빛이 그 길들을 환히 밝혀주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처럼 계시라도 받았나 이런 생각을 해보게 된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을 읽어보면 난문을 이겨낼 수 있다라고 하는 그런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는다. 그것이 중요한 지점인 것 같다. 또 다르게 말해보면 인간이 얼마나 허약한 존재인지 또 인간 존재가 얼마나 무지하고도 몽매한 존재인지에 대해서 그렇게 깊이 고통스럽게 따져보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가, 그러한 점에서는 데카르트의 자기의식이 또 위한 발견이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데카르트는, 칸트나 헤겔도 마찬가지지만, 기본적으로 내가 알고 있는게 없구나 하는 자기에 대한 아주 극심한 의심과 걱정에서 시작한다. 심지어 내가 뭔가 알고 있는 것 같기는 한데 이게 진짜인가, 내가 도대체 어찌해볼 수 없는 악령이 있어서 그것에게 휘둘리고 있기 때문에 아닌가 이런 얘기를 할 정도이다. 그렇다 해도 데카르트는 파스칼과는 다르게 그냥 내가 허약한 존재라는 것을 안다, 그런데 굴복해서 그냥 신을, 여기서는 무한자라고 하는 것을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처럼 말할 수는 없을테니까 신이라고 지칭을 한다, 연약한 놈이 뭘 알겠어 이런 식의 자괴감과 더 나아가서 자기학대로 빠지지 않고, 그냥 믿어버리지 않고 따져보기로 결심한다. 이런 결심이 대단하다. 어찌보면 데카르트가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보다 훌륭하다. 자기가 못났다, 도대체 안될 것 같아 이런 상황이다. 이런 상황을 자각했을 때 무너지지 않았다.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런 자각은 없었다. 인간은 안돼, 알 수 없어 이런 자각은 없었다. 그런데 데카르트는 이런 자각이 있었고, 거기에서 내가 얼마나 유한한 것을 깨닫는가, 나의 깨달음이 강하고 깊을수록 그런 것을, 바로 그 자기의식을 신과 연결시킨다. 그런 점에서는 신과 마주보고 있는데 조금이라도 내가 무한자에 가 닿을 수 있는, 조금의 실마리라도 쥐고 있으면 그것을 꽉 붙잡고, 바로 코기토이다, 나는 생각한다, 내가 절대로 굴복하지 않겠다라는 것이다. 그런 결심, 신과 마주보는 존재로서의 인간을 자각하고 그리고 나아가는 것이다. 데카르트보다 후대 사람인 키에르케고르도 그런 절망에 빠져들어간다. 《공포와 전율》에서 두려움과 떨림으로 신을 마주한다는 의미에서. 데카르트도 파스칼도 키에르케고르도 그런 두려움과 떨림을 가지고 무한한 것에 대해서 생각한다. 태도가 다르다. 데카르트는 근대의 철학자로서 이보다 더한 모범이 없지 않나라는 생각이 든다. 

칸트는 용감하다고는 하지만 각기 다른 면모들을 보여주는 것 같다. 그들의 형이상학이 단순한 이론이 아니라 삶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 살다보면 도대체 내가 헤어나올 수 없는 절망이다, 이 상황은 어찌해 볼 수 없어, 내가 지금껏 살아온대로 사는 것으로는 극복이 되지 않을 것 같아, 그런 상황에 처해있을 때 어떻게 할 것이다. 그런 상황이야말로 진정한 난문, 아포리아이다.  그랬을 때 어떻게 할 것인가. 이런 태도를 읽을 수 있다. 그래서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류의 인생 에세이보다 형이상학을 읽으면 아주 근원적인 삶의 태도들이 나온다. 이것을 읽으면 인생론 같고 감동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렇게 보면 칸트는 좀 맹랑한 사람이다. 뭘 그런 것 가지고 고민해, 차단해 버리면 되지 이렇게 하는 것. 그러면서도 걱정을 하는 것. 이성의 사변적 사용이라고 하는 것을 마지못해, 영혼불멸, 신 이런 것들은 사변적으로 사유할 수밖에 없는데 그러면서도 자꾸 의심과 확신의 경계선을 넓혀보려고 그리고 형이상학을 이대로 죽여버리면 사람들이 막 살아버릴까 걱정되어서 고민을 했던 것. 

헤겔도 마찬가지로 그런 무한자로 나아가고 싶은 욕망이 있는 것이다. 인간의 정신이 참으로 대단하다, 플라톤도 아리스토텔레스도 데카르트도 그렇다. 인간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속된 말로 하면 짬뽕 철학이다. 앞에 나온 좋은 것은 다 가져다가 쓴다. 다해서 하나로 만들었다. 그래서 인간의 정신이라고 하는 것은 바깥에 있는 것을 받아들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다해서 하나로 만들었다. 인간의 정신이라고 하는 것은 정신이 세계로 나아가서 신으로까지 뻗어나간다고 얘기한다. 

"유한자(대상 세계) — (유한자이면서도 독자적 존재인) 인간 — (신이라 불리기도 하는) 무한자" 이 구도에서 이 사람들의 문제가 어떻게 제기되었는지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아우구스티누스도 마찬가지이다.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기도를 하야한다, 기도를 열심히 하면 신이 은총을 준다. 그래서 기도와 은총으로 구원에 이를 수 있다. 조금 아쉬운 것은 만민이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어떻게 하지, 이 사람에게는 걱정거리였을 것이다. 칼뱅 같은 사람들은 구원받을 사람이 정해져 있다. 그런데 누가 구원을 받는가, 그것은 신이 하는 일이니 모른다. 골치 아픈 일이다. 항상 서양 형이상학은 유한자와 무한자, 그리고 그 가운데 놓여있는 중간의 존재인 인간, 이 세개의 축을 가지고 움직여간다. 

제31강 뒷부분을 보면 칸트의 목적론을 살짝 덧붙였다. 목적론은 제목 그대로 용어 그대로, 최고의 목적, 최고 선에 이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칸트에서는 도덕적으로 하는 것은 경험의 원리에 근거해서 만들어 낼 수 없다. 그리고 그냥 도덕적으로 고결한 삶을 살면 행복한가, 그건 아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현실 세계 속에서 행복도 얻어야 한다. 그러면 이것을 칸트는 도덕적으로 올바름만을 추구하는 것을 자유의 영역이라고 했고, 오늘의 즐거움도 있어야 하고 기쁨을 누리는 것은 자연의 영역이라고 했다. 그 둘을 연결하려면 뭐가 필요하다. 그래서 이 두 개를 연결시키려면 어떻게 해야하는가. 다시 말해서 우리의 생각을 가지고 이 두 개를 연결하는 방법을 궁리하는 것, 그것이 다음부터 읽어나가게 될 《판단력 비판》이다. 판단력은 판단하는 힘이 아니라 이것 저것 따져보고 헤아려보는 힘을 말한다. 그런 판단력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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