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티오의 책들 | 역사 고전 강의 — 34 / 제22강(1)

 

⟪역사 고전 강의 - 전진하는 세계 성찰하는 인간⟫, 제22강(1)

❧ 종교에서 과학으로의 이행
“종파 간의 피흘림은 종교의 위력을 무너뜨리고, 세계와 인간을 설명하는 근본 범주는 자연과학이 만들어 낸다. 과학과 기술은 긴밀하게 얽히고 유력자들의 후원과 제도적 뒷받침에 힘입어 사회적 권위의 자리에 오른다.”
“세계와 인간을 설명하는 근본 범주”, 즉 세계관 - 세계관의 학으로서의 철학 - 세계관 연구의 한 방법으로서의 사상사

 

 

2021.11.16 역사 고전 강의 — 34

⟪역사 고전 강의⟫ 제22강이다. 전체가 40강으로 되어있는데, 20강부터 근대세계이다. 근대가 이 책에서는 절반 정도이다. 당연히 우리가 살고 있는 근현대 세계에 대해서 자세하게 아는 것이 중요하다. 지금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기본틀을 만들어 낸 것이 근현대 역사이니 그런 경로를 따라서 오늘이 만들어졌다고 하겠다. 22강의 발문을 먼저 읽어보면 "종파 간의 피흘림은 종교의 위력을 무너뜨리고, 세계와 인간을 설명하는 근본 범주는 자연과학이 만들어 낸다. 과학과 기술은 긴밀하게 얽히고 유력자들의 후원과 제도적 뒷받침에 힘입어 사회적 권위의 자리에 오른다." "종파 간의 피흘림은 종교의 위력을 무너뜨리고", 종교의 위력이 무너졌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이신론이라든가 종교의 회의주의가 등장하면서 서구에서는 기독교라고 하는 전통적으로 그 사회의 통일성을 유지해오던 일종의 정신적인 힘이 기독교인데 그것이 무너진다. 그것을 오랜 기간에 걸쳐서 무너뜨리면서 대체하게 된 것이 "세계와 인간을 설명하는 근본 범주", 이것이 굉장히 중요하다. 이게 있어야, 지나치게 정신적으로 사태를 설명하는 것이기는 한데, 세계와 인간을 설명하는 근본 범주가 있어야 세계가 유지된다. 세계와 인간을 설명하는 근본 범주, 다르게 말하면 세계관이다. 어떤 사람들은 철학이 세계관의 학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철학이란 무엇인가를 놓고 철학을 연구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많은 논쟁이 오고간다. 철학이라고 하는 것은 세계와 인간을 설명하는 근본 범주을 따져묻는 것이다. 즉 세계관의 학이다. 이렇게 보는 사람도 있고, 본인은 그런 사람에 속한다. 그러면 세계와 인간을 설명하는 근본 범주는 어떻게 알아 낼 수 있는가. 세계와 인간을 설명하는 근본 범주를 설명하는 책들을 읽어서 알 수 있다. 그런데 그 책이 느닷없이 튀어나온 것이 아니라 그 세계와 인간들이 어떻게 살았는지에서 생겨난 것 아니냐, 즉 세계와 인간이라고 하는 특히 세계, 세계라고 하는 배경과 맥락을 연구하면 세계와 인간을 설명하는 책들을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고, 그렇게 배경과 맥락을 이해하면서 그 세계와 인간을 설명하는 근본범주를 다루는 책들을 읽으면 더 잘 읽을 수 있을 것이고, 그렇게 함으로써 오늘날 우리가 살고있는 세계, 그리고 그 세계에서 살고 있는 우리 인간을 설명하는 근본범주에 관한 책을 쓸 수도 있다. 그런 것들을 연구하는 것, 그것이 맥락과 텍스트를 동시에 연구하는 것을 대체로 사상사라고 부르는데 철학의 방법론으로 사상사를 생각하는 것이다. 다시 정리하면 철학은 세계와 인간을 설명하는 근본 범주, 즉 세계관에 관한 연구하는 학문이다. 그런데 세계관을 연구하려면 세계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 이전의 역사로부터 그 역사의 경로를 따라서 형성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연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면 세계사이다. 글너데 세계사만 보면 안되고 그 흐름 속에서 생겨난 세계와 인간을 설명하는 근본 범주, 사상의 역사를 연구한다. 그렇게 되면 철학이라는 것이 뭔가를 뚜렷하게 알 수 있지 않겠는가, 사상의 역사를 연구한 다음에 그 사상의 역사들을 통해서 뭔가 추상적인 특정 시대에만 국한되지 않고 언제 어디서나 사람들이 받아들일 만한 것들이 뭔가가 있을까 하는 것을 생각해보는 것이 철학이다. 그 지점에서 약간 초월적인, 그런데 예전에는 이상주의, 관념론이라 했다. 요즘에는 좀 힘들다. 세계관으로서의 철학 그리고 세계관을 연구하는 방법론으로서의 사상사, 이 두가지 관점에서 철학을 공부하다보면 철학이 내놓는 보편적이고 추상적인 원리들이 덧없다는 느낌이 들어서 결국 사상사로 철학이 환원되어 버리는, 즉 사상사가 철학이 아닌다 라는 생각에 빠져들 수 있다. 

제22강 272 종파 간의 피흘림은 종교의 위력을 무너뜨리고, 세계와 인간을 설명하는 근본 범주는 자연과학이 만들어 낸다. 과학과 기술은 긴밀하게 얽히고 유력자들의 후원과 제도적 뒷받침에 힘입어 사회적 권위의 자리에 오른다.

그런데 이제 철학은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가 말을 하는데 있어서 말을 명료하게 하는 규칙을 따져묻는 것이 철학이다라고 하는 사람들은 언어철학자이다. 그런 사람들은 인간이 어떤 지질학적 시대에 살고 있는가, 지금은 인류세의 시대인가 이런 것들에 전혀 관심을 갖지 않는다. 그런 것을 연구하는 것이 철학이다. 명료함에 대한 연구가 철학이다. 그렇게 하면 역사를 그렇게까지 따져묻고 종교개혁, 자연과학, 과학혁명, 계몽주의 이런 것들을 따져 묻지 않아도 된다. 철학이 무엇인가, 즉 철학관에 따라서 철학을 연구하는 방식이나 텍스트들도 굉장히 다르다. 언어를 명료하게 밝혀보이는 것이 철학이다 하는 관점을 가진 사람들은 논리학을 열심히 연구한다. 인간이 머리속에서 언어는 어떻게 형성되고 세계를 받아들여서 어떻게 그것을 개념으로 만들고 하는 것을 연구하기 때문에 뇌과학을 열심히 연구한다.

"세계와 인간을 설명하는 근본 범주는 자연과학이 만들어 낸다." 자연과학이 의도해서 만들어 낸 것 일수도 있고, 하다보니 그렇게 되었을 수도 있다. 이러면 사상사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종교가 무너지고 자연과학이 등장하는 구나, 그것을 했던 당대의 자연과학자들은 어떤 의도로 했을까 이런 것들을 한발짝 물러나서, 종교에서 자연과학으로 가는구나, 즉 종교도 하나의 사상이고 자연과학도 하나의 사상이다. 그러면 사상에서 사상으로, 즉 사상의 역사, 그것이 사상사이다. 그런데 왜 종교가 무너지고 왜 자연과학이 등장했을까, 그 원인이 무엇일까, 변형과 이행이 어떤 요소들이 그 변형과 이행에 아주 강력한 영향을 미쳤을까, 이런 것을 따져보고 하는 것이다. 이 문장 하나가지고 그렇게 말을 길게 할 일인가. 그렇다. 왜냐하면 이 발문들은 이 긴 얘기들을 그래도 응축해서 쓰려고 노력해서 한 것이기 때문에 일단 이것들을 설명하고 이것들이 이해가 되어야 한다. "과학과 기술은 긴밀하게 얽히고 유력자들의 후원과 제도적 뒷받침에 힘입어 사회적 권위의 자리에 오른다." 이것도 간단하지 하지 않다. 자연과학이 종교를 무너뜨리고 세계와 인간을 설명하는 근본 범주가 되었다. 그런데 자연과학이라고 하는 것은 원리적인 탐구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면 그것을 활용해서 뭔가를 하려고 하면 기술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즉 우리는 오늘날 과학과 기술을 구별해서 말하지 않는데 과학과 기술은 좀 다른 영역이다. 일차적으로 이해하면 과학은 원리적인 부분이고, 기술은 응용적인 부분이다. 물론 기술이라고 하는 것은 늘 있었다.  똑같은 기술인데 그것을 설명하는 원리적인 설명은 다른 것일 수도 있다. 그런데 17세기 이후에 과학혁명의 시대가 되면 그렇게 기술과 과학이 서로가 서로를 상호작용하면서 또는 재촉하면서 발전하게 된다. 그래서 긴밀하게 얽힌다는 말을 썼다. 그런데 그렇게 얽힐 때는 반드시, 그냥 과학 그 자체가 좋아서 탐구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이것을 해서 뭔가 좀 제3의 무언가를 만들어 보려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면 제3의 것이 무엇일까. 대개는 경제적인 이익이다. 이것이 경제적인 이익과 맞물리게 되면 과학과 기술과 이익, 이게 바로 산업혁명을 향해가는 출발점이 된다. 그런데 그렇게 하면서 없이 사는 사람들이 후원하겠는가. 유력자들이 하는 것이다. 유력자들이 귀족들일 수 있고 그냥 돈많은 사람들일 수도 있는데 여기서 유력자라고 말하면 그 사회가 유지되고 지탱하는데 굉장히 힘을 가진 사람들을 말하니까 그 사람들 눈에 들었다는 말이다. 

종교의 위력이 왜 무너지는가. 종교만 믿고 있다가는 얘네들이 싸움질만 해서 나라가 절단하게 생겼어, 이렇게 하는 지금까지 내가 세계와 인간을 설명하고 더 나아가서 이 세계를 지탱하고 있던 근본범주들이 이 세계를 지탱하기는커녕 이 세계를 절단내려고 한다. 그런 생각이 들면 당연히 그것을 배척하고 세계와 인간을 잘 유지하고 발전시킬 수 있는 더 좋게 하려고 하는 것을 찾게된다. 그런데 그것이 그게 지금까지 우리가 지키고 있던 것들이 여전히 나에게 이익이면 그냥 지키고 있다. 현재 우리가 살고있는 세계도 그렇다. 과학과 기술이라는 것은 정치적인 성향도 없고 불편부당하고 진리만을 오로지 탐구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안된다. 과학과 기술은 17세기 과학혁명때부터 이미 사회 유력자들의 후원과 제도적 뒷받침에 힘입어 사회적 권위의 자리에 올랐다는 것을 꼭 생각해야 한다. 과학과 기술을 발전시켜서 누구에게 이익이 될 것인가를 생각하고 그들이 그것을 발전시켰다는 것이다. 내가 공부하고 있는 것, 열심히 하는 것을 누가 후원할 것인가가 굉장히 중요하게 된다. 후원이 있고 제도적 뒷받침이 있다. 이게 중요한 부분이다. 그래서 이 시기에 대해서 연구할 때 과학혁명의 후원이라고 하는 것, 뒤에서 도와주는 사람이 누구인가, 그리고 왜 도와줬는가를 연구하는 것이 과학사를 연구하는 사람들이 하고 있는 주요한 주제 중 하나이다. 










댓글