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티오의 책들 | 철학 고전 강의 — 32

 

⟪철학 고전 강의 - 사유하는 유한자 존재하는 무한자⟫, 제36강(2)

❦ ‘개념파악적 사유’
❧ 긍정과 부정, 구분과 구별
하나의 판단은 그와 대립되는 판단을 함축하고 있다.
현실의 사태는 단 하나의 판단만을 낳아 놓지만, 우리는 그것의 대립을 사유할 수 있다. 즉 우리의 사유는 대립항들을 동시에 사유할 수 있는 상위의 입장에 올라설 수 있다.
하위의 입장만을 고집하면 자신이 다른 것과 ‘구분’된다고 여기지만, 상위에 입장에 서있는 사유는 그 대립항들이 서로 ‘구별’된다고 생각한다.

❧ 상호 이행 또는 생성
세상의 모든 사물은 서로 인과의 연쇄에 있고 하나는 다른 하나를 전제할 때에만 존립한다. 이것은 상호 이행이며 하나가 다른 하나를 생성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사물의 생성과정 전체를 아는 것은 진리를 아는 것이다.
전체의 진리를 아는 것, 이것이 바로 개념파악적 사유이다.

 

2021.05.04 철학 고전 강의 — 32

헤겔 형이상학의 기본 개념들을 다루고 있는 36강을 읽는다. 앞서 신적 입장에 올라선다는 것에 대해서 플라톤과 오리게네스의 이야기를 가지고 헤겔의 이론을 비교해서 설명했다. 앞서도 이야기했듯이 시대만 근대 철학자이지 일단 형이상학의 가장 기본적인 부분은 플라톤과 오리게네스 그 부분에 있다. 선행하는 철학자들을 완전히 무시한 철학자들은 없다. 데카르트 같은 경우에 아리스토텔레스를 무시했다고 하는데, 철학에서 무엇이 나에게 앞서 가 있는가, 내가 뭔가를 새로운 것을 내놓으려고 해도 뭐가 있었는지 알아야 내가 말하려고 하는 것이 새로운 것인지 알려면 이미 새롭지 않은 것들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 기존의 것이 무엇이 있는지 알아야 그것과 다른 것을 내놓을 수 없다. 기존의 것을 무작정 옳지 않은 것이다 폐기하고 싶어도 그것이 뭔지 알아야 한다. 그런 점에서 데카르트가 전통을 폐기했다고 말했다고 해도 《방법서설》을 읽어보면 학교에서 이런저런 배운 것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이 사람이 이것을 배우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그 방법을 없애거나 그러하지는 않았다. 우리가 근대철학자들은 과학에 몰두해 있고 또 과학적인 사고방식이 있다, 우리가 근대라는 말을 들으면 과학적인이라는 말로 이해하기 쉬운데, 헤겔이 갑자기 기원전 5세기의 플라톤이나 300~400년 무렵의 교부들의 이야기를 가지고 한다고 생각하면 어이가 없게 여겨질 수도 있다. 게다가 이 사람은 종교개혁을 시작했던 루터파 교회의 신학교를 다녔다. 그렇지만 모든 철학자들이 당대의 과학에 몰두해서 그것만 가지고 학문을 한다는 것이 반드시 그래야 하는 것은 아니다.

신적 입장에 올라선다는 것이 헤겔에 있어서 학문의 기본적인 목표다. 그러면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해보겠다. 어떻게 해야 신적인 입장에 올라설 수 있는가. 제일 좋은 방법은 그냥 선언하는 것이다. 내가 신이라고 선언하는 것이다. 신임을 선언하는 것, 그것은 자기 혼자 방에서 하면 된다. 자기만 설득하면 된다. 방 바깥의 다른 사람에게 설득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학을 한다고 하는 것은 철학을 한다고 하는 것은 모든 사람은 아니어도 적어도 많은 사람을 적어도 설득해야 하는 과정이 뒤따라야 한다. 흔히 철학을 하는 사람도 그렇고 철학을 하는 사람을 보는 사람도 그렇고 두 입장 모두에게 공통된 철학에 대한 가장 큰 오해 중에 하나가 제멋대로 생각하고 제멋대로 말하고 나만 옳으면 된다, 나만 설득하면 된다 이것이 철학인 것으로 여기는 것이다. 그런데 철학은 결코 그런 학문이 아니다. 당장 나 자신을 설득하는 것은 사실 필요 없다. 흔히 철학은 모든 학문의 기초가 된다고 말한다. 이 말은 철학 이외의 학문을 하는 학자들에게 속된 말로 말빨이 먹혀야 한다는 것이다. 아무도 동의하지 않은 얘기만 잔뜩 하고 있는 것 같아도 기본적으로 철학자들은 보편적인 학을 추구하기 때문에 누구나 다 읽고나면 따라해볼 수 있는 것을 하게 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철학자의 태도이다.

헤겔이 신적 입장에 올라선다는 섬을 자기 철학의 궁극적인 목표로 삼았다. 그러면 그게 선언으로 그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하면 그런 신적인 입장에 올라설 수 있는가에 관한 방법을 알려줘야 한다. 그 방법이 개념파악적 사유이다. 헤겔 형이상학에서 기본적인 두 개가 무엇인가. 하나가 형이상학의 목적으로서 제시된 것, 즉 신적인 입장에 올라선다. "관상하는 자, 구경하는 사람(theōros)"가 헤겔이 말하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철학자이다. 이것이 바로 헤겔이 말하는 철학의 목표이다. 플라톤에서는 철학적 앎을 추구하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했을 때 좋음의 형상, 선의 이데아를 알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그것을 알기 위한 방법으로 국가·정체에서 철인통치자를 양성하는 과정이 나온다. 이와 마찬가지로 헤겔에서 철학을 공부하는 목적, 철학적인 사색을 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신적인 입장에 올라서는데 있다. 그러면 어떤 방법을 통해야 하는가. 헤겔이 내놓은 것이 개념파악적 사유이다. 헤겔 그러면 개념파악적 사유를 통해서 신적 입장에 올라서는 것, 이것이 헤겔 철학을 집약해서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신적 입장에 올라서는 것은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철학적 관조와 유사한 점이 있기는 하지만 꼭 그것과 같지는 않다. 거기에 헤겔 철학의 특장점이라는 것이 있다.

제36강 397 물화, 인간화, 신화의 과정을 거쳐갈 때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보고 있는 이는 누구입니까. 신입니다. 우리의 용어로는 철학자입니다. 그는 관상하는 자, 구경하는 사람(theōros)입니다. 

제36강 398 무한자의 입장에 서서 모든 사태를 인식하는 것을 헤겔은 '개념파악적 사유'(Begreifen)라고 합니다.

철학적인 사유는 실제로 우리가 할 수 있는지 아닌지는 차치하고서라도 하나 하나 따져보니까 말이 되는 방법을 일단 내놓아야 한다. 말은 되네, 그런데 실천을 하려면 굉장히 힘들겠네. 여기까지는 가줘야 한다. 간단히 말해서 '말은 되네'까지는 가야한다. 논리적으로 해명이 되야 한다. 이를테면 불교의 경우 열반에 이르는 길이 있다고 할 때 이 길을 석가모니 붓다가 아함경에서 논리적으로 설명을 한다. 그래서 불교는 종교가 아니라 철학이라는 말을 하기도 한다. 성서를 읽어보면 예수 그리스도는 논리적으로 설명하지 않고 내 말을 믿으라는 말 만을 했다. 그래서 초대 교회에서는 그것을 논리적으로 설명하기 위한 굉장히 다양한 논증들이 제시되었고, 그것이 또다른 전통이 되었다. 그래서 성서에 기록된 예수의 언명과 그것에 대한 해석들 두가지가 동시에, 그리고 전례, 이 세 개가 결합이 되어서 교리가 된다. 철학은 어떤 방식으로 이것을 해야 한다고 할 때 불교의 계와 율 같은 것은 없지만, 그래도 철학적 사색의 목적이 있고 그것에 대해서 적어도 논리적인 것이 제시되어야 하는데 그 논리를 제시하는 부분이 바로 개념파악적 사유라고 할 수 있다. 개념파악적 사유를 한마디로 말하면 세상의 모든 것을 알아내는 것이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알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어떤 것을 분류에다가 집어넣고 어떤 것을 분류에서 빼고, 유와 종 사이를 종회무진으로 오고갈 수 있는 능력을 기르는 것 이게 바로 개념파악적 사유이다. 어떤 면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와 비슷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앎의 종류와 단계들, 그리고 19강을 보면 학의 성립에 관한 물음, 보편적 존재론과 신학의 관계 이 부분을 보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우리의 앎은 감각적인 지각해서 신적인 앎에 이른다고 했다. 그게 하나하나 단계를 밟아가는 것인데 바로 헤겔은 이 지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의 방법론을 떠올리면서 자기 고유의 체계를 다시금 논리적으로 정리한다. 이게 바로 헤겔의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측면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그러면 헤겔 형이상학의 기본 개념을 할 때 플라톤과 오리게네스를 다루었고, 지금 아리스토텔레스. 헤겔이 의존하고 있는 사람은 바로 앞선 사람인 칸트가 아니라 저 고대의 철학자들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기독교 신학에 관한 깊은 통찰을 가지고 거기에 적용하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헤겔이 독창적인 사유를 집어넣은 것이 있다. 파르메니데스처럼 있음은 있음이고 없음은 없음이라고 딱 갈라져서 얘기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있음을 이해하려면 반드시 없음이 전제된 상태에서 있음을 얘기한다. 무라고 하는 것이 없다면 무라고 하는 것을 논리적으로라도 전제하지 않는다면 유라고 하는 것, 존재라고 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설명이 되지 않는다. 다시말해서 이 세계의 가장 근본범주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유와 무는 서로가 서로를 전제해야만 설명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을 헤겔은 상호 이행 또는 생성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에서 끊임없이 A는 not A 또다시 not A는 또 A로 생성된다. 삶이라는 것이 그렇다. 태어나면 죽는다. 삶과 죽음이라는 것이 딱 갈라져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이 순간이 딱 삶이라고는 것만으로는 이루어져 있지 않다는 것이다. 죽음을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헤겔 형이상학의 술어로 표현해보면 삶과 죽음은 오고간다. 삶이라는 것을 생각하려면 죽음을 전제해야 하고, 죽음이라고 하는 것을 생각하려면 삶을 전제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 머릿속에서는 삶이라고 하는 것과 죽음이라고 하는 것이 오고간다. 우리 몸뚱아리는 지금 살아있기는 해도 죽음에 대해서 생각한다는 말이다. 그게 바로 삶과 죽음의 상호이행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살아있는 사람이 죽음을 생각하는 것, 이것이 진짜 진리에 이른 태도이다. 그게 진리는 생성이다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삶이라는 것만 알아서도 안되고 죽음이라는 것만 알아서도 안되고 삶과 죽음 모두 다 아는 것 이게 바로 전체를 아는 것이다. 그래서 이 세상 만물을 다 그렇게 한 눈에 꿰뚫어 볼 수 있다는 것, 물론 사람이 그 경지에 이를 수 있겠냐마는 논리적으로라도 그런 것을 설명해내는 것이 철학의 과제이다. 이 모든 것을 알아차리는 사유가 개념파악적 사유이다.

제36강 40 진리인 생성은 지향점 없이 무한히 계속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신이라는 상위의 목적을 향해 갑니다. 이것이 역사입니다. 따라서 철학은 이 역사적 과정에 대한 관상이 되고, 신을 향해 가는 사태의 변전에 대한 통찰이 되는 것입니다. 역사철학, 역사 형이상학이 철학인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알아차리는 사유가 바로 개념파악적 사유입니다. 전체의 진리를 아는 것입니다. 이 전체의 진리를 서술한 것이 논리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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